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식탁> 고려 말 김진과 소주
소주에 빠진 고려 장수 쾌락에 취해 전부를 잃다
고려 말 경상도원수 김진,
파벌 ‘소주도(燒酒徒)’ 만들어 폭언과 매질도 일삼아
왜적 쳐들어오자 “소주도끼리 싸우시오” 병사들에 외면 당해
당시 소주는 고급술, 금지령 거론되기도
안동소주 제조 과정 모형(안동소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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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5000년 역사에서 가장 한심했던 장수는 누구였을까?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궁지로 몰아넣은 원균일까? 아니면 고려 때 몽골군에 항복해 적의 침략을 도운 홍복원·홍다구 부자일까?
역사가 유구한 만큼 나라를 지킨 영웅도 많았지만 무능한 장군, 겁쟁이에다 비겁한 장수도 있었다. 이런 인물 중 역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사람이 고려 말의 김진(金鎭)이다.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인물이었음에도 고려는 물론 조선의 선비들도 그의 이야기를 여러 형태로 기록에 남겼다. 그의 행동을 후손들이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김진 이야기는 ‘고려사’ 열전에도 실려 있다. 고려 역사를 적은 정사(正史)에 기록해 경각심을 일깨우려 한 것이다.
고려 말 우왕 때 왜구가 수시로 고려를 침입했다. 우왕 재위 기간 14년 동안 무려 378회나 출몰했으니 평균적으로 일 년에 27번의 침범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해안은 물론이고 내륙에 이르기까지 왜적들은 수시로 쳐들어왔다.
이럴 때 김진이 경상도원수로 부임했다. 말하자면 경상도 방위사령관이다. 그런데 부임하면서 엉뚱한 짓부터 했다. 예쁘다고 소문난 기생들을 모두 불러 모아 술판을 벌이고 휘하의 가까운 장수들과 함께 밤낮으로 술을 퍼마시며 놀았다. 군중에서는 이런 김진에게 분노했다. 그와 더불어 술 마시며 노는 장수들을 소주도(燒酒徒)라고 불렀다. 소주나 마시며 노는 패거리라는 뜻인데 도원수 김진이 소주를 즐겨 마셨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원수와 장수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술 마시고 노는 것에서 그친 게 아니라는 데 있었다. 군졸과 비장들이 조금만 뜻을 거슬러도 번번이 매를 때렸고 욕을 보였기에 모든 군사가 분하게 여기며 원망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문제가 불거졌다. 적군은 도원수가 머무는 진영인 지금의 창원 일대 합포(合浦) 병영을 공격해 불사르고 함안·진해·고성·동래·기장 등 남해안 일대를 도륙하면서 약탈을 일삼고 마을을 불태웠다. 그런데 적이 공격해 왔음에도 병사들은 나가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코앞까지 쳐들어온 적을 보고 하는 말이 “도원수는 소주도를 시켜서 적을 물리치면 될 것이지 어찌하여 우리보고 싸우라고 하는가?”라며 물러서서 진격하지 않았다.
김진의 소주도에 관한 조선 기록(野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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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도원수 김진은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났다. 당연한 결과로 고려군은 왜적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결국 고려 조정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김진의 직책을 박탈하고, 신분을 평민으로 만들어 창녕으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지금의 부산 가덕도로 귀양지를 옮겼다.
적군이 쳐들어 왔는데 병사들이 나태한 지휘관과 그와 놀아났던 일부 장교들에게 “당신들끼리 나가 싸우라”고 할 정도로 원망을 샀으니 후세 사람들이 최악의 장수로 기록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은 것이 당연하다.
병영 내에서 ‘소주도’라는 파벌을 조성하며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비싼 술 대신 소박하게 소주를 마셨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텐데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은 소주가 서민들이 마시는 평범한 술이지만 김진이 살았던 고려 말의 소주는 보통 술이 아니었다.
소주는 고려 때 아랍에서 증류 기술을 도입한 원나라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술을 태웠다는 뜻의 한자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소주(燒酒)는 증류주로서 옛날에는 이름이 다양했다. 곡물을 증류해 이슬처럼 받아 내리는 술이라고 해서 노주(露酒), 불을 때서 받는다고 해서 화주(火酒), 또는 땀방울처럼 술이 맺힌다고 해서 한주(汗酒), 술이 맑아서 백주(白酒)라고도 했다.
고려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소주는 지금의 고급 양주만큼이나 사치스러운 술이었다. 단종이 아플 때 소주를 마셔 기운을 차렸다는 기록도 있고 아픈 원로 대신에게 소주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약으로 쓰였을 만큼 귀했던 것이다. 순수 곡식을 발효시킨 후 증류해 만드는 만큼 식량이 부족했던 성종 때는 소주 제조 금지령을 거론했을 정도다. 왜적을 막으라고 보낸 장수가 이런 소주를 끼리끼리 마시며 파벌을 조성하고 부하 장병을 욕보였으니 역사상 최악의 장군 소리를 들을 만하다.
우왕이 김진을 귀양 보내고 얼마 후 다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자 최영 장군이 적극 반대했다.
“김진은 병사를 돌보지 않은 데다 적을 보고 머뭇거리다 패전했으니 목숨을 보전한 것만도 다행입니다. 이런 자를 용서했다가 나중에 공을 세운 자가 있으면 어떻게 대우하시겠습니까? 상벌은 왕의 권한이지만 상과 벌이 멋대로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호국의 영웅은 잊어서는 결코 안 되지만, 김진 같은 인물 역시 잊지 말고 기억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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