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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2000년11월18일자에 방영된 800년 논쟁, 삼국사기의 진실은? 의 대본중 그래픽처리등의
불필요한 부분은 빼고 읽기 좋도록 최대한 원본 손상없이 편집된 것입니다.
어느 부분을 보아도 삼국사기가 사대성 역사서라고 단정할 만한 내용이 없는데
무슨 반론을 하였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역사스페셜 조기방영반대 카페에 있는 대본 내용을 올립니다.
보다 정확한 원본을 보시려면 아래 출처의 주소에 가셔서 직접 확인하십시요
(출처: http://cafe.daum.net/kbshistory)
百濟 牟大王 님의 삼국사기는 엄연한 사대주의 역사책이다. 라는
본문에서의 답글중 김태환님의 답글에서
김 태환 : 28권의 본기 중 단 10줄 안 밖의 기사로 삼국사기의 성격을 단번에 '사대주의적'으로 정의 내리시는군요..
역사 스페셜 93회'현존하는 最古의 역사서 800년의 논쟁, 삼국사기의 진실'편을 추천해드립니다.
한시간 남짓하니까 간략하게나마 百濟 牟大王님의 생각에 대한 반론을 보실수 있으실 것입니다.. 07.06.23 00:18
百濟 牟大王 : 아주 오래 전에 봤습니다. 제 주장은 그것에 대한 반론입니다. 07.06.24 19:33
2000년11월18일자에 방영된 내용과 百濟 牟大王 님의 본문과는 거리가 먼 내용인데 어떤 부분에 대한 반론을 하셨기에
그것에 대한 반론이라 하시는지요???
내용이 좀 길어서 불편하시지만 당시 방영된 대본의 내용을 손상없이 최대한 그대로 편집하여 올리니 보다 확실한 반론을
부탁드립니다.
----<< 내 용>-------
역사스페셜 93회 800년 논쟁, 삼국사기의 진실은?
P D : 우종택, 작가 : 정영미. 방송 : 2000.11.18
지난해 11월.이례적으로 한 일간지를 통해 역사논쟁이 벌어졌다.
삼국사기를 그대로 믿을 순 없다는 주장과 삼국사기를 부정하는 것은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삼국사기는 왜 이런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인가.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이 책은 김부식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한 10명의 학자들 이름이 적혀있는 것이다.
고려 인종때 간관 즉 임금의 언론담당이었던 최산보의 이름까지 적은 뒤
김부식은 가장 나중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두었다.
또한 편찬자들은 전대의 역사기록인 수많은 고기를 인용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방대한 자료를 참고해 쓰여진 것이다.
인터뷰/신형식
삼국사기가 현재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 고대사에 대한 구체 실상은 알 도리가 없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삼국사기는 우리 한국사가 고대사를 흘러온 과정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준
가장 기본적인 책이 아니겠는가....이것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 공부하기가 불가능했다고 봐야죠.
고대 복식사에 있어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한 박선희 교수. 삼국사기의 위력은 박교수의 논문에서도 드러난다.
삼국사기 색복조를 통해 면섬유가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었음을 밝혀낸 것이다.
면주포" 여기엔 신라가 생산한 직물 가운데 면과 견을 합성한 면주포가 등장한다..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알아낼수 없었을 내용이다.
인터뷰/박선희 상명대 교수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문익점이 목화를 전해하기 이전까지 한민족은 면섬유를
생산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신라 사람들은 당시 이미 면을 생산했고
또 실크와 합성섬유를 만들고 또 면으로부터 솜을 생산해서 옷에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삼국의 제도, 풍습, 전쟁,인물등 수많은 정보를 수록한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로 들어가는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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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또 방대한 역사책인 삼국사기는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쓰여진 때로부터 오늘까지 800년이 넘도록 비판의 대상이 돼왔습니다.
그 비판중 하나가 김부식이 역사 기록을 조작하고 날조했다는 지적입니다.
삼국사기를 쓰면서 기본 자료로 삼은 다른 여러 역사기록들을 자기 주관에 따라 바꿔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비판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김부식이 자료로 삼은 일련의 역사적 기록들이 단 하나도 전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국이상국집 한 페이지 뜨고
그 전대의 기록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게 하는 유일한 단서가 바로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 안에
들어있는 동명왕편입니다.
이규보는 서문에서 동명왕편을 <구삼국사>라는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을 토대로 썼다고 언급해 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삼국사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동명왕편 기록 뜨고
7월에 홀령에 검은 구름이 피어...7일만에 운무가 걷히고 성곽 궁실이 자연히 이루어져
#삼국사기 기록 올라오고 (고구려 본기중 동명왕편)
4년 4월에 운무가 일어나 사람이 7일간 색을 구분히 못하였다.7월 성곽과 궁궐을 지었다.
동명왕편은 전설적인 이야기를 그대로 적고 있는 반면 삼국사기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부식은 아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표현을 사용해 전설적인 이야기를 역사기록으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을 둘러싼 비판이 끊이지 않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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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재상의 반열에까지 올랐던 당대 최고의 권력가였다.
12세기 고려 상황-그가 활동한 것은 12세기. 거란의 요, 송, 고려의 안정된 삼각구도는 여진족이 세운
금의 등장으로 깨지고 있었다.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로 고려 조정은 요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여론이 양분되기 시작했다.
자료/고려사 - 이때 김부식은 강력하게 급부상하는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화친하자는 태도를 취한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한 것이다.
그 무렵 고려엔 중대한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불+창+군사들(9초) 왕실을 개혁하고, 오랑캐국인 금나라 정벌을 위해
서경 천도를 단행하자는 묘청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금나라와의 전쟁보다는 왕권강화를 통해 민생 안정을 추구했던 실리주의자 김부식으로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 결국 묘청의 난은 김부식에 의해 진압됐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두고 근대사학자 신채호는,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신채호전집-역사를 식민지 시대를 청산할 투쟁의 방법으로 삼은 신채호는 김부식 때문에 조선의 강토가
줄어들게 됐다고 주장했다. 김부식의 사대성 논쟁은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인터뷰/이강래 전남대 교수
신채호 선생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자주성을 잘 반영한 것이 묘청이라고 보았다.
근데 이 묘청의 천도운동을 진압한 총책이 김부식. 김부식에 대한 신채호 선생의 평가 가희 짐작이 가는 것.
여기에서부터 김부식 그리고 삼국사기에 대한 사대성의 규정이 고착되었고,
이것이 별다른 길이 있는 검토없이 그냥 우리 모두에게 공유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중국 성리학을 받아들인 유교 중심의 조선시대 학자들은 어떠할까.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읽으려면 잠이 올 뿐이라고 혹평하기도 하고, 중국 사서와 다르다는 점을 들어
오히려 모화사상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중화주의를 극복한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의견은 또 달랐다. 도리어 중국 사서를 그대로 베껴 자주적이지
못하다는 정반대의 지적을 하고 있다.
인터뷰/이강래
결국은 삼국사기나 김부식에 대한 향후의 평가라고 하는 것들이 전부 평가자들이 처하고 있는
현실의 사회 경제적 처지 자기 관점에서 본 삼국사기의 모습 결국 어떤 시대 어떤 상황이든
삼국사기나 김부식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처하고 있는 시점을 중심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 그렇게 상반된 결과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김부식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삼국사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이강래 교수는 김부식의 정치적 태도로 삼국사기가 재단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자료/신라본기 내물이사금 삼국사기는 크게 역사적 사실과 사론으로 나눌수 있다.
동성동본 혼 관련 논왈로 시작되는 사론은 김부식이 자신의 의견을 적어놓은 것이다.
그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신라의 동성동본혼이 중국의 예법과 다르다는 지적에 대해 무조건 중국 예법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밝혀두었다.
자료/삼국사기 본기와 고려사 세가 비교 왕의 업적을 기록한 대목에 본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본기는 중국 황제의 기록에만 사용할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 본기 대신 제후의 기록이라는 세가로 대신하고 있다.
자료/고기 신뢰 대목 더욱이 우리 고기와 중국 기록이 상반되는 대목에선 신라본기 진평왕 거의 예외없이
고기에 대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또한 편찬자들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우리 것을 강조했다.
인터뷰/이강래
신라시대 특정제도..왕호명칭중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그리고 나서 중국식으로
왕이라고...이렇게 변하지만 이런 신라의 고유한 왕 칭호를 그대로 전한다.
이것은 뒷날 조선시대 학자들, 신라 하대 최초원과도 구별되는 일.
이 학자들은 신라 고유의 왕 칭호를 아화되지 못했다. 즉 중국화되지 못했다 비루한 표현이다
해서 전부 왕이라는 용어로 바꾼다. 그러나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독특한 문화나 용어조차
원래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가고 천명하면서 그대로 살리고 있다.
조선시대말까지 삼국사기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김부식 개인에 집중돼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대주의적이라는 이런 비판들은 사실 김부식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기록에 대한 비판은 각 시대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기록 하나 하나가 정확한 것인가, 그것이 사실인가 이런 것을 검토하고 밝혀내야 역사책에 대한 올바른 비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별 기록의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하고 나선 것이 구한말 , 일본학자들이었습니다.
삼국사기의 백제와 신라 초기, 대략 3,400년동안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믿을 수 없다고 전면 부정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일본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상당기간 우리 사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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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동안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를 비교,연구해 오고 있는 최재석 교수.삼국사기를 부정한
일본 학계의 움직임은 100년동안 조직적으로 진행돼왔다고 주장한다.
인터뷰/최재석 전고려대 교수 구한말부터 19세기말부터 지금까지 거의 조직적으로 고대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도 예외없이
고대 한국은 일본 식민지였고, 동시에 삼국사기는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처음으로 부정한 근대사학자는 일본 사학계의 거두 쓰다 소이치. 일제시대인 1919년부터 시작된 일이다.
쓰다 소이치는 일본서기중 신대 기록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해 한때 일본 우익세력에 의해 재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 우리에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학자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 제국을 위해 그는 고대
역사를 조작했다. 그 역시 황국사관의 충실한 대변자였던 것이다.
그들 주장의 기본은 일본서기였다. 자연 일본서기와 내용이 다른 삼국사기는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최재석
일본 신화시대 700년 계속되었다고.. 그러니까 일본서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일본을 통치했다고
주장...그런 일본서기의 거짓 조작된 내용 중심으로 일본 고대사 써 나가는데,
삼국사기에는 그런 내용이 하나도 없으니까 삼국사기 조작됐다고...
일본 황국 사관에 지장이 되니까 삼국사기 조작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본학자들이 부정하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백제와 신라 초기 역사다.
일본서기에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이 근초고왕.
신라는 내물왕이기 때문에 그 이전 역사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백제와 신라 초기 400년 가까운 역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임나 일본부설을 위해서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해야 했다.
4세기 야마토 정권 시절,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이다.
그 근거로 일본서기 신공왕후조 기록을 내세운다.
신공왕후 49년 서기 369년, 일본 군대가 한반도 남부 7국을 평정해 200년동안 속국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한강 이남 지역에는 특별한 정치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왜가 진출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임나일본부설은 광개토대왕비 신묘년조의 기록이 알려지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이 비문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391년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그 해석과 비문의
성격을 둘러싸고 견해가 엇갈리고 있음에도 일본 학자들은 그들에게 유리한대로 해석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나 일본부설의 가장 큰 걸림돌은 남아있었다. 바로 삼국사기였다.
삼국사기 어디에서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다는, 그 근거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뷰/최재석
다시 말하면 고대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 하나도 나와있지 않으니까
삼국사기는 조작됐다고 해야했다. 그래야 그들의 주장을 펼수 있으니까.
4세기 이전에 강성한 고대국가로 성장했던 백제와 신라! 그러나 바로 이런 삼국사기 기록을
부정함으로써 당시 한반도 남부를 소국들만이 난립하는 정치적 공백상태로 만들었다.
결국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부정은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시키려는 도구였다.
쓰다 소이치에서 시작된 이런 주장은 그동안 진행된 고고학적 발굴 성과들과
국내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많이 수정돼왔습니다. 지금은 일본 안에서조차 임나 일본부설을 믿는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중에는 또다른 이유를 들어 삼국사기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렇게 연대가 표시돼 있고, 어떤 곳에는 월까지 나와있습니다.
<요즘같이 달력이 없던 시대에 어떻게 날짜를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겠느냐
아마도 김부식이 필요에 따라 제 맘대로 날짜를 써넣었거나 아니면 중국 기록을 그대로
베꼈을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문제가 있다 > 바로 이런 지적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삼국사기 안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총 266회의 천문관측 기록이 있습니다.
일식에 관한 기록도 있고, 유성이나 운석이 떨어진 기록도 있습니다. 혜성출현도 적어놓았습니다.
이 기록들이 실제 일어난 현상인 지 만약 실제 일어난 것이라면 중국 기록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지 알아보겠습니다.
현대의 천문관측은 망원경으로 모든 별자리의 움직임을 파악하지는 않는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행성의 움직임은 망원경없이도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일어날 것까지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
이제는 컴퓨터를 통해 과학적인 계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인터뷰/박찬경 서울대 천문학과 박사과정
일식이나 월식, 오행결집같은 현상들이 앞으로 미래의 몇천년몇만년후에 일어날 것인가 그런걸 정확히 예측 가능.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과거에몇백 몇 천 몇 만년전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컴퓨터로 정확하게 추정 가능.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실제 일어난 현상일까. 최초의 일식기록을 입력했다.
최초의 일식 이것이 기원전 54년의 일식 모습이다. 삼국사기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고대 천문현상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를 계속해온 서울대 박창범 교수.
박교수는 고대 천문기록들이 중국 한국 일본 삼국에만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세 나라의 고대 일식
기록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리고 각각의 기록들이 실제 일어난 현상이었는 지 분석했다.
인터뷰/박창범
전체적으로 삼국사기 80%, 중국이 75%, 일본은 45%.일본은 절반만 실제 일어난 현상.
특히 삼국사기 초기 기록 한 200년 정도까지 초기 기록을 보면 89%가 실제 일어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가 주변 국가들의 다른 사서보다 훨씬 더 신뢰성이 높다 이렇게 우리가 얘기할 수 있죠.
그런데, 일식은 지구상 여러 지점에서 관측이 가능하다.
삼국사기가 중국 기록을 베끼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현장오디오/저는 이것을 일식도라고 부르는데요.
지구상의 각 지점에서 어느 한 일식이 일어날 때 각 지점마다 볼수 있는 일식의 최대식분을 표시한 거다.
이 안에 점선 찍은 데는 계기일식 볼수 있는 곳. 90,50 30도 나뉘어진다. 그 지역은 부분일식 볼수 있다.
이 쪽으로 가면 제로 나오는데, 그러면 일식을 볼수 없다는 건가?
이런 일식의 경우 선 바깥쪽 지역에서는 일식을 볼수 없다.
일식을 볼수 있는 곳과 볼수 없는 곳을 표시한 일식도. 이 일식도를 이용하면 관측지점을 알 수 있다.
그래픽/최대식분도를 통해 본 관측지점 삼국사기의 모든 일식 기록을 입력해 보았다.
결과는 관측지점이 모두 다르게 나타났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중국이나 일본의 관측지점과 달랐다. 이것은 바로 삼국사기가 다른 기록을 베끼거나
조작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인터뷰/박창범
실제로 일식이 어디서 일어났느냐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할.수 있는데
지금 우리가 컴퓨터로 사용해 일식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니고서는
제 생각에는 도저히 임의로 일식기록을 베낀다든지 또는 만들어내 가지고 지역적인 차별을 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김부식이 중국 기록을 베꼈다면?
중국 기록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지역으로 나타났어야 하는데 고구려는 훨씬 북위도로,
신라는 훨씬 저위도로 나타나는 것이 그런 과정을 부인 할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중국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독자기록도 있다.
컴퓨터로 측정해본 결과 이 기록들 또한 실제 일어난 현상이었다.
독자기록중에는 낮에 태백성을 봤다는 태백주현 현상도 있다. 태백성이란 금성을 가리킨다.
낮에 금성을 관측하는 것은 기록하고가능한 일일까.
낮에 관측하기 힘들다. 태양빛이 밝아서..금성 좌표 사전에 알아야한다.
육안으로 가능한가? 가능하다. 저녁때는 잘 보이겠지만 낮에는 겨우 보일까말까...어렵다고 봐야죠.
낮에 금성을 육안으로 확인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한다.
하늘이 짙푸른 빛을 띠는 가을과 겨울. 즉 계절적인 조건과 금성이 밝아지는 주기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224년의 태백주현 확인(17초) 224년 12월로 기록된 삼국사기의 태백주현. 놀랍게도 금성의 밝아지는 주기와 일치했다.
인터뷰/박창범
지금으로부터 천800년전부터 태백주현 기록 나오는데 그 시기 이런 기록 있다는 것이 대견스럽다
그렇다면 삼국시대에는 행성의 주기를 계산할 수 있는 천문 관측기술이 있었을까.
고조선시대 유적을 연구중인 이용복 교수.
삼국 이전에 벌써 수준높은 천문관측 기술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별자리가 정확하게 그려진 고인돌들이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초 확인된 이 고인돌 별자리는 기원전 15세기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터뷰/이용복 서울교대 지구과학과 교수
삼국시대 초기에는 엄청난 수준높은 관측이 진행되지 않았겠느냐 그런생각이 든다.
그게 단순히 별자리 관측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게 신앙적인 대상으로 별을 관측했겠죠.....
상당히 높은 수준의 관측도 이뤄지고 그 당시의 사람들의 과학적인 수준도 높지 않겠느냐 하는 추정도 한다.
태백주현 기원전의 천문현상까지 기록으로 남겨둔 삼국사기.
이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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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문제는 하나씩 해결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최근 국내 중견 사학자들 사이에선 또하나의 논쟁이 뜨겁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그대로 따를 것인지,
아니면 믿을 수 있는 것만 부분적으로 선택해 따를 것인지 최근의 논쟁은 이런 것입니다.
이 책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삼국지 위치 동이전입니다.
280년경에 중국사람 진수가 쓴 것으로, 삼국사기와는 달리 당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삼국의 초기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책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3세기 경 백제와 신라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당시 한반도 남부 모습은 70여개의 소국으로 나눠져있고 권역별로 소국들이 연맹체를 이뤄 마한 진한 변한으로
묶여져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고 알고 있던 삼국의 초기 모습인데요. 지금까지의 통설입니다.
그런데 이 통설이 잘못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주장의 근거는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구체적으로 삼국사기 백제 본기와 신라본기를 살펴보면 이미 AD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주변 국가들을 통합해 나가고 있음을 알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3세기까지 신라 백제가 조그만 소국에 불과했는데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 신라는 주변 지역을 통합한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습니다.
최근 논쟁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대의 기록인 삼국지와 12세기 기록인 삼국사기. 과연 어느 기록을 더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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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논쟁을 불러일으킨 서강대 이종욱 교수.
그는 왜 『삼국지위지동이전』을 근거로 한 통설을 부정하는 걸까.
인터뷰/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
삼국사기가 저술된 시기는 1145년. 삼국지 한조는 280년대.
그렇기 때문에 280년대까지의 역사는 삼국지 한조의 기록을 토대로 연구한다는 게 타당하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
그러나 고려의 역사를 송사 열전으로 연구할 수 없고 조선의 역사를 명사나 청사의 열전으로 연구할 수 없는 것처럼
삼국지 한조의 기록을 가지고 바로 3세기까지의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삼국지 한조의 기록을 검토해보면 백제나 신라의 왕 이런 이야기가 없다.
왕의 계보도 없다. 중국 사람들은 백제나 신라의 정치적 성장, 삼한지역의 정치적 성장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 그 원인을 이 교수는 삼국지의 편찬 목적에 두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한전은 삼국지 제30권 위지. 그 중에서도 동이전 끝부분에 실려있다.
기록 그 내용 또한 삼국의 정치적 성장에는 관심이 없음을 지적한다.
막로국의 이름이 두 번 나오기도 하고 변한과 진한을 합한 나라가 24국이라 했지만 실제는 26개국.
변한, 변진 이름을 혼동한 대목 등 국가 관련 사항을 일관성없이 허술하게 다룬 대목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위나라와 삼한의 관계(18초) 이런 부정확한 기록이 실린 것은 당시 위나라와 삼한 지역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위나라는 낙랑 대방을 통해 무역에 필요한 간접적인 정보를 입수할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인터뷰/이종욱
삼국지 찬자들이 직접 삼한 지역에 와서 견문하고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있엇던 여러 정보들을 모아가지고 또 간접적인 자료들을 통해서
결국 삼국지 하한조를 편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 하안조에는......
그 하나 하나의 시대를 우리가 설정할 필요가 있죠. 그렇지 않고서는 이 자료를 그대로 삼국시대 3세기 역사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종욱 교수는 삼국지 한전이 그리고 있는 모습은 기원전으로 올라가고(3초) 3세기가 아닌 훨씬 이전 단계로
올라갈 가능성이 지도 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록/삼국지 염사착은 진한 우거수로서 그 근거로 한전에 실린 내용중 연대가 확인되는 기사들을 염사착 벌채 제시한다.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 통제 불가능 20년에서 29년 사이에 진한의 이름이 벌써 등장하는 걸로 한이 대방군을 공격
궁준이 전사 봐서 삼한의 형성은 기원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적인 정치적 성장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대방태수를 전사시킬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삼국지 기록대로 소국 상태의 국가라면 불가능한 일들이라는 것이다.
인터뷰/이종욱
삼국지 하안조의 기록을 따르면 3세기까지의 각 지역에 모두 소국들
신라도 소국 사로국..백제도 소국...삼국지 기록을 따를 경우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따를 경우 만들어지는
역사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걸 알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는 기원전부터 주변국들을 병합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3세기에 이르면 백제는 이미 충청권까지, 신라 또한 경북 일대를 통합하고 있다.
이번 논쟁의 또다른 당사자인 경북대 주보돈 교수.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이기도 한 주 교수는 삼국사기에 자료 있는 모든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밝힌다.
인터뷰/주보돈 경북대 박물관장
삼국지라고 하는 책 위략이라고 하는 책을 근거로 작성. 위략이라고 하는 책은 3세기 전반에 쓰여진 것.
그래서 전성이 되었던 기간으로 생각하면 2세기 후반까지 소급가능. 기원전 1세기까지 또는 기원후 1세기까지
소급해 보는 것은 삼국사기 기록에 맞춰대기 위한 것. 편법에 지나지 않는다.
내용을 분석해보면 그 근거를 찾지 못했다.
기록/삼국지
옥을 귀하게 여기고... 삼국지를 신뢰하게 된 근거중 하나로 한 사회가 금은보다 구슬을 더 귀하게 여겼고,
유곽 무관 : 장례때 관 대신 곽을 사용했다는 대목을 지적한다.
관이 없는 유적 그동안의 고고학적 발굴이 이런 기록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실제 3세기 이전 무덤에선 관이 없는 것들이
나타났고, 곡옥 다양한 형태의 옥 장신구들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금과 은은 출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3세기가 넘어서야 무덤들의 부장품이 풍부해지고 화려한 금관도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3세기 이후에 가서야 국가의 세력이 강성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주보돈
3세기라는 것이 그런 거대한 정치세력이 만들어지기 위한 준비단계의 모습은 고고학적으로 충분히 증명.
삼국사기 처음부터 기원전 1세기부터 큰 국가 만들어 출발했다고 하는 것은 지금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는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픽/지도
삼국지 한전을 근거로 한 지금까지의 통설과 삼국사기를 토대로 한 새로운 주장.
삼국사기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삼국지 한전의 기록을 따를 것인지
주보돈 교수를 비롯해 고대사를 연구해온 많은 학자들이 삼국지 한전의 기록을 따랐던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당대 기록을 최우선시하는 것이 역사학의 abc라고 합니다.
그러니 12세기 기록인 삼국사기보다 당대기록인 삼국지를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더욱이 지금까지의 유적 발굴 결과를 보면 3,4세기에 들어와서야 고분 부장품이 풍부해지고 다양한 금속제품이 발굴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종욱 교수의 주장은 무척 새롭고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 교수의 주장대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게 되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됩니다.
삼국의 국가 형성 연대도 조정돼야 하고, 토기는 물론, 여러 유물의 연대 또한 새롭게 정리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수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것은 고대사의 체계 자체를 바꾸는, 일대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최근 이 논쟁에 해답을 제시할 중대한 발굴이 진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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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아파트 공사를 하던 중 발굴된 풍납토성.
거대한 성벽과 대량의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학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백제 초기 것으로 보이는 기와. 상당한 지위의 관직명칭으로 추정되는 대부라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그리고 제사터로 알려진 여자형 건물터도 있다. 그와 함께 왕궁 제사에 사용하는 말머리뼈도 발굴됐다.
이로써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500년 한성도읍지의 왕궁터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성의 규모였다. 폭 40미터, 높이가 최고 9미터에 이르는 성이
2,2킬로미터나 이어져있다. 허물어져 나간곳까지 계산하면 3.5킬로미터에 이른다.
게다가 해자까지 감안한다면 성의 최대높이는 15미터까지 추정이 가능하다.
지상에서 본 토성 이 정도 규모라면 백만명이상의 인력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당시 자료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이것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신빙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문제다.
발굴 조사단은 지하 3.,400미터 뻘층에서 축조연대를 풀어줄 단서를 찾아냈다.
바로 성을 쌓을 때 사용한 판축용 목재였다.오래 세월동안 뻘층에 묻혀있어 부식되지 않고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목재의 탄소 연대측정을 실시했다.
탄소 연대측정은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유물의 연대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인터뷰/강형태 문화재 연구소
탄소연대는 과학적 원리에 의해 진행.전세계적으로 200군데에서 진행.
오차문제..동일한 지역에서 많은 시료 동시에 분석하면 오차 줄일 수 있어.
50년까지 줄일 수 있어 그 연대폭에 대한 믿음성은 충분히 과학적으로 증명
다시 실험 : 문화재 연구소는 가능한 오차범위를 줄이기 위해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그 결과 풍납토성의 축조연대는 오차범위를 감안하고서도 기원전 2세기까지 올라가는 놀라운 결과를 얻어냈다.
인터뷰/조유전 문화재 연구소 소장
지금까지는 기록만 가지고 시비. 그래서 유구와 유물을 찾았을 때는 다시 그 기록을
검토해보는 것이 당연. 그래서 이제 새로운 연구를 해야되지 않느냐,
그런 입장에서 삼국사기 기록을 다시 검토해야되지 않느냐 그런 애기죠
기록/삼국지 기원전후에 시작해 최소한 2세기 이전에 토성이 완성됐다는 연구결과는 성곽이 없었다
지금껏 통설로 삼아온 삼국지 한전의 기록으론 설명할 수 없다.
백제를 마한의 소국중 하나로 기록하고, 마한 일대에는 성곽이 없었다고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인터뷰/이종욱
이 거대한 성을 축조할 수 있었던 통치제도라든지 인력동원 방식이라든지 이런 걸 우리가 새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삼국지 하한조에 익숙해가지고 백제라는 나라가 3세기경까지 하나의 소국이었다
이러한 생각만해온 연구체계로서는 이 풍납토성과 같은 거대한 성을 설명할 수가 없다'
삼국사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기존의 연구체계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는 또 있다. 바로 토기문제다.
삼족토기-3세기 유물로 알려진 전형적인 백제토기, 즉 삼족토기뿐 아니라 지금까지 소위 원삼국시대로
분류해온 토기들이 한꺼번에 대량으로 발굴되는 이런 상황은 풍납토성이 처음이다.
인터뷰/신하권 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전형적인 삼족기라든가 접시 고배 주둥이 똑바른 작은 항아리 이런 토기들을 기존에 백제토기라고 했다.
풍납토성에서 나온 유물을 보면 그런 것을 포함해 그보다 훨씬 시기가 올라갈 수 있는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기종의 유물들이 3분의 2이상 된다.
그런 유물들을 이전 백제 전형적인 유물들과 어떤 관계로 해석해야될 지 중요한 과제
토기 돌고- 풍납토성의 축조연대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이 안에서 발굴된 토기의 연대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과도 연결된 중요한 과제다.
인터뷰/최몽룡 서울대 고고학과 교수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기원전 37 신라가 기원전 57 백제가 기원전 18년
이라는 나라가 생긴 연대를 고고사학자들은 별로 믿지 않았다. 그 대신 태조왕 고이왕 내물왕
적어도 4세기에 신라 백제 고구려가 성립돼왔을 거다 했는데
풍납토성의 연대가 올라가고 그것이 고대사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면 한국의 삼국시대의 기원,
그것은 삼국사기 설이 맞다고 볼수 있지. 이제 긍정적 역사관을 만들 필요도 있지 않나
삼국사기가 기록한 한성 초개 백제의 500년 도읍지, 하남위례성. 바로 그 성이 이 풍납토성으로 밝혀진다면
삼국사기는 다시 한 번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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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분명 우리의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너무나 중요한 책입니다.
따라서 삼국사기를 둘러싼 의문들을 하나씩 해결해가는 일은 결코 회피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격렬한 논쟁이 붙고,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 문제점들이 지적된다고 해서 삼국사기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끊임없이 계속되는 비판과 논쟁은 삼국사기의 이해를 더욱 깊게 해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풍납토성의 발굴과 함께 불붙고 있는 최근의 논쟁은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될 일입니다.
삼국사기의 진실은 무엇인지
이 논쟁으로 우리 고대사가 한층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서게 되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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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afe.daum.net/kbshistory
첫댓글 제가 봤던 거하고 약간 다르네요;; 새로 만든건지 아니면 오래돼서 제 기억이 부정확한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역스가 가끔 그랬듯이 이것도 삼천포로 쭉 빠져서 무슨 초기기록에 대한 신빙성 문제가 나오고 아주 쑈를 하네요. 벌써 몇 번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전 삼국사기의 신빙성에 대해 이야기한적 없습니다. 여기서 제가 반론을 할 만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다 했습니다. 내물이사금 초두부분은 논의 대상이 아니고 고기와 중국 기록의 모순에 관한 부분은 자주성 사대성이 아니라 합리성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제가 역스 93회 대본 전부를 옮기면서 보기 편하도록 편집한 것으로 임의로 글짜를 추가한 것은 일체 없습니다. 김태환님의 답글에도 분명히 93회라고 밝혔고 님 역시 그것에 대한 반론이라 해놓고 무슨 삼천포로 빠졌는지?? 제가 오히려 어리둥절 합니다. 그냥 "더욱이 우리 고기와 중국 기록이 상반되는 대목에선 신라본기 진평왕 거의 예외없이 고기에 대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또한 편찬자들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우리 것을 강조했다." 라는 부분에서 제가 일관되게 묻는 것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님이 역스 93회를 보고 그부분을 반론했다기에 전채를 옮겼는데 내물이사금조 부분은 제가 반론하는 바가 아닙니다. 18:58
계속 딴이야기만 나오니 난감하네요. 기본적으로 '사대'의 개념부터 합의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사대'란 말 그대로 큰 걸 섬긴다는겁니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우리 것을 강조'하던 고기에 대한 신뢰를 보내던 말던 큰 걸 섬겨야 된다는 주의면 그건 사대주의입니다.
저는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시분들은 삼국사기를 읽었는지 궁금하군요. 저도 5년전엔 그렇게 생각한적이 있었고, 저렇게 글을 올린적이 있었는데요. 자세히 읽어보면 아니라는것을 알 수 있죠.
그런 식의 단순 단정 권위적 코멘트는 논의에 별 도움이 안됩니다. 저급한 인신공격밖엔. 저도 삼국사기는 나름대로 자세히 읽었는데 그럼 제 뇌가 이상하다는 거군요. ㅎㅎ 그냥 웃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