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風水師
풍수이론에 의해서 땅의 길흉을 相卜하는 사람을 風水師, 地師, 地官이라 한다. 풍수사란 풍수술에 능통한 선생, 地師는 지리에 뛰어난 선생이란 뜻이고, 地觀은 조선시대에 왕가의 능을 만들 때 풍수사로 하여금 그 지역을 상정하게 하고, 이 相地에 임명된 자를 地官이라 칭한 데서 유래한다. 이 지관은 상설직도 아닌, 왕릉을 선정할 필요가 있을 경우 임명된 임시직이었다. 그 임용은 서울에 모인 전국의 풍수사 중에서 우수한 서너 명을 선출해서 임명했으므로, 한번 지관에 임명된 자는 풍수적 지식이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는 셈이 되며, 또한 조선시대에는 한번 어떤 관직에 임관되면 퇴임 후에도 그대로 관직명을 습용하는 관습이 있어, 한번 地官에 임용된 자는 영원히 地官으로 불렸던 것이다.
地官은 최고의 풍수사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나중에는 실제 地官에 임용된 일이 없는 자에게도 敬稱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경칭으로서가 아니고, 풍수사의 별칭으로 불려지고 있다. 또 地觀은 땅을 보는 자라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地官과 地觀이 동음이기 때문에 오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풍수사가 되기 위해서는 한문지식이 있어 많은 풍수서적을 읽어야하고, 선배 풍수사를 따라다니며 전국의 모든 산을 답산 하여 이론과 실제를 익힌 후에야 비로소 풍수사로서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으로, 적어도 1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지금의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10년은 공부해야 박사학위를 받는 것과 같다). 地官으로 임용되는 데는 『경국대전』에 규정된 지리학과의 전부를 통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地官으로 임용되기 위해서는「陰陽科 地理學」과거시험에 합격을 해야 했는데, 靑烏經 · 錦囊經 · 胡舜申 · 明山論 · 地理門庭 · 洞林照膽 · 疑龍 등등의 과목을 줄줄 외워서 강의 할 정도가 되어야 했다.
漢文으로 된 풍수서적을 읽을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아무나 풍수사가 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한문을 익힐 수 있는 中人이상의 계급이 아니면 풍수사가 될 수 없었으므로 풍수사의 지위는 다른 占卜術을 업으로 하는 盲人이나 巫女 등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었다. 한마디로 格이 달랐으며, 水準이 달랐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어찌 굿을 하는 무당이나 齊(祭)나 올리고 돈벌이에 눈이 먼 돌팔이 승려들과 같겠는가? 물론 지금도 제대로 풍수공부를 하기위해서는 기본적인 漢文 실력은 갖추어야 하는데,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 돈벌이에 눈이 멀다보니 몇 개월에 마스터하여 營業(?)을 하게 해준다느니 하면서 학문을 호도하고 있으니 스스로 천박해지고 말았다. 地官이라면, 國祿을 먹는 國家 官吏인데 어찌 국가공무원들의 업무가 맹인이나 무당들이 하는 점복술과 같은 수준의 업무이겠는가?
조선시대에 약 5천명의 풍수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지만, 풍수의 學理에 통달한 소위 名師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대부분이 풍수의 본말을 망각하고 類物내지 방위에 구애되어, 牽强附會격으로 吉地를 정했기 때문에, 甲 과 乙 과 丙이 보는 관점이 달라, 풍수의 점정을 원하는 자로서는 누구를 믿어야 좋을지 몰라서, 마침내 결정을 무복(巫卜)에 위임하게 되는 일조차 있었다하니, 풍수가 스스로 巫俗級 占卜의 수준으로 추락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때문에 이러한 俗士와 구분하여 名人을, 明師로 부르게 되었다. 중국고서에는 名師와 구분되는 俗士를 時師로 기술하고 있다.
풍수사에 대한 보수는 일정하지 않았다. 부모의 상을 당한 자가 풍수사에 의뢰해서 길지를 선정 받은 때에는 자신의 부모가 안주할 좋은 묘지를 선정해 주었기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를 다했다는 기쁨과, 부모를 길지에 모셨기 때문에 그 蔭德으로 번창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풍수사에게 될 수 있는 한 厚한 보수를 지불하였으나, 풍수사로부터, 얼마를 달라고 청구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 보수는 대략 卑辭厚弊라는 말대로, 선정을 받는 자는 풍수사에 대해서 공경의 태도로서 맞이하고, 음식은 물론, 의복 한 벌에 약간의 돈을 첨가해서 보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있었다. 개중에는 지금처럼 풍수사 쪽에서 보수액을 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원래는 길지의 선정을 의뢰한 자의 뜻에 따라서 보수를 받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으로 되어 있었다.
풍수사가 되기 위해서는 한문으로 된 풍수서적을 읽을 수 있어야만 가능하므로 조선의 풍수사 중에는 승려가 가장 많았었다. 우리나라 풍수의 鼻祖로 인정받고, 고려의 도읍을 확립했던 신라 말의 도선국사도 승려이고, 조선의 한양궁터를 정한 무학도 승려이며, 『서산대사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釋休靜도 승려이고,『南師古秘訣』의 저자로 명조 때 풍수, 천문, 점성에 통달했던 남사고도 소년 시절 神僧을 만나서 풍수의 비결을 전수 받았던 것이다.
조선조에 있어서도, 무학의 漢陽王都 選定 및 왕릉(지금의 동구릉)의 선정을 비롯하여, 많은 묘지가 모두 風水僧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풍수사의 대부분이 승려였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으나 풍수사가 승려뿐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고려조에 있어서도 書雲觀등에는 풍수술에 통달한 학자가 있었고, 조선조에서도 음양과의 학자들이 풍수술을 공부했으며, 또한 한양의 터를 정할 때는 무학보다도 오히려 학자인 정도전의 주장이 통했을 정도이며, 풍수술로써 각종의 구재사업을 행했던 맹사성도 학자이고, 南師古, 李土亭, 鄭斗卿, 成兪正, 尹參議, 朴相宜 등도 모두 풍수에 능통했던 학자들이다.
이외에 풍수사에 준하는 자로서 巫女가 있었다. 풍수사에게 의뢰해서 묘지를 길지로 선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집안에 災厄이 빈발하여 점을 쳐보니 그 묘지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괘가 나왔다든가, 甲․乙 兩 풍수사의 말이 부합되지 않아 어느 것도 믿을 수 없을 때, 또는 풍수사가 가까이 없어 길지를 선정 받을 수 없는 경우에는, 무녀 또는 맹인에게 점을 청하여 무엇 때문에 災厄이 있는지, 어느 땅으로 옮겨야 하는지, 언제 어느 곳으로 해야 하는지를 물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占定은 風水術 또는 풍수신앙에 벗어난 것이므로 무녀 등을 풍수사로 간주할 수도 없으나 풍수와 무속의 구분이 없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의 식민지를 거쳐 해방 후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청산해야 할 구시대의 迷信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風水師라고도 할 수 없는 다수의 풍수종사자들이 학문적 깊이도 없는 짧은 지식으로 돈벌이를 하다 보니 혹세무민하게 되고, 스스로 신뢰를 잃은 결과로,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풍수가 스스로 巫俗級 占卜의 수준으로 추락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며, 스스로 분발하여 절차탁마하여야 할 것이다.
불교(선)과 함께 풍수를 깊이 배우고자하시는 분이 있으면, 제가 지난 15년 동안 탁마한 알음알이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물론 돈을 받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조건은 있습니다. 본인의 확고한 의지와 정열을 담보로 합니다.
카 페 : 여산 풍수철학 연구회 / cafe.daum.net/DoctorCSC
교육장소 : 마포구 마포동 지하철 5호선 마포역 불교방송 근처
연락처 : doctorchoi@nate.com
jmidoctorchoi@hanmail.net
첫댓글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_()()()_
나무 마하 반야 바라밀!.......!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