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깊은 서랍 외 1편
이은림
서랍은 늘 조금씩 열려 있습니다.
들키기 쉽게
아니, 들킬 수 있도록.
누구도 자신의 서랍은 볼 수 없습니다.
스스로에게만 사각지대거든요.
서랍에는 1인칭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사소하고 하찮은 담론부터
거대하고 자의적인 농담까지
어쨌거나 내 것일 수밖에 없는 이력들.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서랍을 읽고 있습니다.
아마 제법 오래 관찰 중이었던 것 같은데요.
내 서랍이 그 정도로 크고 깊은 걸까요.
서랍에 대해서는 지극히 제한된 표현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펜과 붓을 들고 있고요.
서랍은 고의적으로 들통납니다.
내 서랍은 순식간에 그림으로 증명되겠지요.
서랍을 열자마자 날아오르는 파랑새라니요,
그래서 등 뒤가 그토록 가려웠던 걸까요.
이번엔 내 방식으로 누군가의 서랍을 열겠습니다.
조금 넓어진 입구로 한껏 풍경을 읽은 후,
옮겨 적어 볼까 합니다. 이를테면, 詩랄까요.
1945
연양갱을 먹는다
천 원을 주면 거스름돈까지 건네받고
울컥과 달콤의 미학을 깨우치게 하는,
연양갱은 아빠와 동갑이다
일흔 살을 훌쩍 넘긴 간식에 매번 감탄하는
열두 살 딸은 무민가족 이야기를 즐긴다
핀란드에서 건너온 이 동화도 1945년생,
그해 제국주의자들은 항복했고
소심하게 피어난 꽃들의 아우성 너머
멈칫멈칫 찢어진 구름이 흘러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빠는 태어났고
아빠가 태어난 것과 무관하게 연양갱은 달콤했으며
연양갱과 상관없이 무민가족은 발랄했다
1945년은 태어나기 적합한 때가 아니었다
아빠와 연양갱과 무민가족은 서로 동갑인 걸 몰랐다
일흔하나, 일흔둘,
아빠가 갖지 못한 나이를 지나
일흔셋, 연양갱은 여전히 찬란하고
일흔다섯, 무민가족 이야기는 한없이 달콤하다
연양갱을 손에 쥘 때
울컥과 달콤의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할아버지를 잊어 가는 속도와
무민가족을 알아 가는 속도는
얼마나 차이가 날까
일흔일곱, 여든, 여든하나
아빠가 못 가진 나이를 나와 딸아이는 가질 수 있겠지
아빠는 상관 말고 연양갱과 무민가족은 부디 무한했으면
― 이은림 시인, 『밤이라 불럿 미안해』 (시인의 일요일 / 2023)
이은림
경남 양산 출생. 1997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2001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태양중독자』 『그림자보관함』.
구름감상협회 회원처럼 ‘차이’를 발견하는 시인
이은림에게 시적 대상과 마주치는 사건은 ‘풍경’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것이 대상을 ‘나’의 세계로 환원하는 완전한 주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반복하자면 이은림에게 시적 대상을 마주하는 일은 ‘서랍’ 속을 들여다보는 행위로서 그것을 닦달하여 강제로 개방하는 것과 다르다. 따라서 ‘풍경’을 먹는다는 것은 정보가 입력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일 뿐 포식한
다는 의미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의 경험이 증명하듯이 이때의 정보가 항상 의식의 층위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나는 거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나는 거야”(「정오의 희망곡」)라는 진술처럼 ‘생각’과 ‘기억’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떠오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떤 기억은 망각에 대해 저항하면서 의식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머물고 있다가 특정한 조건이 되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른다. 시적 상상력은 바로 이러한 비자발적 기억이 특정한 시적 대상과 만나 구체적인 이미지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억은 나중에 떠오르기 위해서라도 먼저 내면화되어 쌓여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먹는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 외부를 향해 ‘나’의 감각을 개방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름감상협회(Cloud Appreciation Society)라는 단체가 있다. 2005년 개빈 프레터피니라는 영국인이 만든 이 단체에는 현재 120개국 6만여 명의 회원이 가입해 매일 구름 사진을 공유하면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개빈 프레터비니의 『구름관찰자를 위한 가이드』에는 흘러가는 구름을 가만히 바라보는 행복감부터 구름의 다양하고도 극적인 모습에서 발견한 숭고하고도 덧없는 아름다움까지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구름’에서 차이를 읽어 내는 능력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어떤 것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것만의 고유한 성질, 그리고 같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서 ‘차이’를 발견해내는 능력이 다는 것이다. 요컨대 ‘꽃’이나 ‘나무’ 같은 개념어로 모든 식물을 지시하는, 따라서 ‘차이’를 읽어 내지 못하는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셈이다. 반면 “만발했던 봄꽃들이/ 뉘엿뉘엿 저물 때긴 하지”(「4월, 그리고 안녕」)나 “명료했던 4월 30일의 작약은/ 조금은 모호하고 느슨해진 채/ 5월 1일에 닿는다”(「경계」)처럼 꽃의 모습에서 시간의 변화를 감지해 내는 시인은 ‘꽃’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꽃농사”(「꿈에 아빠와 꽃꽂이를 했어요」)를 짓는 집안의 딸로 태어나서 그런 것일까? 그녀의 시에는 싱고니움, 라일락, 장미, 튤립, 작약 같은 꽃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꽃’에 대한 시인의 감각이 남다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