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작 목민심서와
파장출입(破墻出入)과 상피(相避)제도
남원학연구소
노상준
예나 지금이나 권세와 후광의 함수(函數)관계는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연일 보도되는 최순실게이트 국정농단 사건과 청문회 등 현 정치 상황이 그렇다.
조선시대 고을 수령들은 삼권(三權)을 손에 쥐고 있었기에 권세가 대단하였다.
따라서 그 권세가 그의 내외 친족이나 처족에게 악용되지 않도록 하는 법도가 엄격했다. 그러나 그때도 관리의 치부(恥部)는 많았던 것 같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 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 : 1818)에서 목민관(牧民官)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했다. 백성들 편에 서서 관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고발, 탄핵, 경계하고 있다. 특히 부패의 극에 달한 사회 상태와 정치의 실체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지금 우리 정치 지도자 중에도 목민심서에 깊은 관심과 목마른 자가 많다.
많은 세계 지도자들 중에 이웃 베트남이 국부라 일컫는 호치민은 생전 그의 머리맡에 목민심서를 놓고 살았다고 한다. 왜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목민심서에 심취하여야 할까? 목민심서에는 백성을 위한 길이 있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을 위하고 기르는 목민(牧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목민관들은 오직 사리를 취하기에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 모른다. 그렇다보니 백성들은 피폐하고 곤궁하게 된다 하였다. 목민심서 12장은 부임, 율기, 봉공, 애민,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 진황, 해관인데 매장을 다시 6조씩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목민심서는 목민을 위한 불후의 명작이라 할 수 있다.
「파장출입(破墻出入)」이란 말이 있다.
옛날 수령이 집무하는 동헌에 가족이나 일정 범위 안의 친족들은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근무시간에는 사적인 일로는 누구도 정문출입은 할 수 없게 되어있기에 부모님의 위독을 알리는 아들이 와도 정문으로는 들어올 수 없어 동헌의 옆담을 헐고 들어오게 하였다하여 이를 파장출입이라 했다.
또 친족의 정실청탁을 막기 위한 제도적 보장의 하나로 「상피;相避」제도가 있었다. 서로 영양을 끼칠 수 있는 벼슬자리에 친족이 있으면 벼슬자리를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는 것을 ‘상피’라 한다.
아버지, 할아버지, 형제, 백‧숙부, 사위, 매부는 물론, 모계(母系), 처계(妻系)의사촌 처남에 이르기까지 상피를 해야 했다. 대권(大權)을 쥔 임금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임금의 아들이나 형제인 대군이나 임금의 사위인 부마(駙馬)등 가까운 친족들은 벼슬을 할 수 없는 것이 법도였다. 다만 종친은 종친부(宗親府)에 외척은 돈녕부(敦寧府)에 부마는 의빈부(儀賓府)에 소속시켜 품작만 주어 먹고 살게 했을 뿐 권세를 부리거나 그 후광을 악용할 수 없게 했다.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녕대군은 사냥과 술로, 효령대군은 절에 들어가 불공드리는 것으로 여생을 살았지 않았던가 싶다. 효령이 불사(佛事)를 올리고 있는 절간에서 양녕이 사냥해 온 고기를 냄새를 피우며 구워 먹은 일이 있었다. 효령이 정색을 하고 말리자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살아서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성불(成佛)한 아우의 형이니, 나처럼 생사간에 복 받은 사람이 없다.”고 자적(自適; 마음이 가는 대로 유유히 생활함)하고 있다.
그래서 허울만 좋고 실속 없는 것을 빗대어 “임금님의 형제”라는 말까지 있었다. 권세가 임금의 후광을 타고 횡류(橫流 : 물이 제 곬으로 흐르지 못하고 옆으로 꿰져 흐름)하거나, 후광에 죄어드는 아부배를 미리 막는 아름다운 법도요 전통이었던 것 같다. 오늘날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 참고 되고 교훈삼을 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