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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감사할 줄 아는 백성 (1)
(시편 136:21-26)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복된 추수감사절을 맞이합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날이지만, 해마다 더 새롭게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작년보다 더 나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성도, 내년에는 더욱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성도로 자꾸 성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금년에 나는 얼마나 컸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마음으로부터 감사가 넘치는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1. 먼저 내 마음에 진심의 감사가 들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쥐가 한 마리 살았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무서워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왜 이렇게 쥐로 만들어주셨습니까? 나는 고양이가 무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너를 고양이로 만들어주면 되겠느냐?” “예. 하나님. 나를 고양이가 되게 해주세요.” 그러자 그는 고양이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개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고양이가 되기는 했는데, 개가 무서워서 못 살겠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개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마 들개가 되어 돌아다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가끔 들려오는 호랑이의 포효 소리에 얼마나 두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호랑이가 너무 무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호랑이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수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호랑이를 잡겠다고 자기를 찾아다니며, 산 속에 숨어 있으니, 도무지 무서워서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포수들이 무서워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너는 쥐가 되어야 하겠다. 너는 호랑이가 되어서도 쥐와 같은 겁쟁이 마음을 버리지 못하였구나.”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① 이 쥐를 보면 한 번도 하나님께 감사했던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는 감사하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감사가 며칠을 가지 못합니다. 그가 처음에 고양이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까? 고양이로 있다가 개가 되었어도, 개가 되었다가 호랑이가 되었어도 그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잠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가도 금방 불평하는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가난하다고 불평하던 사람이 부자가 되면 저절로 감사하는 사람이 될까요? 가난할 때에 갑자기 큰돈을 벌게 되면 물론 감사하겠지요. 그러나 며칠 지나면 도로 불평하게 됩니다. 자기의 환경은 모두 호화판으로 바뀌었지만,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불평하는 마음은 아직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마음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더 많습니까, 불평하는 마음이 더 많습니까?
② 이 쥐는 고양이가 되었어도 쥐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가 되었어도, 마지막에 호랑이가 되었는데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을 비유로 하여 설명한 것이지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렸을 때보다는 더 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부자가 되면 가난할 때보다 더 마음이 커져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역시 마음이 더 커져야 합니다. 몸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커져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성장입니다. 신분은 변했는데, 마음은 그대로 있다면 그 사람은 높은 자리에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부자가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하고, 또 높은 권세를 주시기도 원하고, 또는 큰 은혜와 능력을 주시기 원하지만, 우리 마음이 먼저, 큰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변하지 않으면 그런 복은 임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릇이 작은데도 큰 복을 주시면 그 복으로 인해 오히려 자기를 멸망시키는 불행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마음 그릇이 변한 사람을 말합니다. 변화되지 못한 사람은 거짓 그리스도인입니다. 로마서 12:2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합니다. 이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복이 오히려 화가 됩니다.
③ 이 쥐는 고양이로 변했을 때에는 물론이고, 개가 되었어도, 호랑이가 되었어도 하나님이 왜 자기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하나의 욕심을 이루는 것, 곧 자기의 평안과 영달이었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 나를 왜 미국에까지 보내셨을까? 내가 우리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나에게 왜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주셨을까? 자녀들을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 등등 우리가 하나님께 여쭈어보아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하나하나 깨달아서 하나님의 뜻을 행해 나갈 때에 비로소 천국의 문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④ 이 세상 모든 것들에게는 소위 천적(天敵)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절대 안심하고 살게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쥐는 고양이가 두렵고, 고양이는 개가 두렵고, 개는 호랑이가 두렵고, 호랑이는 포수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면 포수는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왕이 되면 두려울 것이 없고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순진한 발상이지요? 우리 사람들은 물론이고, 모든 짐승들이나 벌레들까지도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12:5에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라고 예수님이 경고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감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봅시다. 홍해를 건넌 후에 그들은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너무도 신기해서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만나’입니다. 만나는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낸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맛은 어떠했습니까? 출애굽기 16:31에 설명하기를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음식을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날마다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1:5에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도 맛이 좋고 자기들을 살려낸 음식이 아니었습니까? 식사 때마다 감사, 또 감사를 드렸어도 모자랐을 터인데, 그 백성들은 오히려 ‘박한 식물’이라고 불평하였습니다. 이 말을 공동번역에서는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라고 하였고,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감사한다는 말이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감사 대신에 항상 불평과 원망을 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어도, 그 땅을 구경도 못해 보고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그 만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깜빡했습니다. 날마다 당연히 하늘에서 쏟아지는 줄로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먹는 양식은 어떻습니까? 내가 잘나서 당연히 하늘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것입니까? 내가 능력이 있고 돈을 잘 벌어서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음식은 물론이고, 건강도 주시고, 입맛도 주셨으니까 우리가 기쁨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닙니까? 병이 들어 누워있으면 어떻게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만나를 처음 먹을 때에는 꿀 섞은 과자 맛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광야생활이 거의 끝나갈 때가 되어서는 “박한 음식, 진저리나는 음식, 보잘것없는 음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본래부터 그들 마음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3)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들은 이 복된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더욱 힘들고 어렵기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쥐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쥐의 공포심을 가지고 살아야만 합니까? 광야 백성들처럼 불평불만이 많은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이 못된 마음은 고쳐질 수 없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마음은 평생 고칠 수 없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좋은 환경이라는 옷을 입혀 놓으니까 잠깐 그 못된 마음이 가려져서 훌륭한 인격자인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큰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우리에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2.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결정적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1)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아 자기를 발견해야 합니다.
① 영어로는 우리의 눈(眼)을 ‘아이’(eye)라고 하고, 나를 ‘아이’(I)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아이’에게 공통점이 있답니다. 무엇입니까? “남을 보는 것은 잘 하지만, 자기를 보지 못하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는 잘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판하는 일은 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명심보감 존심편(存心篇) 3장에 “사람은 비록 자신은 지극히 어리석을지라도 남을 꾸짖는 데는 밝고, 비록 총명함이 있다 해도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데는 어둡다. 너희들은 마땅히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꾸짖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면 성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②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3-4)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먼저 자기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눈 속에 들보가 들어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내 속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없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을 섬기는 진실한 마음이 없음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소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이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하였지요? 예수님이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너희가 소경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③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발견도 위대하고,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위대한 것이지만, 참으로 중요하고 위대한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실로 깨닫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그 죄에서, 또는 죄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2) 죄를 깨닫고 예수님 앞에 나아올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됩니다.
① 석가모니는 이 죄의 문제에 대한 강한 충격을 받고는 왕자의 높은 지위도 던져버렸습니다. 아내도 버렸습니다. 왕궁을 뛰쳐나와 그 해결책을 알아보려고 평생을 수도하면서 방랑하였습니다. 마침내 그가 깨닫기는 했는데, 그것은 사람이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시작 단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② 중국의 노자나 공자 같은 분들도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평생을 바쳐 수도(修道)에 정진하였습니다. 많은 도덕적 교훈들을 말하였고,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옳은 것이라고는 말했지만, 정작 죽음의 문제, 내세의 문제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는 내가 도덕적으로 산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양심을 괴롭히는 그 아픔과 두려움이 어찌 없어지겠습니까?
③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아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비로소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게 되고, 천국의 길이 열려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 놀라운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요, 또한 직접 체험한 사람입니다.
3)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① 세상 만물을 보니 분명히 지으신 분이 계십니다. 우주 만물이 아무렇게나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질서와 조화가 있습니다. 로마서 1:20에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9:1에서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찬양합니다. 이 위대한 창조 그 한 가운데에 내가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만드셨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제껏 엄청난 복을 부어 주시면서 길러주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인 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겠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② 그런데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가 오셔서 우리에게 천국을 가르쳐주시고, 우리 삶의 길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친히 한 마리의 어린양이 되셔서 속죄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를 용서받게 되었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③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오늘도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며, 마음의 생각까지도 주관하셔서 악한 마음을 버리고 항상 좋은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며, 나아가 의의 길로 가게 해 주십니다. 금년 한 해 동안도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기억하고 우리가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3.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1) 추수감사의 마음입니다.
① 추수란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 장사도 농사입니다. 회사에 다니는 것도 농사입니다. 더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말에 ‘자식 농사’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자녀를 기르는 일은 벼농사, 밭농사 등과는 비교도 안 되는 중요한 농사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한 해 동안 나의 농사는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혹시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하나님께 부끄럽고 죄송스러워도, 새로운 소원을 주님께 드리면서 새해에는 더욱 새로운 농사를 할 수 있도록 은혜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② 농사는 자연계의 이치를 알게 해 줍니다. 농사하는 사람들은 대자연이 얼마나 정직하게 역사하는가를 잘 가르쳐준다고 말합니다. 봄철에 씨를 뿌리면 가을철에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씨를 뿌린 만큼 거두고 농부가 땀을 흘린 만큼 거둡니다. 그래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고 하였고,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한 성경에서는 “우리가 행한 대로 받는다.”라고 가르칩니다. 잘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③ 농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해 줍니다. 농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입니다. 그래서 농사하는 사람들은 늘 하늘을 쳐다보면서 삽니다. 사람이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하늘로부터 햇빛과 단비를 때맞추어 내려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풍년이 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로부터 추수를 하고 난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이런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제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① 추수감사절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우리 조상들이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라고 하였는데, 반석이 그리스도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만나도 역시 그리스도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48-51)라고 하셨습니다.
② 사람들은 밭이나 논에 농사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밭에 농사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를 뿌리십니다. 그러고는 그 씨가 잘 자라나도록 햇빛과 단비를 내려주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씨를 잘 받아 간직하고, 햇빛과 단비를 잘 받아서 무럭무럭 크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농사가 성공하도록 우리가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 중에서도 어떤 씨가 가장 좋은 씨입니까?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18에 ‘십자가의 도’라고 했지요?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 나오는 말씀이 바로 로고스요 도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잘 뿌려야 합니다. 그 씨가 싹을 내고 잘 자라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③ 더 나아가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됨으로 주님의 농사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논에서 자라는 벼도 한여름의 뙤약볕과 사나운 비바람을 잘 견뎌서 드디어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도 이런 고난을 잘 견디고 이겨야 합니다. 항상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그 큰 은혜 안에서 거룩하고 복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④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농사를 하시지만, 또한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주시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주셔서 그 마음에 우리가 농사를 짓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라는 씨를 주님의 마음에 뿌려야 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내가 어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 그것을 일컬어 사랑이라고 합니다. 만일 나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미움이 되겠지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두셨습니다. 베드로를, 그리고 바울을 마음에 두셨습니다. 이제 당신을 마음에 두시려고 하십니다. 농사를 잘 지으면 천국에 보화를 쌓아놓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3)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① 눈에 보이는 세상의 농사에 대해 감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할 수 있게 되면, 드디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감사하면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지금 나에게 원치 않는 일도 생기기도 하고,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가게 되기도 하지만, 그 배후에 전능하신 주님의 손길이 역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오히려 감사가 충만해지지 않습니까?
② 또한 성경은 전화위복의 역사를 이루심을 늘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 8:28).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급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사 오히려 자기 형들은 물론이고, 아버지와 온 가족을 구원해내게 하셨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시 119:71). 또한 바울도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도 전화위복이다, 새옹지마다 하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것을 가르쳤는데, 하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되겠습니까? 항상 더 좋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희망을 가지고 주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③ 범사에 감사함은 우리 믿음을 주님께 보여드리는 것이고, 또한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더 커져서 하나님께 쓰임 받을 그릇이 되었음을 보여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4:4-5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기뻐하라’라는 말 대신에 ‘감사하라’라고 하여도 역시 같은 의미가 될 것입니다. 너그럽지 못하면 남을 용서하지도 못하고, 또한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너그러운 사람이요, 주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이 은혜 안에서 늘 감사가 충만한 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9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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