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벌식 자판에 입문하며
어느 날 잠에 들기 전에 갑자기 '세벌식 자판을 써 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습니다.
그때 제가 알고 있던 세벌식 자판이란 '초성이 두 개 있는 이상한(?) 배열' 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세벌식 자판의 원리 또한 하나도 모르고 그저 인터넷 어딘가에서 세벌식에 관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라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다음 날 아침, 저는 바로 컴퓨터 설정에 들어가 두벌식이었던 한글 자판을 3-90 자판으로 바꾸었습니다. 한컴타자연습을 내려받아 자리연습을 해 보는데 웬걸, 자판을 오른쪽 손부터 쳐서 왼손으로 넘겨 한 자를 치는 방식이더군요. 신기하고 재미있어 저는 연습 삼매경에 빠졌고, 그렇게 입문 이틀 째 되던 날의 타수는 바로 13타였습니다.
독수리 타법으로 신나게 타자를 치던 것의 50 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답답해서 펄쩍 뛸 노릇이었지요. 세벌식으로 더듬더듬 자판을 쳐 내려가다 짜증이 나서 두벌식 자판으로 확 바꾸어 치곤 했고,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아 쓰던 날개셋 입력기와 구름 입력기(Mac)를 홧김에 지워 버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세벌식 자판을 되돌려놓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날개셋 IME를 깔아 세벌식을, 윈도우 기본 IME에는 두벌식 자판을 선택하여 Win+Space 키로 전환해가며 사용했었습니다. 이러니까 세벌식을 포기하지는 않게 되더군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습을 이어 가니 점점 세벌식 자판과 정타법의 장점이 몸소 느껴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벌식 자판을 쓸 때처럼 손이 꼬인다든지 순서가 틀린다든지 해서 생기던 오타가 많이 줄었으며, 좀만 타자를 치면 아려 오던 양손이 이제는 웬만큼 오래 쳐도 말짱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모아주기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 자판을 칠 때의 습관이 잘못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어 타자연습을 할 때는 해당 기능을 꺼 두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또한 잘못된 타자 습관을 고치기 위해 스페이스 바를 마지막 손의 반대 손으로 번갈아 치는 연습이라든지, 백스페이스를 소지로 누르는 연습 들을 병행하니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아 타자 치기가 즐거워지더군요. 한 달을 내리 연습하니 한글 자판만큼은 완벽히 정상적으로 치게 되는 성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실생활에서 세벌식 자판을 이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타수가 상승하였습니다. 처음에 쓸 때 적잖이 당황했던, 키보드의 4열까지 있던 한글 글쇠와 키패드 식의 숫자 배열은 익숙해지고 나니 오히려 전보다 편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3열과 4열의 왼손 배열이 중성과 종성의 조화에 굉장히 큰 신경을 쓴 것이 느껴져 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예로, "좋았습니다"라는 글자를 칠 때 물 흐르듯 쳐지는 리듬감이 예술이지요.) 이제는 세벌식 자판을 정말 잘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들인 노력보다 훨씬 큰 보람이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신세벌식 자판을 만나다
사실, 저는 초반 대다수의 기간에 3-90 자판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 열심히 (3-90 자판을) 연습하다가, 더 나은 세벌식 자판은 없나 싶어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공세벌식"과는 다른 원리를 이용한 "신세벌식"이라는 자판 종류가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첫가끝 갈마들이라는 기술이 아주 획기적이라는 생각에 신세벌식 자판을 쓰기로 마음 먹고, 그중 팥알 님의 "신세벌식 P2" 자판을 선택하여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팥알 님께서 "글걸이"라는 개인 누리집에 상세한 제작 원리와 함께 날개셋 설정 파일을 을려 놓으셨더라고요. 자판을 이용하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고심하신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훌륭한 자판 배열을 선보여 주신 팥알 님께 이 자리에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숫자 열과 기호가 쿼티 자판과 거의 다를 바가 없고, 가운뎃점, 줄표, 가새표 등 실생활에서 많이 쓰는 기호들이 빠짐없이 들어 있어 처음에는 아주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날개셋 타자연습으로 좋아하는 글들을 넣어 열심히 연습했었지요. 윗글쇠(Shift)를 전혀 쓰지 않는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당시에 기세를 모아 영문 자판을 콜맥(Colemak) 자판으로 바꾸기도 했던 터라, 직접 도안을 만들어 키캡 주문 인쇄 업체에 두 자판을 새긴 글쇠의 제작을 맡겼습니다.
이게 그 결과물입니다. 인쇄가 잘 되어 흡족했었고, 며칠 동안 잘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글과 영문 두 자판 모두 쓰지 않아 결국 원래의 키보드 글쇠로 다시 되돌려 놓았습니다.
영문은 다시 쿼티 자판을, 한글 자판은 3-90으로 돌아갔거든요. 영문은 쿼티 자판의 호환성 때문에 도저히 사용하기 버거워 울며 겨자먹기로 돌아간 것이지만, 한글 자판은 그런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신세벌식 P2 자판에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신세벌식 P2 자판을 떠난 이유
(*주의* 이 부분에서는 서술의 편의를 위해 두 자판을 각각 '공세벌식'과 '신세벌식'으로 칭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이유 때문에 신세벌식 P2 자판(이하 신세벌식)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첫째, 힘이 약한 약지-소지의 연타가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어, "용", "냥"이라는 글자를 3-90 자판(이하 공세벌식)과 신세벌식에서 친다고 해 보면,
공세벌식의 경우 각각 쿼티 자판으로 치환하였을 때 "J - 5 - A", "H - 6 - A"으로 소지를 쓰는 일은 받침 ㅇ을 넣을 때의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세벌식으로 두 글자를 쳐 보면, "J - X - A", "H - W - A"이 됩니다. 약지를 치고 곧바로 소지를 이어 쳐야 하지요. 이때 손가락의 관절에 상당한 무리가 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ᅟᅭᆼ 과 ᅟᅣᆼ 꼴의 글자를 접하는 때가 생각보다 많아서 칠 때마다 거슬리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둘째, 일부 겹받침 조합이 애매하다.
이것은 공세벌식 자판도 어느 정도 안고 있는 문제점입니다. 공세벌식에서 ㄵ 받침을 쓰기 위해서는 "S - !(Shift+1)"라는 어마무시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요. "삯" 등에 사용하는 ㄳ과 "곬" 등에 사용하는 ㄽ 받침도 비슷하게 조합하여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 받침은 굉장히 드물게 쓰기 때문에 사실 문제를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3-91(공병우 최종) 자판을 사용해도 되지요.
그러나, 신세벌식 자판에서는 자주 쓰는 겹받침을 쓸 때도 애매한 손가락 놀림이 필요한 사례가 있어 문제가 됩니다. 바로 ㅄ 받침입니다. 신세벌식 자판에서 ㅄ 받침을 넣기 위해서는 "E - Q"의 순서로 중지와 소지를 써서 넣어야 하는데, 이때 중간에 낀 W 자리의 약지가 자꾸 말썽이었습니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자꾸 W 자리의 ㄹ이 함께 쳐지는 오타가 났고, 이는 고속으로 타자를 쳐야 할 때 큰 불편감을 주었습니다. 억지로 약지를 띄울 때마다 손가락이 아프기도 했지요. 상당히 자주 쓰는 받침이기 때문에 이 부분이 자주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신세벌식 자판은 쉬프트 사용을 배제하기 위하여 쌍시옷(ㅆ)을 제외한 모든 겹받침을 삭제하고 홑받침의 조합으로만 넣도록 하였는데, 때문에 왼손이 "모음-받침 1-받침 2"까지 총 세 번의 연타를 받아내야 할 때가 많아 왼손이 쉽게 피로해지기도 하였습니다. ㄺ, ㄲ, ㅄ, ㄻ, ㅀ, ㅆ 등의 겹받침을 한 타에 입력할 수 있는 공세벌식 자판이 이 점에서는 제게 좀 더 만족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셋째, 3열의 왼손 배열, 즉 모음의 배열이 불편할 때가 있다.
신세벌식의 경우 QWERT 자리의 모음 배열은 ㅒ, ㅑ, ㅐ, ㅓ, ㅕ 순입니다. 덕분에 쉬프트나 4열을 쓰는 일 없이 편리하게 중성을 입력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 때문에 ㅓ 와 ㅕ 를 바꾸어 잘못 쳤을 때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가기 쉽고, 종성과 조화하였을 때 손가락의 각도가 다소 불편할 정도로 애매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걱정의 "걱"을 두 자판으로 넣어 본다고 해 보면요, 공세벌식에서는 "K - T - X" 순으로 왼손 글쇠인 T와 X 를 힘쓰는 일 없이 부드럽게 넣을 수 있지만, 신세벌식에서는 "K - R - C" 순으로 왼손 글쇠끼리의 각도가 거의 90도가 되지요. 때문에 손의 긴장이 발생해서 타자를 칠 때 불편감을 느끼게 됩니다.
"아뇨, 없어요 그냥.", "안녕하세용", "균핵균", "나트륨" 등의 글자를 신세벌식으로 쳐 보시면 위에서 제가 느낀 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모아주기를 사용할 수 없다.
이는 첫가끝 갈마들이를 사용하는 신세벌식 계열 자판의 특성 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신세벌식 자판들은 왼손 글쇠들의 순서를 틀리면 갈마들이가 반대로 되어 아주 이상한 글자를 넣게 되는 경우가 많아 해당 단점이 더욱 두드러지게 느껴집니다.
더 많은 이들이 세벌식 자판을 사용했으면...
그래도, 공세벌식 자판이든 신세벌식 자판이든 표준 두벌식 자판보다는 제게 더 나은 사용 경험을 안겨주었습니다. 90년대, 공병우 박사님과 한글 문화원이 건재했고 세벌식 자판 사용자들의 교류가 활발하던 때에는 제가 이 세상에 없었던 터라 그 시절의 열기를 느껴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기세를 몰아 그때 3-90 자판이든 공병우 최종 자판이든 복수 표준이 되었다면 지금보다는 세벌식 사용자의 세가 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당시에 활약했던 선대(?) 분들의 노력 덕에 윈도우든 Mac이든 지금까지 두 종류의 세벌식 자판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입니다. 더 늦기 전에 많은 이들이 세벌식 자판도 쓸 만하다는 것, 어렵지 않고 익숙해지면 오히려 편하다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남기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한달정도의 짧은 이용기간에 비해 꽤 심도있게 신세벌식의 문제에 접근하신 것 같네요.
저도 비슷한 이유로 팥알님과 3-2015를 만드신 소인배님께 'ㅓ'의 위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지요.
제가 만든 신세벌식M은 1~3줄 아랫글쇠(non-shift)에 한해서는 공세벌식과 일치하게끔 했습니다.
하지만 왼손에 연타 부담이 가중되는 신세벌식 자체의 문제를 피하기는 쉽지 않네요.
결국 날개셋을 벗어나서 사용하려면 직면하는 한계 때문에 현재는 공세벌식 최종을 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인구 감소 이슈와 키보드 자체의 필요성 문제(모바일 기기 + AI의 발전)로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세벌식을 이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을거에요.
2006~7년 쯤 제가 처음 세벌식을 익힐 때와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세벌식 유저들이 사람들이 세벌식 자판의 통일과 표준화를 원했는데 지금은 모두 반대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아래 또바기님께서 AI를 통해 통찰한 세벌식의 미래를 보면 세벌식은 결국 호기심과 독특함에 이끌린 매니아 소수가 사용하는 자판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남은 사용자끼리 소소한 교류라도 유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요즘 태어나는 세대들은 키보드를 거의 접하지 않고 자란다는 말도 있는 만큼 전통적인 PC의 입지가 많이 약화되고 있는 지금 세벌식 사용자가 다시 늘어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겠군요. 지금 나와 있는 개선된 세벌식 자판들도 각각의 지향점이 달라 하나로 통일되기도 쉬워 보이지 않고요. 사실 말이 쉽지 않다 정도이지 "불가능하다"가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파편화가 심한 것이 사실이지요. 이대로라면 세벌식 자판을 표준화하기에는 요원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스플릿 키보드 등 커스텀 배열을 직접 만들어 쓰는 사용층에게 세벌식 자판을 어필하는 방향도 세벌식 자판의 명맥을 잇는 데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실제로 관련 커뮤니티를 보니 세벌식 자판(주로 신세벌식 계열)을 사용하는 분들이 많이 있더군요. 하나로 통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각자의 세벌식 커스텀 배열 제작이 활성화되어 매니아층의 취미 생활의 한 부분으로서 녹아들게 한다면, 절대적인 사용자는 적을지라도 세벌식 자판의 매력을 알아 주는 사용자끼리 취미로서의 교류가 끊기지는 않을 것이고, 실사용할 때에도 물리적인 키보드 배열 커스텀과 맞물려 상승 효과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말씀하신 신세벌식M도 한번 진지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소는에이치 제가 바로 스플릿 키보드 사용자로서 스플릿 키보드에 맞는 세벌식 배열을 개발중입니다. 기존 세벌식 배열들은 스플릿 키보드에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요. 사실 다 완성되었는데 최종 테스트중인 단계네요. 세벌식 배열을 아예 매니악한 단계로 가보는 게 좋을거 같아요.
@wigglymapp 오, 참신세벌식 이후로 이렇다 할 새로운 배열은 없었는데 기대됩니다!
정성이 담긴 글을 올려 주신 것에 감사 드립니다.
어디부터 다뤄야 할지 모를 만큼 신세벌식 P2 또는 세벌식 자판 전반에 관한 문제와 이야깃거리가 참 많은데, 일단 겹받침에 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세벌식 자판에서도 3-90 자판처럼 윗글쇠 + 일반 글쇠로 겹받침을 한꺼번에 넣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3-90 자판처럼 일부 겹받침만 넣는 것에 그치지 않고 ㄳ · ㄾ을 비롯한 모든 겹받침을 한꺼번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날개셋으로 쓴다면 기호 확장 또는 옛한글 조합 기능이 들어간 신세벌식 P2에서는 글쇠 배열 → 옵션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전처리 수식에서 'H=0'을 'H=1'로 바꾸면 윗글쇠를 눌러 겹받침을 한꺼번에 넣는 기능을 켤 수 있습니다.
이 기능을 기본적으로 끈 까닭을 다음 3가지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겹받침을 많이 따로 둘수록 한글 배열을 받아들이거나 쓰는 일에서 사람들에게 짐이 됩니다. 배열이 복잡하게 보이는 시각 효과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두째는 신세벌식 자판을 지원하기 위한 입력기 개발이 더 번거로워집니다. 현재 신세벌식 자판을 구현하는 프로그램 방식이 입력기 또는 입력 환경마다 조금씩 다른데, 겹받침 넣는 기능까지
대비하지 않은 처리 방식을 따른 경우에 이 기능을 더 넣기가 곤란할 수 있습니다.
세째는 겹받침 배열에 관한 취향이 너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ㅍ→ㄿ, ㅁ→ㄻ처럼 연관되는 홑받침-겹받침을 짝짓는 배열 방식을 선호했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3-91 자판에 가까운 겹받침 배열로 고쳐 쓰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겹받침 배열은 취향에 따라 쓰는 기능으로서의 성격이 짙어서 한 가지 배열로 통일할 수 없을 겁니다.
@팥알 제가 3-90 자판을 잠깐 쓰다가 3-91 자판으로 넘어갔던 까닭 가운데 하나도 겹받침 때문이었습니다. 3-90 자판에서는 한꺼번에 넣지 못하는 ㄳ · ㄵ · ㄼ 등을 3-91 자판에서는 일관성 있게 한꺼번에 넣을 수 있는 것을 처음에는 좋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3-91 자판은 너무 많은 겹받침을 담고 있는 데다가 ㅈ과 ㄵ의 자리에서 볼 수 있듯이 형평에 어긋나는 면도 있습니다. ㄽ · ㄾ · ㄿ은 차라리 기본 배열에서 빼면 좋겠다 싶을 만큼 기억 부담을 높이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세벌식 자판을 오래 써 온 관성 때문에 겹받침 한꺼번에 넣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궁리하다가 신세벌식 자판에 같은 방식을 넣어 보았고 갈마들이 공세벌식 자판에도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대중화까지 생각한다면, 따로 들어가는 겹받침이 이미 쓰는 사람에게 쓸모 있는지와 함께 새로 익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비치고 얼마 만큼의 부담이 되는지도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한글 낱자를 넣는 방법이 두 가지 이상이 된다면, 어떤 방법을 사람들에게 권해야 하는가부터 갈등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갈마들이 공세벌식인 3-2015 P/M 자판 자판은 ㅓ 자리 문제도 있었지만 겹받침 자리도 문제였습니다. 공세벌식 자판은 기본 배열부터가 겹받침을 홑받침으로 조합하여 넣기 껄끄러워서, 겹받침이 따로 넣는다는 전제를 미리 깔고 있습니다. 공세벌식의 틀에서 홑받침만으로 겹받침을 매끄럽게 조합할 수 있는 기본 배열을 마련하는 일은 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합의는 어렵고 골치는 아픈 겹받침 문제는 제가 공세벌식 자판에서 신세벌식 자판으로 아예 옮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세벌식 자판에서 겹받침은 기본적으로 요구되어 온 요소가 아니고, 공세벌식 자판들보다는 홑받침으로 겹받침을 조합하기가 편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겹받침을 넣을 때에 같은 손가락을 거듭 쓰는 때를 줄이는 것이 신세벌식 P2의 목표였습니다.
신세벌식 P2은 최악을 피하여 차악을 고른 결과물입니다. 딱 한 번만 해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힘이 쏙 빠지게 하는 타자 동작이 나오는 것을 최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사람마다 손 크기나 손가락들의 길이가 서로 다르고 손놀림도 다르기 때문에 무엇을 최악으로 느끼는지도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제가 볼 때에 세벌식 사랑 모임 등에서 이야기되는 타자법이 성인 남자를 우선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자판 배열을 다룰 때에 일반적인 성인 남자를 우선하지 않고 타자기 쓰던 시절에 타자 교본에서 권장하지 않는 타자 동작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손목을 바닥에 붙여 쓰거나 손목을 비틀거나 접는 것은 손이 작은 사람(특히 어린이)에게서 나오기 어려운 자세인데, 이런 자세는 신세벌식 P2이나 제가 제안한 자판 배열을 쓸 때에 권장하지 않습니다.
저도 한가하거나 힘들 때에는 손목을 붙이고 글쇠를 누르기도 하지만, 바쁘게 작업할 때에는 손목을 떼고 팔(특히 왼팔)을 조금 더 움직이는 타자법으로 씁니다. 팔 움직임으로 손가락, 손목이 불편한 자세가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예전에는 당연해서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지만, 3-2015 자판이나 3-D2 자판 등이 옛날의 타자기 교본에는 매우 드물게 소개된 타자법을 전제로 깔고 나왔다는 것에서 따로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타자법이 서로 다른 것을 빠뜨리고 이이야기하다면, 어떤 점이 편한지 불편한지에 관한 의견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며 대화가 평행선을 달릴 수도 있을 겁니다.
@팥알 주신 댓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자판을 만드신 분께서 직접 댓글을 달아주시니 영광입니다. ^^
쓰신 댓글을 보고 타자법을 바꾸어 손목을 조금 더 띄우고 한동안 신세벌식 P2 자판을 사용해 보았습니다. 제가 본문에서 느낀 손가락의 통증 부분이 상당히 나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제가 느끼는 불편한 점들이 아직 신세벌식 자판과 그 타법에 덜 익숙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판을 조금 더 사용해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사실 영문 쿼티 자판과의 정합성이라든지, 풍부한 기호 확장 기능이라든지 하는 것이 정말로 세벌식 자판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자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390 자판을 사용하는 내내 신세벌식 P2 자판에 미련이 남았었습니다.
공세벌식의 겹받침 배치 문제도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받침 문제에 있어서는 신세벌식을 통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고, 모든 겹받침을 홑받침의 조합으로(또한 윗글쇠의 사용은 배제하고) 넣는 방안이 제일 깔끔한 것 같습니다. 자판을 설계하실 때 의도하신 대로 겹받침 한 번에 넣기 기능을 끄고 최대한 적응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91-> p2 -> 390 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힘이 약한 약지-소지의 연타가 자주 발생한다. 이점 때문에 p2 포기하고 390으로 정착했는데 제게는 확실히 손이 편한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