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김성수 감독 영화에 별 세 개 이하를 줄 날이 올 것이라고 나는 감히 상상도 못했다. 조명의 이강산, 촬영의 김형구 콤비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 [비명도시]로 존재를 알린 그는, 말 많고 탈 많았던 필화사건까지 일으킨 데뷔작 [런어웨이]의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비트]로 한국 최고의 테크니션임을 선언했다. 이정재 정우성의 버디 무비 [태양은 없다]와 [무사]를 거치면서 그는, 현단계 한국 감독들이 활용할 수 있는 테크닉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온갖 고난도의 기교를 실험하고 개성적 표현을 찾는데 힘을 기울여왔다.
너무 기대가 커서인지, 비록 실망스럽게 봤지만 그래도 [무사]만 해도 상업적 시스템 아래서 형식적 미학을 밀어붙이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영화사 나비픽처스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돈벌이에 나섰다는 소문이 들렸다. 나는 무시하려고 했다. 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변화된 영화적 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로맨틱 코미디를 창립작품으로 만든다고 했을 때, 그래도 그가 만들며 신선하고 재미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오늘, 멋지게 배반당했다.
[영어완전정복]은 넘치는 영화다. 의욕과잉, 연기과잉, 표현과잉. 어떻게 하면 관객들을 조금이라도 더 웃겨볼 수 있을까 의욕이 넘쳐난다. 배우들의 감정도 넘쳐나고, 연출적 기교도 넘쳐난다. 그것을 기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문자나 만화의 대사를 집어넣는 풍선까지, 화면에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라면, 조금이라도 더 큰 재미를 줄 수 있다면, 온갖 방법이 총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덕지덕지 분칠한 늙은 창녀처럼 너무 추하다.
그렇게 과잉된 기교를 사용하고 배우들의 오버 연기를 이끌어내면서도, 정확하게 웃음의 코드를 짚어내지 못하는게 [영어완전정복]의 결정적 패인이다. 김성수 감독은 정말 로맨틱 코미디를 완전 정복했어야만 했다. 재능은 있지만 이과에서 문과로 옮겨 아직 적응 못하는 학생의 답안지를 보는 것 같다.
웃음이 터져야 할 때 터지지 않고, 폭발해야 할 때 피식거리게 된다. 유치원 때부터 대학원까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전국민이 혈안이 되어 있는 나라, 영어 컴플렉스에 걸린 사람들로 넘쳐 나는 이 나라에서 이런 소재가 아직까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좋은 소재인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무지 많을 것 같은데, 원어민 선생과 함께 진행하는 회화반을 중심으로 한 영어 학습 이야기는 별로 재미없다. 존대어가 서툴어 늘 반말로 한국말 하는 영어 선생이나, I love you long을 번역하면 [사랑하지롱]이 된다는 식의 개그에 그치고 만다.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9급 공무원 나영주(이나영 분)의 캐릭터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앞 뒤 보지 않고 열심히, 적극적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한국의 전통적 여성 캐릭터와는 다르다. 동사무소 직원들의 술병 돌리기에 의한 결정으로 영어학원에 나가게 되었지만, 나영주는 혀를 굴리지 않는 조형기식 막가파 발음에다 눈치코치없이 조금은 순수하고 조금은 맹한 모습으로, 꾸미지 않고 직선적으로 돌진한다. 계산에 빠르고 이기적인 현대 여성의 캐릭터는 아니다.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 위한 로맨틱 코미디의 한국식 여주인공이다.
치마만 두르면 쉴새없이 작업성 멘트를 날리는 바람둥이 박문수(장혁 분)는 백화점 여성 구두 코너 판매원이다. 그는 어릴적 해외로 입양된 여동생과 만나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 얄미운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를 미워할 수 없다. 천성이 착하고 순박한 그는, 이제 어떻게 나영주와 맺어지는가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김성수 감독은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한다. 에피소드는 너무 속이 뻔하게 들여다보이고 또 후반으로 갈수록 축축 늘어진다. 지루하게, 시계를 자꾸 보게 만든다. 촌철살인식의 짧지만 폭발적으로 터지는 웃음의 순간도 없다. 김상진이었다면, 장진이었다면,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영화 속에는 박문수 가족(홀어머니뿐이다)과 나영주 가족(4인가족은 물론, 시골 사는 외조부 외조모까지 등장한다), 동사무소 동장을 비롯한 공무원 팀과, 캐씨(안젤라 켈리 분)를 중심으로 한 회화팀 등이 두 주인공의 배경으로 둘러쳐져 있다. 그들과 남녀 주인공의 관계도 과장되어 있다. 세수대야에 얼굴 집어 넣고 누가 더 오래 숨을 참나 시합하는 딸과 아버지, 같은 백화점에 근무하는 청소부 어머니와 판매원 아들, 말끝에 ~유를 붙여서 영어선생의 한국말을 존대말로 고쳐주려는 충청도 출신 피자배달원, 특별히 새롭지도 않고 우습지도 않다.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다. 연기뿐만이 아니라 연출 스타일 자체도 힘 빼고, 돈 좀 벌어보겠다고 만들었으니 더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너무 돈을 쫒아가면 돈은 달아나는 법이다. 관객들이 웃기 위해 제 발로 찾아 오게 만들어야지 관객들보고 어서 웃으달라고 쫒아가서는 안 된다.
기둥 줄거리야 로맨틱 코미디답게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과정에서 해외로 입양된 박문수의 여동생이 한국을 방문하는 에피소드와, 영어회화팀이 나영주의 외조부가 사는 시골로 MT 가는 에피소드가 삽입되어 있다. 이나영은 오랜 부진에서 벗어나, 비록 그 장래는 예측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전혀 색다른 면모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