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계승한 고려의 자주성 낭가사상에 나타나
고려는 한강 이북의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나라다. 이 지역은 먼 옛날 고구려의 영토였다. 때문에 궁예는 한때 자신이 세운 나라를 `후고구려'라 부르면서 그 지역의 호족과 백성들에게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부추겼다. 궁예를 내쫓고 이 지역의 세력을 장악한 왕건도 궁예가 내세웠던 고구려 계승 의식을 더욱 강화하였다.
고구려 계승 의식 - 고려 자주성의 버팀목
왕건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먼저 국호를 `고려'라 하였으며,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을 `서경'이라 하고 장차 도읍을 그곳으로 옮길 의도마저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왕건뿐만 아니고 제3대 정종과 중기의 인종도 갖고 있었다.
인종 때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 `평양 천도 운동'이 그것이다.
고구려 계승 의식은 바로 고려의 북방 정책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이 북진정책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겠다는 것으로, 고구려의 계승자로서의 고려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정책이요 고려를 `고려'되게 버틴 정신적인 지주였다.
고려의 역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려의 이 `고구려 계승 의식'이야말로 고려의 대외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였다는 점이다.
고려 초기 이 계승 의식이 북진 정책을 통해 강하게 추진되었을 때에는 거란 여진 등 거듭된 북방 민족과의 충돌에서 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었지만, 이 계승 의식이 약화되어 북진 정책에서 추진력이 멀어졌을 때에는 북방 민족과의 대결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겨우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따라서 고구려 계승 의식은 고려가 대외 관계에서 자신의 자주성을 견지하는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버팀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 강열했던 고구려 계승 의식에 변화가 오게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고려 초기에 시행한 과거제의 시행과 관련이 깊다. 과거제는 제4대 광종 때부터 시행하기 시작한 관리 선발 제도로, 태조 왕건 사후에 불안정했던 고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태조 왕건은 호족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취한 혼인 정책으로 수많은 후비와 자녀를 두었다. 왕자의 뒤에는 호족 출신의 외척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외손인 왕자를 왕위에 올리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초기 왕권을 위협하는 음모와 반란들이 있었는데, `왕규의 난'은 대표적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자신의 이복형들인 혜종과 정종이 비명에 가는 것을 보면서 즉위한 광종은 호족 출신 외척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감행했다. 한편 전에 자유민이었다가 신라 말 혼란기에 노비로 되었던 사람들을 풀어 주는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및 백관이 공복을 착용토록 하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모두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의도와 관계가 깊다.
과거제 시행으로 고려의 전통 사상 퇴조해
그런데 이 과거제의 시행은 고려 초기의 사회 사상과 정권 담당자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과거제의 시행으로 그 시험 과목인 유교가 부상되었고 거기에 따라 사회사상 및 정권 담당자들의 형성에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첫째 변화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졌던 고려의 건국 주체 세력(호족)들의 사상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전통 사상(여기에는 화랑도 사상을 비롯하여 선종 중심의 불교 사상과 풍수 지리설 등)이 다소 퇴색하고 유학 사상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광종과 그 아들 경종을 이어 즉위한 성종은 최승로 같은 유학자의 건의에 따라 고려의 통치 제도 전반에 걸쳐 유교적인 이념을 수용하는 일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따라서 이 급격한 사상 정책 전환에 비판적인 자세를 갖는 지식인과 관료들이 나왔던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성종 때, 거란의 소손녕이 1차로 침입하자 고려 조정에는 서경 이북을 거란에게 넘겨 주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그러나 서희와 이지백은 그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이 때 전 민관어사 이지백은 홀로 "선왕의 연등, 팔관, 선랑 등의 행사를 회복하고 `다른 나라의 이법'을 배척하며, 국가 태평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신명에 고한 연후에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면 화의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지백이 성종이 추진했던 일련의 유교 중심 정책을 비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종이 유교적인 이념에 따라 중화의 문물만 시행하고 전통 사상에 입각한 제반 행사를 소홀히 한 것은 국민 감정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국력을 크게 저하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서경 중심의 낭가 사상파 - 개경파 귀족과 갈등 일으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지백이 주장한 `선랑' 사상을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이 `낭가 사상'이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신채호가 지적한 이 `낭가 사상'은 신라의 `화랑도'와 고구려의 `조의선인(검은 옷을 이은 선인)'과 같은 것으로 단군 시대부터 전래된 고유 사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채호는 화랑이 국선, 선랑, 풍류도, 풍월도로 칭해졌음을 지적하고 이들이 국가의 중진으로 사회 사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 낭가 사상은 신라 진흥왕 대를 거치면서 삼교를 포함하는 균형있는 사상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과거 제도의 시행으로 유교가 발전하면서 정권 담당자에도 변화가 서서히 일어났다. 고려 초기의 정권 담당자는 대부분 한강 이북의 호족들이거나 그 후손들이었다. 그러나 과거제의 시행은 어느 정도의 유교적인 교양과 통치 경험을 가진 자들을 등용시켰다. 따라서 과거 시험에 의해 선발되는 인물들 중에는 호족들의 후손보다는 옛 신라계 귀족들의 후손들이 더 많게 되었다.
묘청의 난 이후 - 자주적 낭가 사상 패퇴
과거제 시행 이후 부각되기 시작한 신라계는 고려 중기에 이르면 개경에서 핵심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사상적으로 유교적 기반 위에 형성된 신라계의 개경파 귀족들은, 초기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견지해 오던 서경 중심의 `낭가 사상파'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 갈등이 만주에서 일어난 금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계기로 `묘청의 난'이라고 하는 정권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이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를 계기로 자주적인 `낭가 사상'이 패퇴하고 사대적인 `유교'가 그 후의 한국 사회를 1천 년 간 지배하여 우리의 역사를 비자주적인 굴종의 역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