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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伽倻山1430m)
팔공산 파계봉능선에서 바라본 가야산전경
국립공원 가야산은 옛적 가야국의 진산으로 그 이름을 가야산으로 불렸다. 범어(梵語)에서 가야(伽倻)는 소를 뜻하기도 하는데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어 성불했다는 곳, 불교의 성지 부다가야(佛陀伽倻; BuddhaGaya)에서 어원은 비롯된다. 정상은 석가모니의 출생지 풍습에 따라 소를 신성시하는 소를 뜻하는 우두봉(牛頭峰) 또는 그곳에 힘센 동물의 상징인 코끼리를 뜻하는 상왕봉(象王峰)이란 이름을 겸하여 칭한다. 정상을 중심으로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입산수도하여 성불했다는 가야산 최고봉 칠불봉(七佛峰1433m) 등 여러 개의 산봉을 거느린다. 십승지로 알려진 가야산은 숱한 전화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고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팔만대장경 판(八萬大藏經板;국보 제32호)이 갈무리 되어진 법보사찰 해인사를 품고 있다. 고운 최치원선생이 말년에 은거했던 홍류동(紅流洞) 계곡이 있어 봄의 진달래, 가을의 단풍, 그리고 계곡물까지 붉어 삼홍(三紅)을 이루는 산수가 빼어난 명산이다. 산은 우뚝 솟아 정상에 오르면 조망도 좋아 팔공산, 비슬산, 화왕산, 금오산, 자굴산, 무학산, 황매산, 덕유산, 지리산 등이 조망되고, 사계절 어느 때나 찾아도 좋지만 특히 가을 단풍과 홍류동 계곡의 봄꽃이 좋다.
伽倻山 19景을 더듬어 白雲洞에서 紅流洞 까지
만물상 능선
오늘은 기상예보에 가야산은 맑다고 했는데 얕은 구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날씨라 정상에 오를 즈음 맑아지리라 기대해 본다. 09시30분, 가야산 온천 관광호텔이 있는 등산기점 백운동이다. 수륜면 소재지에서 택시가 다른 손님을 태워주고 오느라 예정보다 30분 늦게 도착했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시골에는 요즈음 택시가 주민의 발이다. 십중팔구는 호출 손님이라 도시처럼 빈차가 다닐 일은 드물단다. 백운동탐방안내소 앞에서 용기골을 따라 직진하면 서성재까지 2.6km이고 만물상 능선을 따라 오르면 서성재까지 3km이다. 시간도 더 걸리고 거리도 먼 만물상 능선을 택해 굳이 좌측능선으로 오른다. 앞서 50대 초반의 중년 부부가 오른다. 그들을 따라잡아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으니 이 아래 호텔에서 자고 온단다. 집이 청주인데 부부가 중등교사로 방학을 맞아 어제 덕유산 등반을 마치고 덕유산에서 바라본 가야산이 생각나서 예정에 없던 가야산에 오게 되었는데 가야산이 처음이란다. 나더러 산행안내를 부탁해왔다. 선의의 부탁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은 나더러 산에 혼자 산에 가면 심심하지 않느냐? 위험하지 않느냐? 물어오지만 집을 나설 때는 혼자이지만 이렇게 산에 오면 만나는 사람 모두가 친구요 형제가 아닌가?
만물상
만물상 능선 전경
가야산성 성 돌이 보이는 곳에서부터 본격적인 암릉지대다. 만물상(萬物像)이란 바위가 많아 갖가지 형상을 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금강산의 만물상을 끌어다 붙인 이름이다. 얼핏 이런 곳에 길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길은 있다. 길이 험하여 통행금지로 있다가 근년에 등산로를 정비하고 개방하여 찾는 이가 많다. 눈이 얼어붙어 빙판 길이 되어 미끄럽고 부부의 속도가 다소 늦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당초 오늘 계획은 정상까지 12시까지 예정되어 있고 늦어도 13시까지 정상에 도착해야 오늘 산행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 나는 자꾸만 시계를 쳐다본다.
공룡능선과 만물상 능선이 만나는 곳 상아 덤
이제 얕은 구름도 사라지고 청명한 하늘이다. 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르내리다 보니 힘들이지 않고 만물상 능선을 지나 마지막 계단을 타고 올라 가야산 공룡능선과 만나는 상아덤(嫦娥 덤1159m)이다. 상아는 전설 속에 이름으로 달 속에 사는 선녀의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어여쁜 새 악시가 족두리를 한 모습으로 머리 위에 족두리 하나를 덤으로 얹어 놓은 것이 상아 덤이다. 바위위에 바위가 얹혀있는 모습이 동, 서, 남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다른데 서쪽 공룡능선에서 바라볼 때 가장 멋지다. 상아 덤은 가야산성의 동장대 서쪽에 있어 서장대라고도 한다.
가야산 칠불봉에서 바라본 비슬산 전경
상아 덤에서 정상 방향으로 능선을 타고 내려와 12시35분 서성재다. 서성재는 옛날 백운동 사람들이 해인사나 치인리로 왕래하던 고갯길이다. 지금은 등산객들이 백운동에서 서성재로, 만물상 능선을 타고 서성재에서 만나는 갈림길인데 전에는 이곳에서 해인사로 오르내리는 등산로가 있었으나 오래전부터 출입통제구역으로 폐쇄되어있다. 여기서 백운동에서 용기골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다수 만났다. 이제부터 정상으로 오른다. 우두봉까지 1.4km 보통 1시간거리다. 절반은 비교적 완만한 능선 오르막길이지만 절반은 급경사 계단 길로 가야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구간이다. 때문에 오늘처럼 차가운 날씨에도 곳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보인다. 특히 여름철에는 계단길이 끝날 적마다 휴식을 취하곤 한다.
칠불봉 정상부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10m 앞에 성주군에서 세운 정상석이 있는 칠불봉(七佛峰1433m)이다. 옛 가야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칠불봉은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하(夷毗訶)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뇌질주일(惱窒朱日)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고 뇌질청예(惱窒靑裔)는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 되었다 전한다. 김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 10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큰아들 거등(居登)은 왕위를 계승하여 아버지 김수로왕의 성을 따르고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 허황옥의 성을 따라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아들은 가야산에 입산수도하여 생불했다고 전하니 이래서 칠불봉이라 한다.
칠불봉에서 바라본 정상 주변풍경
칠불봉은 실제 가야산의 상봉이다. 멀리 덕유산이나 팔공산에서 바라보면 칠불봉에 시선의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곳은 경북성주 땅이고 가야산 정상으로 등재된 경남 합천의 우두봉(牛頭峰1430m) 보다 실측결과 3m 가 더 높다. 그러나 국립지리원에서는 합천군과 해인사의 손을 들어줘 우두봉을 가야산 정상으로 인정하고 있어 지금도 시비가 끊이질 않는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씨다. 멀리 연무현상이 있지만 멀리 지리산 천왕봉과 반야봉이 연무위로 솟았고 금년 신년 일출 산행을 했던 잔설이 보이는 덕유산 능선이 깨끗이 보이고 비슬산도 연무위로 솟았다. 나는 처음으로 가야산을 등정한 동행한 부부에게 가야산 등정 인증 사진을 찍어주고 함께 200m 거리의 우두봉으로 향했다.
우두봉에서 바라본 칠불봉
우두봉이다. 나는 가야산에 올적마다 오르는 곳이지마는 지난해 12월12일 폭설이 내린 다음날이라 설경을 보려고 가야산에서 가장 험한 공룡능선을 탔지만 시간이 부족해 정상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좋은 날씨를 택해 오늘 다시 왔다. 일명 상왕봉(象王峰)이라 부르기도 하는 우두봉(牛頭峰1430m)은 이름 그대로 소의 머리를 뜻한다. 범어(梵語)에서 가야(伽倻)는 소를 뜻하기도 하는데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어 성불했다는 곳, 불교의 성지 부다가야(佛陀伽倻; BuddhaGaya)에서 어원은 비롯된다. 정상은 석가모니의 출생지 풍습에 따라 소를 신성시하는 소를 뜻하는 우두봉(牛頭峰) 또는 그곳에 힘센 동물의 상징인 코끼리를 뜻하는 상왕봉(象王峰)이란 이름을 겸하여 칭한다. 소의 머리를 닮았다는 우두봉 정상에는 평평한데 동쪽 끝에 소의 콧구멍에 해당하는 물 웅덩이가 있으니 이름하여 우비정(牛鼻井)이라 칭한다. 가야산 정상 주변 풍광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이곳이 가야산 19경중에 제1경이다. 여기서 어찌 시 한수가 없겠는가? 한학자 예운 최동식(猊雲 崔東植)선생이 1918년 가야산 19경을 돌아보고 지은 연작시의 하나인 우비정을 감상해 보자.
牛鼻井 (우비정)
泉自金牛鼻孔通 (천자금우비공통) 우물이 금우의 콧구멍 속으로 통해 있으니
天將靈液寘巃嵷 (천장령액치롱종) 하늘이 신령스런 물을 높은 산에 두었도다
倘能一揷淸穿肺 (당능일삽청천폐) 혹, 한번 마신다면 청량함이 가슴속을 찌르리니
頃刻翩翩遠御風 (경각편편원어풍) 순식간에 바람타고 멀리 날아가리라!
지금시각 13시 정각 백운동에서 여기까지 4.4km에 3시간30분 걸렸다. 예정보다 다소 늦었지만 하산 길에 속도를 내면 계획은 무난할 것으로 본다. 초행길 부부를 위해 산행 안내를 했지만 단순한 길잡이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해설사 노릇까지 겸했다. 가야산 산행 30여 회에 이렇게 까지는 처음이다. 부부는 고마워 어쩔 줄 모른다. 부부는 백운동에 차가 있어 부득이 오던 길로 하산하고 나는 계획대로 해인사를 거처 홍류동 소리 길로 하산해야 한다. 3시간 남짓 등로에서 함께한 정이 아쉽게도 우리는 작별을 고하고 하산이다.
마당바위에서 쳐다본 봉천대
우두봉에서 5분쯤 내려오면 암봉이 있는데 여기가 옛적 기우제를 지냈다는 봉천대(奉天臺)다. 가야19경의 하나인 봉천대 옆 다소 험한 길을 따라 내려서면 마당바위가 있다. 해인사에서 우두봉으로 오르내리는 길목에 있어 쉬어가기 좋은 마당바위다. 마당바위에서 쳐다보이는 봉천대의 바위 벼랑에는 언제나 독수리가 떠다닌다. 오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마당바위에 올라가 본다. 참으로 자연스런 풍경이다.
해인사 마애불입상
이제부터는 다소 길이 좋아져 속도를 내 본다. 마당바위에서 50m 쯤 내려서서 동쪽으로 50m 쯤 떨어진 외진 곳에 통일신라 때 작품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석조여래 입상(보물 제264호)이 있다. 오래전에 한두 번 가 보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싶어 찾아보았더니 젊은 스님이 혼자서 합장기도를 하고 있다. 내가 다가가자 기도를 끝낸 스님은 떡과 과일을 권한다. 나는 늦어도 해인사 상가지역에서 점심을 먹기로 계획되어 있는데 점심때가 지난 시각이라 배도 고프던 차에 잘 먹었다. 종교는 다를지라도 나누는 것에 서로 거리감이 좁혀진다. 해인사 스님으로 운동 삼아 산행중이란다. 그는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고 나는 하산길이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각자 목적지로 향한다. 여기서 시간을 보낸 만큼 속도를 내본다. 토신골을 따라 내려간다.
해인사
명산대찰 해인사(海印寺)다. 마음에 새긴 글이 바다보다 깊다는 뜻일런가?
우리나라 12대 명산의 하나인 가야산(伽倻山)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국보 제32호)을 갈무리하는 해인사를 품고 있다.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通度寺),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와 더불어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海印寺)는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이다. 전국10위권 이내에 들어야 주어지는 총림의 품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 해인사 부속암자인 백련암에서 입적한 성철(性徹1912~1993)스님이 남긴 것은 누더기 옷 한 벌과 지팡이가 전부인데 정작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부도가 해인사 경내에 왕릉처럼 거대하게 조성되어 있다. 그의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했다. 얼핏 산은 가야산이요 물은 홍류동 계곡물로 들릴 수 있다. 산은 산이지 물일 수 없고 물은 물이지 산일 수 없지 않는가? 너무도 간단명료하여 이해가 쉬울 것 같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 더욱 난해하기도하다. 수년이 흐른 지금에도 나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선정에 들어 적멸의 경지에 이르든지 아니면 아마도 그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나는 이렇게 이해해 본다. “세상이 변하고 인심이 변해도 산처럼 물처럼 진리는 변함이 없도다!” 이다.
해인사를 지나 15시다. 해인사입구 상가에서 때늦은 점심식사를 하고나니 30분이 훌쩍 지났다. 여기서 축전 주차장까지 홍류동계곡 소리 길은 전장 7.2km, 1시간30분 거리다. 햇볕이 들지 않는 홍류동 계곡 길은 얼어붙은 눈길임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황혼에 빗 긴 해는 산마루에 걸렸다. 서둘러 소리 길로 접어든다. 계곡 숲길은 해가져서 어둑어둑 하다. 초입에는 예상 밖에 눈도 쓸려있었다. 그것도 잠시 예상대로 결빙된 내리막 눈길은 긴장감을 높인다. 이럴 때는 경험상 보폭은 짧게 미끄러질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 옮겨야한다. 봄의 진달래와 철쭉꽃 그리고 가을에 단풍이 붉어 가야산 홍류동 계곡이다. 낙엽 저 삭막한 이때에도 낙낙 장송 큰 나무는 군락을 이루어 푸른 잎을 자랑했다. 그래서 소나무는 나무(木) 중에 군자(公)라 했던가? 지금은 꽃도 단풍도 없는 혹한기라 계곡 물은 얼어붙어도 물살이 소용돌이치는 담, 소, 폭포에는 숨통을 낸 듯 얼음이 얼 틈을 주지 않는다. 해는 저서 아무도 없는 계곡 길을 나 홀로 걷고 있다. 계곡물은 얼음장 밑으로 흘러도 들리는 물소리는 고운선생의 시구처럼 온 산을 에워 싼 듯도 하다. 소리길 중간쯤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이다.
농산정 풍경
농산정(籠山亭 경남도문화재 제172호)은 고운선생이 풍치 좋은 이곳에서 바둑을 두거나 휴식을 취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1922년에 해체 복원하여 1936년에 보수했다 한다. 농산정에는 고운선생이 남긴 시 題伽倻山讀書堂 (제가야독서당)과 농산정중수문 등이 걸려있고 농산정 앞에는 孤雲崔先生遯世地碑 (고운최선생둔세지비)가 있다. 계곡 바위에는 紅流洞(홍류동)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고 계곡건너편 바위벽에는 고운 선생의 시가 새겨져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세상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가 보다. 망할 징조 신라의 권력 내부의 다투는 소리 고운선생이 그 소리 듣기 싫어 청량산, 지리산, 무학산 등지를 두루 거처 말년에 찾아왔던 곳, 국가나 단체나 가정도 다툼이 끊이질 않고 서로 싸우면 망할 징조다. 싸우면 깨지고 깨지면 가루가 되고 가루가 되면 흩어진다. 어느 단체의 내부 다툼으로 망하는 꼴을 당해보았던 나는 홍류동 농산정 앞에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노산 이은상선생이 번역했다는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857~?)선생의 시를 생각하면서, 오늘은 아쉬움을 남긴 채 이곳을 떠나야했다.
題伽倻山讀書堂(제가야산독서당)
狂奔疊石矹重巒 (광분첩석올중만) 바위골짝 내닫는 물소리 겹겹산을 뒤흔드니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은 지척에도 분간하기 어려워라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옳으니 그르니 그 소리 듣기 싫어
故敎流水盡籠山 (고교유수진농산) 내닫는 계곡물로 산을 온통 에워쌌지
한학자인 예운 최동식(猊雲 崔東植)선생이 1918년 가야산 19경중 연작시의 하나로 쓴 시가 있다.
聾山亭 (농산정)
何日文昌入此巒 (하일문창입차만) 최치원선생이 언제 이산에 들어왔던가?
白雲黃鶴渺然間 (벡운황학묘연간) 흰 구름과 황학이 아득히 어우러진 때였도다
已將流水紅塵洗 (이장유수홍진세) 이미 흐르는 물로 세상의 때 씻었으니
不必重聾萬疊山 (불필중농만첩산) 만겹산으로 다시 귀를 막을 필요는 없으리라!
계곡을 건너 농산정 맞은편 언덕에 위치한 가야서당에 올랐다. 건물 배치는 맨 위쪽에 고운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學士堂(학사당)건물이 있고 그 아래 伽倻書堂(가야서당)이 있다. 서당 앞에 文昌候遺墟碑(문창후유허비)가 있다. 이곳 가야서당은 고운 최치원 (孤雲 崔致遠857~?)선생이 말년에 은둔하면서 독서하던 곳으로 어느 날 아침 갓과 신을 벗어 버리고 홀연히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훌쩍 떠난 후 오늘날까지 종적을 알 수 없어 사람들은 흔히들 “신선이 되었다”라고들 말한다.
入山詩(입산시)
僧乎莫道靑山好 (승호막도청산호) 스님이여 청산 좋다 말하지 말라
山好何事更出山 (산호하사경출산) 산이 좋다면 무엇 하러 다시 나왔나
試看他日悟踪跡 (시간타일오종적) 나중에 나 어찌하는지 두고 보시오
一入靑山更不還 (일입청산갱불환)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다!
홍류담의 겨울풍경
가야서당에서 내려와 곧장 전망대가 설치된 홍류담(紅流潭)이다. 계곡미가 빼어나서 단풍잎이 떠내려가는 가을에는 물론 사계절 어느 때 찾아도 좋은 명소다. 오늘은 혹한기라 절벽에는 고드름이 있고 계곡은 얼어있으나 홍류담에는 물 소용돌이로 얼지 않았는데 물빛이 청량하다. 이 엄동설한 어두워지는 홍류동천 홍류담에서 나는 홀로 무엇인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배회했다. 날은 저물고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어 화들짝 놀란 듯 홍류담을 떠났다.
紅流洞(홍류동)
春風躑躅發層巒 (춘푼척촉발츰만) 봄바람에 철쭉이 온산 봉우리에 피어나니
膩漲臙脂水鏡間 (니창연지수경간) 거울 같은 물속에 붉은 연지 가득하구나
若使重移楓葉景 (약사중이풍엽경) 만약에 단풍붉은 빛을 다시금 옮긴다면
溶溶錦浪半函山 (용용금랑반함산) 크고 넓은 비단물결에 반쯤은 잠기리라!
가야산 해인사의 일주문을 겸하고 있는 홍류문
가야산 해인사의 일주문을 겸하고 있는 홍류문(紅流門)이다. 이 문 반대편 정면에는 “가야산 해인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문을 들어서면 가야천 상류 홍류동 계곡이 시작되고 우두봉까지 10여 km 거리까지가 해인사 땅이다. 가야산국립공원의 대부분이 해인사 사찰림으로 우리나라 종교 중에서 가장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것이 불교다. 여기서부터 소리 길은 해인사 땅이니 입장료 곧 통행료를 내야하고 이문을 들어가는 차량도 통행료를 내야한다.
홍류문을 나서니 민가가 보인다. 홍류동천 계곡을 사실상 벗어난 것이다. 마을 앞을 지난다. 더 이상 볼 만한 것이 없다. 저녁시간이 지나서인지 대부분의 민가에는 저녁연기가 없다. 산 아래 한두 외딴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날 뿐이다. 무릉교를 지나 이제는 해도 저물고 볼 것도 없으니 소리길 입구까지 내 닫는다. 입구 50여m을 남겨두고 그만 길이 없어져 버렸다. 소리길 한가운데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길을 막아버렸다. 부득이 논둑길로 지나갔다.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여러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 작물재배용은 아닌 것 같다. 시설물 앞에 붉은 페인트로 출입금지라는 글씨가 보인다. 혹시 지주의 허락 없이 소리 길을 낸 것에 항의하여 주인이 막아버린 것일까? 시간여유가 있으면 찾아들어가 물어보고 싶지만 궁금증만 눈 덩이처럼 키우고 지나친다. 소리길 입구다. 소리길 입구 표지석이 서있고 이정표도 있다.
소리길 입구 표지석
지금시각 17시15분 오늘은 비교적 성공적인 산행이다. 날씨도 맑고 바람도 심하지 않았다.
다만 전구간이 빙판길이었지마는 그래도 사고 없이 끝냈다. 소리길 7.2km 결빙 구간을 1시간45분에 내달렸다. 산행을 하고나면 항상 아쉬움은 남는 법, 소리길 구간에서 시간에 쫒기고 어두워서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쉬울 뿐이다. 고운 선생이 옳으니 그르니 그 소리 듣기 싫어 찾아왔던 산, 가야산은 오늘도 어느 산보다 시비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으니 어인 일인가? 몇해전 해인사의 매화산(남산제일봉1010m)등산로 폐쇄시비, 합천군과 성주군의 정상시비, 해인사의 소리길 통행료징수문제 시비, 눈앞에 보이는 소리길 입구 출입금지 시비 등 이다. 오늘의 노정은 백운동~만물상능선~상아덤~서성재~칠불봉~우두봉~봉천대~해인사~농산정~가야서당~홍류담~홍류문~소리길 입구(구원2리마을) 15.6km 7시간45분이다.
2013년 1월8일 화요일 맑음
첫댓글 깔끔 ,,, 합니다 ^^*
감사합니다.
겨울산이라
조금은 삭막한 느낌이 들겠지요.
자주찾아주세요.
상세하면서도 실감있는 산행기 감사합니다.
산악회에서는 대개 이 코스를 해인사에서 6시간에 끝내거든요.
그래서 저는 소리길까지 연장하여 한번에 끝내려고 개인적으로 왔지요.
짧은 해라 소리길 구간에서 조금 소홀히 한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함께 가야산을 오른 듯 합니다.
짧은 해에 먼길를 욕심내다 보니 시간부족으로 소리길 구간은 해진 뒤에 걸었지요.
세상 때를 씻기에 좋은 홍류동 소리길을 말입니다.
그래도 격려를 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