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중재 제도 개선을 바라는 법학교수·변호사 140인 선언
- 위헌적인 직권중재 제도는 철폐되어야 한다.
11월 15일 현재 177일을 넘은 가톨릭중앙의료원(강남·여의도·의정부 성모병원)의 파업은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173일째인 목포가톨릭병원, 171일째인 한라병원도 마찬가지이다. 27일을 넘는 집단단식농성, 로마 교황청방문 등을 통한 대화 호소에도 아직 가톨릭의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수 십명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이미 10여명이 넘는 구속자 발생, 해고 등 병원사업장에서는 매년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파업 이후 가톨릭중앙의료원은 노조지부장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의 자술서를 요구하고, 경희의료원은 재단 관계자가 노조간부를 만나 민주노총 탈퇴를 종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가톨릭중앙의료원 소속 모 병원장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비난하면서 '외부 보건의료노조 집행부가 주도하는 병원 파괴행위' '오로지 투쟁과 파괴를 통한 민주노총의 목적달성만이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유인물까지 공공연히 배포한 바 있다. 교구까지 나서서 파업을 비난하는 글을 신자들에게 배포하였다. 이는 본 사태에 대하여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을 정부와 사용자들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정부와 교회, 병원은 직권중재제도를 빌미로 병원 노동자들의 파업이 실정법을 위반한 '불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병원노동자들이 위반한 것은 오로지 헌법에 위배되는 실정법일 뿐, 그 내용이나 형식에서 정당한 것으로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고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71조 (공익사업의 범위 등)는 병원사업을 비롯하여 통신산업, 전기, 가스, 철도 등 많은 사업장을 필수공익사업으로 지정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필수공익사업장에서 분쟁이 벌어지면 해당 사업장은 조정신청을 할 수 있고 그 조정기간이 15일이다. 그리고 조정이 실패하면 다시 15일간 중재에 회부된다. 그리고 중재재정이 내려지면 위법하거나 월권인 경우에만 행정소송을 통하여 이를 다툴 수 있을 뿐이다. 결국, 필수공익사업장은 조정기간 15일, 중재기간 15일 등 합계 30일 동안 쟁의행위가 금지될 뿐만 아니라 중재재정이 내려지면 아예 쟁의행위를 할 수 없다.
이는 결국 필수공익사업장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을 사실상 박탈하여, 헌법상 보장되는 노동 3권 중의 하나인 단체행동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다.
지난 5월 23일을 기준으로 보건의료노조 산하 98개 병원사업장이 조정을 신청하여 그 중 8개 병원은 교섭을 계속하기로 하여 조정이 종료되지 않았으나, 나머지 90개 병원 중 23개 병원은 조정성립, 그리고 폐업 신고한 병원 일부를 제외하고 남은 57개 병원 중 53개의 병원사업장이 직권중재에 회부된 것을 보더라도 직권중재제도로 인한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이 얼마나 침해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도 지하철노조와 문화방송노조의 파업과 관련하여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9명중에서 5명이 직권중재제도에 대하여 위헌 판단을 내린 바 있다. 다만, 그 수가 위헌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한 정족수(6명)에 이르지 못하여 합헌 결정이 내려졌을 뿐이다.(헌법재판소 1996. 10. 26. 90헌바19, 92헌바41, 94헌바49 결정). 다시 말하면 내용적으로는 위헌이나 형식적으로만 합헌인 것이 바로 직권중재제도인 것이다. 그리고 최근 2001년 보건의료노조의 파업 당시 이루어진 중앙노동위원회 중재회부 결정에 관한 직권회부결정무효확인 사건에서 서울행정법원은 노동조합법상의 직권중재제도가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하여 기존의 합헌결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위헌심판제청 인용결정을 하여 이 사건이 아직도 헌법재판소에 계류중이다. (서울행정법원 2001. 11. 16.자 2001구23542 결정). 이미 한 번 헌법재판소에서 결정이 내려진 사안에 대하여 법원이 재차 위헌심판제청결정을 인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현행 직권중재제도의 위헌성은 명백하다.
한편 이 제도의 운영실태나 현실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그럴듯한 입법취지와는 무관하게 단체행동권을 봉쇄하기 위한 수단,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기능해 온 위헌적인 제도라는 점이 더욱 명백해 진다. 직권중재제도는 형식적으로는 단체행동권만을 사전적으로 박탈하는 제도이지만, 실제는 단체교섭권 및 단결권까지 침해하게 된다. 현실을 보면 사용자들은 직권중재제도를 빌미로 단체교섭에 성실한 자세로 응하지 않는다. 불법을 감수하면서까지 파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노조가 파업을 포기하는 순간 교섭력은 생기지 않으며 결국 사용자의 시혜만이 집행부의 존속을 보장해 줄 수 있다)을 하거나, 설사 파업에 들어가더라도 중재재정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나올 것이 기대되고, 덤으로 불법파업을 빌미로 한 노조와해 내지 무력화시도도 가능하므로(더 작은 기대로는 자주적인 집행부의 제거) 사용자로서는 결코 교섭에 적극적으로 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 직권중재제도 아래에서 노동조합은 파업권을 포기함으로써 사용자의 시혜에 의존한 교섭만을 하는 노조로 전락하거나(그것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불법파업의 혐의를 감수하고서라도 파업을 하든지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용노조가 아닌 한 조합원들의 총의 곧 요구의 수준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조직이 노동조합이고 보면 그 생존을 위하여 결국 후자인 파업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권력투입, 간부들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및 구속과 형사처벌, 간부들 심지어 조합원들과 신원보증인에게까지 가압류와 손해배상청구, 그리고 해고를 비롯한 징계가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정부와 교회, 병원은 노사관계의 안정은 정당한 법치주의와 대화를 통한 평화적 방법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지 위헌적인 악법과 형사처벌로 강제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법학교수, 변호사 140명은 병원 장기파업이 무려 177일을 넘어서고 있는 오늘, 그리고 11월 16일 행정법원이 직권중재제도를 위헌제청한지 1년을 하루 앞둔 11월 15일에 또다시 위헌 소지가 있는 이 제도로 말미암아 불법파업 시비속에 대화가 중단된 채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있는 가톨릭중앙의료원, 목포가톨릭병원, 한라병원 사태가 신속하고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을 촉구하면서 아래와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첫째, 오는 11월 16일 직권중재 위헌제청 1년을 맞이하여 헌법재판소는 조속한 심리를 통해 이 법 조항이 위헌임을 확인하는 판결을 내릴 것을 촉구한다.
둘째, 공공 부문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을 박탈하고 사용자의 불성실교섭을 부추겨 파업을 유도, 결국 노사평화를 깨뜨리는 위헌적인 직권중재제도는 즉각 철폐되어야 한다.
셋째, 위헌적인 직권중재제도에 의하여 발부된 체포영장은 즉시 철회되어야 하고 노조간부에 대한 형사처벌은 중단되어야 한다.
넷째, 병원 장기파업 사태 해결을 위하여 정부는 더 이상 악법에 의존한 탄압과 방관만 하지 말고, 노사간 대화와 타협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평화적인 대화분위기 조성과 중재에 적극 나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