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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은 난고 김병연이 14년 동안 은거하였을 뿐 아니라, 생의 종명 지로 정한 곳이다. “생거(生居) 진천, 사후(死後) 용인” 라 했다. 생활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진천에서 살고, 산소 자리는 산이 많고 땅이 따뜻한 용인이 좋다는 뜻이다. 행운 유수처럼 떠돌던 그의 발길을 붙든 화순은 과연 어떤 매력이 있었을까, 내심 많은 기대를 하고 나는 집을 나섰다.
화순(和順)의 품 안은 무등산과 백아산을 두 축으로 어머니 가슴 같이 드넓은 모후산자락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답고 편안한 어머니 젖줄 같은 동복호와 옹성산을 바라보니, 몸과 마음이 젖어드는 화순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영산강과 섬진강이 누에의 등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지니, 나도 그 안에서 안식을 위한 풍류의 고치를 짓고 싶어진다. 자연의 사랑이 충만한 우윳빛 젖줄을 먹고 사는 고장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만나는 사람마다 향토애와 자부심이 참으로 대단하다. 가는 곳마다 문화 유적지에 대해 물어보면, 환한 미소와 함께 친절한 답변에서 산사람의 푸근한 정과 넉넉한 인심을 느끼곤 한다.
이곳 경치 또한 산자수명할 뿐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인 화순 고인돌 유적지와 백성이 부처인 땅 운주사가 있으며, 도시민의 피로를 풀어주는 온천과 휴양림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음식 맛은 우리 고유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세계적인 음식명 가가 많다. 한 마디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문명만은 깊은 산골이라서 그런지 백성의 형편은 매우 곤궁하였다. 그래서그런지 주민은 늘 좋은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며 아프고 저린 현실 속에서 미래를 향한 희망의 강줄기를 바라보며 깊은 위로를 받지 않았나 싶다.
화순의 믿음인 운주사는 또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도선 국사가 비기를 가지고 건립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절이기도 하다. 구름이 머물다 가는 사찰이라는 뜻에서 운주사(雲舟寺)라 명명할 정도로 깊고 깊은 산중에 자리 잡고 있어 공기 또한 청정하기 이를 데 없지 않은가.
운주사는 도선 국사가 공사바위에 앉아 공사를 진두지휘한 곳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인들에게 명하여 새벽이 되기 전에 천불천탑을 만들어 부처가 세상인 불국정토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희망 아래 천인들이 불탑을 부지런히 만들어 세우던 중 한 동자승이 일이 하기 싫어 꾀를 내어 닭울음 소리를 내니, 천인들은 새벽이 온 줄 알고 모두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때 미처 세우지 못한 미완의 두 부처님이 산 중턱에 누워있는 와불이 내게는 아주 인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 후에도 운주사를 찾은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와불을 세우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작가 황석영도 장길산을 방편으로 와불을 세우고자 했으며, 임권택 감독도 아제아제 바라 아제를 통해 불국정토를 염원하지 않았나. 하지만 아직도 두 부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하늘을 향해 누워만 있다. 아직도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리는 미륵 부처가 이 세상에 오실 때가 아니란 말인가.
그날 닭울음 소리만 들리지 않았더라도 산자락에 우뚝 서서 세상을 구제했을 미륵 부처님은, 그런 세속 사람들의 아쉬움과 조급한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전혀 미동도 없다. 다만 솔바람 소리와 불경을 벗 삼아 깊은 침묵의 동안거에 들어 계시지 않는가. 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미완성으로 멈춘 와불이 비로소 세상을 향해 우뚝 서는 날, 그날을 위한 속인의 꿈은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지리라! 우리는 모두 마음의 고향인 이데아를 현실 속에서 늘 꿈꾸며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단 한순간도 미래를 향한 희망이 없다면 예고 없는 삶의 폭풍을 또 어떻게 참고 견뎌낼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미래는 항상 현재보다 조금 나은 내일이 있으리라는 꿈 하나를 지팡이 삼아 세상 개화와 진보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가.
화순의 자랑인 신비한 거석 여행지는 고인돌 유적지이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문화상과 사회 구조, 정치세계는 물론 그 당시 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무덤 형태이다. 고인돌이 많은 것은 이곳이 예부터도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란 것을 입증하는 얘기다. 예나 지금도 사람들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정착하는 것이 양지양능(良知良能)의 이치 아닌가.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보존가치가 매우 높아 2000년 12월 2일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화순 효산리 및 대신리 지석묘군” 은 세계적 가치를 지닌 문화적 유산지임을 확인하여 주는 곳이다. 그래서 유네스코의 허락을 받아야 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최대의 고인돌은 마고 할매가 치마폭에 돌을 싸가지고 가다 치마폭이 터져 놓고 간 돌이다. 마고 할매가 소변을 본 곳이 구멍이 생겨 그곳에 돌을 던져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핑매고인돌과 온갖 모양의 고인돌이 그 일대에 넓게 퍼져있다.
또한, 이곳은 산세가 수려하여 경치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맑은 강이 많아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자연처럼 살고 싶어하든 선비들이 선호하든 고장이었다. 그렇기에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고 살겠다는 선비의 단아한 정자들이 많다. 자신이 품은 높은 뜻을 끝까지 꺾지 않고 세상에 세우려다 추방당한 선비들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절개 높은 선비들도 아주 많다. 조선 중종 때 왕도정치를 실현키 위해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펴다 훈구파의 모함으로 이곳 능주로 귀양와 사약을 받고 하직한 정암 조광조의 적려 유적과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된 최신 두는 이곳에서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등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마친 도원 서원이 있다.
송순의 호를 따서 이름붙인 물염정(勿染亭)은 바위절벽이 병풍을 두른 휘어진 창량천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정자는 선비정신처럼 단아한 절개와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진 아담한 정자이다. 물염 송정순이 지었다고 전하며, 외손들인 금성 나씨들에게 물려주어 오늘날까지 관리하고 있다. 정자 앞에는 적벽에서 잠들었다고 하는 김삿갓의 시비와 동상이 깔끔하게 서 있다.
오늘 최대행사는 즉석 백일장과 김삿갓 따라 하기가 열리는 장소로 ‘이서 망향정’이다.
망향정은 굽이굽이 비포장 된 산길을 실타래처럼 감고 돌아 올라가 도착한 화순 적벽이다. 기묘사화 후 동복에 적거 중이던 최신 두가 중국 소동파가 즐겨 찾던 곳으로, 신선이 놀다갔다는 중국 적벽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하여 적벽이라 이름 붙여진 곳이다. 시선(詩仙)이던 김삿갓이 여러 차례 적벽 선경에 취해 떠날 줄 모르고, 끝내 이곳에서 신선이 되어 승천한 곳, 화순 적벽의 그 절경에 취해 나 또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책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듯한 높은 절벽과 푸른 수국 같은 산세와 세상 근심을 다 담을 수 있는 푸른 물결은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 휴양지로 선비들에게 최적의 마음 수양 지로 사랑받지 않았나 싶었다.
적 벽을 바라보고 날아갈 듯이 지어진 정자에서 우리 문인들은, 예향의 산 증인인 판소리 동편제의 명창, 송순섭 선생의 ‘적벽가’ 소리 한 자락을 듣고 있는 내 마음이 곧 선경이다. 200여 년 전에 난고(蘭皐) 김삿갓이 누렸던 풍류의 도에 나 또한 흠뻑 빠진다. 가슴은 학처럼 고고함에 젖어들어 출세 간의 경지를 넘나들던 극치의 한순간이었다.
1박 2일 동안 화순 땅을 순례하면서, 김삿갓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양반가문의 자제로서 할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을 찌를 뿐 아니라, 탐관오리의 병폐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었다는 강한 비판의 글로 장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머니를 통해 듣게 된 슬픈 가족사를 듣고 난 후부터 그는 삶의 중심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연자방아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일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가족의 오명이 마음의 깊은 족쇄의 그늘을 드리운다. 그당시 양반 사회의 끝없는 부패상을 지켜보면서 삶의 가치와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는 혼돈을 맞게 된다. 그것이 그가 평생 바람처럼 방랑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그 부패의 중심에 자신의 할아버지가 있고, 비판의 당사자가 자신이었다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을 양심 있는 학자로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리라! 그것이 평생을 두고두고 주홍글씨가 되지 않았을까.
젊고 푸른 날, 세상을 정의롭고 아름답게 구현해 보리라는 청운의 갈매기 꿈을 가져보았지만, 현실은 이미 그가 꿈꾸던 세상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이상이란 것을 알지 않았는가. 그런 현실적 절망을 일찍 체득한 그는 평생 하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큰 죄인이라 생각하여 하늘을 가릴 만큼 큰 삿갓을 쓰고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 아픔에 머물지 않고 잘못된 체제와 제도, 세도 정치의 부패에 당당히 풍자로 맞서 올바른 세상 구현에 소명의식과 긍지를 삼지 않았는가. 그런 쓰리고 강한 신념으로 써 내려가는 마음의 시어는 도탄에 빠진 백성에게는 답답한 삶의 체증의 소화제요, 하루하루를 오뉴월 땡볕처럼 견뎌야 하는 가난한 생활고를 잊게 하는 시원한 강바람과 다름없었다. 그는 선지식을 전하는 세상 부처요, 깨달은 사람이자 눈 뜬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때로는 지혜로운 의사가 되기도 하고, 망집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에게는 그 강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뱃사공 노릇을 톡톡히 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를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지금까지 살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의분과 정의감이 넘치고 인도주의적인 평민사상으로 무장한 채, 해학과 재치로 풍류로 한 세상 살다간 조선 후기 천재 시인이며 풍운아의 시선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는 개인적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사회적 승화로 피워낸 수련 같은 그 맑고 고운 지성의 향기가 품어내는 청초한 여운은 진정 아니었을까. 산처럼 우직하고 흙처럼 변함없는 착한 백성 편에 서서 그릇되고 부패한 양반 사회를 비꼬는 풍자와 해학 넘치는 시 한 수는 마치 불볕 더위를 식히는 소낙비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를 우리가 신화의 존재로 추앙하는 이유이지 않은가. 어떤 물욕이나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사람으로서 매임 없는 그의 드높고 고고한 정신세계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를 풍류 시인이라 불렀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무후무한 시선(時仙)으로 자리매김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지금도 그의 발자취를 좇고자 후손들은 시나브로 이곳 종명 지를 찾지 않던가.
진정한 풍류 정신이 무엇일까? 그것은 마음이 흐르는 물길, 즉 탐욕이 자신을 묶을 수 없도록 청정하게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정신이라 생각한다. 자유롭게 주인정신으로 곧은 절개를 지키며 사는 것이기에 세속인은 마음뿐 실천하기 어려운 삶의 길이다. 집을 떠나 전국을 유랑하는 아버지를 찾아 모시기 위해, 김삿갓의 아들이 장성하여 아버지를 찾아 세 번이나 집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끝내 데려갈 수 없었던 마음의 해우소는 진정 무엇이었단 말인가! 천륜마저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니, 그의 절개 깊이와 높이가 하늘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의 마음 지기는 자연이요, 선비정신의 곧은 절개만으로는 한세상 살기에는 너무나 아픈 현실의 이데아를 우주 이치인 근원에서 찾고자 그렇게 고단한 마음의 방랑길을 재촉하며 평생 살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에 세상 그 어느 것도 김삿갓의 방랑길을 멈추게 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그의 세상 뜻은 사람과 신의 경계에서 고뇌를 통한 우주적 승화를 문이재도 (文以載道)로 구현한 것이리라. 그에게는 그 길만이 이 땅에서 감내해야 할 존재 이유였고, 참 지식인의 또 다른 역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참 자유인으로 살다 갔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은 끝내 떨치지 못하고 허공에다 둥둥 북을 치며 화순 산천에다 무한한 고독감을 훌훌 털어 놓으며 치유 받았으리라. 그러기에 속세의 한 인연으로 엮인 가장으로서의 호박 넝쿨 같은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없는 부끄러운 영혼이기에 고향 하늘에 머물지 못하고 타향을 끝없이 떠도는 근본적인 이유였으리. 그 숙명 같은 인간적 비애를 가슴에 푸른 멍처럼 평생 달고 살 수밖에 없었던 가장과 남편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런 마음 허기를 김삿갓은 화순 땅에서 심신의 안정을 찾았기에 마침내 이곳에 정착한 것이다.
상처 난 마음의 치유제가 된 이곳은, 빼어나도록 수려한 자연경관과 산을 닮아 순박하도록 때 묻지 않은 넉넉한 마을 인심이었고, 절개를 지키다 유배 온 학자들과 벗할 수 있었기에 안식을 얻어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이리라. 그는 이승의 옷을 화순 땅에 조용히 벗어놓고 승무 춤을 추면서, 신선이 사는 곳으로 봉황처럼 훨훨 자유롭게 날아갔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일러 방랑시인이라 부르며 그의 정신세계를 더듬어 보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의 절개 높은 선비정신의 결정체인 풍류를 이해하며 음풍 하고자 하나 마음뿐, 속인들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도인의 선경(仙境)인 듯 아득한 꿈길이다.
그때 어디서 백로 한 마리가 푸른 창공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강 건너 화순적벽으로 날아가 살포시 앉는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지극한 눈길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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