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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장(臨江)을 둘러싼 싸움과 린비아오의 반격
쓰핑전투 뒤 남만주는 국민정부군이 차지했다. 공산당의 동북민주연군 주력은 쑹화장 너머 하얼빈 방향으로 후퇴했다. 남만주에는 2개 종대의 소수병력이 남아 국민정부군 후방을 교란했다. 하지만 근거지는 날로 줄어들어 창바이산(백두산) 지역과 압록강 유역의 4개 현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국민정부군 동북 사령관인 두위밍에게는 이 남만주의 민주연군이 골치거리였다.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야 하는데 후방이 걸리니 먼저 남만주를 정리하려 하였다. 이른바 ‘선남후북’(先南後北: 먼저 남쪽을 도모하고 그후 북쪽을 치는 것)의 전략을 입안했다.
옌안의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나 동북 민주연군 지휘부는 남만주 근거지를 지키고는 싶지만 가능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북국의 천윈, 샤오징광을 남만주 근거지로 파견하였다. 마오쩌둥은 “천윈 동지가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라고 믿음을 보였다. 천윈이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하면 지키고 여의치 않으면 철수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천윈은 당시 동북국 부서기 겸 동북 민주연군 부정치위원으로 린비아오에 이어 두 번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윈은 류샤오치와 더불어 중공 지도부에서 흔치 않은 노동운동 출신이었다. 그는 빈농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병으로 모두 잃었다. 재봉사인 고무부가 그를 키웠는데 소학교 졸업 후 더 공부하기 힘들어 상하이의 가장 큰 인쇄소인 상무인서관에 취업했다. 그는 노동하며 고학했는데 나중에 인쇄노동자들을 조직하여 파업을 벌였다. 천윈은 파업위원회 서기를 맡았으며 1925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고참 당원으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입장을 견결하게 지지하여 마오의 신임을 얻었다.
천윈은 공산당 남만주 분국에 가서 분분한 의견을 정리해냈다. 1946년 12월 상순, 그는 남만주 근거지인 지린성 바이산시(白山市: 백두산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에서 종대 이상 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남만주 지휘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남만주 근거지가 좁고 군중의 기반이 약해 유지하기 어렵다, 식량이 부족하여 병력을 먹이기 힘들다, 심지어 겨울 군복이 없어 전사들을 입힐 수 없다. 주력은 북쪽으로 후퇴하고 남만주는 유격투쟁으로 전환하자.”는 등 여러 현실적인 주장이 있었지만 천윈은 현지 지휘관들을 설득했다.
“남만주를 버리면 두위밍이 마음 놓고 하얼빈의 민주연군을 공격할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곳을 지켜 북만주와 서로 호응하자. 적이 북만주를 공격하면 우리가 뒤를 쳐야 한다. 적이 우리를 공격하면 북만주의 우군이 적의 뒤를 칠 것이다. 우리가 힘들면 적도 힘들다. 이길 수 있는 싸움으로 적을 교란하자.” 마침내 지휘관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근거지를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마오쩌둥과 쭈더 등 공산당 지도부는 “천윈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라며 흡족해 하였다. 하지만 결의하는 것과 실제로 지켜내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앙군사위원회는 46년 12월 13일 동북민주연군 수뇌부에 “주력을 집중하여 적을 각개 섬멸해야 한다. 실지를 수복하고 적의 북만주 공격을 지연시키는 데 협력하라.”고 지시했다.
이 무렵 마오쩌둥은 부쩍 적의 병력을 소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병력의 집중과 각개격파, 그리고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적을 최대한 섬멸하여 소모시킬 것, 적을 조금만 더 소모시키면 전장의 형세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동북 민주연군 총사령부는 다음과 같은 방침을 확정했다. “남쪽을 공격하여 북쪽을 유인하고 북쪽을 공격하여 남쪽을 유인한다. 남만주 부대가 린장(臨江) 지역에서 적을 요격하여 섬멸한다. 북만주 부대는 쑹화장을 건너 창춘, 지린 북쪽 지역에서 지원나오는 적을 섬멸한다. 이 전투에서 동북의 형세를 바꾸도록 한다.”
동북민주연군의 계획에도 아랑곳없이 동북의 국민당군은 대병을 움직여 남만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946년 12월 17일, 두위밍은 국민정부군 제1군, 6군, 71, 60, 52군 일부 등 6개 사단으로 린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린장(臨江)은 압록강변에 있어서 이름이 린장이다.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마주보고 있으며 맞은편 바로 아래가 추운 곳으로 이름난 중강읍이다. 공산당 남만주 근거지가 린장, 바이산, 통화(通化) 등 좁은 구역에 몰려있어 방어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북만주의 동북민주연군 주력이 호응한다고 하나 하얼빈과 남만주 사이에는 쑹화장이 가로놓여 있었다. 쑹화장은 헤이룽장(黑龍江)의 가장 큰 지류로 강폭이 커서 도하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홍군 시절과 달리 국공내전은 대포와 전차, 트럭 등 중장비를 동원해야 하는 현대전이었다. 민주연군 대병력이 쑹화장 너머로 출격하려면 강이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이 되어야 했다. 남만주 민주연군은 월동장비와 피복이 부족한데다 근거지가 좁아 보급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교통선도 모두 국민정부군이 통제하여 이동도 불리했다. 해방구 기반도 좋지 않았다. 오랜 기간 일제치하에 있어 민중들이 비협조적이어서 적정의 정찰, 부상병 안치 등 여러 어려움에 싸여 있었다. 오직 근거지를 사수하겠다는 지도부와 전사들의 결의를 믿을 뿐이었다.
남만주 민주연군은 먼저 국민정부군 후방을 교란하기 시작했다. 국민정부군 후방 거점 20여곳을 점령하고 3,000여명을 살상하는 등 교란하자 국군 2개 사단이 진압에 나섰다. 그러자 1947년 1월 5일, 북만주 민주연군 대병력이 쑹화장을 건너 창춘과 지린 북쪽을 공격했다. 동북 민주연군은 12개 사단, 3개 포병단을 출격시켰다. 공산당군은 지린 북쪽의 요새 치타무(其塔木)를 포위하고 지원 오는 적을 섬멸했다. 나중에 치타무 요새의 수비군을 섬멸하자 국군은 부득이 린장 공격을 멈추고 북쪽을 지원했다. 동북의 겨울은 춥다. 영하 20도에서 30도까지 예사로 내려간다. 때마침 한파가 밀어닥쳐 북만주 민주연군 주력에 동상환자가 속출했다. 소총의 노리쇠가 얼어 오줌을 누어 녹여야 총을 쏠 수 있는 형편이었다. 동북 민주연군은 부득이 1월 19일에 강 북쪽으로 돌아가 휴식에 들어갔다.
1월 11일, 공산당 중앙군사위는 동북 민주연군 사령부에 전보를 보내 독려했다. “적을 섬멸하는 규모가 날로 확대되고 있다. 장제스는 동북에 병력을 증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년안에 적 20개 사단을 섬멸토록 하라. 그러면 적과 아군의 형세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1월 30일, 국군은 4개 사단을 동원하여 다시 린장 공격에 나섰다. 1차 전투에서 썼던 작전을 다시 실행하여 1개 종대가 국군 후방을 교란했다. 환인성은 옛적 고구려의 수도이다. 옛날 고구려는 환인의 오녀산성에서 출발하여 국내성 등 주변성에 도읍을 정했다. 2000년 뒤 이곳에서 국공 간에 격전이 벌어졌다. 남만주 민주연군은 환인성을 습격하는 한편 퉁화(通化) 북쪽의 까오리청즈(高麗城子:고구려성에서 비롯한 이름이다.)에 출격하여 국군 2,000여명을 섬멸했다. 그러자 국군은 린장 공격을 멈추고 북쪽에서 1개 사단을 이동시켜 다시 공격하려 하였다.
2월 13일, 국군은 5개 사단을 동원하여 린장을 세 번째로 공격했다. 그러나 국군은 이동하던 중에 남만주 민주연군에게 습격당해 점령했던 지안(集安: 고구려 국내성이 있는 도시)을 빼앗기고 2개 연대 병력을 잃었다. 그때 다시 북만주의 민주연군 12개 사단이 다시 출격했다. 그러자 린장을 공격하던 국군은 다시 북쪽을 지원하러 돌아갔다. 북만주 민주연군이 다시 회군하여 휴식하는 사이 국군은 북쪽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진격한 국군은 쑹화장 양안에서 동북 민주연군과 결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얼빈 부근은 동북 민주연군의 근거지였다. 몇 번의 작은 승리를 통해 사기를 회복한 민주연군은 불과 몇 달 전 일방적으로 밀리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동북 민주연군도 주력을 동원하여 3월 8일 세 번째로 쑹화장을 건넜다. 국민혁명군은 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신속하게 후퇴를 결정했으나 민주연군이 맹렬하게 추격했다. 결국 국민당군 꼬리를 잡은 동북 민주연군은 국군 1개 사단 병력을 섬멸하였다. 국민정부군은 급히 러허와 남만주의 병력을 이동시켜 공산군의 공세를 막았다.
3월 27일, 국군은 20개 연대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린장을 공격했다. 그러나 사기가 떨어진 국군은 남만주 민주연군의 매복공격에 걸려 1개 사단을 잃고 철수했다. 이로써 남만주의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네 번의 공격과 쑹화장 건너 북만주에 대한 국군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공방전에서 국군은 4만명을 잃었다. 만주에서의 주도권이 공산당에게 넘어갔으며 산둥, 화중과 함께 전체 내전이 교착상태로 들어갔다. 하지만 내상은 국민정부 쪽이 훨씬 심했다. 국군은 1946년 11월부터 1947년 2월까지 4개월 동안 34개 여단을 잃었다. 국군 비정규군도 41만명을 잃어 병력의 소모가 심각해졌다. 공산당이 잃은 병력은 12만명이었다. 이 기간에 국군은 주요도시 87개를 점령하였고 공산군도 87개 도시를 점령하거나 탈환했다. 내전초기 도시점령의 비율은 3.2대1이었으나 이제 1대1로 바뀐 것이다.
린비아오로서는 내전 초기 쓰핑패전의 불명예를 어지간히 만회했다. 그는 쓰핑 패전 뒤 ‘후퇴장군’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별명을 얻었다. 공산군은 다섯 차례 공방전에서 11개 도시를 탈환했으며 운동전, 매복전, 요격전, 포위섬멸전, 공성전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다. 민주연군은 언제나 다수 병력으로 소수를 공격하는 전법으로 불리한 상황을 바꿀 수 있었다. 남만주 민주연군 전체 병력은 소수였지만 전투에서는 언제나 다수의 지위를 차지했다. 결국 린비아오의 “남쪽을 쳐서 북쪽의 적을 끌어 들이고, 북쪽을 쳐서 남쪽의 적을 끌어낸다.”는 방침이 두위밍의 “남쪽을 먼저 공격하고 북쪽을 도모한다.‘는 전략을 이긴 셈이 되었다. 이것은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마오쩌둥, 설날 집에서 만두를 대접하다
1947년 1월 22일은 중국의 설날, 즉 춘절이었다. 내전에서 공산당이 한참 밀리고 있을 때였다. 산둥 남부에서 천이가 작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산둥 해방구 수도이던 린이는 이미 국민당이 차지하였다. 국민당은 또 화북과 동북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동북에서도 남만주 지역을 평정하려 대군을 보낸 시점이었다. 지역을 중시하는 장제스는 국민정부가 승리할 날이 머지 않았다고 확신하였다.
그래도 마오쩌둥은 여유가 있었다. 평생을 장제스에 쫓겨 다니기만 하던 그는 이제 비로소 상대와 정면대결을 펼치고 있는 셈이었다. 장제스가 단기간에 중국을 평정하려 서둘렀다면 그의 호흡은 길었다. 그에게 내전은 이제 시작이었으며 승패는 마지막에 결판나는 것이었다. 마오는 전략과 방침에 따라 주력을 보존하고 적의 병력을 계속 소모하면 언젠가 국면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였다.
설날 아침, 그는 아침에 빗자루를 들고 눈을 쓸었다. 중국에서 설날은 가장 큰 명절이다. 설이 되면 중국인들은 몇날 며칠씩 맛있는 음식을 잔뜩 해놓고 먹고 마신다. 집집마다 마을마다 귀신을 쫓는다고 폭죽을 터뜨린다. 오랜 전쟁에 지치고 뒤따른 내전 속에서 모두 힘겹고 가난했지만 사람들은 만두를 빚거나 떡을 조금씩 해놓고 설을 축하했다.
마오쩌둥의 집에서도 이제 여덟살 난 작은 딸 리나(李訥)가 폭죽을 들고 와서 터뜨리자고 졸랐다. 리나는 네 번째 부인인 장칭이 낳은 딸이었다. 마오와 세 번째 부인 허쯔전 사이에 낳은 큰 딸 리민(李敏)은 엄마와 함께 소련 모스크바에 가 있었다. “여덟살이나 되었는데 그걸 애비한테 들고 오느냐? 가서 오빠와 함께 놀아라.” 마오쩌둥이 타이르자 리나는 “오빠는 항상 바빠요. 아침부터 어디 갔는지 없어요.”하더니 “아빠, 폭죽 재미있어요. 하지만 무서워요.”하고 졸랐다. 리나의 오빠라고 부르는 이는 금년 26세가 된 장남 마오안잉이었다. 두 번째 부인 양카이후이가 낳은 자식으로 마오의 큰 아들이었다. 마오쩌둥은 허허 웃더니 폭죽을 빗자루 손잡이 끝에 매달고 피우던 담배로 폭죽에 불을 붙였다. 폭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지자 리나는 귀를 막고 “무서워요. 무서워요.”하면서 펄쩍펄쩍 뛰었다.
마오쩌둥은 석탄을 개어 난로에 넣은 다음 바깥에 나와 찬 공기를 잔뜩 들이마셨다. 그때 저우언라이와 주더가 그의 집을 찾아왔다. “주석, 해가 서쪽에서 뜰 모양이오.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찌감치 일어나셨소?” 주더가 멀리서 인사를 하였다. “주 총사령, 새해 복 많이 받으시오. 명색이 설인데 늦잠을 잘 수 있겠소? ” 마오쩌둥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어젯밤 잠을 안 잔 게 틀림없지요. 주석, 그렇지 않습니까? ” 저우언라이가 묻자 마오는 “저우 부주석에게 거짓말 할 수야 없지. 하루쯤 안 자도 별 문제 있겠소?” 하고 대답했다.
저우언라이는 얼마 전 1946년 11월에 옌안으로 돌아왔다. 장제스가 국민대회를 일방적으로 개최하고 연합정부 구성이 파탄나자 난징에서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합작이 깨어지면 신변이 위험해지므로 항의도 할 겸 곧바로 귀환했던 것이다. 뒤이어 펑더화이, 예젠잉, 류샤오치 같은 당정군의 고위인사들이 모여 들었다. 마오쩌둥이 만두를 쪄놓고 요인들을 불렀던 것이다. “설날, 잘 보내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시오.” 이런 인사들이 오가고 만두가 나왔다.
중국에서 설이 오면 산둥이나 섬북 같은 곳은 만두를 빚어 쪄먹는다. 동북은 추운 지방이므로 국물이 있는 만둣국, 즉 훈툰을 빚어 뜨거운 국물과 함께 먹는다. 본래 중국에서 만두는 만터우라고 하는데 그냥 두툼한 밀가루빵이다. 따빙, 즉 호떡처럼 둥글게 된 밀가루떡과 함께 중국인이 먹는 주식으로 파오차이와 함께 늘 먹는다. 설날에 먹는 만두는 교자로 송편처럼 생겼는데 안에 당면이나 고기소 등 다양한 내용물을 넣고 만든다. 마오를 비롯한 지도부는 흥겹게 만두를 나누어 먹었다. 커다란 솥에서 만두를 꺼낸 뒤 자신의 접시에 나누어 먹는 소박한 조찬이었다. 반찬이라고는 소금에 절인 채소, 즉 파오차이가 커다란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다. 관병이 함께 동고동락한다는 기풍으로 고위 당간부라고 하여 특별히 호화로울 게 없었다. 마오의 부인 장칭이 부지런히 만두를 담아 간부들에게 건넸다. 마오와 지도부는 만두를 먹으며 덕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전쟁의 전략과 당면한 방침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마오쩌둥은 낙관했다. “적을 꾸준히 소모시키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5년이면 국민당을 소멸하고 신중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동북과 남만주의 일은 린비아오와 천윈이, 그리고 산둥을 비롯한 화동의 일은 천이와 쑤위가 잘 처리해가고 있었다. 문제는 화북과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섬북이었다. ‘서북의 매’라고 부르는 후쫑난이 홍색수도인 옌안을 공격하려고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장칭(江青)
장칭은 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이다. 마오쩌둥은 평생 네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마오쩌둥에게 소박을 맞아 부인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뤄씨였는데 뤄이구(羅一姑)라고도 부른다. 뤄씨는 할머니가 마오씨로 마오쩌둥의 친척 할머니였다. 몸집이 좋고 예뻐서 부모가 눈여겨 두었다가 며느리로 삼았다. 열여덟살에 시집을 왔는데 마오쩌둥의 나이는 열네살이었다. 뤄씨는 착하고 집안일을 잘해 시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남편인 마오쩌둥이 거들떠보지도 않아 이름뿐인 부인이었다. 그녀는 집안일만 하다 병에 걸려 결혼 삼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부인은 양카이후이로 은사인 양창지 교수의 딸이다. 두 사람은 깊이 사랑했는데 양카이후이와의 사이에 마오안잉, 마오안칭 등 두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마오쩌둥이 추수기의 뒤 징강산에 들어갈 때 헤어졌다. 삼년 뒤 홍군이 창사 등을 공격할 때 후난의 국민당 군벌 허젠의 군대에 잡혔다. 그때 국민당 인사가 “마오쩌둥과 이혼을 선언하면 풀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양카이후이는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마오가 혁명에 성공하기만을 바랄뿐이다.”하고 의연하게 대답하였다. 1930년 10월, 그녀는 스물아홉에 처형을 당했다.
마오쩌둥은 1928년, 징강산에서 세 번째 부인인 허쯔전(賀子珍)을 만났다. 양카이후이와 헤어진 지 일년만이니 사실상 중혼을 한 셈이 되었다. 그녀는 용맹한 혁명전사로 기마와 사격에 두루 능했는데 말을 탄 채로 쌍권총을 쏘았다고 한다. 마오쩌둥과 10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는데 온갖 고생이란 고생을 도맡아 하였다. 그녀는 장정 중에 출산해서 부득이 부근 농가에 맡겨야 했다. 마오쩌둥과 사이에서 여러 번 출산했으나 겨우 리민이라는 딸 하나만 곁에 두었다. 그녀는 장정 중 국민당군 비행기의 폭격에 부상을 입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결혼생활의 위기는 엉뚱한 곳에서 왔다.
중국 공산당 홈페이지 등 공식 기록에서는 “성격의 차이가 컸다, 마오쩌둥 곁에서 비서 등으로 일하기보다 더 배우고 싶어했다.”는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여자 문제로 크게 다퉈 모스크바로 보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오쩌둥과 스캔들을 일으킨 여성은 시안으로 돌려보내고 계속 이의를 제기하는 허쯔전은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모스크바에 보냈던 것이다. 그것이 1937년의 일이었다. 허쯔전은 나중에 귀국했지만 결혼생활을 회복할 수 없었다.
1937년 허쯔전이 아직 소련으로 떠나기 전, 옌안에 장칭이 나타났다. 장칭은 산둥성 출신으로 어릴 때 이름은 리윈허(李雲鶴)이다. 여러 번 이름을 바꾼 끝에 옌안으로 와서 장칭으로 개명했다. 그녀는 상하이의 영화배우 출신으로 옌안에 오기 전 여러 번 결혼과 동거를 거듭한 전력이 있었다. 옌안에서 그녀는 중앙 당학교에서 공부한 뒤 루쉰예술학원 교원이 되었다. 그런데 빼어난 미모 탓인지 옌안에 온 지 일년도 안 되어 중앙군사위원회 기요과(기밀을 다루는 부서이다.)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마오쩌둥과 결혼하였다. 아마도 마오가 그녀를 신변에 끌어 들였을 것이다.
이해심 많은 부인
장칭은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배우 생활을 할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문학을 이해하고 문화적 소양을 쌓았다. 그녀는 마오쩌둥과 함께 경극을 좋아했다. 옌안에서 공연했던 ‘어부가 악질선주를 죽이다.(打漁殺家)’ 중의 샤오구이잉(蕭桂英)을 마오쩌둥 만큼이나 좋아했다. 장칭은 글씨도 잘 썼다. 전에 그녀는 칭다오 대학 도서관의 관리원을 했는데 해서로 도서카드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해서체를 예쁘게 쓸 수 있었다. 한가할 때 장칭은 마오쩌둥과 포커 게임을 즐겼다.
장칭은 마오쩌둥과 결혼한 뒤 신혼 시절에는 이해심이 매우 많았다. 그녀는 마오쩌둥에게 차를 우려줄 때 찻잔 손잡이를 마오 쪽으로 돌려 잡기 편하도록 하였다. 마오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면 담배를 가져가 불을 붙인 뒤 건네주곤 하였다. 장칭은 상하이 시절부터 담배를 피웠는데 중독 수준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독서를 할 때 장칭은 그가 원하는 책을 재빨리 찾아주곤 하였다. 장칭은 언제나 마오쩌둥의 사무실을 가지런하고 깨끗하게 정리하였다.
그 무렵 장칭은 별 역할이 없었다. 마오쩌둥의 요동에는 손님이 많았는데 그녀는 손님들에게 차를 내오고 바로 물러갔다. 곁에 참여하는 일이 없었다. 외국기자나 국민당 통치지역의 손님이 오면 장칭은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했다. 어떨 때 마오쩌둥이 그녀를 나오게 하면 밝은 낯으로 악수만 하거나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혹은 땅콩이나 섬북의 대추를 내오고 바로 돌아갔다. 그럴 때는 마치 새색시처럼 수줍어했다. 신혼 초 나날은 평온했다. 두 사람은 서로 잘 지냈다. 장칭은 마오쩌둥에게 털옷을 짜 주거나 매운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한가할 때는 구식 유성기를 요동 안에 틀었다. 마오쩌둥이 경극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는 옌안에서 경극 노래판을 수집했다. 마오쩌둥이 심취해서 듣고 있으면 발로 박자를 맞추거나 따라서 흥얼거리곤 하였다. 장칭도 그 무렵부터 경극에 심취했다.
장칭은 본래 말을 타지 못했다. 그녀가 마오쩌둥과 연애하던 시절 귀가시간이 늦어지면 마오쩌둥은 그녀를 말에 태우고 경호원을 시켜 말고삐를 잡은 채 집에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기마술을 익혔다. 경호원이 견마를 잡을 일도 없게 되었다. 나중에는 사나운 말에 올라 길들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강인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때 옌안에서 말을 타고 비호처럼 달리는 여인이면 사람들은 장칭으로 생각했다.
장칭과 마오쩌둥은 나이차가 컸다. 생활습관도 달랐다. 마오쩌둥은 낮밤이 바뀌어 있었지만 장칭은 정상이었다. 마오쩌둥은 매운 것을 좋아한 반면 장칭의 기호는 담백한 편이었다. 하지만 당시 마오쩌둥과 장칭은 많은 취미를 같이 했다. 둘 다 경극이나 고전문학을 좋아했으며 서예를 좋아했다. 장칭은 마오쩌둥에게 적응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장칭은 마오가 ‘홍루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신도 파고들었다. 훗날 홍루몽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자신이 “반은 홍루몽 학자”라고 칭하게 되었다.
마오쩌둥 곁에서 그녀는 ‘마오체’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글을 쓰거나 편지를 쓰면 늘 고쳐 썼다. 문장에 동그라미를 치는 등 어떻게 수정하여도 어쨌든 나중에는 인쇄본이 되어 나오게 되었다. 편지는 이와 달라서 고친 곳이 많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오쩌둥은 다시 베껴 보내곤 하였다. 일이 바쁠 때 마오쩌둥은 다시 베낄 시간이 없어 장칭이 대신했다. 그후 장칭이 마오체를 흉내 내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는 경지가 되었다. 문화혁명 뒤 베이징 군사박물관에서 ‘마오쩌둥 사적전람회’가 열렸을 때 장칭이 베껴 쓴 ‘마오쩌둥 수고’가 오인되어 공개적으로 전시된 적도 있었다.
약법삼장을 받아들이다
중공 중앙이 마오쩌둥과 장칭의 결혼을 받아 들였지만 장칭에 대하여 여전히 ‘약법삼장’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그 내용이란 첫째, 마오쩌둥과 허쯔전의 부부 관계가 정식으로 끝나기 전에 장칭 동지는 마오쩌둥 부인으로 행세해서는 안 된다. 둘째, 장칭 동지는 마오쩌둥 동지의 기거와 건강을 책임지고 보살펴야 한다. 이후 누구도 당 중앙에 비슷한 요구를 할 수 없다. 셋째, 장칭 동지는 마오쩌둥 동지의 개인생활과 사무를 관리해야 한다. 하지만 20년 안에는 당내에서 어떠한 직무라도 맡는 것을 금지한다. 부득이하게 관여할 때는 당내 인사들에게 물은 뒤 정치생활에 참가할 수 있다.
이 약법삼장은 왕루어페이(王若飛)의 노트에 기록되어 있다가 국민당 군대가 1947년 옌안을 점령했을 때 노획하여 공개하였다. 왕은 당시 중공 중앙 비서장이었다. 따라서 그 회의기록은 믿을만한 것이다.
1939년초 장칭은 임신했다. 마오쩌둥과 결혼한 지 딱 일 년이 지난 뒤였다. 다음해 8월 그녀는 딸을 출산했다. 그녀의 나이 26세였으며 마오쩌둥이 47세 때였다. 자식이 태어나자 마오는 매우 기뻐했다. 딸의 이름을 리나(李讷)라고 짓고 귀여워했다. 리나는 활발한데다 귀엽게 생겨 마오쩌둥의 요동 안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1943년 12월 엔안에 다시 겨울이 닥쳤을 때 리나의 나이는 세 살이 지났다. 벌써 땅에서 뛰고 구르며 놀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백 수의 고시를 암송할 수 있었다. 한가할 때 마오쩌둥은 딸을 안고 진지하게 어른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그때 장칭은 다시 임신했지만 폐결핵이 심해져 부득이 인공유산을 하게 되었다. 유산한 태아가 남자라는 것을 알고 비통하게 울며 의사에게 소리쳤다. “내 아이를 돌려줘요. 내 아이를 돌려줘요.”
마오쩌둥의 큰 딸 이름은 리민이다. 장칭과 사이에 낳은 딸은 리나이다. 마오쩌둥이 직접 이름을 지었는데 논어의 한 구절에서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즉 “군자는 말을 적게 하고 행동이 민첩해야 한다.”(君子訥于言而敏于行)에서 한자씩 따서 지었다. 성이 마오가 아니라 리가 된 것은 정식으로 이름을 지을 당시 마오가 변성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는 1947년 옌안을 잃은 뒤 섬북을 전전할 때 리더셩(李得勝: 승리를 얻는다는 뜻이다.)으로 이름을 바꿨다. 국민당군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두 딸이 평생 그 성과 이름을 쓴 것을 보면 마오의 뜻인지 본인들의 희망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내전 시절의 장칭은 현모양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여성이 나중에 사인방의 두목이 되어 평지풍파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사람의 일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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