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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초에서 13세기 초까지 약 2백여년 동안 요, 금, 송 세 나라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세력 균형을 이루며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했던 사막의 왕국 서하西夏..
서하는 티벳계열의 민족인 탕구트족과 5호 16국 시대 북중국을 지배했던 북위의 탁발선비족(타브가치)의 잔존 세력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로, 전성기에 동쪽은 황하, 서쪽은 옥문관, 남쪽은 난주, 북쪽은 고비 사막에 달하는 40만 평방 제곱 킬로에 달했고 보유하고 있던 군대의 총병력은 무려 50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서하란 송의 입장에서 불리던 이름이고 서하인들 스스로는 대하大夏라 불렀죠. 하지만 서하란 이름이 더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편의상 서하라고 부르겠습니다.
서하를 세운 탕구트족은 지금의 감숙성 일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가 서기 756년, 당나라에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의 통제가 약화되자 점차 자립할 움직임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이 평정되고, 당시 한창 성장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던 신흥 강국인 토번(티벳)와 이 탕구트족이 연합할 것을 우려한 당나라에 의해 탕구트족은 764년 오르도스(금주 이북, 하주 동부)의 동남부로 강제 이주되었고 이후 평하부平夏部로 불리워졌습니다.
당 희종僖宗때 하주절도사로 임명된 평하부의 수령 탁발사공拓跋思恭은 881년 황소의 난이 발생해 당의 수도인 장안이 반란군에 점령되자 1만의 기병을 이끌고 황소군을 섬멸하여 장안을 수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이로 인해 탁발사공은 883년 당으로부터 하, 은, 유주를 다스리는 하국공夏國公으로 봉해짐과 동시에 당 황실의 성씨인 이씨 성까지 하사 받았습니다.
오르도스 서남부를 장악한 평하부는 광활한 목조치를 중심으로 대량의 가축을 방목하는 한편, 황하 주변의 비옥한 토지를 개간하여 농업에도 종사하였습니다. 또한 오지烏池, 백지白池에서 석염(염지에서 생산되는 소금. 해안선이 내륙에서 먼 중국에서 소금은 귀중한 생필품이죠)을 생산해 교역 자원으로 삼았습니다.
황소의 난을 기점으로 평하부가 오르도스 서남부에서 확고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는 사이, 각 지방에서 절도사들의 할거를 막지 못하던 당나라는 907년 황소의 부하였던 주전충의 손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
그 후 중원은 5대 10국이란 혼란기에 빠져 들었고 오르도스의 평하부는 중원의 세력들에 대해 "밖으로는 신하라 하되, 안으로는 자립하는 형태의 국가로 행세한다"는 생존 전략을 구사해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멀리 중원 북방에선 한차례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탁발사공의 후손인 이인복이 평하부의 수령으로 있을 무렵, 멀리 만주 서부의 시라무렌 강에서 일어난 신흥 유목민족인 거란족이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영웅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일대 제국을 세웠던 것이죠.
거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로 고구려의 후계 국가인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를 완전히 석권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몽골 초원으로 진출하여 고비 사막 이북과 이남마저 장악하였습니다. 이렇게 거란의 판도가 팽창함에 따라 평하부와 거란이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자 당시 하북에 웅거하고 있던 후당 정권은 평하부와 거란이 서로 연합하여 자국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후당의 명종은 933년 평하부 수령 이인복이 죽자, 평하부에 대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후당의 침공은 평하부의 굳건한 방어에 막혀 실패로 끝났고, 후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평하부는 이 해를 기점으로 점차 자립의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거란 및 중원의 왕조들과 맞설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반대로 평하부 침공에 실패한 후당은 국력의 소모를 가져와 자중지란에 빠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고 말았으며 그 후, 몇 차례의 쟁탈전 끝에 중원은 960년 조광윤의 송나라에 의해 통일되었습니다.
송태조 조광윤이 죽고 2대 황제에 오른 그의 동생인 송태종 조광의는 요나라(거란)와의 전쟁에서 보였듯이 호전적인 행동으로 유명하며, 이는 곧 평하부에 대한 무력 행사로 나타났습니다.
조광의는 982년 평하부에서 수령의 승계를 놓고 내분이 발생하자 평하부의 귀족들을 회유하여 하주, 은주, 유주 등을 송조에 헌납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평하부의 다른 지배층의 반발을 샀으며 그들은 송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984년부터 은주 및 하주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요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조광의는 평하부의 공격을 받자 요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투입하여 평하부를 멸망시키려는 무력 진압을 강행했습니다. 또한 평하부를 고사시키기 위해서 송과 탕구트족간의 무역을 금지시키는 한편 평하부의 근거지인 하주를 철저히 파괴하는 등(994년) 초토화 작전도 전개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주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련의 전쟁(982년~997년), 일명 하주지쟁은 결국 평하부의 승리로 끝났으며 평하부는 996년 송의 적대 세력인 요나라의 성종에게 귀부해 평하부의 독립적인 지위를 강화시키는 한편 요와 송의 대립 관계를 이용해 송 진종으로부터 다시 하주와 은주, 유주를 총괄하는 절도사의 직책까지 받아 냈습니다.
하주지쟁에서 승리한 평하부는 이후 하서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해 서역 무역을 장악하였으며 오르도스와 하서 지방을 석권한 평하부는 1038년 이원호 때 휘하의 동산부, 남산부를 주축으로 서하 제국을 창건했습니다. 군주의 호칭을 왕이 아닌 황제로 고치고 나라의 이름은 대하, 수도를 흥경부(은천)로 정하는 등 국가로서의 명실 상부한 자주적인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습니다.
서하 황제가 된 원호는 송나라에서 내려준 조씨 성을 버리고, 탕구트식 성씨인 탁발로 고치는 한편 연호도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라고 고쳤습니다. 또 한자를 모방해서 만든 독자적인 문자인 서하 문자의 제정, 역시 독자적인 관제의 확립, 궁전의 수축 등을 추진하여 요나라, 송나라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황제 국가임을 과시하였습니다.
(관직은 문관·무관과 함께 상사上司, 중사中司, 하사下司의 3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행정구역은 4부府, 11주州, 7군郡, 6현縣, 8진鎭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서하 문자로 된 기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이원호의 건원 칭제와 서하 건국 소식을 접한 송 인종은 이원호의 이같은 행동을 송황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로 규정한 뒤, 서하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결정 하였습니다.
송 인종은 한기와 범중엄을 서하 방면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1040년 서하에 대한 침공에 나섰습니다. 1040년부터 1042년까지 전개된 송과 서하의 격돌은 호수천에서 송군의 대패로 말미암아 송에게 서하를 무력으로 합병할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승리한 서하도 큰 피해를 입었고 특히 송과의 교역이 단절되어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자 전쟁의 도화선이 된 종주권 문제를 송에 양보하고 대신 송에게 막대한 세폐를 얻어내는 편으로 정책을 전환하였습니다.
이리하여 1043년 서하의 제기로 양측의 화의 교섭은 1044년 서하의 칭신을 조건으로 타결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서하가 송에게 신하라 칭하였지만 대신 서하는 매년 송으로부터 비단 13만 필, 은 5만 냥, 차 2만 근을 상납받게 되었으니 사실상 서하측이 큰 이득을 본 셈이었죠.
서하는 송과의 화의체결 이후 요나라와 오르도스 북부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에 휩싸였습니다.
원래 서하와 요나라는 1004년 요나라와 송나라 간에 전연의 맹이 체결되는 시기까지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송나라와의 관계를 해결한 요나라가 오르도스 북부 지방을 은근히 잠식해 들어오자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점차 금이 갔고 국경지대에선 양측끼리 소규모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양국간의 충돌은 대규모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는데 이것은 서하측의 외교정책, 즉 요나라와 송나라를 동시에 적대시하지 않는 다는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044년 서하와 송 사이에 우호조약이 체결되자 상황은 급변하였습니다. 종래까지 수동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던 서하측은 무력으로 오르도스 북부의 영유권 문제를 매듭짓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원호의 개전 의지는 요와 서하간의 대립과 충돌을 일으켜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송나라의 은밀한 개입으로 말미암아 더욱 공고해져 결국 1044년 10월, 요와 서하간의 전면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1044년 5월부터 서하의 변방 도발을 주시해 온 요의 흥종은 서하측의 도발이 계획적인 것임을 알게 되자 이번 기회에 서하를 친히 토벌하여 굴복시키겠다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요 흥종은 1044년 9월, 구십구천(현 내몽골 남부)에서 10만의 기병으로 구성된 대군을 직접 인솔하여 금숙성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군대를 삼분하여 서하로 진공했습니다.
요군과 서하군간의 최초의 격돌은 가란산 북쪽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서하군이 요군의 북로군 6만에게 패배하자 이원호는 요나라에 화의를 요청하여 흥종의 승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서하를 완전히 멸망시켜 감숙성 일대를 자국의 영토로 합병하여 동서 무역을 장악하자는 대신들의 압력에 밀린 흥종은 곧 화의의 승낙을 파기하고 오르도스로 대군을 진격케 했습니다.
화의가 거절당하고 요의 대군이 오르도스로 진격해 오자 이원호는 요군에 직접 맞서는 대신 초원 지대에 불을 지르면서 요군을 자국 영토 안으로 깊숙히 끌어 들였습니다. 초원의 방화와 서하군의 고의적인 후퇴로 인해 군량이 부족해져 요군의 전력이 약화되자 이원호는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습니다. 반격에 나선 서하군은 요군을 대파하였고 흥종은 패주하였습니다.
패전한 요는 1048년 이원호가 사망하자 또다시 대군을 일으켜 서하를 침공했습니다. 이번 침공로는 오르도스와 가란산 양방면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요의 두번째 서하 원정은 이전의 실패를 경험 삼아 대량의 식량까지 준비하는 등 주도면밀한 것이었습니다. 가란산 방면으로 침공한 요의 장군 야율직로로는 개전 초기 이원호의 왕비까지 사로잡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서하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고 주요 장군들이 전사하는 등 전세가 기울자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회군해 버렸습니다.
이후 양측은 대규모 충돌 대신 금숙성 일대에서 소규모 각축전을 주고 받다가 1051년 이원호의 후계자인 이경작의 칭신을 계기로 화의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서하의 요에 대한 칭신을 기점으로 요, 송, 서하 삼국간에는 다시 평화국면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1081년 서하에서 내분이 일어나 황제가 태후에게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송은 이 기회를 틈타 서하를 멸망시키려는 의도 하에 50만이란 대군을 동원하여 서하를 침공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군은 서하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명전에서 대패하였습니다. 이에 송군은 작전을 바꾸어 이듬해 하, 은, 유주의 경계지점에 영락성을 쌓고 이를 거점으로 재차 서하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려 하였습니다. 영락성이 완공되자 위기를 느낀 서하는 30만이라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영락성의 공략에 나섰습니다. 이 영락성을 둘러싼 대격전에서 서하군은 송군 20만명을 패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결국 송군은 영락성을 포기한 채 본국으로 퇴각해야 했습니다.
당시 동북아 최강국이었던 요와 송, 두 나라를 상대로 싸우면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던 강한 면모를 보인 서하의 군대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하는 말의 산지와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군의 주력을 기병으로 삼았습니다. 서하의 기병은 철갑과 마갑을 장비한 중장기병이었고 철기鐵騎라고 불리웠습니다.
또, 서하 정규군의 보병은 반드시 낙타를 한 마리씩 의무적으로 가져야 했으며, 기병의 표준 장비는 말 1마리, 낙타 5마리, 전사와 말은 철갑을 두르고, 활 1개에 화살 5백개, 창과 곤봉 등이었습니다.
서하의 중장기병이 입은 갑주는 송군이 특별히 제작한 신비궁같은 강한 노가 아니면 뚫지 못할 만큼 두꺼웠으며, 서하군 중에는 낙타 위에서 소형 투석기인 선풍포로 주먹만한 돌멩이를 사격하던 포병대도 있었다고 합니다.
11세기 말을 끝으로 요, 송, 서하는 삼국 정립을 이루며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던 중 12세기 초, 만주 동부에서 아구타가 이끄는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요를 멸망시키고 재차 송나라마저 양자강 이남으로 밀어내는 위력을 보이자 서하는 이 혼란의 와중을 틈타 요나라와의 접경 지대에 있던 영토 일부를 점령합니다.
곧이어 요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가 금군을 피해 서하로 망명해 오자 금의 장군인 종한은 서하에게 천조제를 잡아 금에 바치면 영토 일부를 할양해 주겠다는 제의를 했고 이에 서하는 금에 신하라 칭하는 한편 천조제를 넘겨 주었습니다.
이후 서하는 금을 도와 송을 공격한 댓가로 옛 북송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지만 금의 세력이 공고해진 1156년을 기점으로 평화 관계를 유지합니다.
약 50년간을 금와 남송의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며 평화롭게 지내던 서하에게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태풍이 몰아 닥칩니다. 그것은 바로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이었죠.
몽골군이 서하에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은 1205년 봄이었습니다. 이때 몽골군은 서하의 변경을 습격해 막대한 양의 말과 낙타를 약탈해 갔습니다. 서하군이 나서서 몽골군과 싸우려 했지만 이미 몽골군은 철수한 뒤였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209년, 이번에는 칭기스칸 자신이 직접 인솔하는 몽골 대군이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합니다. 서하의 북방 요새였던 올로하이에는 5만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야전에서 몽골군과 대결하던 서하 장군 고량후는 전사하였고 결국 올로하이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성 안에 남아 농성전을 벌이던 서하 왕자 이충상은 사로 잡혔습니다.
올로하이 성을 함락시킨 몽골군은 이제 서하의 수도인 흥경 인근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서하는 금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는 한편, 도성 안에 주둔하고 있던 10만의 군대를 보내 흥경 외곽에서 몽골군과 접전을 치렀으나 몽골군의 유인-매복에 걸려 절반이 전사하고 사령관 외명령공이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서하의 사신을 접견한 금의 영제(위소왕)은 서하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한 지 6개월이 지나자, 결국 1210년 서하의 군주 이안전은 성에서 나와 낙타와 비단, 옷감, 매 등의 공물과 자신의 딸을 바치고 칭기스칸의 신하임을 인정했습니다. 이에 만족한 칭기스칸은 군사를 돌려 몽골로 회군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무릎을 꿇었다고는 하지만 서하 정부는 내심 몽골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며 이는 1219년 칭기스칸이 호라즘 원정을 감행하기 전, 서하에게 병력을 보낼 것을 요구하자 재상이던 아자 감부가 "우리에게 손을 벌릴 정도로 충분한 병력도 없는 자가 무슨 대칸이란 말인가?"라며 거부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답변에 격노한 칭기스칸은 일단 분노를 억누르고 예정대로 호라즘 원정에 나섰고 완벽한 대성공으로 끝난 서방 원정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서하에 대한 최종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칭기스칸은 매우 격정적이고 격렬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결코 감정만으로 결단을 내리는 적은 없었습니다. 그의 행적을 보면 놀라우리만치 냉정하고 합리적입니다)
서하측으로서도, 칭기스칸에게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전국토에 총동원령을 내려 30만이란 대군을 규합하였고 1226년 가을, 몽골군과 서하군은 서하의 수도 흥경성 외곽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결정이었는지 서하군은 결코 말기의 금이나 송군처럼 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칭기스칸이 직접 지휘하는 몽골군과의 결전에서 전멸하였습니다.
서하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끝까지, 결사적으로 저항한 서하에게 미친듯이 분노한 칭기스칸은 전 서하인의 씨를 말려 버리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몽골비사에서는 이를 "서하인 남녀들의 둥근 것, 흰 것을 없애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하의 수도인 흥경이 함락되자 그의 명령에 따라 이미 항복한 서하 군주인 이현과 재상 아자 감부 및 모든 관리와 병사, 주민들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몽골군에게 도륙을 당했고 서하의 다른 지방에서도 몽골군에 의한 잔혹한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간신히 살아남은 서하 주민 일부는 칭기스칸의 황후 예스이에게 노예로 바쳐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4백여년 간 감숙성 일대에서 이룩했던 서하의 고유한 문명 -각종 도서와 왕궁, 도시들, 언어와 문자- 등도 칭기스칸의 명령에 따라 모조리 파괴되거나 소실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서하 역사의 연구는 상당히 미진합니다.
어쨋든 1227년, 2백년 역사의 전통을 가진 대국 서하는 그렇게 해서 멸망되었습니다. 그 이후 두번 다시 감숙성에는 독자적인 문명을 지닌 국가가 출현하지 못했습니다.
첫댓글 서하...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말이지요..
지도에서 보고 사막+산 한가운데에서 뭐먹고 살았을지 궁금했는데 중계무역이 비법이었군요. 그런데 중계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는 거의 건국=>급 번영=>급 쇠퇴 이런 순서로 가는듯...
칭 기즈칸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가 서하를 공격하다 죽었다고 해서....기억이 남는 나라입죠 ㄲㄲ
칭기즈칸은 남송 정벌중 죽은걸로 아는데...
남송은 꽤 오랫동안 살아남습니다. 쿠빌라이칸대에 와서 비로서 정복당하죠. 칭기즈칸 생전에는 남송과 국경을 접한일도 없지요.
징기스칸 한거 보면 참 막장이라는;;;
슬플역사네요 ㅜㅡ
서하애덜도 잘싸웠지만 문제는 당대 막장테크타시고 달리시던 몽골아자씨들....-_-;;
지도자가 술밖에 모르는 사람인지라
몽골아저씨들 당시 모토가.. 전세계의 영토를 몽골의 목초지로, 전세계의 여자를 자신들의 여자로 만들자~ 였다는걸로 압니다. ㅡㅡ; 유목민과 농경민과의 세계관의 차이인듯 싶네요. 기름진 목초지는 한정되어 있고.. 목초는 누가 키워서 될것도 아니니.. 내 말과 양떼를 먹이려면.. 상대를 완전 없애거나... 철저하게 복속시켜야 가능하다는 시각이니.. 정복지의 정주민들이 소중한 자원으로 보여지지 않았겠죠. 후에 야율초재같은 사람들이 이런 시각을 많이 교정하긴 했지만서도요. 송나라 점령하고 초장기에는.. 한족들 씨를 말리자는 제안도 있었던걸로 압니다. 호라즘 왕국에서 벌어진 일이 중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던 거죠.
강족의 국가 서하나 호라즘이나 고려나 남송이나 셀주크나 같은 몽골의 피해자들
그런데 원래 국명은 대하 입니다. 그런데 중국인이 서쪽에 있다고 서하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