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임진모
이번에는 1960년대 비틀스를 비롯한 영국 록그룹들이 미국을 강타하는 시절의 이야기와 흑인 공민권운동의 발달과 함께 꽃핀 소울 음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소울은 사회적으로 또 음악적으로 록의 역사에서 매우 중시되는 음악입니다.
간추린 로큰롤의 역사(History Of Rock And Roll) 2회
위풍당당 영국의 침공, 수치심에 떤 미국의 반격
1960년대 초반 로큰롤은 브릴 빌딩의 싱어송라이터 음악으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곧 1950년대의 엘비스 현상을 추월하는 강력한 음악으로 재무장해 다시 미국사회를 강타한다. 그러나 이번의 주역은 '로큰롤의 나라' 미국의 가수들에 의해서가 아닌 대서양을 횡단해온 영국의 가수들이었다.
이 영국의 가수들은 50년대 로큰롤 가수처럼 솔로가 아닌 최소 4명의 연주자들이 포진한 밴드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음악은 사운드 볼륨이 컸다. 1964년 2월, 미국 정복의 욕구를 불태운 영국의 비틀스(Beatles)가 뉴욕의 케네디공항에 내리는 순간, 로큰롤은 잠깐의 소강상태를 벗고 다시 세상을 뒤엎는 혁명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I want to hold your hand' 'She loves you' 'Can't buy me love' 등 발표하는 곡마다 모조리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한때는 빌보드차트 순위 1위부터 5위까지 휩쓰는 전대미문의 대폭발이었다.
비틀스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면서 '탈출이 불가능한 황금어항'이라 할 가공할 스타덤을 창출했다. 10대 소녀들의 괴성 아우성 비명 졸도와 같은 전형적 '팝 히스테리' 현상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능가했다.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치밀한 기획 하에 펼쳐진 광포한 비틀마니아(Beatlemania)는 음악과 패션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비틀스가 성공하자 미국 음악계는 영국에서 건너온 밴드들로 봇물을 이뤘다. 역사가들은 이를 영국의 침공(British invasion)이라고 일컬었다. 비틀스와 전혀 다른 불량한 이미지로 성공한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는 처음에는 고전했지만 '(I can't get no) Satisfaction'의 전미 차트 정상정복과 더불어 곧 비틀스에 버금가는 굳건한 인기성곽을 구축했다.
영국그룹의 기세는 무서웠다. 제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 서처스, 'The house of the rising sun'으로 유명한 애니멀스(Animals), 할리스(Hollies),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가 작곡해준 곡 'World without love'로 성공한 피터 앤 고든 등 히트 퍼레이드는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졌다. 허먼스 허미츠(Herman's Hermits)와 킹크스(Kinks) 같은 그룹들은 미국에 오지 않고 영국에서 주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음악계의 주목을 받을 정도였다.
이제 그들 대부분은 잊혀져버렸지만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그리고 영국 젊은이들의 과격한 모드족(Mods) 정서를 난폭한 음악에 실어 나른 그룹 더 후(The Who)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빅3'로 역사에 길이 남아있다. 더 후는 비록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에 인기는 뒤졌지만 60년대 청춘은 '분노의 세대'임을 누구보다 실감나게 전달한 밴드였다.
본격적인 영국의 침공으로 인해 비틀스의 고향인 리버풀이 갑작스레 관심의 대상이 됐으며, 런던은(특히 카나비 스트리트) 음악은 말할 것도 패션도 주도하는 '우주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영국의 밴드들은 어찌하여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음악은 결코 '영국음악'이 아니었다. 비틀스, 롤링 스톤스 등은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것인 로큰롤과 그 기원인 블루스를 홀대하고 있는 동안에, 그것들을 받아들여 더욱 강한 볼륨으로 업그레이드해서 미국에 들여왔다. 초기 로큰롤 스타인 척 베리와 엘비스 프레슬리는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가 받들어 모신 영웅이었다.
영국 밴드들 때문에 그제 서야 미국인들이 미국의 블루스 가수 이름을 아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국의 그룹들이 미국의 가수보다 더 미국적이었다고 할까. 음악 자체보다 '음악의 뿌리'를 취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미국 땅에 성공의 깃대를 꽂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침공이 로큰롤 역사에서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미국은 로큰롤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땅을 몽땅 내주는 수치를 당했다. 상한 자존심을 견딜 수 없어 하루빨리 반격을 가해야 했다. 와중에 그나마 미국의 체면을 세워준 존재로는 먼저 비치 보이스와 흑인 레코드를 잇달아 출시한 모타운 레코드사가 있다.
비치 보이스(Beach Boys)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은 비틀스를 이기려는 욕심이 강했다. 비틀스가 상륙하기 전 미국 서부지역에서 잉태된 서핑 뮤직(Surfin' Music) 붐을 주도했지만 비틀스 열풍이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게 되자 “살기 위해 모여서 대책회의를 해야만 했다”고 그는 술회한다.
결국 그와 비치 보이스는 중요한 역사적 성과물을 개척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1965년 기념비적인 앨범 < Pet Sounds >였다. 녹음 스튜디오 기술의 일대 진전을 꾀했다는 찬사를 받은 이 앨범에 비틀스도 자극받아 1967년 팝 사상 가장 위대한 명반으로 꼽히는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를 만들게 된다.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흑인의 음악세상'을 꿈꾸었던 베리 고디가 설립한 모타운 레코드사는 포 탑스(Four Tops), 템테이션스(Temptations), 스모키 로빈슨 앤 미라클스(Smokey Robinson & The Miracles), 마빈 게이(Marvin Gaye),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등 굵직한 흑인 슈퍼스타들을 배출함으로써 영국그룹들과 시장과 인기차트를 양분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비틀스에 대한 미국의 저항군으로는 이밖에 버즈(Byrds), 마마스 앤 파파스(Mamas & Papas), 러빙 스푼풀, 영 래스컬스 등이 있었다. 하지만 10대들을 자극한 열풍으로는, 비틀스를 철저히 복사해 한때 비틀스를 능가했던 그룹 몽키스(Monkees)를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열정의 순도와 태도를 중시하는 로큰롤의 역사는 그들을 철저히 외면한다. 유사한 스타일로 비틀스와 맞서서 미국이 존재를 곧추세우기는 어려웠다. 미국의 힘은 조금 다른데서 나타났다. 그것은 60년대 중반을 몰아친 소울(Soul)음악이었다.
미국사회를 휘몰아친 흑인 영혼의 힘, 소울 음악
소울이란 무엇인가. 영혼이란 말처럼 흑인들의 솔직하고 강도 높은 자기표현이면서 혼신을 다하는 정열이다. 그래서 소울가수들은 노래할 때 잔뜩 찡그린 표정에 엄청난 땀을 흘린다. 그 땀은 또한 백인중심의 미국사회에서 소외된 흑인들의 한과 분노의 산물이기도 하다.
소울음악은 1960년대 중반 흑인들이 마침내 자신들의 주장과 자긍심을 투쟁적으로 표현하면서 표면 위로 융기했다. 뉴욕 LA 그리고 디트로이트에서 흑인폭동이 발발했을 때 소울은 그 분노한 흑인들의 욕구표출을 위한 도구였다. 때문에 소울은 '흑인 공민권운동'에 발맞춘 음악으로서 드높은 사회성과 역사성을 인정받는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흑인음악은 리듬 앤 블루스가 아닌 소울로 불렸다.
소울의 대명사는 지금도 '소울의 대부'로 통하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이다. 그의 1968년 히트곡 'Say it loud-I'm black and I'm proud'처럼 당시 흑인들은 팔을 들어올리며 '소리 높여 말하자! 난 흑인이며 난 자랑스럽다!'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는 비트를 잘게 부순 펑키 리듬에다 놀라운 춤으로, 그동안 숨죽이던 나약한 미국의 흑인들에게 강한 인상과 존재의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제임스 브라운이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하기 훨씬 이전에 소울은 싹을 틔웠다. 1950년대를 풍미한 '원더풀 보이스'의 소유자 샘 쿡(Sam Cooke)과 그의 라이벌인 재키 윌슨(Jackie Wilson)은 소울의 개척자였으며 시각장애자 가수이자 얼마 전 사망한 레이 찰스(Ray Charles)는 경이로운 창작력과 박자 감각을 과시한 '소울의 천재'였다.
이들 선구자들에 이어 60년대 중반을 넘어서는 퍼시 슬레지, 윌슨 피켓, 오티스 레딩, 샘 앤 데이브 등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해 음악계를 흑색으로 변모시켰다. 멤피스 소재의 스택스 레코드사 출신인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은 그곳의 특기인 반 박자 늦은 백 비트로 독특한 흡인력을 발휘했으며, 윌슨 피켓(Wilson Pickett)은 제임스 브라운 못지않은 발군의 펑키 리듬을 선사했다. 흑인 소울 여가수 글래디스 나이트는 윌슨 피켓을 '킹 오브 펑크(Funk)'라고 칭하고 있다. (제임스 브라운과 윌슨 피켓은 나중 1970년대 흑인음악의 대세가 된 펑크를 1960년대에 미리 싹 띄운 셈이다)
그러나 가장 기억해야 할 인물은 단연코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이다. 그는 놀라운 감정표현과 음역, 빈틈없는 가창력으로 흑인음악을 경원시하던 백인들마저 팬으로 끌어들였다. 아레사 프랭클린에게 주어진 타이틀은 '소울의 여왕'이며, 평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를 '역사상 가장 노래 잘한 가수'로 꼽는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소울이 교회음악인 가스펠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교회에서 성가를 부르며 다져졌다는 사실 그리고 신(神)에 대한 경배를 느낄 수 있다. 거기에 리듬 앤 블루스를 드라마틱하게 결합하면서 대단위 성공을 창출했던 것이다.
대부분 소울가수들이 아레사 프랭클린처럼 교회에서 가스펠을 부르며 음악계에 발을 디뎠다. 그래서 가스펠의 영향으로 소울음악은 열정적이면서도 신성(神聖)하다. 소울이 감동을 부르는 이유는 그 신성함이 영혼을 위무해주기 때문이다.
소울은 당시 미국 특정지역에서 환영받은 것이 아니라 전국적 현상이었다. 필라델피아에도, 멤피스에도, 디트로이트에도, 뉴욕에도 소울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레코드사로는 터키 대사의 두 아들인 어테군 형제가 설립한 뉴욕 소재의 어틀랜틱(Atlantic)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레이 찰스, 아레사 프랭클린, 퍼시 슬레지, 윌슨 피켓, 샘 앤 데이브, 오티스 레딩 등이 모두 여기서 앨범활동을 펼쳤다.
디트로이트는 상기한 모타운이 있는 곳. 모타운은 어틀랜틱과 함께 경쟁적으로 소울을 전파했다. 흑인이 만든 흑인 음반사라는 기념비를 세운 설립자 베리 고디는 끈적끈적한 소울이 아닌, 밝고 경쾌한 소울로 무장했다. 위대한 프로듀서 퀸스 존스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젊은 미국의 사운드'(The Sound Of Young America)를 목표했던 것이다. 단순한 곡조, 반복, 확실한 멜로디를 중심으로 한 '모타운 사운드'는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흑백을 막론하고 많은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실감나는 노랫말에 세련된 공연을 선보인 소모키 로빈슨(나중 모타운의 부사장이 됐다)과 미라클스를 위시해 템테이션스, 포 탑스, 마싸 앤 더 반델라스, 마블리츠, 메리 웰스 그리고 절대적 스타덤에 오른 슈프림스가 주요 면면들이었다. 70년대 들어서는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슈프림스를 나온 다이애나 로스, 그리고 라이오넬 리치가 이끈 코모도스가 그 계보를 이었다.
필라델피아 소울로는 그룹 오제이스(O'Jays)가 발군이었으며 시카고에서 활동한 임프레션스(Impressions)도 커다란 궤적을 남겼다. 소울이 흑인 시민운동의 힘과 관련한다는 점에서 임프레션스의 리더이자 나중 솔로로도 맹활약한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를 최고의 소울 뮤지션으로 꼽는 사람들도 많다.
이 점과 관련해, 커티스 메이필드와 함께 임프레션스의 멤버였던 제리 버틀러가 한 말은 한번 되새김질 할 필요가 있다. “소울은 거기에 담긴 메시지와 멜로디가 무궁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음악 산업의 생명이자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