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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충만한 삶(4)
엡 5:15-21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 설 교 >
마음에 찬송이 있을 때
엡 5:19-21 / 박덕기 목사
어떤 목사님이 장례식을 집례 하였습니다. 일상적인 방법으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그리고 축도하고 장례식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아주 점잖게 생긴 신사 한 분이 목사님께 가까이 찾아와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인과 개인적 인연이 있어서 오늘 이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기독교 예식으로 진행되는 장례식을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인들은 장례식에서도 노래를 부르는군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찬송이라는 말을 모르거든요. 그 사람의 귀에는 노래로 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맞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에서도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조금 후에 더 중요한 말을 하였습니다. “기독교 교리에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만, 추상적인 진리로 그렇게 받는 줄 알았는데, 오늘 목사님의 설교와 교인들의 반응을 보니까 진짜로 부활을 믿고 있고 영생을 사실적으로 믿고 있군요.” 목사님은 “아, 그럼요. 바로 이 두 가지가 기독교 교리에 핵심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잡수실 때에, 제자들은 그 뜻을 몰랐습니다만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떡을 가지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하시고, 잔을 가지시고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신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그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입니까? 이렇게 성만찬 예식을 행하시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거기서 체포되고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시면서 “찬미하며 가니라!” 그러한 때에 어떻게 찬송이 나올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는 길에 어떻게 찬미가 나올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마 26: 30절에 분명히 말하기를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도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사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케 하기 위함이요,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또한 하나님을 찬송케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고, 찬송을 통해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찬송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누자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적 내용, 즉 기도와 헌금 그리고 찬송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수혜적 내용 즉 말씀, 축복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찬송은 예배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적 예배의 내용으로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의 성호와, 그분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의 주된 내용으로서의 찬송에 대해 좀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배에 있어 찬송이 필요한 이유
히 13:15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습니다.
1)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찬송은 선민의 하나님께 대한 제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창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고 했습니다. 왕정 시대에는 찬송의 제사를 전담하는 찬양대를 레위 족속 가운데서 특별히 뽑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찬송에만 전념토록 하였습니다. 대상 9:23에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대상 15:16에 보면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하여 그 형제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 등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하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각양의 악기를 만들어 찬양 제사에 활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찬송 집으로써 유대교의 회당 예배 시 전회중이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까지 계속되어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 빠져서는 아니 될 필수적인 요소가 된 것입니다.
2)찬송은 성도의 신앙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골 3:16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했습니다. 찬송만큼 성도의 신앙 상태를 다양하게 반영하는 기능도 없는 줄 압니다. 감사하면 감사한 대로, 시험 중에 있으면 시험 가운데 있는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솔직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찬송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찬송을 하는 자는 더 큰 감사의 조건을 발견케 되고, 시험 중에 있는 자는 시험을 이길 힘을 공급받게 되며, 기뻐하는 자는 참된 기쁨을 얻고, 슬퍼하는 자는 위로를 받게 됩니다. 찬송이 성도의 신앙 고백이 되는 이유는 찬송의 기능상 신앙 없이는 찬송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찬송 안에는 신앙의 기본적인 내용인 ‘믿음, 신뢰, 헌신, 감사, 응답’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어떤 찬송을 하느냐에 따라 그의 신앙의 넓이와 깊이가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입니다.
다음은 ‘밴쿠버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 원장 양승훈님’의 간증입니다. <전 한국 누가회 이사장이자 안양 병원장인 박상은 박사님이 VIEW 교제모임에서 강의를 하였다. 박 원장님은 강의 중 한 입원환자에 대해 언급했다. 빔 프로젝트로 그 환자의 사진을 비추었을 때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분은 얼굴만으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고사하고 도대체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큰 교통사고로 얼굴 앞부분이 완전히 함몰된 것 같기도 하고 심한 화상으로 얼굴이 타다가 만 것 같기도 했다.
그분은 말기 피부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어느 교회 권사님이었다. 암 덩어리들이 그 분의 눈을 중심으로 입을 제외한 얼굴 윗부분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눈썹은 말할 것도 없고 눈과 코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포도송이 같은 암 덩어리들이 뒤덮고 있는 그분의 얼굴은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다만 그분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입뿐이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박 원장님의 얘기는 권사님의 얼굴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원장님이 그분에게 다가갈 때마다 그분은 잘 들리지는 않지만 늘 흥얼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런 분이 무슨 노래를 부르실까 하며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어느 날 가까이 가서 들어보았는데 놀랍게 그분은 찬송을 부르고 계셨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가 23장이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그분은 마지막 남아 있는 입으로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자신의 추한 마음을 보혈로 정결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필자는 짧은 찬송가 한 곡이 이처럼 놀라운 능력과 영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징그러운 피부암도, 말기 암의 고통도 그분의 구원의 감격과 찬송의 영감을 앗아갈 수가 없었다. 설사 암 덩어리가 그분의 입까지 다 뒤덮었다고 해도, 그래서 그분이 더 이상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 해도 마음으로 부르는 그분의 입까지는 막을 수 없었으리라! 얼마 후 그 권사님은 평안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제 그분은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없는 천국에서 '만 입'을 가지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계실 것이다. 권사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 동안 멀쩡한 입과 몸을 가지고 찬송의 껍데기만 스쳤던 자신을 회개했다. >
2. 예배에 있어서 찬송의 역할
벧전 1:3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1)소망을 줌
노래는 인생의 한과 소망을 고루 악보에 담은 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속 음악의 내용은 거의가 비탄, 허무, 좌절, 상실, 배신 일색입니다. 그만큼 이 사회가 소망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이러한 노래는 생명이 없는 죽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그렇지 않습니다. 찬송은 부르는 자들에게 언제든지 참된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저 넓고 푸른 동산 내 앞에 열리고 그 검은 구름 걷혀 새 하늘 보인다. 끝없는 나의 소망 저 환한 생명 길 참 보배 되신 주님 늘 함께 하소서♬
♬예루살렘 금성아 복 가득하도다. 내 너를 생각할 때 마음이 기쁘다. 비할 데 없는 복과 그 빛난 광채와 나 받을 모든 기쁨 다 측량 못하리. 주 예수 보좌 앞에 내 짐을 내리고 즐거운 잔치 할 때 개개를 부르리. 주 명령 따라 나가 승전한 성도들 영원한 그곳에서 흰 예복 입겠네.♬ 어느 시인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한 우리는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아가는 한 우리에게 소망의 태양은 언제나 떠오를 것입니다.
2)바른 간구를 하게 함
시 72:19에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 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고 했습니다. 찬송은 곧 진실한 간구입니다. 성경은 찬송이 진실한 간구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기도와 찬송의 온전한 조화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찬송과 기도는 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쌍둥이와도 같습니다. 어느 한 쪽이 귀하고 덜하지가 않습니다. 각기 다른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아뢰며 은혜를 받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3)헌신을 하게 함
히 13:15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습니다. 찬송은 찬송하는 자의 전인격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입술로만 불러대는 찬송은 진정한 찬송이 되지 못합니다. 예배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임해야 하듯이, 찬송 또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전인을 드린다는 결단이 있어야 참된 찬송이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송입니다.
예배의 찬송에는 회중 찬송과 성가대의 찬양, 특별 찬양 등이 있습니다. 찬송 잘하는 사람들은 천국에서도 대접받을 것입니다. 천국은 찬송으로 가득 찬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찬송 질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리고 삽니다. 누군가 성가대원의 특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교회에 올 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까운만 뒤집어쓰면 되기 때문이다.)
2)항상 예약석을 갖고 있다.
3)회중석에 있는 사람들을 항시 내려다 볼 수 있다.
4)목사의 예리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찬양은 성가대원들만의 특별한 은사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 삶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찬송을 음정 박자 화음에 충실히 따라 부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믿음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음정 박자 화음에 충실하여 아름다운 선율을 낼지라도 그 음악에 우리들의 정성된 마음이 담겨 있지 않으면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찬송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찬송에 담겨 있는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은 작사자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부르는 찬양으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성도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심지어 성가대의 찬양까지도 우리들의 신앙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라야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면대로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케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을 쓴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이 말은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찬송의 올바른 정신입니다. 그리고 찬송하는 사람의 바른 자세입니다. 켄트 휴스라는 설교자는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찬양을 허락하신다.”고 했습니다. 거듭난 증거의 하나가 ‘찬양할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라는 중국 선교에 신화를 남긴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가 청년시절 신앙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이라는 소책자를 접하게 됩니다. 그때의 감격을 술회하기를 “나는 갑자기 나의 구원에 대해서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냥 이 사실을 받아드리고 찬양할 것 밖에 없음을 알았다. 나의 신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마음속에 찬송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마음에 찬송이 있으면 우선 우리 몸의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잠 17:23절에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속에 노래가 있으면 혈액순환도 잘 되고, 소화도 잘되고, 신경의 긴장이 풀어지고,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엔돌핀이 나와서 건강에 좋습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 몸의 질병의 70% 가량이 심리적인 원인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속에 노래가 있으면 그 만큼 몸에 병드는 확률이 줄어든다는 결론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찬송이 있으면 모든 유혹과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찬송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마음속에 찬송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찬송이 있을 때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찬송이 있으면 세상의 음란한 노래가 아무리 크게 들려와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유행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까? 그 마음속에 찬송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지요. 마음속에 찬송이 있으면 ‘나이트클럽’이나 ‘노래방’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찬송이 있으면 이적이 일어납니다. 한 목사님이 출산을 앞둔 산모 심방을 했습니다. 기도를 끝냈을 무렵 진동이 오자 산모는 너무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을 훔쳤습니다. 산모의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던 목사님은 힘차게 찬송을 인도하셨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산모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큰일이구나, 목사님이 나의 죄를 알고 저러시나?” 순간 ‘애가 나오려고 할 땐 힘을 써 봐.’하는 친정어머니의 말이 생각나 얼른 온 몸에 힘을 써 보았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나올 생각을 않는 것이었습니다. 산모의 상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사님의 찬송은 계속되었습니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정말 힘써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착해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산모는 참는 데까지 고통을 참아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찬송은 더욱 산모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참아도 못 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산모는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아니 죽을까라고? 출산하다 죽는 사람도 많다는데... 혹시 나도?’ 그런데 마침 목사님의 노래가 바뀌었습니다. “믿으면 하겠네.” 순간 아이가 으앙 하고 태어났습니다. 물론 유머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정말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체험한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 낸 것 때문에 시 당국에 고발되어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의 마음속에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만 찬송을 부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 들을 수 있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옥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고 고랑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옥을 지키던 간수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그날 밤 그의 가족까지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속에 찬송이 있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찬송이 있어서 우리 삶에 기적이 일어나는 감격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세세무궁토록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엡 5:19-21 / 손상률 목사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믿음의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삶이요 그것이 바로 예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감사」라는 말(Ἐυχαριστια)의 신약적인 의미는 값없이 받은 호의에 대하여 마음에서 우러나는 고마운 생각을 뜻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보답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과 기도, 헌신과 봉사와 같은 일련의 행위가 모두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으로써 이를 예배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자기가 처한 환경이나 조건에 얽매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더 절실하게 감사하며 헌신하는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성경적 감사는 조건에 따라서 선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하는 것은 무슨 일에든지 다 감사하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뜻 깊은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범사에 감사하라”하는 말씀으로 신령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본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중에서 「은혜」라는 말과 「감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보답하기 위하여 드리는 신앙적 행위입니다. 「은혜」라는 말(Χάρις)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조건 없이 거저 주는 선물’을 뜻합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의 은총은 모두 다 값없이 받아서 쓰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것(凡事)이 다 은혜요 선물입니다. 고린도후서 9:15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1) 일반적인 은혜입니다.
시편 116:12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하였습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을 다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한 목적으로 다스리며 관리하여 좋은 결과를 내도록 분부하신 것입니다(창 1:28). 하나님께서 따뜻한 햇빛과 땅을 적시는 비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주셨습니다(마 5:45). 안정된 나라와 사회적인 환경도 다 하나님의 은혜 중 일부입니다(행 17:26).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과 소망에 넘치는 자녀들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시 127:3). 온갖 재난과 질고와 죽음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 이 정도라도 안정된 생활을 하며 내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희망을 가꿀 수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2)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자기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불러주신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불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입니다. 신명기 7:6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78편에는 하나님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광야 여행을 하는 동안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초자연적인 은혜에 대하여 그 내역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곧 애굽에 재앙을 내려 장자들을 죽이고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신 일이나, 홍해를 가르고 맨땅으로 건너게 하신 일과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밝히며 보호하신 일, 하늘의 양식 만나를 먹이신 일,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신 것 등 수없이 많은 이적과 기사들로 자기 백성을 인도해 내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게 된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훗날 모세는 그 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신 33:29).
신약의 경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해당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받은 특별한 은혜를 열거하면서 그 중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과 하늘의 영광스러운 기업의 후사가 되게 하신 것(롬 8:15,17)이라고 하였습니다.
(3) 신비로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내리시는 특별한 은혜 가운데는 무엇보다도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대교회는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행 2:1-4). 오순절 절기 때 예루살렘에 모여 든 많은 사람들은 성령 받은 사도들의 말씀 전하는 것과 거기 나타나는 이적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행 2:38).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행 11:17). 성령 받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신비로운 사건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됩니다(고전 12:3).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은혜의 선물로 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하여 주십니다(고전 2:12-14).
또한 성령이 함께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알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8:15-16). 이와 같은 사실들은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될 수 없는 신비로운 사건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Ⅱ.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며 절대적인 주권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가장 선하게 운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만사는 다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일에 부합될 때 최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강 가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요한이 이를 거절하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였습니다(마 3:15).
(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소요리 문답 제일 첫 머리에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곧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31).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이나 그가 행하신 모든 일도 다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의 소임을 다하게 될 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7:55-56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주신 은혜는 그의 영광과 직결됩니다.
시편 기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것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19:1-4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24:1-2에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24:9-10에는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자연과 만물은 각각 제 위치에서 창조 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므로써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간혹 피조물들이 범죄한 인간의 욕심으로 인한 횡포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 방해를 받게 될 때 크게 탄식하며 인간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로마서 8:21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3)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이 되게 하십니다.
로마서 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거나 매우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일이라도 그것이 오히려 아름답게 마무리되어져서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십니다.
옛날 아하수에로 왕 때 하만의 모해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달 월 십삼 일 하루동안 모두 다 죽임을 당하게 되는 위기에 놓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하수에로의 왕비 에스더로 말미암아 그들을 살려내고 오히려 하만과 그 일족을 죽게 하였습니다(에 7:9-10).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악이 선으로 바뀌어지고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어지는 전화위복의 체험을 하게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행하시므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27-29).
Ⅲ. 모든 것이 복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전도서7:14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앞길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교차되게 하시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다 복이 되게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잠 16:3).
(1) 형통케 되는 것이 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의 앞길에 형통함이 보장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시편 1:2-3에 복있는 사람에 대하여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밤중 같이 어두운 세상에서도 말씀의 밝은 빛으로 조명을 받는 사람은 그 걸음이 안전하고 형통케 되는 법입니다. 옛날 다윗은 그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고 하였습니다(왕상 2:3).
(2) 고난과 시련도 복이 됩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도록 섭리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시대를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그들이 겪는 시험은 훗날 반드시 놀라운 축복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욥도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혹독한 시련을 당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이겨낸 사람입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내다보았습니다. 욥기 23:10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범사가 복이 되게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옛날 형들에 의해서 미디안 대상에게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은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다음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간증하였습니다(창 50:20). 다윗은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시 30:5).
(3)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 있습니다.
본문 성경을 기록한 바울은 평생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에 붙들려서 그의 복음 증거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도 그는 로마 옥중에 수감되어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 마음 속에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마 28:20). 좋은 일에나 궂은 일에나, 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건재하고 승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저와 함께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일에나 적용되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가 가이사랴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 그레데 해역에서 풍랑을 만나 파선하게 될 위기에 이르렀습니다. 배 안에 있던 이백 칠십 여명의 승객들은 열 나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떡을 먹으라고 권하며 확신에찬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전날 밤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 옆에 서서 그 배에 탄 승객들을 다 네게 주셨다는 싸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7:25에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불변의 진리인 언약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무슨 일이나 복이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씨앗은 무엇입니까
엡 5:19-21 / 이원근 목사
사람이 어떤 열매든지 거두고자 하면 반드시 그 씨앗을 심어야만 합니다. 아무 것도 심지 않거나 엉뚱한 씨를 심고서 자신이 원하는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콩을 거두기 원하면 반드시 콩을 심어야만 하듯이 자기 인생의 밭에서 축복이라는 열매를 거두고자 하는 사람들은 축복의 씨앗을 심어야만 합니다. 감사가 바로 축복의 씨앗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를 하나님께 귀하게 여기십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감사의 삶을 살 때 축복의 씨앗입니다.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고 했습니다.
1) 생명을 구속하신 은혜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감사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생명의 구속이라는 엄청난 은혜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증거한 것처럼 허물로 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구속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지닌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과학을 발달시켜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많은 도구들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전 세대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구체화 된 시대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접근하지 못한 분야가 생명의 구속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며, 은혜로만 가능한 부분입니다. 이토록 큰 축복을 받았으니 감사해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2) 필요를 따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구속하셨을 뿐 아니라 일상의 필요도 돌보십니다. 아버지가 그 사랑하는 자녀들의 필요를 위해서 열려하듯이 그분도 성도인 우리의 일상 생활에 깊이 관여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므로 마땅히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채워 주십니다. 영적인 필요든지 물질적인 필요든지 우리의 공급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염려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염려를 주께서 맡아 주십니다. 우리의 걱정, 불만, 긴장 등의 짐을 그분이 대신 져 주십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그분께 감사해야 할 충분한 요건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 때 우리의 필요를 따라 돌봐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명을 구원하신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축복의 씨앗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자의 감사가 축복의 씨앗입니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1) 주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인정입니다.
범사에 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분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은 축복을 거두기 위한 씨앗입니다. 주는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일꾼의 선택이라든지 때를 정하는 일 등에 있어서 그분은 우리의 의견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공청회를 여는 일도 없으시고, 여론 수렴을 위해서 어떤 계획을 세우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모든 진행 과정을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주와 만물 일체를 주께서 창조하셨듯이 역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도 주께서 주관하십니다. 따라서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역사관이 바뀌게 되고, 역사에 대한 외경심을 갖게 됩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치 않습니다.
2)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범사에 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주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하박국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여건이 심히 열악하고 죄악의 상태를 맞게 되었을지라도 주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성도들에게서 주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태도가 도무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줍니다. 첫째는 신앙의 근거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시는 신본주의 신앙이라야 할텐데, 사람 혹은 자기가 중심이 된 인본주의 신앙을 가졌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쏟으시는 관심이나 역사 하시는 방법 등을 모르기 때문에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것과 이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이 세상 만물을 주고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생명의 길로, 진리로, 그리고 삶의 모든 부분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도하심을 믿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 축복의 씨앗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며 감사 할 때 축복의 씨앗이 됩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1) 어떤 제사보다 나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코자 결단하기란 어떤 환경에 처한 사람에게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축복을 위한 씨앗입니다. 축복이라는 열매를 자신의 인생에서 거두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도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이사야가 그 백성을 책망한 것은 그들이 제사를 소홀히 하거나 제물이 풍족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매를 자청했기 때문입니다(사1:5). 아무리 많은 제물을 주께 드릴지라도 그분을 순종함이 없으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주께 책망을 받은 까닭은 성경에 무지하거나 종교 의식상의 어떤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주를 순종하는 생활, 진실한 삶의 태도가 없음을 책망 받은 것입니다(마23장).
2) 불순종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은 영원히 불변하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아무도 이 법칙을 깰 수 없습니다. 비록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선택된 사람일지라도 이 법칙의 국외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불순종을 인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성경이 가르쳐 줍니다. 불순종은 형벌을 불가피하게 초래하므로 우리는 이를 멀리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울이 버림받아 망하게 된 사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주님께 불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의 표적이 됩니다. 자신의 인생이라는 밭에서 축복의 열매를 거두고자 하면 불순종을 경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성패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 여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종 결재권자, 평가자는 하나님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성도가 순종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자식이 부모의 말에 무엇이든 순종할 때 그 부모는 기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 할 때 무서운 형벌이 있습니다. 형벌 중에 무엇이 제일 무섭습니까? 칼입니까? 질병입니까? 저주입니까? 내 생각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불러도 대답이 없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하나님께 버려진 존재가 제일 무섭습니다.
결론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 밭에 축복의 씨앗을 뿌린 사람만이 거둘 수 있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 성도, 감사가 넘치는 마음은 축복의 씨앗입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의 삶 속에 넘치는 복을 채워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엡 5:19-21 / 송영태 목사
추수감사주일이며 가족 초청주일 아침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생각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수하게 느껴지는 연기냄새가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황금물결로 출렁이는 들판 한 가운데 타작기를 벌려 놓고 타작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밀짚모자 믿게 검게 탄 얼굴에 스며드는 만족한 웃음과, 짚 검불을 막기 위해 쓴 머리에 수건 위로 하얗게 먼지가 뒤덮여도 마냥 즐거워하던 우리의 어머니들이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느 이름 모를 시골 동네를 지나다보면 저 멀리 집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에는 붉게 익어터질 것 같은 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에서 마음이 푸근함을 느끼는 계절입니다. 어느덧 한 해가 다 지나고 추수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이 계절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마음 넉넉해지는 계절임을 실감하는 때임을 부인할 수 없는 풍성한 가을에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미칠근”이란 말이 있습니다. 쌀 한톨의 무게가 일곱근이란 뜻입니다. 곡식 한톨을 얻기 위해 쏟은 농부들의 노고의 가치가 이토록 무겁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유래 없는 풍작으로 인해서 추수해야할 벼를 갈아엎는가 하면 무, 배추 역시 뽑아서 팔기에는 생산원가를 건지지 못한다고 하며, 제주도에서도 감귤이 적정량보다 너무 수확량이 많아서 감귤을 따서 퇴비로 쓰고, 짐승 먹이로 쓰고 그리고 땅에다 버리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너무 풍장을 이룬 것도 농민들에게는 심각한 타격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테러이후에 아프간 공격과 탄저균으로 이어지는 국제정세의 불안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초래하면서 전 세계가 불황으로 이어지고 아르헨티나는 국가 채무를 감당 못해 국가가 파산 직전에 있는 상황까지 가고 있습니다.
국내 경기는 완전한 바닥으로 인해서 도처에서 한숨과 원망이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위대한 목회자 “헨리 무어 하우스” 목사님께서 교회적으로 어려운 일에 부딪쳐서 낙망했을 때 경험하셨던 일입니다.
어느 날 풀이 죽은 모습으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응접실에서 놀고있던 어린 딸이 반갑게 맞이합니다. “아빠! 이제 들어오세요?” 그리고는 아빠 손에 들려 있는 꾸러미를 보고는 휠체어에서 일어나며, “아빠 그게 뭐예요?”하고 묻습니다. “엄마에게 줄거란다. 엄마! 어디계시니?”, “아빠 엄마는 2층에 계셔요. 아빠 이리 주세요. 제가 들고 갈께요”
이 말에 헨리 목사는 “아니 너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 꾸러미를 들고 2층에 있는 엄마한테 가지고 간다는 거니?” 하며 의아해서 오히려 아빠가 물었습니다. 사실 딸은 소아마비를 심히 앓고 있어서 제대로 걷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딸이 말합니다. “아빠! 이 꾸러미는 내가 들고 아빠가 나를 안고 가면 되잖아요?” 그 순간 헨리 목사의 머리에는 “아! 하나님이 나를 이와 같이 안고 계시는데 왜 내가 그토록 좌절하고 고민하고 근심했던고?”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습니다. 그후로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얻고 감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하였습니다. 결론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시인 이해인 님이 쓴 시에 보면 “급한 순간 버스를 놓쳐 안타까울 땐 다음 버스가 있음을 기뻐한다. 몸이 아파 괴로울 땐 건강의 고마움을 절감하여 기뻐하고, 글이 써지지 않아 답답할 땐 내 능력의 한계성을 깨치게 됨을 기뻐한다. 다른 이에게 내 실수가 드러나 부끄러울 땐 겸손을 실습할 기회임을 기뻐하고, 오해를 받아서 슬플 땐 인내할 수 있는 기회임을 기뻐한다. 이 모든 일들이 신앙 안에서는 더욱 가능한 것임을 기뻐하고 감사한다.”
결국 감사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환경이 좋고 하는 일들이 다 잘 된다고 해서 모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환경을 기도하기 전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믿음이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며, 무엇을 어떻게 감사할 것인가를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눅19:1-10절에 보면 삭개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 당시에 살던 삭개오는 당시의 직업이 세리장입니다. 당시 막강권력을 가진 로마가 온 세계를 지배할 때 유대나라 역시 로마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이 때 삭개오는 정치적 대세를 잘 이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성공했습니다.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고민이 있습니다. 종교적 고민으로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것이요, 또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반민족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힘을 빌어서 권력과 부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삭개오에게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현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어서어서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삭개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문이요, 가난한 자들과 고통 당하는 자들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위로한다는 소문입니다. 세리까지 사랑하는 그분,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여인을 용서하시는 그분, 그분을 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도 뽕나무 위에서 그 밑을 지나시는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십니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리의 집입니다. 죄인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상종도 인사도 않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거지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같은 세리인데 그를 보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밤 너희 집에서 자겠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그의 고민, 그의 깊은 관심, 그의 궁극적 관심을 예수님께서 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마음을 충분히 다 알아 주셨습니다.
메시아가 죄인의 집에 오십니다. 그래서 나의 신분을 바꾸어 놓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감사한 것입니다.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난리가 나서 왕이 피난을 갑니다. 변장을 하고 신하들과 도망하여 어느 시골로 숨어들었습니다. 어느 촌부의 집에 유하기를 청합니다. 누구들인지는 모르지만 점잖은 사람들이 얼마동안 유하겠다 하니 그 집에서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맞아들여 정성껏 잘 대접을 합니다. 이윽고 상황이 바뀌어 왕이 환궁합니다. 궁에 돌아온 왕이 생각해보니 그 촌부가 퍽 고맙습니다. 그 난리를 피하게 해주었으니 말입니다.
왕이 그 촌부를 부릅니다. 궁에 불러들여 가보니 전날에 그저 “이서방”으로 알고 있던 저 사람, 바로 임금입니다. “전날에 나를 도와준 것 참 고맙네, 소원이 있으면 한가지만 말하게”, “땅이나, 집이나, 벼슬이나, … 뭐든지 말하게” 하십니다.
촌부가 대답합니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단지 며칠 후에 제 환갑날에 임금님께 꼭 한번 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왕이 대답합니다. 꼭 참석하겠다고 말입니다. 왕이 촌부의 환갑잔치에 오신다는 소문이 나자, 사방에서 얼마나 많은 선물이 들어오는지 하루아침에 떵떵거리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보세요! 왕이 우리 집에 한번 오신다. 이것이 뭘 의미합니까? 내 신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 의가 달라지는, 사람이 달라지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은,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신 것입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임마누엘입니다. 엄청난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족한 기쁨입니다. 원래 참된 감사는 생각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생각 없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많다보니 오히려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켜서 길을 밝혀준 사람에게는 감사하지만 밝은 햇볕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삽니다. 병들어 고생할 때 그 병을 고쳐준 의사에게는 감사하면서 평소에 건강하게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에게 감사해야합니다. 우리들이 태어난 시절은 참으로 어렵던 시대였습니다. 그 어렵던 시절에 낳아서 정성을 다해 키우시고 가르쳐 주신 부모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세익스피어”는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식을 갖는 것은 뱀의 이빨에 물리는 것보다 더 아픈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만듭니다.
그리고 남편 되시는 분들은 어려운 살림에 지금까지 말없이 자녀들 키우고, 시댁식구들과 갈등 속에서도 가정을 꾸려온 아내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맙소”를 한마디해야합니다. 수고를 알아야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아픔과 서운함이 사라집니다. 행복해집니다.
또한 아내들은 직장에 나가 온갖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수고 해온 남편에게 감사해야합니다. 옛날에 월급봉투를 타다 주던 시절에는 그래도 남편들이 권위가 있고 한 달에 한번은 고맙다는 말도 들었는데 요즈음은 온라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오히려 눈치보면서 용돈 타 쓰는 형편입니다. 남편들의 수고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감사해야합니다.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부모가 아이를 낳았는데 선천성 심장병입니다. 곧 죽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일년만 키울 수 있도록 해주세요. 수술이라도 한번 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주세요”
여러분!
“하나님 이 아이를 일년만 같이 살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를 드리는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보시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믿음 안에서 자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 나를 가르쳐 주신 분들,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들, 나를 위해서 뒤에서 기도해 주신 분들, 이 모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감사한 일을 찾지 마시고 평범한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어려운 가운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낙심하거나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없는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장원급제를 하여 고향에 돌아옵니다. 마을 중간에 들어와서 거기에 있는 포플러나무를 보더니 말에서 뛰어내려 넙죽 절을 합니다. 주변에서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대답하기를 “내가 사실은 어렸을 때 공부 안하고 말썽을 많이 부렸기 때문에 아버님께서 바로 이 나뭇가지를 꺾어서 회초리를 만들어 때려주셨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장원급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있는 어려운 회초리 같은 것이 무엇입니까? 분명 나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생에 어려움이 있을 때 바로 깨어 기도하게 되고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인생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길 “고통이란 수를 놓는 것과 같다” 했습니다. 한 바늘, 한 바늘 정성 들여 수를 놓습니다. 그런데 뒤를 보면 참 지저분합니다. 여러 가지 색깔들이 뒤엉켜 무슨 모양인지 모르지만 완성된 다음에 뒤집으면 그렇게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 역시 어려운 일, 고통스러운 일, 기분 나쁜 일까지 하나 하나 놓고 보면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나중에 뒤집어 보면 그 고통 때문에 우리 인생이 이만큼 아름답고 성숙해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려운 일 생겼을 때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어려움들이 우리를 쓰러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한 단계 더 높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은 허락지 아니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피할 길을 주십니다. 어려움을 만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히려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시고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 감사를 표현할 줄 알아야합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높은 곳이 정말 어디에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다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권불십년이라고 했듯이 권세가 높은 것 같지만 10년도 못 갑니다. 권세가 있을 때는 세상이 다 자기 발아래 있는 듯 하지만 그 권세에서 내려오면 결국은 차디찬 곳, 외로운 곳으로 가는 신세가 됩니다. 있을 때 잘해야 돼요! 큰 소리 할 것도 없습니다. 있는 형편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우리 나라 사람들 참 무뚝뚝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고 하는데 막 뛰어오는 사람이 있어서 열림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서 함께 타고 올라갈 때 절대로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연히 뛰어 왔더니 더워 죽겠네” 이러면서 넘어갑니다. 감정표현에 인색합니다.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감사를 모르는 존재인 듯 싶습니다. 본성이란 참 중요합니다. 오리새끼는 태어나자마자 헤엄을 칩니다. 그런데 본성이 다른 병아리를 물에 집어넣으면 죽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본성적으로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미워하고, 빼앗고, 죽이는 일은 할 줄 알면서 감사하는 일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감사절을 만드신 것도 이때만큼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아라. 다시 한번 기억해 보아라.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본성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배워서 되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목사님 하루는 강도를 만나 지갑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강도를 만나 지갑을 빼앗겼지만 지난 12년 동안은 지갑을 빼앗긴 일이 없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지갑을 빼앗기긴 했지만 생명을 빼앗기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강도들 만난 자가 되었지만 내가 강도가 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감정으로 하면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 감사가 생활화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하는 말, 감사하는 행동을 배워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범사에 감사합시다. 먼저 내게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어떤 분들은 어두운 자신의 과거에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는 죽을 죄인이다. 나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 합니다. 죽은 사람 같으면 하나님께서 벌써 죽이셨습니다. 왜 살려 두셨겠습니까?
쓸모 없는데 왜 세상에 두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 용서하신 것을 내가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도전이요. 마귀가 이끄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깨닫는가 매우 중요한데, 생은 무상하다. 하는 것을 알면 불교인입니다. 인간의 삶의 도리를 알면 유교인입니다. 은혜를 알면 기독교인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시요, 신앙인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입에 감사가 없고, 표현할 줄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마음껏 오늘을 감사하시면 하나님께서 찬송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찬양의 능력
엡 5:19-21 / 최병남 목사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을 꼽으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예로 들기도 하고 또 영적인 호흡과 같은 기도생활, 그리스도 본질인 전도생활 그리고 봉사생활을 예로 드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찬송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이사야 43장 21절에서도 보니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도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는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하는 것을 등한히 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창조의 목적과 완전히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은혜가 충만하면 자동적으로 찬송이 입에서 흘러나오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게 되면 자연히 주님을 향한 찬양이 계속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찬송할 때 어떤 능력이 나타나는가?
찬송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 찬송이 이렇게 중요합니까? 찬송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노래들은 아무리 많이 불러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찬송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찬송이 우리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져야 되는 이유는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1. 영적 생활의 원동력이다.
또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찬송은 영적 생활의 원동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신앙생활을 원만하게 하고 은혜 충만하여 주님을 사랑하면서,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가려면 바로 찬송을 통해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송을 부를 때에 돌처럼 굳어지고 강팍한 영혼들이 깨어지고 부서져서 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 컬컬하고 답답한 심령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를 통하여 시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말씀을 읽고, 말씀에 은혜 받을 때도 있습니다.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입고 새롭게 일어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쉽게 은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바로 찬송입니다. 찬송은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노래 부르는 것은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편합니다. 별로 부담스럽지도 않습니다. 찬송을 부르다가 큰 은혜를 받게 되고, 찬송을 부르다가 뜨거운 감격을 체험하게 되고, 찬송을 부르다가 성령충만함을 받게 되고, 찬송을 부르다가 주님을 만나게 되고, 찬송을 부르다가 문제해결의 열쇠를 발견하게 됩니다.
2.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다.
여러분! 찬송은 또한 어떠한 능력이 있는가 하면 문제해결의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찬송을 통해서 개인적인 문제, 또는 국가나 민족의 문제를 해결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과 같은 사람 얼마나 큰 시련을 겪었습니까? 그러나 욥이 그 어려운 시험과 난관을 이기고 승리하고 갑절의 복과 은혜를 받았던 것을 욥기 1:21에서는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찬송하게 될 때에 환난을 뛰어넘을 수가 있었고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찬송은 환난을 정복하는 능력입니다.
찬송은 놀라운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에 악신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불러왔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왕 앞에서 수금을 타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탔더니만 그만 악신이 물러갔습니다.(삼상16:23) 우리교회 파이프 오르간이나, 관현악단이나, 피아노나 이 모든 악기들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악기를 연주할 때나 악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려드릴 때에 그것이 능력이 되고,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만큼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본래 아시아지방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을 받아 자기가 가려고 했던 아시아지역으로 가지 못하고 마게도니아 빌립보지역으로 복음 전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귀신들린 여자아이, 귀신들려서 점치는 여자아이의 귀신을 내쫓아 주었더니, 세상 인심이 너무 악합니다. 상을 주고 표창을 해주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귀신들린 여자아이가 귀신이 쫓겨 나가니까 점을 칠 수가 없게 되자 주인의 수입의 근원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주인이 화가 나서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 버립니다. 그랬더니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가 실컷 때리고 감옥 속에 가두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같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복음을 전하러 오지 않았습니까? 아니, 내가 원하는대로 가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왔으면 복음 전하는 길이 순탄하고 잘 되어야 될텐데, 어째서 전도의 길은 열리지 않고 매만 실컷 맞고 감옥에 갇혀야 합니까?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좌절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원망하지 아니하고 밤새도록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발에 묶였던 착고가 풀어진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간수가 와서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받으리라."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초청해서 융숭하게 대접을 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양할만한 현실입니까? 아마 대부분 아니라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찬양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찬양하게 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영광 돌릴 수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면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렵습니까? 현실을 헤쳐나간다고 하는 것이 내 지식으로, 내 경험으로,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큰 난관 앞에 어쩔 수 없이 좌절하고 힘들어서 남모르게 좌절하고 낙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찬양 듣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일이 잘 되고 기뻐할 때 찬양하기보다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찬양하면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에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인격이 변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능력이 있다.
여러분! 또한 찬양은 어떠한 능력이 있습니까? 찬양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닮아가 우리의 인격을 변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찬송을 많이 부르면 부를수록 그는 점점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낙엽따라 가버린 사람' 누가 불렀습니까? 네, 최중락입니다. 그런데 최중락이 그 노래를 부르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 낙엽따라 가버리고 말았잖습니까? 또 '돌아가는 삼각지' 누가 불렀습니까? 배호가 불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배호는 젊은 나이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부르는 이 노래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면 부를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만 세상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과 가까이 가게 되고 아울러 하나님을 떠나게 된단 말입니다.
두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주 의좋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게 되었는데, 이상한 것은 저녁에 만나기만 하면 이별가를 불렀답니다. 그런데 한 일 년쯤 살면서 서로 싸우지도 않았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이별을 하게 되었답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되는 것은, 시간만 되면 찬송을 합시다.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전력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바로 우리가 찬양하게 될 때 내 인격이 변화가 되어서 점점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못되고 사나운 인격이 부드러워집니다. 욕심으로 가득 찬 인격이 주님을 닮아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아껴주는 이타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인격이 이제는 용서와 관용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찬송을 부르면 부를수록 주님을 점점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찬송이 능력이 있는가?
여러분! 왜 찬양에는 이같은 능력이 있습니까? 찬양을 부를 때에는 여호와께서 그곳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시22:3) 여호와께서 찾아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찬송이 생활화 되어야 하고 체질화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찬송을 불러야하겠다고 의식을 하고 부른느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저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에서 기쁨이 터지고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바뀌어집니까? 불신앙의 사람이 신앙의 사람으로 바꾸어지고 찬송 부를 때에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소극적인 사람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으로 바뀌어집니다. 찬송 부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충만하게 되어집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사람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믿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찬송을 부를까?
정성을 다해서 찬양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드리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루이스 황제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때에 아주 극심한 가뭄이 들어서 온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루이스 황제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사복 차림으로 동산을 거니는데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영국 황제 날 부러워하지 않으나, 나 또한 영국 황제 부럽지 않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루이스 황제는 그 찬송소리에 이끌려 소리나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온 몸에 밀가루를 뒤집어 쓴 할아버지가 쿵덕쿵덕 방아를 찧으면서 흥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할아버지. 무엇이 그리도 즐거워서 찬송을 부르십니까?"
"주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도 기뻐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영국 황제는 명함을 하나 주면서 "내 생일에 꼭 오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이 왕이 돌아간 다음에 할아버지는 그만 겁에 질렸습니다. '영국 황제 루이스'라고 명함에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 황제 앞에서 "영국 황제 날 부러워하지 않으나 나 또한 영국 황제 부럽지 않네"라고 노래를 불렀으니 황제를 모독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안 갈 수는 없잖습니까? 드디어 생일날이 되어서 갔습니다. 그곳에는 만조백관들이 다 앉아 있습니다. 루이스 황제가 보더니 "할아버지, 이리로 들어오세요." 하며 옆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그 방앗간에서 부르던 노래를 불러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절하겠습니까? "영국 황제 날 부러워하지 않아도 나 또한 영국 황제 부럽지 않네. 주님의 은혜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이 찬송을 부르는 동안 그곳에 있던 왕과 많은 대신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셔서 다시는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내서 위기를 극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찬송은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민족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도 살릴 수 있습니다. 찬송은 내 문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도 해결해 줄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찬송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 일생 다 가도록 하나님을 찬송하며 이 찬송을 통하여 승리의 삶, 축복의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순종으로 세워진다
엡 5:20-25 / 이규현 목사
배를 타고 항해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무리 큰 배라도 파도에 요동을 치는데 그때 가장 위험한 것은 엔진이 꺼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엔진이 꺼지면 배는 파도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엔진이 살아있으면 험한 파도가 내려쳐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 삶에도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하다면 아무리 큰 풍랑이 밀려와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인생에 가장 큰 엔진 역할을 하는 것이 가정입니다. 우리 인생에 얼마나 험한 항로가 많지만, 그때마다 큰 파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가정에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엔진 역할을 하는 핵심은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자녀 교육문제도 풀립니다. 부부관계가 건강하면 사회 전체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기본적인 단위는 부부의 관계이고 성경에서도 부부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시작하고 가정 안에서도 부부관계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도 왕들이 전쟁을 일으킬 때를 보면 부부관계가 안 좋을 때가 많습니다. 목사님들도 부부관계가 안 좋으면 강단의 메시지가 날카롭고 정죄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한국의 가정들은 대개 전통적인 가정들입니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가정, 남성의 지배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유교문화까지 겹쳐져서 한국사회가 많이 변하긴 했어도 남성 지배적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팔레스타인의 문화는 남성중심이었고,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여자들은 숫자에 넣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아침마다 “하나님 저는 이방인이나, 종이나, 여자가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여자들을 종처럼 취급했고 여성들은 남성에 지배를 당하며 종속적인 존재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도리어 남성들이 위기감을 가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의 기회가 많아져서 남성들보다 더 높은 지위와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해마다 사법시험 합격자 중에 여성들의 수가 늘어가고, 모든 영역에 여성들이 약진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 가정 안에서 남성의 권위는 실종되고, 아버지들이 설 곳이 없습니다. 어버이날에도 아버지들은 종이로 된 모조 카네이션을 달고 어머니들은 생화를 답니다.
전통적 가정에서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남편이 혼자 벌어 월급봉투를 내밀 때 온 가정은 그의 권위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시대의 뚜렷한 현상 중의 하나는 권위의 부정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여성들의 반란이 시작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남성의 존재를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부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사할 때도 남자들은 이전에는 냉장고를 붙들고 있어야 했는데 이제는 강아지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개그도 오래되었습니다. 사회의 단면을 풍자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간에는 아내들끼리 모이면 가장 좋은 남편감으로 원양어선의 선장이 최고라고 합니다. 이유는 한번 나가면 반년 이상 안 돌아오고,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오고, 가끔씩 집에 오니까 반가워서 좋다는 것입니다. 늘 같이 있는 남편은 불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셔터맨 남편들이 있습니다. 아내가 하는 일에 남편은 아침에 가게 셔터를 열어주고 저녁에 가서 문을 닫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움츠러든 남성들입니다. 남자는 왜소해지고 실용적인 필요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여성들은 홀로 자립할 수 있는 문화 속에서 남편에게 억압받으면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여성 편에서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습니다. 양가 집안에도 문제가 생겼을 때 장모의 파워가 커졌습니다.
우리는 문화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문화는 공기와 같아서 늘 들이키며 문화 안에 살고 있지만,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오염된 공기를 마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안에는 좋지 않은 것들이 많아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익숙해지고 따라가게 됩니다. 전통적인 남성중심의 가정 모델도, 시대와 세상의 문화적인 흐름도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가정의 기준을 붙잡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가정관을 가지고 살게 되고, 결국에는 붕괴되고 우리의 존재를 잊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가정의 모델, 성경이 말하는 부부의 도리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그 진리를 붙잡고 있는 가정만 견고하게 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가정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에게는 남편에게 복종을, 남편들에게는 아내들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은 남성들이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바울 사도가 혹시 남성우월자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가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은 힘의 충돌입니다. 한쪽은 다스리고 통제하려고 하고, 한쪽은 일방적인 태도에 저항합니다. 남편의 지배 심리와 아내의 저항 심리는 인류 최초로부터 오래된 싸움입니다. 남편들은 내세울만한 뚜렷한 사회적 위치와 경제권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 남편 혹은 아버지의 권위를 붙들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도 없을 때 이런 구조는 큰 저항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고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가정 안에서 위계질서 혹은 누가 더 실세인가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부부 중에 어느 한 쪽을 편들어서 힘을 실어주려고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도 복종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인류 최초에 인간의 타락으로 온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여자에게 내려진 저주는 남자를 그리워하는 것,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 남자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에게 있던 모든 저주는 끝이 났습니다. 죄로 인해 주어졌던 모든 저주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구원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모든 관계 안에서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스림을 받는 것이 저주로 인해 주어진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쪽이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라면 열등과 우등한 것을 말하게 되는데 이것은 성경적인 것과 너무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더이상 아내가 남편의 억압과 다스림 아래 살 이유가 없어졌고 남편도 아내와 주종관계로 군림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누가 우위에 있고 누군가는 열등한 존재로 통제받아야 하는 관계는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남편은 아내의 머리됨과 복종을 강조할까요? 이 복종의 문제를 우리가 잘 풀어나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려면 32절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 부부관계의 비밀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이 되는 원리입니다. 부부관계를 풀려면 그리스도가 교회를 어떻게 다스리는가를 보면 아내의 머리된 남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내들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어떻게 복종했는가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다고 해서 교회 위에 군림하거나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폭군이나 군주처럼 제압하고 재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당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섬기셨고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하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 복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역을 할 때에도 기꺼이 그 분 앞에 굴복하고 순종하여 그분의 종의 되어야 합니다. 억울해하거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22절의 말씀은 어떤 면에서 아내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이전에 남편들에게 더 크고 무거운 의미가 됩니다. 가정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 때 그 모습 앞에 감동된 아내가 기꺼이 남편 앞에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은 서로 머리가 되려고 하는 것 때문입니다. 아내도 남편도 서로 머리가 되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이 주는 메시지는 남편의 머리도, 아내의 머리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서로 안에 새로운 관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정 안에 저주를 풀고 축복을 가져올 수 있는 키워드가 복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복종이 현대 사회에서 왜곡되었습니다. 복종은 상대에게 강요해서 무릎 꿇게 하고, 무릎 꿇은 사람은 굴종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도 이 복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복종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히 아내들에게 복종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시는 21절의 말씀에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21절 이후에 모든 인간관계를 설명하는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종과 주인의 이 모든 관계를 여는 중요한 구절이 21절 말씀입니다. “피차 복종하라”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관계를 맺을 때 세상 사람들과 큰 차이를 여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복종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 복종은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가 아닙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하신 것은 온전한 복종입니다. 어떤 면에서 남편은 더 큰 복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내보다 더 강력한 복종의 원리가 남편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녀들에게만 순종을 말하지 않고, 부모 역시 복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예속물도 아니고, 함부로 다루어서도 안 됩니다. 부모가 말씀 앞에 하나님의 권위 앞에 온전히 복종하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잘 섬겨야 하고, 어떤 면에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이가 실수를 해도 너무 억압적이거나 폭력적이거나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태도는 좋지 않은 것입니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섬김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은 가정의 실제적 머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특정인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 안에서 최고의 교육은 부모가 순종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순종의 삶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차 복종한다는 것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주권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복종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복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불순종의 영, 저항의 영, 누구에게도 지배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자기 고집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복종하고 섬기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18절의 말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이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21절의 말씀을 가능하게 하는 키가 되는 구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의 저주를 끊어버릴 힘, 불순종의 영으로부터 모든 관계가 깨어진 것을 하나로 회복시켜주는 파워가 바로 순종이고, 이 순종의 힘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은혜가 임해야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복종하게 됩니다. 다스리려고 하지 않고 기꺼이 섬기려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곳은 모두 피차 복종을 요구하기만 합니다. 상대에게 요구하는 마음이 바로 지배하는 심리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끌고 가려는 폭력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요구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어느 집에 갔을 때 제자들이 모두 발을 내어놓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종이 손님의 발을 씻어주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이 파격입니다. 모두 섬김을 받으려고 요구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스스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종이 되심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권위가 땅으로 떨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자이시고 만유의 주관자이신데 자기의 영광과 권세를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죄인이 되셔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종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상대를 몰아가고 지배적이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이 출근할 때 따듯한 아침을 먹고 출근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침에 기운을 못 차립니다. 남편은 남편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지만, 쌀을 씻고 아내가 깨지 않도록 식사 준비를 해서 먹고, 아내의 아침상까지 차려놓고 출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아내를 깨워서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식사를 준비하고 간다면 아내가 그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까요? 십자가의 사건은 한 번의 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대를 하지 말고 해야 합니다.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서로의 필요에 민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필요가 채워지면 만족이 될까요? 나의 행복을 위해 상대를 나 중심으로 끌어당기면 행복은 멀리 도망갑니다. 상대의 행복을 위하여 내 권리를 포기하고 기꺼이 순종하고 헌신하고 희생한다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우리는 자발적인 순종을 합니다. 내 생명을 다해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고 싶은 자발적인 이 순종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이렇게 복종하고 순종하시는 모습에 감동하여 우리가 내 생애를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상대에게 어떤 것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주어지면 감사한 것이고 안 주어져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하며 종의 모습을 실천해 가는 것입니다. 가정도 선교지입니다. 말씀을 먼저 깨달은 사람이 깨달은 만큼 순종의 삶을 살 때, 그 가정에 변화가 옵니다. 깨달은 자답게 말씀에 순종의 살을 살면 그 가정에 회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이라는 단어는 모두가 좋아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는 종의 개념을 바꾸셨습니다. 이사야서에는 고난받는 종이 나옵니다. 그리스도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스스로 섬기는 자가 되셔서 말씀 앞에 철저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에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고 우리가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자기의 권세를 주장하기만 한다면 아무도 그 권위 앞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머리되심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존중하고 따른다는 것이 남편이 돈을 잘 벌거나 사회적 능력이 있거나 혹은 훌륭한 인격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 안에서 허락한 남편이기 때문에 주님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주님이 허락하신 남편의 머리됨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상태가 아니라 남편에게 권위를 허락하신 주님 때문에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다 보면 남편 안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남편과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순종이어야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지배와 복종의 문제로 갈등을 겪는 전통적 가정과 현대적 변화의 혼란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 길은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교훈입니다. 오직 성경 안에서 주신 기막힌 원리입니다. 이 복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보여주신 기막힌 모델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 안에서 복종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끊을 수 없는 관계처럼 우리의 부부관계, 모든 인간관계 안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다
에베소서 5:20-21 / 옥한음 목사
오늘은 일년에 한번씩 지키는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감사 주일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지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매우 강한 어조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여러분이나 저나 이 말씀을 읽으면 제일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범사에'라는 말과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감사하라고 하는 말에 '범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으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부담을 느낍니다. 감사하라는 말 앞에 '항상'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면 기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시종일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변함없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강도 높은 의미를 가진 말씀을 읽으면서 가책 받지 아니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 가운데는 목사인 저 자신이 가장 많은 가책을 받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항상 감사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또 감사도 많이 하지만 이 본문 말씀이 요구하는 선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 자신이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담을 느낍니다.
저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잘못하면 이런 말씀도 그저 쉽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남의 말 할 때는 쉬운 겁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해도 가르칠 때는 쉬운 겁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1988년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한창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중요한 이슈가 사형 폐지론이었다고 합니다.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라는 후보는 사형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습니다. 어느날 CNN의 토크쇼에 그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쇼에는 유명한 버나드 쇼라는 앵커가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이 버나드 쇼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그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 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이 사람은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고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그들이 받은 인상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자기와 상관이 없으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진짜 자기 일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사람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토크쇼 때문에 그가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하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하고 얼마든지 큰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아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이상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적당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말씀을 넘겨도 괜찮을까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 드리자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놓고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꼭 깨달아야 됩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지, 왜 항상 감사하라고 하시는지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름으로'라는 말을 '때문에'로 바꾸어도 전혀 잘못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한분 만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변명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한번 여러분 마음에 되새겨 보십시오. 그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저무지하고 잔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 만에 그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례 받으시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공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 말은 "내가 너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노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기가 막힌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에 모시고 삽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
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예수님 한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이 나에게 없다 할 지라도 나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설혹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할 지라도 예수님 한 분만 소유하고 그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런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이 말씀이 나와 별로 관계가 없다고 밀치면 안됩니다. 만약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범사에 항상 감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옥 목사가
가슴에 가책을 받고 여러분에게 고백하듯이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이것은 정상
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고쳐야 됩니다.
우리나라에 영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송명희 여사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
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나
'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를 못 가진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
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감사합니까?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
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
에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수준에 저 자신이 도달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
습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런 수준에까지 올라가기를 원합
니다.
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건강한 사람 중에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자기 뜻대로 다 소원성취 하는 사람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저는
수만 명을 상대하고 삽니다.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하는 사람을 한번도 본 일이 없습니
다.
진짜 감사는 누구에게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항
상 감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명령하시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뒤따
라 보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잔소리 하지 말고 범사
에 감사해. 내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줄게."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라." "어떻게 항상 감사합니까?" "할 수 있어. 내가 네게 능력을 준다." 바로 그것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명을 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결론을 하나 얻을 수 있습니
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 만큼 믿습니다. 누구를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앞길이 막막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옵니까? "하나님, 제 앞길 캄캄하지만 주님
이 제 앞에 있는 구름을 걷어내고 어둠을 쫓아 주실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
나님, 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시니 이런 고난을 주시는 줄로 압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의 믿음은 알아줘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 만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어느 정도 믿고 계십니까? 감사하는 것 만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것 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100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무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눈만 뜨면 "하나님 감사합니
다."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나올 정도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심령을 가지면 그 사람은 행
복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복을 누가 빼앗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누구하고 다릅니까? 세상 사람하고 다릅니다. 세상 사람
들은 입만 열면 불평이 심합니다. 불평은 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감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
러나 우리 입에서 계속 감사가 나옴으로써 내가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
다. 감사가 없습니까? 그러면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 만큼 강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천성적인 장애를 안고 나온 자녀를 가
진 부모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자매의 말을 들으면서 저 자신이 자주 도
전을 받습니다.
"목사님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실 말이 아닐
것입니다. '복은 무슨 복인가?' 우리는 당장 그렇게 느낍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 애 때
문에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지 모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 아빠가 예수 믿고 돌아왔습니
다. 아마 애가 저러지 않았으면 아빠는 예수 안 믿었을 것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이
렇게 잘 살아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 애 때문에 세상에서 천대 받고 인정
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애 때문에 하
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복이 보통 많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람 만큼 강한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누가 이 사람을 꺾을 수 있습니
까? 아무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좋아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 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
리는 세상 사람 앞에 매력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집니
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오늘부터 돌아가셔서 의도적으로 감사하십시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다. 예수
님 때문에 나는 무조건 감사할 수 있어.' 하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불평하던 것을 감사하
면, 지금까지 남을 원망하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만족하지 못하던 것
을 감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날보고 범사에 항상 감사하
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나는 감사해야 돼.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돼.' 하면서 어떤 형편에서
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것들을 찾아 하나님 앞에 감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좋아집니다.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강해집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
에게 매력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런 멋있는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
고 계십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
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아멘. ***
감사는 복종의 삶을 사는 것
엡 5:20-21 / 오창우 목사
어느 의과대학교의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의대생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으시대는 두 명의 의대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학생이 병원의 복도를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매우 고통스런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고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저 환자의 병은 분명히 류마티스 관절염일꺼다" 그러자 다른 학생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습니다. "천만에, 저 환자의 병은 허리를 만지며 걷는 것으로 보아서 허리디스크가 분명하다." 두 의과 대학생은 병원의 복도를 힘들게 걸어오는 한 남자를 보고 그 사람의 병명이 무엇일까를 놓고 서로 자신의 판단이 맞을 것이라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드디어 그 남자분이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어하시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두 의과 대학생은 서로 먼저 혹시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류마티스 관절염이시지요? 아니, 허리 디스크시지요? 서로 자기의 판단이 맞지 않냐? 고 묻자! 이 환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렇게 반문을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힘겹게 말입니다. "저..화..화장실이 급한데... 화장실이 어딥니까?"이 분은 화장실이 급해서 화장실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가르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대생하면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환자들의 병에 대해서 연구하고 고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틀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험이나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날 이렇게 의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사람의 병도 고칠 수 있는 것보다 고칠 수 없는 병이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을 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신중해야 되고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의 틀에, 경험에, 지식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아이의 행동을 보고 웃듯이 하나님이 나를 보고 웃으실 때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감사의 부분에 있어서 우리들이 착각이나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여러분 감사가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우리가 맥추감사절을 보냈는데 국어사전에 보면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설명이 다 되는 겁니까?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감사와 일반인들의 감사가 다른 것이 있습니까? 만약에 다르다면 그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그 감사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의 표현 역시 단순한 물질이 아닌 삶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읽은 본문 말씀 중에 20절을 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범사"라는 말은 "모든 일에"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우리는 모든 일에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세워야 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항상"이라는 말은 언제든지, 밤이나 낮이나 어떤 시간에도 가리지 말고 무엇을 하라구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고 하셨는데.... 하나님께 감사를 하는데....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각종 수식어가 붙지만... 그보다도 우리가 항상 불러야 될 하나님의 이름은 "아버지" 그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의 감사입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의 감사입니다.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 될 만한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은 첫째는 죽음에서 생명을 얻었다. 두 번째는 생명만이 아니라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신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지요. 키워주시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주님도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상에서 승리하는 인생을 살도록 그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높은 절벽위에 둥지를 틀고 사는 독수리 가족이 있었습니다. 아빠 독수리가 둥지에서 놀고 있는 아기독수리를 불렀습니다. 둥지 밖으로 나오게 하고 절벽 끝으로 더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아기 독수리를 절벽 밑으로 떨어트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기 독수리가 얼마나 놀랬을까요? 아빠 독수리가 아기독수리를 절벽 밑으로 밀어 내리는 순간 그것은 고난이었습니다. 어쩌면 불안이고 절망이었을지 모릅니다. 아기 독수리는 죽었다고 생각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기독수리가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필사적으로 살기위해서 처음으로 날개 짓을 하는 순간 이 아기독수리는 자기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니 내가 날 수 있다니!’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날개를 펄럭였지만 그때까지 자기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기 독수리는 그 순간부터.... 언제부터요? 아빠독수리가 언덕위에서 밑으로 밀치는 순간부터... 고난의 시간부터... 그에게는 무한한 하늘의 공간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과 희망이 있는 비전의 공간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아빠 독수리가 어느 날 그 사랑하는 아기 독수리를 언덕에서 밀쳤을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새들의 왕을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계획 된 훈련입니다. 그리고 이 아기 독수리가 훈련 중에 아주 땅에 떨어지려고 하면 지체 없이 아빠독수리는 내려와 그 날개를 펴고 아기 독수리를 안았을 것 입니다. 왜요? 죽을 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해서 새 중의 왕인 독수리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을 하기 까지는 이러한 고난이라고 하는 훈련을 통해서 새들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땅 종 되었던 곳에서 광야생활을 하다가 시내산 밑에 왔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들을 업어서 여기까지 왔다. "
만물의 왕인 사람..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이 된 그리스도인도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 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다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승리자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러한 고난도 주시고 어려움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범사에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라고 하는 이 말씀 속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네델란드의 유명한 부흥사인 코리 텐 붐 여사의 간증입니다. 독일 나치에 의해 나라가 정복되자 유태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온 가족이 포로수용소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금되어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체검사를 받는 도중 한 그리스도인 간호원이 코리에게 “가장 갖고 싶은 것을 말씀하세요.”라고 속삭이더라는 것입니다, 코리는 어김없이 성경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고 그 간호원을 통해 작은 성경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그 때 코리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하면서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코리는 들키지 않게 갖은 애를 써가며 성경 말씀을 삼키듯이 읽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도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코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18말씀을 읽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그 말씀은 코리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방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겨진 감방으로 오자 코리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비참한 곳에 있었지만 이곳은 더욱 비참했는데 그 이유는 벼룩이 너무 들끓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계속 마음을 두드립니다. 코리는 도저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니 벳시는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리는 마지못해 언니의 기도에 ‘아멘!’하며 순종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코리는 벼룩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독일 군인과 간수들이 이렇게 들끓는 벼룩 들이 혹시라도 자기들에게 옮을까봐 코리의 감방 주위에는 절대로 얼씬도 하지 않아서 마음 놓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결국 그 귀찮은 벼룩 덕분에 코리와 벳시 자매는 매일 성경 말씀을 그 감방 안에 있는 동료들에게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하루종일 강제 중노동에 시달리고 굶주린 여인들과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아픈 곳을 만져주고 양보하며 기도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게 되자 그 감옥은 천국의 교제권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귀찮은 벼룩 때문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좋은 것으로만 좋게 만드시지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으로도 좋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 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 삶을 책임져요? 그 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중곡동 어린이 대공원에 가면 〔코끼리가 다녀간 식당〕이 있습니다. 어린이 고원에 서커스하려고 온 코끼리가 탈출을 해서 한 식당을 부순 것이지요. 신문과 방송에 소개가 되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가 됐어요. 이로 인해 식당은 큰 피해를 본 것은 물론이지요. 하지만 이 식단 주인은 피해 보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식당 수리를 하면서 식당의 이름을 다시 지었습니다. 「코끼리가 다녀간 집!」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다 보면 '코끼리가 탈출해서 부순 식당이 있다는데' 하다가 이 집이구나! 하면서 들어온다고 해요! 그리고 이 집에 오면 메뉴가 하나 생겼다고 하네요. 코끼리 정식이 있다는 거예요! 이 불경기에 이 식당만은 오히려 장사가 잘 된답니다. 화가 복이 된거지요.「고난은 변장한 축복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다 고통이 있습니다. 힘도 들 때가 있어요. 가룟유다와 같이 배신자도 있어요.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사용하심으로 복이 되게 하시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의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아버지께,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범사에 우리 주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을 따라가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을 지켜주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윌리엄 로우는 그의 저서 <엄숙한 부르심>에서 말합니다. ‘세계 최대의 성자는 기도를 많이 했다든가, 금식을 많이 했다든가, 혹은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든가 한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느냐, 누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간 사람이냐 할 때에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어떤 일에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인데 하나님을 항상 아버지로 부르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믿음의 성도가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피차에 복종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21절을 같이 보게 되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라고 했습니다. 감사를 하는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감사 그러면 감사라는 것은 그냥 인사를 하면 된다고 하지만 이 초대교회에는 무슨 돈이 어디 있습니까? 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삶으로 보여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회심시킨 것은 리빙스턴의 설교가 아닌 삶이었습니다.”
1871년 초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신문기자 헨리 스텐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선교사인 리빙스턴을 만난 후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리빙스턴선교사가 아프리카밀림의 개척자요 탐험가로 수년간 본국과의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본국에서는 그의 소식이 궁금합니다. 헨리 스탠리는 특종을 할 목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허가되지 않은 밀림으로 리빙스턴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스텐리는 수소문 끝에 찾고 찾아 리빙스턴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리빙스턴으로부터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밀림에서 10달 동안 같이 시간을 보내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은 단순한 탐험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간 선교사니까 당시 만해도 피부가 검은 분들은 노예이상의 취급을 하지 않는 때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에게 에수 생명을 전하는 리빙스턴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무신론자 스탠리기자는 그 때 일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 당시 나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에 버금가는 편견을 갖고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리빙스턴 선교사와 10달을 지내면서 상당 기간 나 자신을 향한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이 고독한 노인을 만나게 된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분은 여기에 와서 저 고생을 하고 계신가? 정신이 나간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인가? 무엇이 그를 저렇게 감동시키고 있는가?’ 우리가 서로 만난 지 몇 달이 지났을 무렵 나는 그 노인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생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점차로 타인에 대한 그의 동정의 마음이 나에게도 조금씩 전이되었고, 내 안에도 같은 동정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세와 온유함, 열정과 성실, 그리고 그가 자기 일을 얼마나 열심히 감당하는지 지켜보던 나는 결국 그 때문에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스텐리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회심시킨 것은 리빙스턴의 설교가 아닌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피차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인간관계의 대 전제가 성령 충만을 받아서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피차 존경하여 복종할 때 감사를 통한 바른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는 세 가지의 관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가 제시되고 있는데...시대적으로 봤을 때, 지금봐도 그렇지만 신분의 차이가 철저하게 나뉘어 있는 시대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부관계는 그렇다고 해도 부모와 자식간의 자식이 부모를 복종할 수 있어도, 부모가 자식에게 복종할 수 있습니까? 주인과 종과의 관계도 종이 주인에게 복종은 할 수 있지만 주인이 종에게 복종할 수 있어요?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종에게도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데 감사가 그 안에 있으면 복종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 자유와 자신의 권리를 자기의 권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포기하고 더 나아가 그 권리를 감사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복종이라는 것으로 감사를 표시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복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종들도 주인에게 복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마음은 경외하는 마음으로...경외하는 것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피차 복종을 하는 마음을 가지고 관계를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높여주라는 것입니다. 복종은 그대로 따라서 쫒는 것입니다. 엎드리는 것입니다.
김진사와 이진사는 한 마을에서 성장하여 같은 시기에 장가를 들었습니다. 전답도 살림 형편도 거의 같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윗말 김진사 집은 부유해져 가는데 아랫말 이진사 집은 자꾸 살림이 줄어 가난해져 갔습니다. "자네에게 무슨 비결이 있는가? 해마다 전답이 늘고 살림형편이 기름져 가니 무슨 방법이 있는지 가르쳐 주게" "허허, 뭐 나라고 별다를 게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어! 친구지간에 그러면 못쓰지! 말을 해 주게" 김진사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가 말일쎄, 이 길로 집에 돌아가는 대로 아들에게 소를 끌고 지붕 위로 올라가 보라고 해 보게, 그리고 며느리에게는 소금 한 가마니를 이고 웅덩이에 들어가라고 일러 보게" 이진사는 어이가 없었으나 자기가 졸라댄 일이었으므로 집에 가자마자 김진사가 가르쳐 준대로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 내외는 길길이 뛰며 "아니 아버지가 나이를 잡숫더니 망령이 드셨습니다" 소란을 떨었습니다. 그 길로 이진사는 화가 나서 김진사 집으로 가서 자초지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김진사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를 불렀습니다. "얘들아 이제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아범아 널랑은 소를 끌고 지붕위로 올라가고 어멈아 너는 소금 한 가마를 이고 웅덩이로 들어가거라" 그렇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들과 며느리는 지체하지 않고, 각각 소를 끌고 나왔고 소금 가마니를 이고 웅덩이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알겠는가? 비록 가당찮은 명령일지라도 어른의 말을 믿고 복종할 뿐만 아니라 가족이 서로 화합해서 힘을 합치는데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아버지는 아들 내외가 지붕으로 올라가고 웅덩이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불러 들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부부의 관계나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나, 직장에서 상사와 직원과의 관계도, 주인과 종과의 관계도 교회에서 주의 종이나 교인과의 관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누구와 관계를 갖던 간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경외하고 피차 복종의 자세를 갖게 되면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에게 복 주실 주로 믿습니다.
주님도 복종을 배워 하나님 앞에 영광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기적 자유와 자신의 권리를 자기의 권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포기하고 더 나아가서 그 권리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위해 복종이라는 것으로 감사를 표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관계의 대 전제가 성령 충만을 받아서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피차 존경하여 복종할 때 감사를 통한 바른 인간관계가 형성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을 만나든지 그 분이 예수그리스도시라는 생각을 갖고 경외하고 복종할 수 있는 마음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된 우리에게 아버지의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에 보면 오래 전부터 유명하고 세계적인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나라에도 보면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손자병법이나 군주론 또는 한비자 같은 책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보면 거의 남을 죽이고 내가 살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내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렇게 된다면 과연 이기는 것이냐?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조가 망한 것도 사색당파 때문이에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도 보면 또 싸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계산을 잘못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교육을 받은 정치인들이 싸울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큰 손해인 것을 모르고 계속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도 싸우면 이긴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행동은 세상 사람들처럼 싸우면 이길 것처럼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들도 똑 같해! 아니 믿는 것들이 더해!.. 하면서 좀처럼 인정을 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를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싸우면 아주 큰 손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경은 싸우는 자가 이긴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인들끼리도 왜 그리 싸우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에 경쟁한다지만 믿는 사람들은 왜 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셉이나 다니엘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사람들과는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자신의 이익을 따라 움직이지만 믿음의 선진들 특히 위대한 사람일수록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본으로 삼고 살아야 할 우리들이 그렇게 싸움 싸우듯 살아서야 세상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녀 된 자로써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을 경외함으로써 피차에 복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우리들이 취해야 할 모습입니다.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남편한테 아내한테 지세요. 자식들한테 상처주시지 마시고 지세요. 부모들 더 잘 섬기시고 윗 상사나 아래 직원들에게 더 잘해주세요. 교회에서도 복종 잘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다 많이 받고 훌륭한 하나님의 좋은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차 복종하라
엡 5:20-33 / 임덕순 목사
5월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가정의 달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어린이 주일에는 다윗 얘기를 하면서 강하게 키우자고 했고, 어버이주일에는 질서의 가치를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이 모든 것의 기본인 인간관계의 기본원리에 대하여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5장 21절부터 6장 9절까지에 보면 인간관계의 핵심인 부부관계, 부자관계, 주종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해서 책임지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절대 복종해라.”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헌신하여 책임져 기르고, 자식은 부모에게 철저히 순종해라.” “사장은 직원을 책임지고, 직원은 주님을 섬기듯 단 마음으로 사장을 섬겨라.”
이 말씀의 대 전제는 에베소 5장 21절에 있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나 남편은 자식이나 아내를 헌신적 사랑으로 책임져 주는 것이 섬기는 방법이고, 자식이나 아내는 자기를 책임져 주는 이에게 순종하는 것이 섬기는 방법이며, 이렇게 상대를 섬기는 것을 성경은 피차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인간관계의 기본은 피차 복종, 즉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책임진 사람은 상대방을 보호하고 책임져주는 것이고, 상대방은 자기를 책임진 사람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섬김은 사랑의 구체적인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우리를 위한 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남자인 아담을 먼저 지으셨고, 아내는 나중에 지으면서 남편을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을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고 순종으로 섬겨야 합니다. 대신 남자는 자기를 돕는 아내를 자기의 생명을 다해서 책임지고 돌봐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남편은 아내를 먹이고 입히고 보호하고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남편의 역할은 뼈 빠지게 일을 해서 아내를 먹이고 책임지며 아내가 위험에 처하게 되면 즉시 달려가서 보호해야 하고 아내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버려서 죄인들을 구원해 주신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남편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자들은 긴 한숨을 쉬시기 바랍니다. “나더러 어떻게 감당하라고 이 큰 짐을 맡겨주셨나이까?” 남자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성전환수술을 해서 여자가 되지 않는 한, 그 책임은 벗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전환수술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남자는 남자된 책임은 벗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자분들, 여자가 된 것이 참 다행이지요? 저는 여자가 부럽습니다. 그러나 여자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바로 자기를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남편이 ‘여기 좀 밀어줘’ 하면 거기를 밀어주고,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해주는 것이 아내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돕는 배필의 의미입니다.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그렇다는 것이고 남자에게 훨씬 큰 책임을 주셨다는 것이고, 큰 책임을 맡은 사람에게 협력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차를 함께 타고 하면서 옆에 앉은 사람이 운전대를 잡으면 당연히 사고가 납니다. 아무리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운전기술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다고 해도, 운전대는 둘이 쥐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옛날 버스 운전석 옆에는 “운전사와 잡담 마시오.” 라고 써 놓았었습니다.
군대에 가면 기관총이나 대포를 쏘는 일에 사수가 있고 조수가 있습니다. 사수는 책임자이고 조수는 보조자입니다. 조수가 인격이나 자질에서 사수만 못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수가 둘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먼저 들어온 선임병이 사수를 맡고, 나중에 들어온 신병은 조수를 맡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간관계의 질서도 똑 같습니다. 먼저 만들어진 남자가 사수를 맡고, 나중에 만들어진 하와가 조수를 맡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아내를 먹여 살리고 책임지는 남편 노릇하기가 어려울까요? 아니면 자존심이 좀 상하지만 남편이 하자는 대로 순종하는 아내노릇 하기가 어려울까요? 남편 노릇 하기에 비해서 아내노릇하기가 훨씬 쉽지 않을까요? 역할이 적으면 책임도 적은 것입니다. 여성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은 아내를 책임짐으로서 아내를 섬기는 사람이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남편을 섬기는 사람이며, 이것을 성경은 피차 복종, 즉 피차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원리입니다.
6장으로 가면, 이 원리가 부모와 자식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기르는 사람입니다.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서 기르느라고 밤낮으로 돈을 벌어 대야 합니다. 자식 대학보내기 위해서 당사자보다 더 걱정하고, 시집 장가보낸 뒤에도 그들의 자식까지 길러주고, 자식 돌보다가 죽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부모는 그렇게 책임져 주는 것으로 자식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자식은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방법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누구 역할 하기가 힘들까요? 당연히 부모의 역할이 백배, 천배 힘듭니다. 하나님은 단지 세상에 먼저 태어나서 자식을 낳았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막중한 책임과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그에게 세상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하셨고, 그 이후에 아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자에게는 세상과 아내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겼고, 아내에게는 그 남편에게 순종하는 비교적 쉬운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부부관계나 부자관계가 다는 아닙니다. 사회에서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6장 5절부터 9절까지 에서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원리는 앞의 내용과 똑같습니다. 사장은 직원들을 책임져 주는 것으로 직원들을 섬겨야 하는 사람이고, 직원은 사장에게 단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사장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직원노릇하기와 사장 노릇하기가 어떤 것이 어려울까요? 노동자는 일하는 시간 8 시간만 땀 흘리면 됩니다. 그러면 퇴근 시간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고 휴가도 있습니다. 반면에 사장은 좋은 차를 타고, 언제든지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낼 수 있고, 골프장에도 들락거리며 정말 사는 것답게 사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장의 자리를 감당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일까요? 사장은 항상 머리가 복잡합니다. 경쟁회사에 뒤지지 않도록 전망 있는 분야를 찾아내야 하고, 기술을 개발해고, 자본을 끌어오고, 상황을 판단해서 때를 놓치지 않고 중대한 결정을 혼자서 해야 하고, 자기네 제품에 문제가 생기거나 직원이 문제를 일으키면 최종 책임을 져야 하고, 회사 사정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불법 파업을 하는 노조가 생기면 밤잠을 못자며 신경을 쓰는 등, 사장에게는 휴가도 없고 휴일도 없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사장이 그런 고생을 하는 이유는 물론 자기 회사 성장시키고 돈을 벌려는 것이지만, 결국 자기 회사에 고용된 수백 수천 명의 직원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장이 자기 혼자 편하기로 마음먹으면 머리 아프게 회사 경영하느니 차라리 문 닫아버리고 자기 돈 은행에 넣어놓고 이자만 먹고 살아도 자기 식구 먹고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지만, 직원들을 생각하면 그렇게도 못하고 머리 터지는 일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장노릇은 안 해봤어도 부모노릇은 해 봤으니까 책임지는 자리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애쓰는 사장에게 직원들이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사장은 책임으로 직원들을 섬기는 직분이고, 직원은 사장에게 순종으로 섬기는 직분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피차 복종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부부관계, 부자관계, 주종관계를 말씀하실 때 마다 먼저 누구에게 말씀을 시작하셨는가를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녀들아,” “종들아,” 라고 하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 관계들을 말씀하실 때 순종하고 복종할 자에게 먼저 명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 상대들의 헌신과 수고가 훨씬 크기 때문이고,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본성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그 일을 이미 상당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되면 대부분 자기가 가정을 부양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최선을 다합니다. 부모가 된 사람은 거의 대부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자식을 위해서 헌신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남편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모도 있지만, 자기 역할을 하지 않는 부모보다 역할을 잘 감당하는 부모가 대부분입니다. 남자들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 사명을 위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합니다.
가정을 책임지는 남편은 많이 볼 수 있고, 자식을 위해서 몸을 다 바치는 부모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왜 남편에게 기꺼이 순종하는 아내를 보기는 어렵고, 부모에게 진심으로 순종하는 자식을 보기 어려울까요?
부모노릇 하기가 자식노릇 하기보다는 백배나 쉽고, 아내 노릇 하기가 남편 노릇하기보다 훨씬 쉬운데도 왜 진심으로 순종함으로 섬기는 사람을 보기 어려울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질서와 역할을 정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현재의 내 위치와 역할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자기의 상대를 섬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도 남자이실까? 너무 남편 편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시며, 누구의 편을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질서와 책임을 제정해 주시고 각자 그것을 감당하는가 지켜 보시는 분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입장을 바꾸어 볼 수는 없습니다. 남자로 태어나면 여자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용인이 사장님이 되어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은 나중에 누구나 부모가 되어 부모의 경험을 해 보게 됩니다.
부모와 자식의 역할을 경험해 본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순종하는 자식 노릇하기가 어렵습니까? 자식의 모든 것을 다 책임지는 부모 노릇 하기가 어렵습니까? 순종하는 입장에 서 있는 자식노릇하기가 훨씬 쉽지요?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아내노릇보다는 책임지는 남편노릇이 더 어렵고, 고용인 노릇보다는 고용주 노릇하기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자식에게, 고용인들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을 먼저 하신 것입니다.
공평하시고 질서를 중시하시는 하나님의 법에 기꺼이 순종하여 하나님께 충성하고 인간관계를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주 명쾌합니다. “남편은 책임으로 섬기고, 아내는 순종으로 섬겨서 피차에 섬기는 관계가 되어 질서 있고 행복하게 살아라. 부모는 자식을 책임져 기르고, 자식은 자기를 책임진 부모에게 순종하여 부모를 섬겨 질서 있고 행복하게 살아라.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도 그렇게 해라.”
얼마나 명쾌합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분이고 각자에게 위치와 역할을 주신 분이며, 그들의 장래를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명쾌한 선을 그어 주시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책임이 중한 사람이 덜 중한 사람을 책임지고, 덜 중한 사람은 책임 중한 사람에게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피차 섬기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기본원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명한 진리를 알려주어도 세상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입장과 전통에 붙들려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알려주어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망해갑니다.
서양 사람들은 남녀가 평등하다는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에 서로 다투다가 이혼으로 가정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동양 사람들은 남자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여필종부’해야 한다는 말로, 남자의 책임은 말하지 않고 여자의 맹종만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법이 아니라 남자가 만든 법이기 때문입니다.이렇게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과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의 입장에 유익한대로 살려고 하니까 자식이 부모를 배척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잘났다고 싸우고 깨어지고, 회사들도 파괴적인 노조운동으로 무너지면서 사회 전체가 망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놓치면 안 되는 핵심이 있는데, 피차 복종하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너희 상전이 하늘에 계심이라.”는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들이 다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책임질 자리와 순종할 자리를 하나님이 정해주셨다. 그러니 인간관계에서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이 명령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너희 인간끼리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 이 제도와 책임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계시니, 남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남편노릇을 하고, 부모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모 노릇을 하고, 사장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장노릇을 하고, 아내도, 자식도, 고용인도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아내노릇, 자식노릇, 고용인 노릇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의 뜻입니다.
부모나 남편이나 사장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요 역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책임진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살펴야 하고, 하나님께 앞장서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는, 자식은 네 것이 아니라 내가 맡긴 것이니 네 마음대로 하지 말고 내 말을 따라서 기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남편이나 부모나 사장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서 악을 행할 때, 아내나 자녀나 직원이 거절할 수 있고 항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항거의 방법도 正道를 따라야 하지, 질서를 파괴하며 자기 분수를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패고, 아내가 남편을 저주하고, 고용인들이 불법 파업을 하는 것은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이 아닙니다. 부모가 잘못을 명할 때 자식은 눈물을 흘리며 그 잘못된 명령을 거두어달라고 간청해야 하고, 하나님은 아내와 자녀와 고용인의 그런 태도까지 살피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똑똑한 사람이 남편이 되고 사장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직책이 그럴 뿐입니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남편 노릇을 맡게 되었을 뿐이고, 먼저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부모의 역할을 맡는 것이며, 돈과 아이디어를 맡았다는 것 때문에 사장이 된 것 뿐입니다. 남편은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창조질서 때문에 아내를 부양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단지 질서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든지 지금 나를 여기에 있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한때 부잣집의 사랑받는 귀염둥이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제들의 시기심 때문에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얼마나 절망적이고 얼마나 분노할 일입니까? 나 같았으면 도무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고, 너무 절망스러워서 죽음 밖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통사람과 달리 행동했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노예의 신분이라면 노예노릇을 철저히 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가장 착하고 열심히 일하는 똑똑한 노예로 생활했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아버지의 일을 할 때처럼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죽지 못해서 일하는 다른 노예들과는 영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고, 주인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모든 일을 책임지는 총무로 삼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지금 내가 맡은 역할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만 바라보고 행동하지 않고, 환경과 역할을 맡기신 주권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에게 다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인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한 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거부했더니, 도리어 누명을 씌워 감옥에 보내버렸습니다. 이쯤 되었으면 원망과 절망으로 날을 보내고 밤을 새웠어야 맞습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는데도 그런 결과를 만났으니, 이제 하나님도 소용없다고 원망하며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때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지금 내가 맡은 역할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기왕에 감옥에 들어왔고 죄수가 된 이상, 뭔가를 얻고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서 간수들에게 순종하고 모범수로 생활했습니다.
그랬더니 감옥을 주관하는 교도소장이 그의 훌륭한 인격을 알아보고 그에게 다른 죄수들을 관리하는 감옥 행정을 맡게 했습니다. 요셉이 어디를 가고 어떤 상황에 이르든지, 지금이 자리, 이 상황, 이 역할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생활했더니 결국 하나님은 그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시되 애굽 전체를 다스리는 총리가 되게 하셔서 옛날의 자기 주인을 다스리게 하셨고, 굶어죽게 된 애국 국민들을 살려냈으며, 자기 가족들도 구원하여 한 민족으로 번성하게 하는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요셉은 오늘 본문을 읽어본 적이 없는 구약시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이 말씀을 정확하게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동일했기 때문이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와 역할을 가지고 살다가 결국 그분 앞에 가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요셉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 말씀을 읽어보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주 안에서 순종하라.”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분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는 일이 없느니라.”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인관관계에 똑같이 적용되는 기본원리입니다.
오늘 내가 어떤 자리, 어떤 역할을 맡았던지, 자기 역할을 다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됩시다. 부모는 책임지는 것으로 자식을 섬기고, 자식은 순종하는 것으로 부모를 섬깁시다. 남편은 아내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 아내를 섬기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으로 협력해서 남편을 섬깁시다.
이것이 피차 복종하는 삶이요, 이것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기본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고 언제나 유익합니다. 이 하나님의 법이 무너지면, 가정들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무너져버립니다.
여러분이 확실하게 이 법을 지켜서 가정들을 든든히 세우고 사회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셔서, 복된 세상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