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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대장
음력 정월의 바람은 세차기만 하다. 우리 4남매는 대나무가 우거진 대문 앞에다 주차를 하였다. 대문간 너머로 우리 집은 그대로였다. 저렇게 빈집이 되리라는 것을 아버지는 어떻게 아셨을까? 대문 옆에다 큰 가시가 촘촘히 박힌 범구나무 두 구루를 어디서 구하였는지 옮겨 심어 놓으셨다. 봄, 여름에는 팔손이처럼 큰 잎이 무성해서 가시가 잘 보이지 않지만 잎이 지고 난 겨울에는 나무줄기에 가시만 남아 위협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범구나무는 마치 절간의 사천왕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잡귀로부터 우리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범구나무 옆으로 대문 기둥을 타고 오르는 능소화의 마른 줄기가 보인다. 봄이 오면 저 마른 줄기에서 잎이 피고 여름이면 홍황색의 꽃이 범구나무를 향해 까닥까닥 부채질을 해댈 것이다. 세상이치의 조화로움을 대비시켜놓은 작품들을 보며 아버지를 추억하는 일이 우리들에게는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대문을 들어서면 철따라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나고 화려한 아버지의 궁전에서 우리들은 즐거웠었다. 아버지는 땅에다 철사를 박아 거북의 형상을 만들고 그 철사 줄을 따라 사철 푸른 덩굴을 심어 키우셨다. 덩굴이 자라자 모가지며 꼬리며 다리의 틀을 잡아 헤엄치는 거북처럼 다듬으셨다. 마당 안으로 더 들어오면 여러 분재화분들 사이에 큰 돌탑을 쌓아 놓으셨다. 마당 오른쪽 장독대 옆에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긴 목의 봉황이 서있다. 집 뒤 대밭에서 큰 바윗덩이를 굴려다 자리를 잡고 그 주위에다 또 작은 잎이 촘촘하게 달린 사철 푸른 덩굴을 심으셨다. 희귀한 덩굴의 이름을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는데 건성으로 들었는지 덩굴 이름을 외우지는 못한다. 덩굴이 우거지자 날개를 접은 모양의 몸통을 만들고 가느다란 목이며 머리에 나있는 깃까지 가위로 다듬으셨다. 그리고는 흰 사기 종지로 눈을 박고 검정눈동자까지 그려 넣으셨다. 아버지의 예술성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아버지는 가난해서 누구네들 처럼 멋진 건물도 짓지 못하고 돈 들여 사들이는 물건들도 없이 평생을 흙과 돌과 나무와 꽃들을 가지고 노셨다.
이제 아버지가 쌓아놓은 돌탑은 무너져 있다. 네모난 돌에 아버지가 새겨놓으신 “기린동산” 이란 팻말만이 굴러 떨어진 돌들 사이에 끼어 있다. 사람들은 살기가 각박한 요즘 세상이라고들 한다. 피부로 와 닿는 말이다. 사람들이 도회지로 떠난 시골집에는 간간히 좀도둑들이 들어왔다. 우리 집 분재도 값나가는 것들만 가져가 버리고 없다. 옛날 물건들은 값이 나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골을 돌아다니며 심지어는 옛날 창살을 가진 문짝까지 다 떼어간 집들도 있다. 오늘은 아버지 산소에도 가고 우리 집도 돌아보려고 아침부터 형제들이 시간을 맞췄다. “막둥아, 저기 돌탑 옆에 맷돌들도 광에다 가져다 놓아줄래?” 막둥이가 맷돌을 들고 광으로 들어가며 “이렇게 무거운께 도둑놈들이 남겨 놓았는가보네.” 하며 웃는다. 아버지의 허드레 옷을 입고 일을 하는 큰 키의 남동생이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저 기린동산이라고 씌여진 돌들도 잘 간수해 놓자. 아버지의 친필이잖아.“ ”그러세.“ 남동생이 또 돌을 불끈 들어 옮긴다. ”우리 막둥이 없었으면 우리 집에 남자라고는 없을 뻔했다.“ ”그러게 말이네. 오빠도 지가 좋아하는 하느님 나라로 가버리고, 아버지는 또 오빠 못 잊어서 바삐 따라 가셔 버리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버렸네. 아버지 한중에 제일 잘한 것은 막둥이 낳아준 일인 것 같어.“ 평소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셋째 여동생이 까르르 웃으며 거든다. ”큰언니! 아버지는 참말로 오빠를 만났을까?“ 어릴 때부터 까맣고 순한 눈을 가진 막내가 정말로 궁금하단 듯이 물어 온다. ”그래 만나셨을거야. 그런데 아버지는 왜 기린동산이란 팻말을 세웠을까나?“ 내 물음에 동생들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겨울햇살이 들어와 있는 마루에 앉아 아버지가 ”기린 동산“이란 팻말을 돌탑아래 왜 세웠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웃고 떠들고 저희들 끼리 유쾌했다.
할아버지는 유교사상을 가진 선비이셨다. 아버지가 태어나고 이레 만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 형제는 위로는 형님한분과 누님한분이 계셨다.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 밑에서 어린 아버지는 힘들게 커왔다. 아버지의 형님은 1950년대 한국전쟁 발발 당시의 어수선한 시절 보도연맹 가입에 연류 되어 국군으로부터 학살을 당하였다. 아버지는 형님의 죽음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며 소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형님이 남기고간 한 점 피붙이 어린 조카딸을 맡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에 바람막이가 되어줄 남자들은 아예 없었다. 일제의 압박이 가해지던 때 아버지의 누님은 광주에 있는 전남방직공장에 강제로 끌려 나갔다. 그 당시 이장을 맡았던 아제는 동네에서 말마디깨나 하는 집들은 건드리지 못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집의 처녀부터 공출을 하였다. 아버지의 누님은 높은 담을 뛰어내려 몇날 며칠을 걸어 도망을 나와 집에 숨어 있다가 정신대에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어린나이에 시집을 갔다. 시집살이는 힘들고 고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외갓집 식구가 많은 것이 좋아서 엄마와 혼인 했다고 하셨다. 물려받은 논 한마지기 없이 조카딸을 키워 시집보내고 홀어머니와 우리 육남매 아홉 식구를 거느렸다. 평소 술을 많이 자셨던 이유도 알고 보면 묵중하게 조여 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장남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집안형편을 생각해서 공군사관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아버지는 크게 속 한번 썩히지 않고 자란 아들이 믿음직스러웠다. 들에서 일을 하다가도 장남이 나타나면 슬그머니 담배를 피우러 가시거나 아니면 쉬러 가셔버리곤 하였다. 아들만 보면 믿겠거니 하고 꾀가 난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장남은 공사 생도가 되었다. 아버지는 툭 하면 아들이 타다가 안겨드리는 상장에 행복해 하셨다. 드디어 수석졸업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는 두 어깨에 날개를 단 듯 기뻐하셨다. 그 뒤로 청와대에 초청이 되어 엄마와 함께 서울을 가셨다. 그때 대통령으로부터 친필 싸인이 들어간 손목시계를 하사 받았다. 아버지는 보물 1호로 소중히 간직하셨다. ‘아버지는 저 돌탑 안에다 대통령에게서 받은 손목시계와 함께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벼루를 왜 넣으셨을까?’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3월초에 접어든 날씨는 진눈깨비를 뿌리더니 비로 변하였다. 며칠 전에 파헤쳐놓은 묘지에는 벌건 황토뿐이었다. 아버지의 장남을 대전국립현충원 장교 제 3묘역에 안장을 하였다. 고향을 떠나 살던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다. 장례식장이 아니라 남북 이산가족 만남의 장소인 것만 같았다. 고향 사람들은 아버지 엄마를 붙잡고는 울었다. 또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을 붙잡고는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극과 극을 연출한 묘한 장례식이었다. 아버지는 혼잣말로 되뇌이셨다. “ 봐라 이놈의 자식이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만나게 해놓고 간다.” 엄마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벌벌 떨고 계실 뿐이었다. 안장식이 끝나고 우리는 집으로 가야 하는데 부모님은 서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극구 뿌리치는 부모님을 광주 동신대 한방병원에 반 강제로 입원을 시켰다. 의사 선생님은 최대한 안정을 취하는 치료를 하며 몸 상태를 체크해보자고 하였다.
일주일이 흘렀다. 아버지는 집에 가시고 싶다고 야단이셨다. 토요일에 퇴원을 해서 아버지, 엄마, 우리 삼남매 이렇게 다섯이서 해남 집에 내려갔다. 아버지의 둘째딸은 서울에서 못 내려오고 셋째 딸은 허리 수술한곳이 도져서 전주 제집으로 갔다. 아버지의 장남을 빼고 그러니까 막둥이와 막내와 나, 이렇게 세어보니 그 많던 식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쓸쓸하였다. 우리는 아직도 장남의 죽음이 믿기지 않은 상태라 눈물이라는 개념 자체도 모르는 얼빠진 바보들이었다. 아들이, 형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데도 ‘그렇구나’ 그저 맥풀어진 눈만을 껌벅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나주의 배나무들은 긴 겨울을 강인하게 잘 이겨내고 있다고, 당신가족들도 그러라고 서로 손을 잡고 서서 우리를 배웅하며 멀어져갔다. 이렇게 목사골 마을 나주를 지나 월출산을 바라보며 영암으로 가야 하는데 운전하는 막둥이에게 아버지는 대뜸 “강진 옴천으로 가자” 하신다. 아버지가 말을 잃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한마디를 하시니 가슴속이 울컥 뜨거워져 왔다. 아버지는 슬픈 와중에도 남은 자식들을 불쌍해 하셨다. 아버지는 평정을 찾으신 듯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때는 온 천지가 가난했어야. 옴천 면장은 기관의 손님접대를 해야 쓰는디 면 행정 살림이 뻔하니 고민을 무지하게 하다가 맥주를 대접하기로 안하였냐. 아, 글쎄 그 면장이 원래 술을 못하는 사람이었는지 돈을 애끼려고 그랬는지 맥주 한 병으로 열두 잔을 따라 부렀어야.” 우리는 슬픔을 잘 참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께 보여주고 싶어서 헛웃음을 웃었다. “워매, 울아부지 뻥쟁이! 어떻게 맥주 한 병으로 열두 잔이 나온다요?” 막내가 제 몫을 하려는 듯이 애교스런 목소리로 아버지를 장난스레 몰아 부쳤다. “흐흠, 아니! 그것이 그러니께 순 거품만 나게 따랐응께 열두 잔이 나오지야. 그라고 그때는 옴천 면장 맥주 따르듯 한다는 소리가 유행했어야.” 아버지는 침을 한번 삼키시더니 “그 당시 옴천면이 월매나 가난하믄 옴천 면장 할래? 평동 이장할래? 하고 물으믄 평동 이장 한다고 했겄냐잉.” 그 시대의 빈곤한 상황이나 지금 우리 가족의 휑한 마음이나 가난하고 슬픈 것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인간의 아름다운 삶에 끼려 하는 것 같았다.
아예 말문을 닫고 앉아 계시던 엄마가 그제야 몇 십 년 전의 일을 꺼내며 울먹거리신다. 엄마는 아기인 장남을 데리고 목포 큰집에 제사 모시러 가는 길이었다. 어느 상점 앞을 지나는데 빨간 사과가 진열되어 있었다. 아기인 장남이 갑자기 달려가더니 사과 한 개를 집어 들어 한입 베어 먹고 있었다. 엄마로부터 몇 번을 들은 이야기라 다음에 나올 말을 나는 미리 알고 있었다. “시상에나 점빵 주인이 나와서 사과 값 물어내라고 하는디 수중에 돈이 있어야지야. 머리에는 시어머니가 싸주신 제수감을 이고 달랑 집에 내려갈 차비 뿐이었는디. 지송하다고 미안하다고 점빵 주인한테 손이 발이 되게 빌었어야. 사과 한 개도 못사준 에미가 에미라고 지금까지 살아서 흑흑.......” 가족의 기분을 환기시키려던 아버지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대대장이었던 장남의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셨다. 부모 앞에 먼저 간 자식에게 무슨 체면이 더 남아 있겠느냐 만은 아버지로서 해줄 것이 없어서 마지막 가는 자식의 영혼을 눈물로 쓰다듬고 계셨다. 아버지의 장남은 강원도에 있는 공군 제 18전투 비행단 105대대 대대장으로 취임을 하게 되었다. 그날 이 기쁜 소식을 알리려 전화를 하신 아버지의 목소리는 쩌렁거리다 못해 광이 났었다. 아버지가 그 연세에 회춘을 하셨대도 그렇게 상기 되어 있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부하들에게 고도의 훈련을 직접 시키려고 탑승했던 F5전투기 2대는 황병산 선자령 꼭대기에 머리를 처박고 처참하게 부서졌다. 대대장으로 부임한지 두 달만의 일이었다. 장남의 사고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반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이곳저곳에 사는 자식들을 집합시켰다. "설마 니 동생은 아니겄지야." “어서 가자. 어서” 아버지의 재촉소리는 설마라는 한 가닥의 희망 때문에 그나마 나온 소리였다. 그러나 장남이 그렇게 전심으로 믿었던 하나님은 우리 가족에게 그리고 부하 가족들에게도 무심하셨다. 대대장의 육신은 이미 허공의 바람이 되어 부하들을 이끌고 하늘로 날아가고 없었다. 군인들이 한자나 되는 눈을 헤치고 길을 내줬다. 사고 현장은 처참했다. 일부 수습해놓은 광경이 이 모양이니 처음 광경은 어떠했었을까. 아버지 엄마는 부대에 계시고 우리들끼리 오기에 다행이었다.
몇몇 유족들은 “사고 경위를 밝혀라! 날씨도 안 좋은데 왜 비행을 시켰느냐! 블랙박스도 없는 낡은 전투기로 목숨을 걸게 했느냐! 장례는 어떻게 할 것이냐!” 눈알이 뒤집혀 있었다. 이때 아버지의 며느리가 장남의 일기장을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18년 전 중위시절에 동기생의 죽음을 보며 아버지의 장남이 써놓은 유서 비슷한 내용이었다.
1992년 12월11일
먼저 내가 죽는다면 우리 가족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들은 아들과 남편 아버지로서보다 훌륭한 군인으로서의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담담하고 절제된 행동을 보였으면 한다. 그 다음 장례식은 부대장으로 하고 유족들은 부대에 최소한의 피해만 줄 수 있도록 절차 및 요구 사항을 줄여야 한다. 또 각종 위로금의 일부를 떼어서 반드시 부대 및 해당 대대에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한다. 진정된 후에 감사했다는 편지를 유족의 이름으로 부대장에게 보냈으면 좋겠다. 더욱이 경건하고 신성한 아들의 죽음을 맞이해서 돈 문제로 마찰을 빚는다면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돈으로 대의를 그르치지 말아야겠다. 장례도중이나 그 이후로도 내가 부모 자식이라고만 여기고 행동해서는 않된다. 조국이 나를 위해 부대장을 치르는 것은 나를 조국의 아들로 생각해서 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이일을 명심하고 가족의 슬픔만 생각하고서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오히려 나로 인해 조국의 재산이 낭비되고 공군의 사기가 실추되었음을 깊이 사과할 줄 알아야 하겠다. 나는 오늘까지의 모든 일을 보고 직접 행동하면서 나의 위치와 임무가 정말진정으로 중요하고 막중함을 느꼈고, 조종사이기에 부대에서 이렇게 극진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이 조종사임을 깊이 감사하며, 나는 어디서 어떻게 죽더라도 억울하거나 한스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고 떳떳하다는 것을 확신 한다. 군인은 오직 충성, 이것만을 생각해야한다. 세상이 변하고 타락해도 군인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군인의 영원한 연인 조국을 위해 오로지 희생만을 보여야 한다. 결코 우리의 조국 그의 사랑은 배반치 않고 역시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일기를 다 읽으신 아버지의 얼굴은 단호해졌다. 그 단호한 얼굴을 한 아버지에게는 이미 장남의 혼백이 들어와 있었다. 이제 아버지는 장남을 대신해서 대대장이 되신 것이다. 아버지는 장남의 유언 같은 일기를 보이며 유족들을 설득하셨다. 장례식을 비롯한 모든 절차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3일장으로 의견을 모았다. 부대 측에서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영결식장에서 아버지의 장남은 부하들과 함께 1계급 추서되어 대령이 되었다. 그토록 별 달기를 소원했던 아들이 아니었던가! “나는 대령으로도 족하다.” 진정으로 아버지는 참 군인 정신을 가진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우리들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아깝고 억울하였다. 아버지처럼 슬픔을 훨훨 태워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직은 아버지 품에서 우리가 어린 새끼라서 그럴 것이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사병들의 수고는 너무나도 컸다. 군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많은 조문객들의 세끼 밥을 해대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가만히 앉아서 밥을 받아먹자니 아까의 억울했던 마음이 미안함으로 바뀌어갔다. 영결식 전날 아버지는 며느리와 사돈들과 우리 가족 모두를 한곳에 모이게 했다. 막둥이가 사회를 봤다. 아버지는 보상에 관한 돈 문제는 일체 며느리에게 모두 일임하고 내일 영결식과 안장식이 끝나면 바로 해남 집으로 내려가겠다고 하셨다. 다만 한 가지 손자들을 잘 키워줄 것을 당부하실 뿐이었다. 보이지 않게 팽팽한 선을 그으며 긴장해 있던 사돈 측에서는 우리 사위가 오늘날 이렇게 훌륭한 군인이 된 데는 더 훌륭한 아버님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박수를 크게 쳤다. 장남의 유언대로 돈 문제로 대의를 거스르고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은 아버지의 한마디로 깨끗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대대장이었다.
옴천을 지나 병영으로 갔다. 병영 “설성식당”이 유명하다고 막둥이가 안내를 했다. 그 동안 우리 가족들은 맘 편히 밥을 못 먹고 살았다. 백반을 시키고 방에 앉아 있는데 연탄불에 굽는 돼지불고기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어떻게든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연기처럼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살아있으니 먹자.” 한숨을 쉬며 엄마가 우리들보고 어서 먹으라고 하셨다. 밥을 다 먹은 우리들은 때마침 오일장이라 장에 가보기로 하였다. 설성 막걸리가 유명하다고 막둥이가 한 병을 사왔다. 몸빼 파는전 하나, 마른반찬 파는전 하나, 젓갈전 하나, 생선전 두 곳. 파장 전 장터는 사람도 없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남도만이 있는 토하젓을 보았다. 다가가서 조금만 사려했더니 “너는 멀리 사니 아예 2키로짜리 한병을 사거라.” 아버지가 지갑을 꺼내며 말씀하셨다. 우리는 속이 추운 사람들처럼 아까 막둥이가 사온 막걸리를 한 모금씩 마셨다. 방금 산 토하젓 통을 앞에 놓고 막걸리 한 모금 마시고 멸치 하나 집어먹고 몇 번을 먹어도 우리들의 몰골이 측은하였는지 주인은 나무라지 않았다. 큰 키에 긴 목을 하고 우두커니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아버지의 선한 눈이 미치도록 불쌍하게 보였다. “아부지! 사주신 김에 저 김가루도 사주세요.” “그래라.” 김가루 3천원어치가 푸지기도 하였다. “우리 아부지가 이렇게 물봉인줄 알았으면 진즉에 비싼 것 사달라고 해볼껄.” 막둥이가 농담을 하자 “자기 아버지를 물봉이라고 하는 놈은 너 밖에 없을껴.” 우리 모두는 오랜만에 처음으로 웃는 것 같았다.
엄마 걸음걸이는 마치 헛것을 딛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엄마는 지금 우리들을 데리고 어미코끼리가 굶주림에 죽은 제 새끼를 나뭇가지로 가려서 땅에 묻고 남은 새끼들을 데리고 살 곳을 찾아 떠나는 느리고도 무거운 행렬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는 집을 가까이 두고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고 계셨다. 지금까지는 대대장의 아버지였지만 집 대문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아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자책이 두려웠을 것이다. 병영에 있는 하멜전시관으로 우리는 아버지를 따라 걸었다. “하멜표류기”를 막내가 사달라고 하였다. 하나밖에 없는 제 아들을 주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는 애정에 굶주린 아이들처럼 자꾸 아버지께 뭘 사달라고 떼 아닌 떼를 썼다. 철들고는 처음으로 뭘 사달라고 보채 봤을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것이 힘들어서 아니 주눅이 들어 부모님께 뭘 사달라는 소리를 못해보고 자랐다. 그중에서도 아버지의 장남은 더욱 그랬다. 아버지는 하멜이 신었다는 커다란 나막신을 몇 번이고 들었다 놓으시곤 하셨다. 3만원에 판매하는 기념품이니 우리 3명을 사주려면 아버지에게는 부담이 가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사고 싶은 맘 간절한데 선뜻 못사는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아부지! 얼릉 가시게요.” 내가 재촉을 하였다.
봄이 온 것도 아닌데 그날은 더웠다. 우리는 강진읍을 지나고 성전면을 넘어서 집으로 갔다. 지체할 시간도 없이 우리 형제는 바로 또 올라와야 했다. 우리가 나서 자라온 산골집이 그날따라 얼마나 삭막하고 낯선 동굴 같았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장남은 집에 자주 오지 못했다. 집안의 대소사도 아버지는 당신이 다 참석하셨다. 목숨을 거는 비행이라서 오직 군인의 임무만을 강조하셨다. 우리 형제들도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묵묵히 협조를 하였다. 이제 이 동굴 안에서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장남이 못 견디게 그립고 불쌍하였다. 우리들이 장남에게는 마음의 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그보다 더 자책하고 계셨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로 자랐지만 아버지는 장남을 혼내지 않으셨다. 말썽을 부려 이웃집 아짐이 쫒아 오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나서 “도둑질하고 거짓말하는 것은 크게 혼날 일이지만 사내자식이 놀다가 그럴 수도 있제.” 우리가 아버지께 호된 꾸지람을 들을 때는 장남을 비롯해서 어떤 자식이든지 늦잠을 잘 때였다. 그렇게 자란 아버지의 장남은 사관학교시절 낙하산 훈련에서도 전투기에서 맨 먼저 시범으로 떨어진 생도가 되었다. 부모 형제를 생각하며 악바리 정신으로 빨간 마후라를 목에 걸었을 아버지의 장남은 곧 우리의 우상이기도 하였다.
“막둥아! 니 차에 아버지가 써주신 회고란 글 있지?” “응 누나.” “그것 좀 가져다 줘봐” 그전에는 그저 울면서 읽느라 나는 아버지의 글을 천천히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아버지의 냄새가 배긴 우리 집에서 아버지가 당신의 마지막 인생을 정리하며 쓰신 글을 읽자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회 고
젊고 건강할 때는 받은 것 없이도 두려움 없이 6남매 9식구 거느리고 앞만 보고 살았다. 일이란 무조건 가리지 않고 다해 봤다. 물론 실패도 많았지만 살다 보니 손, 발이 성한 곳이 과히 없구나. 내가 가진것 없고 못 배워서 그 원풀이로 자식들은 고등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물론 뜻대로 다 안되었지만 그런데로 잘 풀려나서 속샘 성공했다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자만이요. 우매하고 오만인 것을 모르고 항상 기회는 있는 줄 알고 살다보니 이지경이 돼서야 아집과 오만한 마음을 알겠다. 내가 잘해 된것 아니고 우리 자식들이 잘살어 준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무거운 짐과 오만함을 다 풀고 가고 싶구나. 2010.9.16. 아비서
월출산의 정기를 이어주는 흑석산이 우리 집 뒤로 자리를 잡고 묵중하게 앉아있다. 흑석산에 머리를 두고 그 옆으로 겹겹이 둘러진 산들이 용의 날개처럼 우리 동네를 감싸고 있다. 장남의 탯줄이 묻혀있는 이곳에 아버지는 신령한 기운이 돌게 하려 하신 것이다. 비가 오면 비를 맞은 바위들이 검게 변한다는 흑석산의 산세를 아버지는 놓치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거북과 봉황을 만들어 사철 푸른 덩굴을 입혀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한학을 공부하신 아버지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사령(四靈)의 영엄함을 믿으셨던 것 같다. 사령(四靈)이란 용, 거북, 봉황, 기린, 이렇게 네 가지 동물들이 뿜어내는 상서로운 기운을 말하는 것이다. 집안에 있는 많은 장소를 두고서 아버지가 “기린동산”이란 팻말을 왜 돌탑아래에 세웠는지를 이제야 알겠다. 당신이 먼 곳에서 손수 골라온 돌들로 쌓은 탑 안에다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손목시계와 대대로 내려온 벼루를 넣고 당신의 다음 세대를 위한 염원을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회고란 글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시고자함은 당신이 꿈꿔왔던 기린동산이 허무했다는 뜻은 아니리라. 장남의 죽음을 의롭다 하신 분이니까. 우리가 군용 셔틀버스를 타고 장남의 흔적을 따라 부대를 한 바퀴 돌며 떠나올 때 장남의 부하들은 손조차도 흔들지 못하고 축 쳐진 어깨로 서있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잊지 않고 계시다가 “힘내세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란 편지와 함께 흑산도 홍어를 보내어 부하들의 마음까지 달래주신 분이니까. “이렇게 좋은 기운만을 너희들에게 불어넣어주고 싶었느니라.” 무너진 돌탑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입관할 때 아버지 모습은 참으로 편안해보이고 정결했다. 장남의 빈 주검 앞에서 우리들은 울지도 못하고 떨기만 했었는데...... 아버지는 남은 자식들의 깊은 상처를 다독거려주고 가셨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입관을 하는가보다. 살아있는 가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아버지는 다른 할 일을 하러 가신 것이다. 반 토막이 나버린 땅에 태어나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요절해버린 형님과 장남을 만나서 아버지는 또 어떤 일을 계획하고 선두 지휘하고 계실까?
“동생들! 어서 정리하고 온곡溫谷 선생께 올라가겠다는 인사드리러 가자.” “그래야지 암말도 없이 가면 칠골 양반 크게 노하시지.” 셋째가 옷을 차려입으며 말하였다. “그래 아버지는 영원한 우리들의 대장이니까 당연히 보고를 해야지.” 막내가 따라나서며 웃었다. 나는 사랑하는 동생들을 데리고 참샘 위에 자리한 아버지 산소를 향해 걸었다. 우리 형제들이 등목하고 물마시며 가재잡고 놀았던 참샘의 물소리가 돌돌돌 한가롭게 우리들의 마음을 다독여주고 있는것 같았다. 마치 아버지의 따뜻한 목소리처럼.
첫댓글 유월이 오면 저도 덩달아서 오씨네 가족이 된듯 울먹이게 되네요. 참 군인정신은 본보기가 되고 교훈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대장이란 제목으로 올려주신 진정성에 눈물을 훔치지 않을수 없었고 앞날을 예견한 사람처럼 써놓은18년전 일기는 어찌된 일인지요 하루를 살더라도 최선을 다하신 발자취를 감히 접하게 되니 고개숙여 국화한송이 받치는 일밖에 제가 할수있는 일은 없어 안타깝습니다. 오대령님과 대장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빈집이 되어 흔적을 더듬을 수 밖에 없는 가족들 의 아픔과 상처를 억지 웃음으로 꿰매가시는 모습에 저도 따라 울었습니다. 현충일 오전 10시 싸이렌이 울면 고개숙여 묵념의 시간을 함께 하겠습니다. 충성
아버님의 '행장'을 따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읽었습니다. 고매하신 아버님의 인품 속에서 오대령과 같은 훌륭한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았습니다. 어찌보면 씼을 수 없는 슬픈 가족사이지만 오대령의 유서에 담긴 마음을 헤아려 담담하게 역경을 헤쳐 나온 아버님은 진정 대장님이셨습니다. 부자지간의 숭고한 이야기가 슬픔을 넘어 단단한 돌비가 되었습니다. 꽃의 탄생을 보는 듯 엄정해지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홀연히 떠났어도 그 마음은 기린동산에 남아 영원히 남은 가족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오연미 시인님께서는 온곡선생 칠골양반에게 큰 선물을 안겨 드렸습니다. 어떠한 족보나 행장보다도 귀하디 귀한
오씨 전가의 보고를 만드셨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로 아버님에 대한 '국문행장'을 쓰신 따님이 아닐까 생각됩니다.이 장문의 글을 쓰시면서 아물지 않은 상처를 다시 도려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슬픔을 거룩하고 아름다운 글로써 아버님과 오대령의 성찰과 사유를 풀어내 주신 오시인님께 큰 박수를 보냅니다. 다가오는 현충일을 맞이하여 국화 두 송이를 아버님과 오대령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진정 이 산하의 아버님과 아들이십니다. 오시인님! 너무나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좀 속이 풀리셨는지요? 아마도 먼 훗날엔 님의 따님들께서도 '어미 그리울 때' 이 글을 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훌륭하신 아버님과 오로지 조국을 위하여
일평생을 사시다 불운에 산화하신
오대령님은 조국의 영웅이 십니다.
오시인님 행간에 살아온 역사를
하나도 빠지없이 기록을 하였습나다
훌륭한 아버님 및에 훌륭한 인재가 태어난다
하던말이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질리입니다
오대령님은 부하에게 자상한 아버지같은
분였고 대한의 빨간 마후라 입니다.
훈련중 추락하는 사고가 어찌 일어났단 말입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아픈고통이
있었군요
하늘나라에서 아버님은 오빠하고 같이 계실가요
그러실 것입니다?허공이 바람이 되어 부하들과
같이 떠나신 안타까운 계려의 사연을 구구절절
이야기하신 오시인님 가족을넘어 계려의
아픔이며 고통입니다
훌륭하신 오빠를 두신 오시인님
그런 사고만 아니었써도
가문을 빛낼 장군님이 살아서계실 텐더요
가슴아프네요 돌아오는 현충일 날에는
머리숙예 계례를 위해 목슴바친 님들을 위하여
머리숙여 묵염을 할 예정입니다
시인님의 자선전을 머리숙여 숙독을
하였습니다
밤깊은 이시간 오시인님! 너무 훌룽하신 가정 아~ 존경스럽습니다 군신유의 부자유친 ......삼강 오륜의 그 어떤 점 하나 빠짐없는 그 사연과 사실에 감탄 또 감탄을 마지 안씁니다 제 눈으로 훤히 본듯 자상하신 글발 내용에 다시 고개 숙이고 오대령님은 가셧어도 가신게 아닙니다 인재명이 아니면 호재표라는 명언도 있지 않읍니까?흐트럼없이 대로로만 간다는 게
어찌 쉬운가요 우러러 존경합니 훌륭한사연 자상한 글 너무 감사합니다 많은 생각을 주신 사연 너무 감사합니다
좋은 날 되소서
제비님^^--
긴 글 쓰시느랴 고생하셨어요
저는 쉽게 그냥 읽었지만 쓰시느랴 마음 많이 아프셨겠지요
아픔을 글로 승화 시키는 힘 정말 대단해요
읽으면서 너무 좋았구요 댓글 달아야 하는데
제 문장력이 딸려 뭐라 써야할지 한참을 머뭇거리게 했어요.
(Tv선전 문구처럼 "좋은데 뭐라 할 말이없네"
그와 똑 같은 표현 써도 될까요.
저는 그렇게 표현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비님은 낭송이면 낭송, 노래면 노래, 글 또한 이리 잘 쓰시니..너무 많은 재주를 가지셨네요~ 살아온 삶으로 감동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글 속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장남이 더욱 훌륭하고 가슴을 울립니다..한편으론 슬픈 가족사지만 이렇게 멋진 글로 승화를 해주시니 아버지와 오빠께서 뿌듯해 하실 것 같아요..너무 잘 읽었습니다..감사해요~^^
어쩜 그리 포근하게 웃어주는 웃음 선물은 바로 훌륭한 집안의 유산인 듯 싶네요 뿌리 깊은 나무는 넓은 땅을 감싸듯이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얼이 대대손손 이어져 이 강팍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그런 가문이 자랑 스럽겠네요 가족의 일대기를 섬세하게 표현한 재주도 대단하시고요 그리고 상상조차도 하기 힘든 사고를 겪어내신 가족분들의 건강과 먼저 가신 영혼들의 명복도 함께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