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배(빌 길버트) 14
2차대전 중 주검 같은 위험 속에서 머맨스크 (Murmansk)를 왕복하면서 화물수송을 했던 라뤼 선장이 그의 1등사관 디노 사바스티오 (Dino Sabastio)에게 "승선을 개시하라! 1만명까지 태운 후 내게 알려줄 것!" 하고 명령했다.
러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피난민들을 짐짝처럼 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물칸과 갑판층 사이에도 틈만 있으면 그들을 태웠습니다. 음식도 물도 없고 의사도 없었고 통역관도 없었어요. 지독하게 춥고 캄캄한 화물칸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지요. 변소 시설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피난보따리들을 이고 지고 탔습니다.
아이가 아이를 업고 있었고, 한 아기를 등에 업고 한 아기는 젖을 먹이는 여인들, 먹을 것과 아이를 끌고 온 노인들 하며 참으로 처참한 군상이었습니다. 모두들 공포에 질린 얼굴 표정이었습니다. 우리가 '빨리! 빨리!! 하고 소리를 쳐도 그저 공손하게 아무런 반응도 없었어요. 그 '빨리! 빨리!'란 말은 영어로 '허리, 허리!(Hurry, Hurry)' 와 같은 뜻인데, 우리가 배운 한국말 몇 마디 중의 하나였습니다."
20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해군 장교들 중의 하나였던 알리 버크(Arleigh Burke) 제독도 당시 홍남에 있었다. 후일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수심에 가득 차 있던 피난민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배고프고 찌들고 공포에 떨면서도 단 한 가지, 생각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임시 보행 판도를 건너오며 소개 작전이 한창 진행 중이고 대부분 미군은 철수하고 홍남시는 적의 포화로 불바다가 되었을 때 미군의 보복 함포사격이 개시되었다. 5년 전 맥아더 장군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문서에 조인을 했던 미조리 (Missouri) 함을 포함한 미군 함정들이 함포사격에 참여했다.
미조리 합의 40밀리 함포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갑판을 뒤흔들었다. 라뤼 선장은 아군의 포탄이 짧게 잘못 떨어질 경우의 위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막을 찢는 미조리 함의 굉장한 포성에 겁이 난 무전통신사는 그의 선실로 들어가더니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훗날 어느 기자가 러니에게 그때 무서워서 울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러니는 말했다: "그런 어색한 질문을 받고 뭐라고 대답할 줄을 몰랐다."
3척의 미국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 해군 전폭기들이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이 폭탄은 목표물을 파괴하고 그 주위를 다 태워버리는 신종 폭탄이었다.
러니는 그런 격렬한 전투현장 속에서도 일말(一抹)의 향수 같은 감정이 솟아났다. 그것도 전쟁의 열기를 체험해 가면서 ... 어마어마한 함포사격에 참여한 함선들은 2척의 순양함 로체스터(Rochester)와 세인트 플(St.Paul
), 미조리 전함, 3척의 항공모함 3척 내지 8척의 구축함들이었다.
흥남시의 건물과 시설에 네이팜을 투하한 전폭기들을 탑재한 항공모함 중의 하나는 바로 러니가 수년 전 해군 예비병으로서 대서양에서 복무한 레이트(Leyte) 함이었다. 하긴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사관들의 대부분은
해군 예비역 장교들이었다.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77속전 항모군'은 공격용 항모 4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22척을 동원하여 10군단 흥남 철수작전의 최후 국면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중공군의 추격은 매 시간 가까워졌다. 열세에 처한 3군단의 방어선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 생사를 오락가락하며 전투 현장을 처음 경험한 부대 중에는 미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한국에 파견된 의무부대인 제1야전 후송병원 (First MASH)이 있었다. 흥남시의 북쪽 외곽의 빈 학교건물 안에 군의관 16명, 간호사 13명, 의무병 87명이 지프차 한 대와 2차대전 때의 트럭 14대, 60개 병상을 가지고 야전병원을 운영했다. 거기서 군의관들은 "고기 완자 수술 (meatball surgery)" (대충 대충하는 수술ㅡ 역자)을 행했다.
매쉬(MASH) 야전병원은 새로 조직된 의무부대였다. 부상병에게 일본 또는 그 외 지역의 보다 좋은 시설과 장비를 갖춘 병원까지 후송되는 동안만 살아 있도록 즉석 간이수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매쉬 요원들은 전진해 오는 중공군에 대항하여 홍남의 해변에서 용맹스럽게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제7. 제3보병사단의 항전) 현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매쉬 의무부대장이었던 칼 두바이 (Carl T. Dubuy) 중령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학교병원 바로 뒷산에 올라가 포탄이 우리와 멀리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 중공군 사이에 떨어져서 터지는 것을 보았지요. 그리고 우리와 함흥 사이의 얼어붙은 들판에 중공군의 소형 말(당나귀: 역자)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귀한 반창고를 있는 대로 다 찾아내서 교실 창문을 싸 발라서 끊임없는 포격의 충격파로 유리가 깨져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했지요."
두바이 중령은 미조리 함의 40밀리 함포의 굉음을 음악의 "남성 최하저음(Basso Profundo)"과 같다고 묘사했다. 그는 말했다: "멀리서 보니까 마치 120리터 휘발유통을 공중으로 쏘아서 폭발시키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 발사체들이 마치 쓰레기통이 머리 위의 얼어붙은 공중을 뚫고 비호같이 지나가며 내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두바이는 회고하여 말했다.
"그때 우리 의무부대원 대부분은 홍남에 갇혀서 철수하지 못할 것으로 믿었어요. 끊임없는 포격, 찌푸린 하늘, 군인과 장비를 싣기 위해 북적대며 초조하게 대기하는 배들, 게다가 제1야전 후송병원은 맨 나중에 떠나야 하는 부대라는 말이 돌았고, 그런 분위기에서 우리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들은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이 탄 배는 2차대전 때의 자유 함정(Liberty Ship)인 마리아 루큰바크(Maria Lukenbach)였다. 두바이의 설명에 따르면, 그 배의 시설과 상태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너
무나 흡사했다
"이런 타입의 화물선에는 선원 이외의 사람을 위한 선실(船室)이나 공간은 전혀 없었다. 온방(溫房)이나 목욕. 급수와 변소 시설이 전무했고, 칠흑같이 캄캄하고 위풍이 센 헛간 같은 방에는 침상도 없었다. 쇠 바닥에 침낭을 깔고 서로 붙어 누어서 체온으로 온기를 유지해야만 했다.
군용 변소는 노천갑판 고물 쪽 배 끝머리 밖으로 튀어나오게 매달아 놓은 간이변소였다. 이런 시설들을 이용하는 것은 생존이 걸린 모험이었다. 그곳에는 일을 보는 동안 배가 흔들리더라도 안전하도록 철봉 손잡이가 달려 있었고, 궁둥이를 찬바람에 노출시켜서 용변을 봐야 했으므로,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끌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러니는 동료 사관과 선원들이 피난민을 태우고 있을 때, "흥남시는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우리는 거의 최전방에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적군 포화의 압박 속에서 피난민들을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이 태우려고 전력투구하고 있을 때 라뤼 선장이 두 가지 주의사항을 시달했다. 즉, 배를 회전시켜 해안에서 급히 철수해야 할 경우에 대비하여 배를 열린 바다 쪽으로 향하도록 하고, 둘째, 승선 작업 중에도 배의 엔진을 계속 틀어놓으라고 명했다.
러니는 말했다: "만약 중공군과 북의 인민군이 돌파해 쳐들어 왔더라도 우리는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절대로 항복해서 배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지독한 북한의 추위는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바람은 질풍 수준으로 심하게 불었고 눈은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해변에 있는 부대와의 통신은 홍남에 설치된 통신장비와 케이블이 모두 타버려 두절되었다. 제1차로 태운 피난민들은 갑판에서 다섯 층 내려간 제5선창(槍)으로 다 내려 보냈다. 선원들은 그들을 화물 발판에 실어 내려 보냈다. 배의 해상 일지(日誌)는 피난민의 승선을 간결한 사무적 용어로 기입했다.
1950년 12월 22일(금)의 일지 난에는:
피난민 승선, 밤 9시 30분 개시, 밤새도록 진행. 다음날 오전 11시 10분 종료:
-21:30 승선 개시. 화물 발판 사용. 제5선창으로 승선
-22:00 승선 개시. 제4선창으로 평갑판과 대형 장비 사용. 사다리 이용, 갑판 승강구 1.2.3번으로 피난민 채움
-23:15 평갑판 사용. 2.3선창으로 피난민 승선
-24:00 5개 선창을 피난민으로 계속 채움, 전등과 배선 점검. 순회점검 완료. 갑판 위 이상 무.
ㅡ스미스(H.J.B.Smith Jr.)3/0. 기록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인간 화물을 만적하고 바다로 향하려고 하는데 지프차 한 대가 급히 부둣가로 질주해 왔다. 한 젊은 육군 소위가 지프차에서 뛰어내려 배다리로 달려와서는 함교(艦橋)에서 라루 선장에게 소리쳤다
"선장님, CID(Criminal Investigation Division: 군 범죄 수사대)에 방금 들어온 정보입니다. 공산당 첩자들이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배에 탔다고 합니다. 부산까지 무장 경비원을 데리고 선장님을 동반하도록 파견 임무를 받았습니다. 17명의 남한 헌병들이 나와 같이 갑니다."
12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면서 바다는 잔잔해졌으나 "구름이 짙게 낀 날씨"라고 일지는 적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피난민들의 승선이 진행되는 동안 노쿠바 (Norcuba) 호의 좌현(左) 쪽에 정박해 있었다. 투광조명등(Floodlights: 건물이나 인물 등에 여러 각도에서 강한 광선을 비추어 뚜렷이 드러나게 하는 조명법.역자)을 비춰서 한밤중의 어둠을 뚫고 승선 작업을 도왔는데, 라뤼 선장이 나중에 회고하기를,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상황을 그런 조명이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했다
"분명히 여러 가지 위험이 따랐지만 작업을 위해서는 투광조명을 안할 수도 없었지요. 우리는 불빛 속에 완전히 노출된 제일 쉬운 목표물이 되었지만, 다행히 적의 포탄이 가까이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군 함포의 포탄이 빗나가 우리 배에 잘못 떨어지는 날이면 사람이고 뭐고 다 박살이 날 텐데, 하고 두려워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사관은 그 장면을 어린아이들에게 잘 알려진 놀이와 생생하게 비교하여 묘사하면서 말했다. "아주 미쳐버릴 것만 같았지요. 피난민을 다 쑤셔 넣다시피 태우는 일은 마치 서커스에서 12명도 넘는 거인들이 미니자동차에 얼굴을 처박고 다 들어가려고 애쓰는 어릿광대 장난 같다고나 할까요."
구출작전의 전 과정을 통해 라뤼는 갑판 아래는 피난민으로 꽉 차있고 수백 톤의 제트기 연료가 배 안에 있다는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훗날 그가 따져본 연료는 자그마치 300톤이나 되었다. "자칫 불똥이 라도 튀는 날이면 내 배는 거대한 장례 화장터의 불더미로 돌변하여 역사상 최악의 해양 참사가 될 건 뻔했습니다."
더구나 구조장비도 전혀 없었다. 피난민에게 돌아갈 구명보트나 구명구는 전혀 없었고, 있는 것이라고는 구명보트 2대와 47명의 사관과 선원용 구명구 47개뿐이었다. 일단 항구를 빠져나가면 안전 경계로 인해 무전통신도 두절된 상태로 망망대해에 홀로 떠가게 되는데, 더욱 겁나는 일은 50킬로 해역에 깔린 기뢰망 위를 지나가야 하는데 기뢰 탐지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피난민들은 몰랐지만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사관들은 알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흥남 철수 두 달 전에 미 해군의 소해선 3척이 적의 기뢰가 터져 침몰했다. 적의 잠수함도 근해에 잠복해 있을 수 있고, 임시 대용의 구조선 정도는 어뢰 한 방으로 침몰시킬 수도 있었다. 그 배는 바다나 공중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할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일단 항진하고 나면 호위해 줄 배 한 척도 없었다.
2차대전 참전용사인 러니는 그때의 상황을. 군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수륙 상륙작전을 정 반대로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