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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첫 제자들(요1:35-42)-예수께서 처음으로 네 제자들을 부르심:캐논주석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요1:35-42)
◈ 원문강해 ◈
예수께서 처음으로 네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은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요한을 떠나 예수를 따르게 된 사실과 함께 그 중 한사람이 제삼자를 데려오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예수의 첫 제자들이다.
1. 예수를 좇은 요한의 두 제자(35-37절) 1) 요한과 그의 제자 (Th'/ ejpauvrion pavlin eiJsthvkei oJ jIwavnnh" kai; ejk tw'n maqhtw'n aujtou' duvo, 테 에피우리온 팔린 에이스테케이 호 요안네스 카이 에크 톤 마데톤 아우투 뒤오; 또 이튼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5절)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을 뜻하는 아우투 뒤오(aujtou' duvo)에서 이미 한 사람은 안드레라는 것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익명의 나머지 한 제자는 누구인가? 여기에 대하여 로빈슨(Robinson)은 요13:23에 언급된 '사랑하시는 자'와 동일 인물로 보고 그를 본서의 저자인 요한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본문에 언급된 자세한 상황(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직접 목격한 자만이 기술할 수 있는 관계로 미루어 사도 요한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사도 요한은 본서를 기술하는 데 있어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익명의 제자는 사도 요한일 가능성이 크다(Morris, A.T.Robertson).
2) 하나님의 어린양 (kai; ejmblevya" tw'/ jIhsou' peripatou'nti levgei, [Ide oJ ajmno;" tou' qeou'. 카이 엠블렙사스 토 예수 페리파툰티 레게이 이데 호 암노스 투 데우;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36절) 다니심에 해당하는 페리파툰티(peripatou'nti)는 '걸어 다니다, 교제하다'를 뜻하는 페리파테오(peripataew)에서 파생된 현재 분사 중간태 단수로서 행위자가 강조된 말로서 특히 계속적인 행동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그의 복음을 전파하고 계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사역은 그의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데서부터 마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복음을 위하여 매진하셨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본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oJ ajmno;" tou' qeou'호 암노스 투 데우)이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예수가 바로 이 세상에 만연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임을 당할 어린양으로서 구약에서 암시되어 온 메시야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3) 예수를 좇는 요한의 두 제자 (kai; h[kousan oiJ duvo maqhtai; aujtou' lalou'nto" kai; hjkolouvqhsan tw'/ jIhsou'. 카이 에쿠산 호이 뒤오 마데타이 아우투 랄룬토스 카이 에콜루데산 토 예수;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7절) '듣고'에 해당하는 에쿠산(h[kousan)은 '듣다'를 뜻하는 아쿠오(ajcouvw)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3인칭 복수로, 자발적으로 예수의 말을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또한 '좇거늘'에 해당하는 애콜루데산(hjkolouvqhsan)은 '따라가다'를 뜻하는 아콜루데오(ajkolouqevw)의 제1부정 과거 능동태 3인칭 복수로서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에서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마8:1919:27;막6:1). 따라서 본문은 이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려 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것으로 헌신뿐만 아니라 예수의 고난에까지 참여하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결국 예수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참제자의 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
2. 예수의 첫 제자들(38-40절) 1) 예수의 질문 (Tiv zhtei'te_ ... JRabbiv (o} levgetai meqermhneuovmenon Didavskale), pou' mevnei"_ 티 제테이테…랍비(호 레게타이 메데르메뉴오메논 디다스칼레)…푸 메네이스; 무엇을 구하느냐…랍비여(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어디 계시오니이까, 38절) '구하느냐'에 해당하는 제테이테(zhtei'te)는 '바라다, 구하다'를 뜻하는 제테오(zhtevw)의 직설법 분사 능동태 2인칭 복수로서 궁극적으로 찾고 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너희들이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씀으로 이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려는 동기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어디 계시오니이까'(pou' mevnei"푸메네이스)라는 말로서 예수께 답하고 있다, 원래 이 말은 유대의 관용적 표현으로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오랜 시간을 가지면서 차분하게 예수와 대화하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Reynolds). 한편 이들이 예수를 향하여 말한 '랍비여'( JRabbi)라는 말은 '나의 존귀한 분'이란 의미를 지닌 아람어로, 주로 제자들이 그의 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에 대한 이들의 영적 무지를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이들은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던 까닭에 예수를 스승으로만 알 뿐 그 이상의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말은 가롯 유다(마26:25,49막14:45)와 베드로(막9:511:21)등에 의해 사용되기도 했다.
2)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 [Ercesqe kai; o[yesqe. h\lqan ou\n kai; ei\dan pou' mevnei 에르케스데 카이 옵세스데 엘단운 카이 에이단 푸 메네이;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산 데를 보고, 39절) '와 보라'에 해당하는 에르케스데( [Ercesqe)는 '오다'를 뜻하는 에르코마이( [ercomai)의 현재 명령법과 '보다'를 뜻하는 호라오(o;ravw)의 미래 직설법의 합성어로 요한의 제자들이 언급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말과 서로 상응하고 있다. 즉 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오면 보게 될 것이란 말이다. 실로 이 말은 구원의 보장을 확답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보고'를 뜻하는 에이단(ei\dan)은 '보다, 알다'를 뜻하는 에이도(ei\dw)의 제2부정과거 능동태 3인칭 복수로 보았다는 사실을 단순히 나타내는 말이며,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 사실임을 의미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위대한 믿음의 결단을 통해 이들이 교회의 영원한 기초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얻었듯이 우리도 예수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믿고 평생을 주님의 제자로 살기로 각오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결단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3) 예수의 첫 제자 안드레 ( \Hn jAndreva" ... ajkousavntwn para; jIwavnnou kai; ajkolouqhsavntwn aujtw'/: 엔 안드레아스…아쿠산톤 파라 요안누 카이 아콜루데산톤 아우토;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안드레라, 40절) '좇는'에 해당하는 아콜루데산톤(ajkolouqhsavntwn)은 '동행하다, 따라가다'를 뜻하는 아콜루데오(ajkolouqhevw)의 제1부정과거 중간태 소유격 복수로서 안드레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중간태로서 그가 자신을 위해 따랐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안드레는 실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롭게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위대한 믿음의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한편 저자는 다른 제자들의 이름에 대하여는 거의 침묵하고 있는 데 반해 안드레의 이름만은 유독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본서의 저술 당시 헬라 세계에 안드레의 존재가 미미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Reynolds).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안드레가 예수의 첫 제자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안드레의 기쁨(41,42절) 1) 안드레의 전도 (euJrivskei ou|to" prw'ton to;n ajdelfo;n to;n i[dion Sivmwna kai; levgei aujtw'/ 휴리스케이 후토스 프로톤 톤 아델폰 톤 이디온 시모나 카이 리게이 아우토;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41a절) '찾아'를 뜻하는 휴리스케이(euJrivskei)는 '발견하다, 찾다'를 뜻하는 휴리스코(euJrivskw)의 현재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단수이다. 그런데 이 말은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두고 샅샅이 찾아 헤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곧 주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가 예수와의 신령한 교제를 통해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제일 먼저 그의 형제와 더불어 그 은혜를 나누려 하였던 것이다(Tasker, Moffatt). 이러한 사실은 진실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한눈으로 볼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2) 메시야를 만남 (EuJrhvkamen to;n Messivan o{ ejstin meqermhneuovmenon Cristov": ... h[gagen aujto;n pro;" to;n jIhsou'n. 휴레카멘 톤 호 에스틴 메데르메뉴오메논 크리스토스 에가겐 아우톤 프로스 톤 예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41b,42a절) '만났다'를 뜻하는 휴레카멘(EuJrhvkamen)은 '찾다, 알아내다'를 의미하는 휴리스코(euJrivskw)의 현재 완료형 능동태 직설법 1인칭 복수로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메시야를 발견했다'(KJV, RSV, Living Bible)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구원(해방)을 사모하는 유대인들의 강한 메시야 기대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Reynolds). 여기서 이들이 말한 아람어 메시야는 헬라어로 '그리스도'(Cristov"크리스토스)로서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를 뜻하는 형용사 크리오(crivw)에서 파생된 것으로 '기름이 발리워진(자)'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 말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위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을 함축하는 말로서 궁극적으로 메시야를 의미하게 되었다. 구약에서 대제사장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출29:6레8:10-13). 본문에서 안드레와 사도 요한은 그토록 소망하던 메시야, 즉 예수를 만난 그 놀라운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가 없어서 시몬에게 전하려 하였던 것을 가리키고 있다.
3)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 (ejmblevya" aujtw'/ ... ei\pen, Su; ei\ Sivmwn oJ uiJo;" jIwavnnou: su; klhqhvsh/ Khfa'" (o} eJrmhneuvetai Pevtro"). 엠블렘사스 아우토…에이펜, 쉬 에이 시몬 호 휘오스 요안누 쉬 클레데세 케파스(호 헤르메뉴에타니 페트로스);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2절) '보시고'에 해당하는 엠블렙사스(ejmblevya")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를 뜻하는 동사 엠블레포(ejmblevpw)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단수로 '자세하게 관찰하여 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곧 예수께서 베드로를 만난 것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고 있었다는 것과 아울러 이 만남이 매우 진지하고 직접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한편 시몬인 베드로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장차 케파(Khfa'"게바)로 불릴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반석을 뜻하는 아람어 케파(apyKe)의 헬라역이다. 본문에서 '하리라'(klhqhvsh클레데세)란 칼레오(kalevw부르다)의 미래수동형으로서 '불려질 것이다'란 뜻이며, 예언적인 성격을 띤다(A.T.Robertson). 실로 이 말은 교회의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한 여려 요긴한 반석중의 하나가 될 것이란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데, 이름대로 베드로는 자신의 인간적 약점들을 성령의 역사로 다 극복하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그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1:15-25). 사도 바울은 베드로를 지칭할 때 갈2:7,8등을 제외하고 많은 경우 이 말로 묘사하고 있다(고전1:123:22;9:5;15:5;갈1:182:9,1,14).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과 마가복음의 설화에서 보여지는 특징적 차이점으로는 예수가 먼저 사람들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의 증인들이었다는 점과 증인들이 그의 인격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묘사하였다는 점과 부름받은 자는 다른 종교와 소유물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Schweizer, C.K.Barrett).
1. 예수를 좇는 두 제자(35-39절) 35절의 '두 제자'중 한 사람은 안드레이고 다른 제자의 이름은 알 길이 없으나 전통적으로 이 사람을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으로 추정하고 있다(Raymond, E.Brown). 이에 반하여 다른 제자는 빌립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두 사람은 복음서에서 같이 등장하고 있으며, 같은 동네 출신이기 때문이다(Boismard). 요한이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음을 모든 복음서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 금식에 대한 자기들 나름대로의 규정이 있었고(막2:18눅7:29-33), 자기들만의 기도문이 있었다(눅5:3311:1, Raymond, E.Brown). 37절의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을 예수에게 보냈다는 내용 때문에 이 설화는 Q자료에 기초한 것으로 주장되었다(C.K.Barrett). 38절의 '무엇을 구하느냐'에서 요한은 사람들과 맞서서 그들의 의도에 도전하는 로고스-그리스도를 보여 주려 했을 것이다(Fenton). 이 표현은 아람어의 토대에 기초하고 있으며, 아람어 동사의 의미로 '무엇을 추구하다, 찾다, ∼을 원하다'로서 여기서는 둘 모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Boismard). '랍비'란 문자적으로 '나의 위대하신 자여'라는 의미이지만 요한은 '선생'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문자적 번역은 아니지만 이러한 용례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Raymond, E.Brown). 39절의 '와 보라'는 문장은 유대 랍비 문헌들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요한에게는 예수에게 오는 것이 중요하며, '보는 것'은 아는 것에 해당한다(Fenton). 유대인의 하루는 일몰에서 일몰로 끝나고, 밤과 낮을 12분할하였다. 이는 로마인들의 시간 개념과 동일하며, 이를 저자 요한이 따르고 있다(Westcott). 이와 반대로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은 모두 일출에서 다음 날 일출을 하루로 보았다는 견해와(P.Harvey) 새벽녘을 원시점으로 정하고 시간을 계산했다는 주장(Gepp, Haigh)도 있다. 시간이 십시쯤인 점에 대하여, 음유적 해석법에 의하면 10시는 완전수이기에 기독교 시대의 시발을 의미한다는 주장과(MacGregor, R.Bultmann), 저자 요한의 시간이 상징적이라는 주장도 있다(J.E.Bruns).
2. 안드레와 베드로에 대한 소개(40-42절) 40,41절의 '그가 먼저…'에 몇 가지 가능한 독법과 번역이 있을 수 있다 ① 프로톤(prw'ton먼저, 우선)이라는 형용사의 부사적 용법은 안드레가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그의 형제를 찾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이는 사본P66,75와 아보느(Abbott)에 의해 입증되고 지지되고 있다(Cullmann). ② 프로톤(prw'ton)은 주격 남성 형용사로서 '시나이티쿠스' (Sinaiticus,후대 헬라 사본)에 기록되었고, 안드레가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 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제자나 야고보를 찾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③ 프로이(prwiv)라는 이 부사는 다음 날 '이른 아침'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OL, OSsin 등의 사본의 지지를 받고 있다(Bernard, Boismard). ④ 타티안(Tatian) 사본과 OScar 등의 사본에는 이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메시야'라는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아람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Raymond,E.Brown). '기름부음'이 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Raymond, E.Brown). 요한복음에서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인 언어들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메시야성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C.K.Berrett). 42절에서 요한은 '게바'라는 이름이 베드로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게바는 아람어로 케바(ap;'yKe바위)중 갈릴리 아람어에 근원하고 있다(Schlatter). 그러나 요한이 이 이름에 대한 해석을 하지 않은 것은 앞으로의 베드로 생애에 어떠한 해석도 입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Fitzmyer, C.Roth).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하나님의 어린양(35-38절) 35절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은 요한이 증거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다(W.E.Hull). 사실 요한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둘만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요한의 일행에 남았다(F.F.Bruce). 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날처럼 그들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예수께로 주목하게 한다. 그는 다시 29절처럼이미 예수님께 대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칭호를 반복한다(F.F.Bruce).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요한이 말로 할 수 있는 것 이상, 즉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크신자'이며 '죄를 제거하실 분은 바로 그분이시다'를 나타내려는 것이었다(J.W.Stallings). 37절 끝부분은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 둘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말한다. 35절의 요한은 그의 제자 둘과 함께 서 있다. 이것은 소우주내에서의 요한의 사역이며 제자들에게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지시한다(J.W.Stallings). 그의 지시를 따라 그들 중에 두 사람이 예수님을 좇는다. 이것은 그들이 그의 추종자들이 되었음을 의미한다(F.F.Bruce). 38절의 '랍비'라고 그들이 사용한 말은 그들이 더 이상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크신 자의 제자라는 그들의 인식을 가리키는 것 같다(J.W.Stallings). A.D.1세기 랍비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적절한 과정의 랍비 훈련을 마친 선생으로서 서품된 사람에게 적용되었다(J.Newman, A.A.T.Ehrhardt).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교사로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 예의의 칭호로 사용되었다(F.F.,Bruce). 예수님을 따랐던 그 둘 중의 하나는 사도 요한이었다. 이 상황은 자신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다(B.F.Westcott, R.E.Brown, J.H.Bernard). '무엇을 구하는냐'는 예수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질문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말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기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그를 알게 되는 것이었다(F.F.Bruce).
2. 와 보라(39,40절) 39절의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와 보라고 대답하신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다. 그것은 제십시, 즉 오후 4시경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곳을 보았다. 마8:20에 비추어 본다면 그곳은 아주 미약한, 아마도 동굴이나 야영지였을 것이다(J.W.Stallings). 40절에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따른 다른 두 제자들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형제 시몬이다. 안드레는 당연히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시몬의 형제'로서 기억된다(J.W.Stallings, F.F.Bruce).
3. 베드로가 된 시몬(41,42절) 41절에서 안드레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행동은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과 사귀도록 하는 것이었다(F.F.Bruce). 안드레가 시몬에게 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은 중요하다(J.W.Stallings). 이 셈족 동사적 형용사는 요한복음을 제외하고는 신약에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와 요4:25에 두 번 언급될 뿐이다. 구약에서 그동사적 형용사는 이스라엘 왕(삼상16:6), 대제사장(레4:3)과 그리고 복수 형태로 선지자 역할의 족장들(시105:15)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기독교 시대의 메시야적 기대는 주로 왕적 형태를 취한 반면에, 실제 성취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지자, 제사장, 왕의 세 가지 역할에서 탁월한 메시야임을 입증하셨다. 안드레가 메시야라는 칭호를 가지고 의미했던 것을 확실하게 진술할 수 없다. 그가 이해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소중히 했던 그 당시의 형태들에 의해 채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그의 동료-제자들이 예수님을 점점 더 잘 알아감에 따라, 메시야와 그의 성취에 대한 초기 개념들은 예수님의 실제 성격과 사역에 의해 그의 생각 속에서 치환되었을 것이다(F.F,Bruce). 그러나 '메시야'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는 기대된 '이스라엘의 왕'과 '크신 자'를 나타내었다는 견해도 있다(J.W.Stallings). 42절의 베드로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마16:17에서는 '바요나 시몬'으로 단축되었다(F.F.Bruce). 또한 '게바'는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반석'(마16:18)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W.E.Hull).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이름짓는 행위
1. 이름 짓는 능력의 의미 본문에 보면 예수가 시몬에게 게바(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는 사건이 나온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대상에게 본질을 규명하고 지배한다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에서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그것들을 지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동물이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성행했던 동물 숭배에 대해 철저히 거부하는 심리를 엿볼 수 있다.
2. 아담의 '이름 지음'과 3중 사역의 성취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한 모형으로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아담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안식에 동참하였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며 감사하였다. 그리고 사물들의 이치와 본성들을 탐구하여 각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선지자적 사명이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 본성과 법칙이 다 규명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직의 수행과 통치권의 행사는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3. 가인에 대한 아담의 태도 가인의 뜻은 '얻음'이다. 여기에서 아들을 얻은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아담이 자신을 닮은 아들을 얻었을 때 어쩌면 커다란 성취감과 영생에의 유혹을 받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얻음'에 대하여 심판하신다. 아벨의 등장이 그것이다. 본래 아담은 이름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능력(이러한 능력은 참으로 힘든 일 중의 하나이다. 사물의 속성에 대한 밝은 지식과 그것을 집약하여 표현하는 능력은 지혜 없이는 할 수 없다.)을 소유하고 있었으나(창2:29), 가인을 얻었을 때 그 총명함은 사라진 듯하다. 후에 아벨을 얻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아담은 세상에서 '얻음'의 무익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4. 마지막 아담 예수 그러나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고차원의 능력이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는 시몬을 보고 그가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을 미리 꿰뚫어 보고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부여했던 것이다.
인간이 신에게 간구하는 것들(1:35-42)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기 힘든 것들을 신에게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이 신에게 바라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의 개인적인 안락함이나 혹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죽은 후에도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신에게 요구하는 인간의 소망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현실에 만족하는 자는 그것을 오래 누리는 것을 요구하는 반면, 그 위치가 불행한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근동/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대신 그들은 종교 생활에서 현세 생활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천체운행을 관찰하는 점성술이나 그 밖의 점복(占卜)에 의해 현세의 운명만을 예측해 보려고 노력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내세(來世)를 음산하고 비참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세적 향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고, 자연히 죽은 사람에 대한 장례는 박절하였다. 따라서 신에게 간구하는 것들은 현세적인 면이 강했다. 이집트 : 이집트 사람들은 현세에 살면서도 그들의 생각은 항상 죽은 후의 세계에 쏠려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건축은 '분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죽음의 세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집트의 분묘는 마스터바(mastaba)라는 평탄한 형태로부터 계단식 모양을 거쳐 끝내는 삼각형의 피라미드로까지 발전하였다. 피라키드는 평균 2.5t의 석탄암 330만개이상을 높이 147m로 쌓아 올린 것이다. 이 피라미드안에는 내세(來世)에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왕들이 미이라가 되어 누워 있는데, 이집트 사람들은 육체가 써지 않으면 영생불사(永生不死)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서양/그리스 :그리스인들에게는 무한(無限)과 영원(永遠)의 관념이 없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일체의 자연 현상을 신들에게 원인이 있는 것으로 돌리며 수많은 신들을 산악·삼림·초목·하천과 연관시키고, 또 지방마다 그 나름의 신들을 섬겼다. 또한 그리스 사람들은 신과 인간을 동일하게 파악했다. 즉 신과 인간은 외형상·속성상의 차이는 전혀 없고, 다만 신은 인간의 이상형으로서 불사(불사)란 점에서 인간과 다를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이 신을 인간과 다를 바 없이 난폭·잔인·교활·방탕하다고 묘사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대신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형상을 그리거나 만들어 완벽한 미(美)의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인들이 신에게 갈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중국 : 중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신에게 바라던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병장수(無病長壽)'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 이불이나 옷등에 자주 쓰여졌던 문양이 '수(壽)'였다는 점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동양인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무릉도원'이라는 곳은 인간 세상의 시간으로 몇 년이나 되는 것이 하루도 안 되어 지나가며 그대로 늙지 않고 살 수 있는 세계였다. 불교 : 불교에서 사람들이 갈구하는 것은 도(道)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었다. 도교에서는 신선(神仙)이 되고자 하는 것이 또한 소망이었고, 이를 위해 사람들은 무심(無心)을 기본 자세로 도를 닦았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힘으로 다다를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자녀를 원할 때(창25:21), 생명이 위태로울 때(창32:11), 환난이 닥쳐왔을 때(대하33:13),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자 할 때, 하나님께 간구한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진솔한 간구에 대해 응답해 주심은 물론이요(시99:6), 성령과 구원까지 주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가 따르는 진솔한 간구를 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세상에 대한 주님의 질문(1:35-42)
'무엇을 구하느냐'(38절)는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최초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다. 올바른 목적의식은 올바른 사고의식과 행동 양태의 요람이 된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올바른 목적의식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과 목적을 상실한 채 지내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끝없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1. 무슨 목적으로 따르는가? '무엇을 구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확고한 신앙의 목적도 없이 따르는 자들에 대한 일침이다. 타성에 젖은 무사안일한 신앙의식을 지닌 사람들, 또 맹목적으로 따르는 감정주의적 신앙인들은 냉철하게 이 질문을 자신들에게 적용시켜야 한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먼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눅18:41)고 물으셨다. 목적없는 신앙 생활은 일종의 위기상황임을 알자. 그것은 주변에 의해 쉽게 변질되고 오염되고 유혹받기가 쉽기 때문이다.
2. 무엇 때문에 따르는가? 또 주님의 질문은 그릇된 목적을 지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된다. 성경은 분명히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딤전6:12),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6:14)고 했다. 죄로부터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종국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3. 무엇을 구하여 사는가? 현대인들은 삶의 의미도 방향도 상실한 채 그저 기계적인 생활과 욕망으로 삶을 허비하고 있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무목적으로 사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질문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라는 의미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기독교 확장의 기틀(1:35-42)
장강대하의 큰 강물도 그 출발점은 깊은 산속의 조그만 옹달샘에서 비롯된다. 기독교의 생성과 그 확장도 같은 원리다.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그리스도가 최초로 만나는 만남이 증언되고 있다. 이 내용은 기독교 확장의 기틀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교훈해 준다.
1. 선지자들의 희생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36절)라며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요한의 희생적 사역은 모든 선지자들의 사역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된다. 오늘 그리스도를 위해 연구하고 기록하고 예언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 구약의 선지자들로 인해 기독교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사역 '와 보라'(39절)는 세례 요한을 떠나 자기를 좇는 제자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제자를 모으고 가르치고 훈련시키사 그들로 최초의 기독교 성도, 선교사, 증인, 사도로 만드신 주님의 사역이 기독교 확장의 기틀이 되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3. 성도들의 증언과 희생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40절). 이 안드레의 전도와 증언으로 대사도 베드로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최초로 주님의 제자가 된 이는 안드레였으나 그는 겸손하게 베드로에게 수석 사도 자리를 내준 것이다. 안드레는 후에 '겸손한 성도'의 상징으로 선택돼 '차석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기독교의 확장과 성장은 이처럼 성도들의 증언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