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라산 통신 30 > 외면할 수 없는 4·3 사건 ( 1 )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관광객의 일원으로, 또는 일하는 사람으로 제주도를 찾을 때는 머리 아프다는 핑계로 외면해도 좋았다.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일을, 더구나 성격규정에 아직도 다툼이 있는 사건을 입에 담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내가 접하는 제주 사람 누구도 그 일에 언급이 없고, 눈에 보이는 흔적도 없어 모르는 체하기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명예 제주도민이 된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고, 총 맞고 창에 찔린 상처를 지닌 그들이 입을 다물수록,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래서 먼저 찾아 나선 곳이 4·3 평화기념관이었다.
몇 해 전 킬링 타임 수단으로 2층 전시실만 훑어보았을 때와는 너무 달랐다. 1층 전시실 입구부터가 그랬다. 캄캄한 제주도 현대사를 상징하듯, 동굴 속을 재현한 통로를 따라 전시실에 들어서자 ‘탁’ ‘탁’ ‘탁’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비명과 울부짖음 소리가 귀청을 찔렀다. 총소리 재현 음향효과였다.
그렇게 비명에 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는 아직도 없다. 정부사업으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고, 기념관과 기념공원이 서고, 4월 3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이 된 지금도 피해자 숫자 파악이 불가능한 것이 이 사건의 특징이다. 한 집안이 씨가 마르거나, 뭍으로 외국으로 멀리 도피한 사람이 많아 진상파악이 어렵다는 것이다.
기념공원 추모비에 이름과 주소가 새겨진 희생자 수만 1만 4,231명, 행방불명으로 확인된 사람 3891명, 형적도 이름도 사라져버린 사람을 포함해 2만 5,000 내지 3만 쯤이라는 게 유족회와 기념사업회, 그리고 다수 연구자들의 추산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다.
20세기 대한민국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런 질문이 수없이 되풀이되지만 그 누구도 명쾌하게 원인과 경위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만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건이었다. 원인과 결과에 아무 연관이 없는 국외자로서는 국가사업으로 이루어진 진상조사 결과와, 기념관 전시물이 말하는 대로 이해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기념관의 첫 전시물은 1945년 8월 15일 직후 제주도 지역사회의 정치와 사회경제 현실이다. 9월 22일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제주도지부가 인민위원회로 재편되었고, 미군정 기관인 제59군정중대와는 협력관계였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악질 친일파만 배제되었을 뿐, 좌우익이 골고루 참여한 인민위원회에는 귀국파 유학생 등 지식인들이 많아 대중적 인기가 있었다 한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은 민생문제 탓이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제주도에 대 기근이 몰아닥쳤다. 보리농사 대 흉작이 직접 원인이었고, 엎친 데 덮치듯 콜레라가 창궐해 민심이 흉흉했다. 거기에 미군정의 가혹한 미곡정책이 강행되었다. 일제 때 공출제도와 다를 바 없는 미곡 수집령이었다. 헐값에 곡물을 팔고 싶지 않았지만 강박이 심했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 일어난 경찰의 발포사건은 민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47년 3월 1일 제주 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행사 구경을 갔던 초등학생이 기마경찰 말발굽에 밟혀 다쳤는데, 경찰관이 모른 체 하고 가버려 성난 군중의 소요가 일어났다. 군중이 경찰서로 몰려가자 경찰은 불순분자들의 습격이라고 총을 쏘아 6명이 죽고 8명이 다쳤다.
중앙언론에 ‘제주도는 모리배 천하’라는 기사가 보도될 정도로 경찰간부와 미군장교 부패가 심했던 것도 소요원인의 하나였다. 다시 등용된 일제 경찰과 관리의 횡포와 부패를 속으로 삭이던 도민들은 총격사건을 계기로 파업과 휴학·휴업투쟁에 들어갔다. 세계에 유례가 없다는 민관 합동파업의 요구조건은 발포책임자 처벌, 고문수사 폐지, 유가족과 부상자 생계대책 등이었다.
이 요구는 철저히 외면되었다. 아니, 거기에 머물지 않고 파업을 전 도민을 적대시하는 강경책의 빌미가 되었다.
현지조사를 한 미 군정 당국자가 “제주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라는 보고서를 내자, 경무부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민의 90%가 좌익색체”라고 규정해 물의를 일으켰다. 이른바 ‘빨갱이 사냥’의 전주곡이었다.
그로부터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은 차마 입에 담기 어렵다. 이 일을 처음 세상에 알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한 구절에 대강의 분위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작전명령에 의해 소탕된 것은 거개가 노인과 아녀자들이었다. 그러니 군경 쪽에서 찾던 소위 도피자들도 못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다니! 또 도 피생활 하느라고 마침 마을을 떠나 있어서 화를 면했던 남정네들이 군경을 피해 다녔으 니까 도피자가 틀림없겠지만 그들도 공비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공비에 게도 쫓기고 군경에게도 쫓겨 할 수 없이 피해 도망 다니는 도피자일 따름이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봉기 이래 1954년 한라산 금족지역 전면개방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된 사건이다.” 기념관 전시물은 측은 4·3 사건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4월 3일의 무장대 봉기는 그 날 새벽 2시 한라산 아래 오름 여기저기서 일제히 오른 봉화를 신호탄으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 단원 숙소를 습격한 일을 말한다.
남로당 조직에 대한 검거선풍과 가혹한 고문수사에 무력으로 저항한 사람들이 무장대라고 불렸는데, 그들의 무장은 볼품없었다. 총기는 일제가 쓰던 99식 장총 27정과 권총 3정뿐이었고, 나머지는 죽창과 낫 도끼 같은 농기구였다. 인원도 전 기간 500명을 넘지 못 했는데 정부는 미군정은 강경진압을 합리화하려고 무장대 숫자를 부풀렸다. “남한 각지에서 모집한 백정들”이라느니, “팔로군 출신 북한 공산군”이라고 왜곡 선전했다.
노동절 행사가 열린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에서 발생한 방화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은 조선경비대(육군의 전신)에 무장대 총공격령을 내렸다. 우익청년단원 소행으로 드러난 이 사건을 계기로 군이 작전주도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5·10 총선거를 앞두고는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부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등이 제주에 모여 강경진압 방침을 천명했다. 350명 무장집단 토벌에 군정 고위 책임자들이 현장에 총출동하고, 연대병력과 해병대까지 동원되었다.
1948년 5·10 선거로 대한민국이 탄생한 뒤에는 더 심해졌다. 무장대를 가혹하게 탄압하라는 이승만 대통령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11월에는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다. 무장대의 활동무대인 한라산 중 산간지역 모든 마을을 불 지르고 피란하지 않은 주민을 학살했다. 그렇게 없어진 마을이 86개다.
해안선에서 5km가 경계선이었다. 그 바깥 지역은 주민의 거주가 금지되었다. 해안마을에는 성담이 둘러쳐졌다. 무장대의 접근을 막는다고 밤낮 없이 주민들을 보초에 동원했다. 먹을 것이 없어진 무장대는 식량 조달을 위해 마을을 습격했다. 먹을 것도 빼앗아가고 궐원보충을 위해 젊은이들도 끌고 갔다.
그 다음날은 군경에게 시달렸다. 이중으로 시달리기 괴로워 주민들은 동굴이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경찰은 굴 밖에서 노는 어린이들을 사탕 하나로 꼬여 부모가 숨은 굴에서 끌어낸 사람들을 가혹하게 죽였다. 그런 세월이 7년이었다.
무장대의 반격도 거칠고 끈질겼다. 경찰관서와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숙소를 집중 공격했다. 5·10 선거 후에는 선거사무 관련자들이 주 타깃이었다.
직접적인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었던 사람들끼리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이 의문의 해답은 역시 정치에 있다. 불법행위를 다스리려면 법절차에 따라 조사와 기소와 재판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 국민 모두의 상식이다. 미국이 원한다고 그대로 시킨 한국의 위정자, 전시도 아닌 때에 위에서 시킨다고 ‘충실하게’ 따른 아랫사람들의 맹목은 우리 모두의 수치가 되었다.
이 사건의 성격은 지난 4월 대법원 판결로 매듭지어졌다. 이승만 양자 이인수 등 6명이 4·3 평화재단 등을 상대로 제기한 4·3기념관 전시금지 청구소송 상고심 공판에서 원고가 패소했다. 대법원은 “원고들은 자신의 현실적인 권리침해를 주장할 수 없고, 4·3사건 특별법도 원고들에게 전시물에 이의를 제기할 권리를 부여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그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로써 사건을 둘러싼 분규는 법적으로 일단락되었다. (2017,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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