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는 서쪽에서 살다가 온 왕 이라는 뜻으로 居西干이라고 하였고 또한 나라이름을 서야벌 (徐耶伐)이라 했다. 서야벌(西耶伐)이라고 하면 서쪽에 있는 자들을 칼로서 치겠다는 뜻이다. 거서간(居西干)과 서야벌(西耶伐)은 일치되는 말 이다. 西耶伐이라고 해야 할 것을 徐耶伐 이라고 이병도가 고쳐 버렸다.
신라는 처음에 세력이 작았기 때문에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려져 오다가 정식국호인 신라를 사용하기까지는 약 300년의 세월이 걸렸다. 기림이사금 10년에 신라(新羅)를 다시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부분은 뭔가 기록이 잘못되었다. 다시 쓰게 된 것이 아니다. 그전 기록에는 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신라(新羅)라는 명칭을 쓰기까지 쓰여 졌던 이름들을 나열해보면 걸의식국(乞衣食國), 비집기국(飛集基國),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괴), 계림(鷄林), 서야벌(徐耶伐 또는 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이다. 그 때에 사용하던 이름이 모두가 누에치기와 동물 등과 관련지어 부른 이름이 특이하다.
또한 계림국(鷄林國)이라 한 것에 대하여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물산지(物産志)를 보면
" ...劉熙釋名, 韓羊 韓兎 韓鷄 本法出韓國而爲也 猶酒言宜城료蒼梧淸之屬也 "
" 유히가 석명에서 말하기를 한양, 한토, 한계라는 것은 본래 그 본법이 한국에서 나와 된 것이다. 술에 의성료니 창오청이니 하고 말하는 것과 같은 종류다. "
여기서 료,淸은 곧 탁주와 청주를 가리키는 말로 의성료, 창오청은 산지의 지명에 따라 붙은 술 이름들이다. 마찬가지로 한양, 한토, 한계 이런 말은 가리키는 동물에 따라 원래 한국에서 나왔기에 불려진 말투라는 것인데 이것은 韓國이 유목(遊牧)에 기반을 두었다는 뜻이 새겨져있다.
신라가 처음 생길 때 이름을 계림국(鷄林) 유계(有鷄), 계괴(鷄괴) 등으로 불리 운 것은 韓의 후손으로 韓은 곧 秦韓(진한조선) 이다. 秦韓(진한조선)은 오랜 유목생활의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한통속)
나(羅)字는 누에치기와 비단생산 등과 관련이 깊은 단어임을 알아야 한다.
사전적 의미는 견직물의 하나. 가볍고 부드러우며 성깃한 구멍이 있다. 《설문 說文》, 《이아 爾雅》에서는 " 새그물을 '나'라 한다."고 하였으며, 《석명 釋名》에서는 '문소나야(文疎羅也)'라고 하여 밀도가 성긴 문양직(文樣織)임을 나타내고 있다. 라고 되어 있지만 유양잡조에 실려 있는 신라시조 김추(金錐)의 설화를 보면 나(羅) 字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에는 김추(金錐)의 할아버지 김방이는 누에농사를 잘 지어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羅자는 보시다시피 실사(絲) 와 새추字로 되어 있다. 나(羅) 字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그 경위는 지금 모르지만 신라가 나(羅) 字를 사용하여 국호를 지은 것은 누에농사의 대국으로 비단생산이 활발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신라는 지금의 감숙성 난주, 금성이 있었던 곳에서 발생하여 실크로드의 요충지역(길목)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명주실로 짠 나(羅)를 만들어 국제교역을 하였다.
(이곳은 고구려 땅 이기도하다. 초기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고구려 땅 안에서 기생하고 있었다.)
이름 하여 비단이다. 그리고 점 점 큰 부자가 되었다. 세계최초로 주물을 부어 성을 축조하였다고 할 만큼 부자나라였다. 그래서 도읍지가 금성(金城)이 되었다.
중국을 뜻하는 인도어의 Sino와 신라의 新신[xin] 羅[lou] 가 발음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중국어 사전에는 支那의 뜻이 秦의 와전 이라고 나와 있다. 즉, 秦(진)那(나라)의 뜻으로 '시나' 라고 읽는다. 과연 신라와 지나(支那) 진(秦) 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약 2200년 전에 秦나라가 망할 때 그 유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퍼져 나갔는데 당시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흉노가 되었다. 또한 신라는 秦의 유민이므로 흉노와 함께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차차 힘이 강해지자 신라(新羅)로 나라이름을 고쳤다. 新은 秦을 되찾은 이름이고 羅는 박혁거세의 본명이 김추(金錐)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朴姓의 기원이 이러하다. 왜 金姓이 朴으로 바뀌었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추측하건데 漢나라의 지배하에서 秦나라의 귀족출신들이 金성을 유지하고 살아가기는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대로 金氏姓을 이어온 것을 우화로 꾸며서 감추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의자왕 편
" 新羅古事云 天降金櫃 故姓金氏 其言可怪而不可信 臣修史 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然而又聞 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
" 신라고사에 의하면 하늘에서 금궤가 내려왔다, 그러므로 성을 김씨로 하였다. 그 말이 괴이하고 이상해서 믿을 수가 없어 신은 역사를 수정하고 고치기로 하였다. 옛날부터 전해오던 말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그부분을 깎아서 떨어뜨렸다. 하늘에서 금궤가 내려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인데 그래도 소문은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떠돌았다. 신라인은 스스로가 소호금천씨의 후손 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옛날성을 그대로 사용하여 김씨라 하였다. "
위글 에서 김부식이 삭제한 내용은 사실상 제일 중요한 부분 이었다. 시조 박혁거세를 등장시키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앞부분을 삭제 한 것이다. 위문장 해석 가운데 "신라고사에 의하면 하늘에서 금궤가 내려왔다." 라고 해석해서는 안 될 문장임을 알아야 한다.
상고시대에는 문장기법이 다분히 해학적이고 우화적이다. 읽는 사람이 알아서 정확하게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하늘에서 금궤가 내려왔다." 함은 옛 조상부터 대대로 이어져 金氏姓이 전해져 온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부분을 김부식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역사의식의 우매함을 스스로 드러냈다. 아니면 머리가 너무 좋아서 역사를 수정하고 고친 것에 대한 변명을 하기위해서 그렇게 고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분명히 역사를 숨기려는 의도가 있음이 문장을 통하여 짐작할 수가 있었다.
김부식의 가문이 金氏의 혈통 이다보니 金氏들이 망하여 피난 온 것 까지는 좋은데 신라국 이라는 나라가 일어서기까지 우여곡절이 너무나도 부끄러워 일단은 김씨성 이었던 居西干혁거세를 朴씨로 고쳤던 것이다. 그기에 신비성을 첨가하여 닷 되나 되는 알 즉 "표주박"을 등장 시킨 것이다.
누군가 진나라(秦那, 支那, 시나, 시라, 시노, 신로新盧) 의 이름을 새롭게 지어 신라(新羅)라 했다면 발음은 그대로 이면서 한자 특유의 그 속뜻만 바뀌는 셈 이니 역시 한자의 장점을 잘 활용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초기 신라는 그야말로 보잘 것도 없는 秦나라귀족출신의 떠돌이 유목민이었다. 秦나라가 망하고 그 유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북쪽, 서쪽으로 피난 간 유민들은 흉노의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동쪽으로 피난 간 사람들은 馬韓의 동쪽으로 몰려들었는데 주로 귀족출신들이 많았으며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임시로 姓을 바꾸거나 새로운 姓을 가지게 되었다. 그 지역이 서안부근으로 고조류방은 秦나라의 유민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오므로 대세를 잡은 것을 확신하고 秦을 무너뜨린 것이다. 馬韓에서 高句麗, 漢 등이 나왔다. 역사는 이부분이 상당히 난잡하게 조작되어 있다. 초기신라는 지금의 감숙성 난주에서 시작했다. 그곳에 金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