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는 고대 문화의 재생, 즉 ‘클래식’의 부흥을 이상으로 하는 운동이었으며, 문학이나 미술에 있어서는 확실히 그 사실을 인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클래식’의 음악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고대 그리스·로마의 음악 자체가 후세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또한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르네상스, 즉 개성이나 인간적 감정의 눈뜸이라든가 명쾌하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 동의 반영을 음악에서 찾아내려 한다면, 이미 ‘아르스 노바’에서 음악의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도 지역적인 차이가 있는데, 대략 15세기말부터 16세기에 걸친 음악의 대표적인 담당자는 기욤 뒤파이(Guillaume Dufay, 1400?~1474)를 중심으로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에서 활약한 ‘부르고뉴 악파’와, 이어 이 악파의 영향을 받고 플랑드르 지방에서 번영한 이른바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가들이었다. 이 두 파의 음악가들은 주로 교회 음악으로, 특히 그 최고의 형식인 ‘미사곡’의 예술적 완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플랑드르 악파’의 대음악가 조스캥 데 프레 (Josquin des Préz, 1450?~1521)는 교회 음악이 간과하고 있었던 인간의 감정을 되찾은 최초의 작곡가였으며, 고전적인 폴리포니 양식을 완성하는 데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마르틴 루터가 데프레를 격찬한 것도 까닭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아드리안 빌라르트(Adrian Willaert, 1490?~1562)도 이 악파의 중심적인 음악가의 한 사람이었는데, 이윽고 베네치아로 옮기고 후에 바로크 음악과 결부되어 가는 독특한 스타일을 정립하였다. 앞서 악보 인쇄와 출판을 행한 베네치아는 당시의 선진적인 음악문화 도시로서, 이곳으로 옮겨간 빌라르트의 악풍은 이윽고 현란한 색채와 힘찬 극적 효과를 갖게 되었다. 그가 창시한 기악의 ‘리체르카레(Ricercare)’ 형식은 후에 ‘교회 소나타’나 ‘푸가(독주곡)’로 발전하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플랑드르 악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음악가 오를란도 디 라소(Orlando di Lasso, 1532?~1594)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답게 여러 가지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플랑드르 출신이었으나 이탈리아와 영국을 여행하고 1556년 이후는 뮌헨에서 살았다.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의 양면에서 바로크 음악의 선구라고 할 만한 신선하고 대담한 악풍을 정립하여 국제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2000곡이 넘는 곡을 썼다고 하며, 세속 음악으로는 독일어의 리트, 프랑스어의 샹송, 이탈리아어의 마드리걸 등 각국 특유의 성악곡을 쓰고 그 다채로운 재능을 나타냈다.
이처럼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가들은 온 유럽에서 활약하며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사를 추진했는데, 라소와 동시대 인물인 로마의 대음악가 조반니 팔레스트리나(이탈리아)가 걸은 길은 그들과는 전혀 달랐다. 16세기의 음악의 중심은 베네치아와 로마로서, ‘베네치아 악파’가 진보적이었음에 비해 팔레스트리나(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 악파’는, 같은 ‘플랑드르 악파’의 대위법적인 기법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오로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회 음악 완성에 힘쓰고 있었다. 교회 음악의 타락이 자주 지적되었던 르네상스의 시대에 팔레스트리나(이탈리아)는 무반주의 ‘아 카펠라(a cappella: 사원풍)’ 스타일에 의해 교회 합창 음악에 최고의 종교적 표현을 주는 데 성공한 음악가였다. 그의 걸작 「교황 마르첼스의 미사곡」은 오늘날 예술 음악으로 감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