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5월9일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8,26-40
복음 요한 복음 6,44-51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양식과 음식의 차이.
2019년 다해 5월9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양식과 음식의 차이>
복음: 요한 6,44-51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은 매우 가난하여 한 때 며칠 동안 라면으로만
식사를 해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쌀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라면이 맛있기는 하지만 매 끼니를 라면만 먹으면 라면이 이상한
맛으로 바뀝니다. 며칠 먹으니 라면에서 짐승의 창자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못 먹겠다고 하니 어머니가 먹기
싫으면 먹지 말라며 숟가락을 빼앗으셨습니다. 그렇게 저녁을 먹지
못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잠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때 어머니의 마음이 더 아프셨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매일 라면만 먹어야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음식이
마치 부모님이 뚝딱 하면 생겨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어느 날 저녁 부모님의 뒤틀린 발가락과 손발에 박힌 엄청나게 두꺼운
굳은살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두껍고 딱딱한 살이 부모님
손발에 붙어있는 것이 신기해서 오랫동안 만져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비로소 음식과 부모님의 굳은살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식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피와 땀으로 마련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음식은 이전의 음식이 아니라 하나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음식과
양식의 차이는 부모님의 사랑을 믿고 안 믿고의 차입니다.
그 이후로는 반찬투정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점심을 싸주지 못하셔도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한 달에
1,100원만 내면 우유를 매일 먹을 수 있었는데도 저는 그 돈을 달라고
청하지도 못했습니다. 돈이 바로 부모님의 살과 피임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 가정 형편을 보며 우유를 먹겠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가는 때는 자신이 먹는 음식이 부모님의 살과
피임을 알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전에 한 폐륜아가 부모의 돈이 탐나
부모를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질러 유산을 노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한약유통을 하는 집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그 부모님이 자녀에게 음식은
주었지만 양식은 주지 못했다고 믿습니다. 음식은 고생하지 않고
마련한 것이고 양식은 그 주는 이의 살과 피가 섞인 것입니다.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면 부모를 그렇게 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먹는 음식이 부모의 피땀이 서려있었음을 믿지 못하며 성장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생명의 빵이신데, 그 빵은 곧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영하는 성체성혈은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태어나시면서 가축들의 밥통인 구유에
놓였습니다. 이것은 짐승처럼 사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먹고 마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새로 태어나게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성체성혈이 예수님의 살과 피임을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사랑도
믿지 못하여 미사를 참례해도 양식이 아니라 마치 비타민처럼 음식을
먹고 돌아가게 됩니다. 음식을 먹어서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성체성혈이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믿지 않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성체성혈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임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폐륜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주시는 음식이 부모님의 희생이 섞인 양식임을 알았을
때 어떻게 변했었는지를 기억합니다. 바로 더 이상 아무 것도 청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성당에 와서 미사를 하면서도 이것저것 부족한 듯이 청하고
있다면 성체성혈이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을 내어주는 분 앞에서 또 무엇이 부족하여 다른 것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미안해서라도 그것에 감사하고 그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청하면 나머지는 덤으로 받는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나머지 것을 청하면서 정작 하느님 나라는 잃습니다.
무언가 청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이 성체성혈에
대한 믿음을 깎아먹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부활 제3주간 목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5월9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
복음: 요한 6,44-51: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44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다가갈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가는 것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선물 덕분에 그리스도께로 왔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 가는 길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사랑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하늘의 빵을 달게
느끼는 어떤 갈망이 있다.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이사 54,13의 말씀으로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이 이끄신다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이끄신다. 이 이끄심은 하느님의 일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절) 즉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로 온다.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우느냐? 바로
아드님에게서 배운다. 그분은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46절)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웠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목소리를 아드님에게서 들었다는 말씀이다. 그 아드님은 아버지를
아시며 말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듯이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이렇게 나오는 말씀은 지나가고 없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에게 남아 있으며 그 말씀을 듣는 이를 끌어당기는
말씀이시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46절) 아들과
성령만이 그분을 제대로 보신다. 외아들과 성령만이 아버지를 온전히
아신다.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
(1코린 2,10)하시기 때문이다. 외아들과 성령은 하느님으로 아버지를
아신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이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영원한 생명이 죽음을 취하셨다. 생명이
죽음을 죽이도록 생명께서 죽으셨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라는 것은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4) 이 영원한 생명께서 당신께서 취하신 육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분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당신의
‘말씀’을 시켜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양식이요 생명으로 주신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언제나
갈망으로 배고파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 음식을 갈망할 때, 그들은 한층 더 흡족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빵을 통하여 그분과 한 몸, ‘그분 몸의 지체’(에페 5,30)가 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49절)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셔서 나날이 배부르게 먹었다. 그래서
“천사들의 빵을 사람이 먹었다.”(시편 78,25)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빵을 먹은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
모시는 이 음식,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은 영원한 생명을 주며,
이 빵을 먹는 이는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이 빵은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하늘의 빵이 되게 하시며 생명을 주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51ㄱ절) 그분은 아버지의
완전한 빵으로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 우리가
당신의 삶을 통하여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아버지의 영인 불사의 빵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 빵을 청해야 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하신 그리스도를 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많은 밀알들이 모아지고 갈리고
섞여서 하나가 되어 빵이 되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ㄴ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고, 그
몸을 통하여 생명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신다. 생명을 주신
말씀께서는 육안에 머무르고 계셨기에 그 육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만드셨다. 그러기에 그분의 몸은 그것을 먹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 몸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말씀으로
완전히 충만해진 그 몸은 부패를 사라지게 한다. 이 성체성사를 잘
준비하고 영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5월9일 목.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삶 전체가 온통 우리를 위한 기도와 걱정, 눈물과
한숨뿐인 우리 어머니!
삶 전체가 온통 우리를 위한 기도와 걱정, 눈물과 한숨뿐인 우리
어머니!
어버이 날을 맞아 김수환 추기경님을 비롯해서 몇몇 신부님들과 함께
만든 책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생활성서)를
펼쳐보았습니다.
‘어머니’라는 단어만 봐도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송구스럽고,
한편으론 안타깝다는 생각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로서의 삶이 가끔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를 바라볼 때 그렇습니다. 점점
병약해지고 연로해져만 가는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찍이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처지...아들이 사제, 수도자라는 이유 때문에
한평생 조심조심 살아온 어머니 생각에 그저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 특히 성직자, 수도자의 어머니들의 삶은
성모님의 삶과 흡사합니다.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성모님께서 철저하게
수동의 인생을 사셨듯이 우리의 어머니들 역시 철저하게 수동의 인생을
살아가십니다.
‘처녀 잉태’라는 그 감당하기 힘겨운 사건 앞에서 성모님은 그저
“예, 주님 뜻이라면 그래야지요.”하며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떠나라는 성령의 이끄심에 말없이 떠나셨습니다.
인제 그만 되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느님의 지시에 단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년 예수님의 비수같은 돌출 발언이나 행동 앞에서도 그저
침묵하셨습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떠나신다니 허망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만 그저 아들 잘 되기만을 바라시며 눈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예수님과 관련된 걱정스러운 소식 앞에서도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하며 간절히 기도만 드리셨습니다. 마침내
아들 예수님께서 모든 사명을 마치고 십자가 위에서 고개를 떨어트리는
순간에도 그저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수도회 입회 때가 생각납니다. 수도원으로 떠나오던 날, 가방 들고 집을
나설 때 마침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무작정 떠나겠다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들이 가겠다는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막무가내로 가겠다니 어머니는 그저
오래오래 손만 흔들어주셨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 서원, 서품에 이르기까지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몸이 아파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어머니는 별말씀 없이 그저 묵주알만 열심히 굴렸습니다.
저희 식구들은 유난히 애정 표현이 서투른 편입니다. 그러나 찬찬히
돌아보니 어머니는 정말 많은 사랑을 끊임없이 제게 주었습니다. 그간
받은 자석 팔찌며 옥돌 매트며, 집에 갈 때 마다 당했던 반찬 고문이며,
바리바리 싸오신 그 모든 것들은 다름아닌 어머니의 깊은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티파노 신부 -
◈ [청주] 신앙은 선물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5월9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요한6,44-51)
신앙은 선물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었지만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본이 아니게 열심히 기도하는 착실한 사람처럼 보여 졌습니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일찍 나서서 청소도
하고 주변정돈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지금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공소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저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신앙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은 미처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셨지만 강하게 이끌어 주신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름을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의탁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 오시는 아들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에 대한 ‘눈높이’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참
하느님이시고 이 땅에 살과 뼈를 지니신 채 사셨던 분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짐에서 자유로울 때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하늘이 되었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추구에서 벗어나
우리를 진정 살리는 것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빵’은 살아있는 양식으로 모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빵을 죽은 양식으로 모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모시는
거룩한 성체는 우리의 영혼과 삶 안으로 모셔야 살아있게 됩니다. 그저
입 안으로 성체의 빵만을 먹으면 결국 이스라엘처럼 만나를 먹고도
죽은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함께야).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5월 9일 (목) - 성령충만 1
오늘은 ‘성령충만’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 말씀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나바를 표현하는 대목인데 참 바나바는 성경에서조차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여러분도 주위에서 이런 칭찬 받는 것 얼마나 복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까? 꼭 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 충만하다는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플레르’라는 어근을 가진 단어와 ‘플레쓰’라는 어근을 가진 단어가
있습니다.
플레르라는 단어는 장기적이고 계속적이고 연속적인 포화상태를
의미하는 충만이고 플레쓰라는 단어는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충만함입니다.
그래서 토레이 신학자는 플레르를 내적 충만으로 플레쓰를 외적
충만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내적 충만으로 튼튼히 무장하여 외적 충만인 복음 전도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무장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는 뭐니뭐니해도 내적 충만, 외적 충만 성령의
충만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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