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
추석은 학실히 대단한 날인가 봅니다.
독서실도 놀더니 학교도서관도 노는 군요.
태풍이 온다는데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이런 날 옛 생각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반야봉에서 일몰을 보려고 기다렸는데 서쪽으로 날씨가 흐리는 바람에 제대로 된 일몰도 못 보고 노고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노루목에 도착한 후 잠시 쉬었다 노고단을 향하려는데 한 아가씨가 올라오더니,
"어떡해? 벌써 날이 저물었어...흑..."
이론, 일행인 친구 둘이 더 올라오는데 세 명이서 랜턴은 아주 조그만 거 하나뿐이고 다들 지리산이 초행이라는 군요.
뱀사골까지 가야하는데 날이 어두워지니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의의 기사인 제가 어찌 '조심해서 가세요' 란 달랑 한 마디만 남기고 제 갈 길을 가겠습니까?
이미 날이 어두워졌는지라 왔다갔다 하는 사람도 없으니 제가 뱀사골까지 안내를 했습니다.
조그만거 하나로 걸음 빠른 두 명이 앞서 나가고 저의 큰 랜턴으로 나머지 한 아가씨랑 같이 뒤에서 갔습니다.
나중에는 앞 사람들은 아얘 보이지도 않더군요.
생각보다 늦어졌지만 무사히 뱀사골에 도착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내가 멋있다는 것이...
뱀사골 계단을 다 내려 온 후 산장쪽으로 랜턴을 비추며,
"자 다 왔습니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어서 가 보세요."
"아니, 다른 곳으로 가시게요?"
"예, 전 노고단으로 가야합니다."
"그럼,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제발...! 제 친구 밥 잘해요."
"아뇨, 지금도 늦었습니다. 어서 가 봐야죠."
"흑...미안해서 어떡해요?..."
그러더니 배낭에서 캔맥주를 하나 꺼내더군요.
"드릴 만 한 것이 이거 밖에 없네요. 이거라도 가시다가 드세요."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무수히 많더군요.
"별이 많네요. 친구들이랑 같이 별보며 할 이야기들도 많을텐데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면서 드세요."
제가 랜턴을 비추는 곳으로 그녀는 미안해하더니 달려가고, 저는 다시 노고단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땅을 치며 그런 때는 뱀사골에 있어야했다며 안타까워하실텐데요...
그 때는 제가 노고단에서 왕시루봉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코스를 노고단-질매재-피아골-주능선 으로 잡았던 겁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일찍부터 왕시루봉 가는 길을 찾았지만 한참을 여기저기 찔러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다시 전날 밤 왔던 길로 되돌아 가게 되었습니다.
연하천을 지나고 형제봉을 지나 벽소령으로 향할 때 쯤...전 날 뱀사골로 데려다줬던 아가씨 하나를 보았습니다.
아는 척을 할까하다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 가지고 수작을 거는 거나 아닐까 싶어 그냥 지나쳐버렸죠.
벽소령에서 점심을 먹고 세석으로 가는데 다시 그 아가씨들이랑 마주쳤습니다.
그 아가씨들이 말을 걸더군요.
"혹시...어제 밤 저희들 바래다 주신 분 아니세요?"
"아, 예..."
(원망하며) "아까 왜 아는 척 안 하셨어요?"
"아, 뭐, 긴가민가 싶어서요..."
저도 노고단에서 왕시루봉 찾느라 지체했는데 그 아가씨들도 연하천에서 삼정가는 길로 잘못 빠지는 바람에 헤매느라 늦어진 거라 하더군요.
하하...만날 인연이 되려니까...
결국 그 때부터 같이 동행이 되었습니다.
같이 사진도 찍고 걔네들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고, 사탕도 나눠주고...
담 날 천왕봉 일출을 위해 장터목까지 목표로 하고 갔지만, 세석에 도착하니 거의 날이 저물고 날씨가 좋지 않아 담날 일출은 기대하지 못할 상황이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세석에서 머물기로 했죠.
같이 저녁을 먹고, 술도 조금씩 나눠 마시고...그녀들은 정말 꿈같은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소등시간이 다 되었고, 아쉬워하며 아가씨들은 산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참이었습니다.
마침 저에게 밤이 많이 있었던 지라...
"밤 좋아하세요?"
"밤요? 없어서 못 먹어요."
"그래요? 그럼 내일 밤 줄께요."
(좋아하며) "정말요? 고맙습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다음 날 아침, 같이 아침을 먹고, 밤도 나눠 주고, 사진을 주고 받기 위해서 주소 가르쳐 주고, 천왕봉까지 같이 산행을 하고 그들은 백무동으로, 저는 대원사쪽으로 가는 것이었죠.
그리고 사진이 날라오면 고맙단 답장을 보내게 될테고,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다 보면...하하하...삼류 멜로드라마처럼 거의 정해진 공식에 대입만 하면 되는 거죠.
하지만...
새벽 두시. 잠이 워낙 안 와서리 바람쐬러 밖으로 나갔더니, 밤 하늘에 별이 가득하더군요.
일출을 볼 수 있다. !!!
전 곧장 산장으로 들어가 배낭을 싸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천왕봉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천왕봉에서 일출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후배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줬더니 마구 야단을 치더군요.
선배는 여자를 사귀어야겠다는 마음의 자세가 안 되어 있다고...
그녀들은 다시 산에서 마주쳤습니다.
지나고 나니까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이라...곰곰 생각해보니 그 때 그녀들이더군요.
같이 산행했던 후배에게 그 이야기를 해줬더니 되돌아 가서 따라잡아서 아는 척 하자는 걸...하하하...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된다며 그냥 가던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렇게 스페셜까지는 가지 못하고 썸씽으로만 끝을 맺었습니다.
하하하...
이 글 읽은 많은 여성분들, 긴장이 풀리며 안심하시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