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 승암산 태극산 자락
감돌며 소살대는 늦가을 전주천
여문 물살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
한 생을 함께 걷는 길동무와
물억새길 따라 곱게 흔들리며
풍화되고 싶은 날도 있지
전주 향교 은행나무
꽃비에 흠뻑 취한 후에
한옥마을 어슬렁거렸네
저무는 시간에도 조급할 것 없이
빈 주머니 부끄러워할 것도 없이
향교 옆에서 고른
진한 녹둣빛 천가방
샤넬백보다 자랑스레 걸치고
성심여고 옆 칼국수 한 그릇에
이내 황금빛 웃음짓는
시인의 아내, 화가의 남편
마음 한 구석에
향교 경기전 전동성당
은행나무 품은 것일까
소나무 껴안고 물들어 가는
담쟁이 부부,
자본의 거리에 주눅들지 않더군
혼불을 살랐던 최명희,
동문거리에서 헌책방을 하던
소설가 이정환을 생각했지
술병 붙들고 악몽을 견디던
'휴전선' 박봉우 시인을 기억했네
양사재에서 제자를 기르던
가람 이병기 선생이며
노송동 언덕배기에서
조선 소나무 선비로 사셨던
고하 최승범 시인
송욱 시를 내게 낭송하시며
송글송글 땀방울 맺힌 채 붓을 잡던
동서학동 유제식 선생을
그리는 늦가을 해질녘
남문 밖 전동성당 터,
망나니 칼춤에도 목을 길게 빼고
하늘만 우러르던 윤지충 권상연
치명자산에 묻힌
호남의 사도 류항검, 요한 루갈다
전동성당 진북동 숲정이에 뿌린
붉은 피 여전히 살아오는구나
어두워가는 하늘을 저편 흰구름,
갑오년에 완산을 짓쳐오르던
14살 소년장수 이복용이로구나
초록바위에 뿌린
김개남 핏빛으로 물드는구나
온고을 전주,
산 곱고 물 맑은 고장이지만
견훤 이성계의 꿈이 흐르는 곳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
동학 집강소 미완의 개벽 꿈
아직도 간직한 풍남문
맺힌 삶 소리로 풀어내던 권삼득
남도 가락이 울려나는 예향
서러움과 신명 뒤섞은 채로
전주천 삼천천 고산천
어우러져 깊어만 간다
만경강 따라 바다로 가는 길
시월 스무날 달빛 받아
저물수록 빛나는
강, 강물아
ㅡ 이대규, '전주 기행' (2024.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