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안영이 사망된 진실을 현장에서 목격한 견증인 (번역)
모안영은 1922년 10월 24일에 호남성 장사시에서 모택동과 양개혜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8살 때 양개혜가 체포된후 어머니를 따라 감옥살이도 했고 어머니가 희생된후 거리에서 넝마주이도 하고 신문도 팔면서 어린 나이에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1936년에 동생 모안청과 함께 쏘련에 가서 공부했다. 그후 쏘련군사학원에서 학습했고 쏘련조국보위전행에 참가했으며 총탄이 비발치는 유럽전쟁에도 참가하여 용감히 싸웠다. 1946년에 연안에 돌아온 모안영은 그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50년 10월에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했다.
성보는 모안영의 사망을 현장에서 목격한 견증인이다. 아래의 사실은 성보의 회상에 근거하여 기록된것이다.
압록강북안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도강하여 조선으로 건너온 중국인민지원군은 팽덕회의 지휘에 따라 1950년 11월 5일에 적군 1만 5800여명을 소멸하고 제1차전역을 결속지었다. 이번 전역에서 아군의 차단부대가 지정된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미국 기병 제1사와 영련방사가 도주하여 이 전역에서 한국군밖에 치지 못하였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장군은 중국이 “상징적으로 출병”할것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중국인민지원군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는 꼭 1950년 성탄절전에 조선전쟁을 결속짓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1950년 11월 19일 오전에 조선 대유동의 중국인민지원군 총부에서 지원군당위 상무위원회들이 중요한 작전회희를 열고있었다. 팽덕회는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엔 먼저 후퇴해야겠습니다. 맥아더더러 우리가 그를 무서워하는것처럼 착각하게 하여 그가 더욱 미친듯이 진군하게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기회를 찾아 적을 섬멸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듣던 모안영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 지도앞으로 다가가더니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생각엔 응당 적군을 향해 공격해야 한다고 봅니다. 적은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린 왜서 승승장구로 진군하지 않고 후퇴해야 합니까?”
모안영의 직접 상급이며 작전실 주임인 성보는 모안영의 말을 듣고 손에 땀을 쥐였다. 그는 (안영아, 네가 처음 전선에 나와 용감한 정신은 좋지만 어찌 감히 팽총사령에게 반대의견을 제출할수 있단 말이냐? 팽총사령의 성격을 너도 모르는건 아닐텐데. 며칠전에 열린 첫번째 작전회의에서 팽총사령은 제때에 적을 차단하지 못한 그 부대의 군지휘원에게 “거기에 적의 빈틈이 있었는데 당신들은 왜서 꾸물거리면서 그렇게 늦었단 말이요? 제때에 지정한 지점에 도착하지 못한것이 무슨 행위인지 모른단 말이요? 그건 군령을 어긴 행위란 말이요. 적을 소멸할수 있는 기회를 그르쳤으니 법에 따라 참형에 처해야 하는거요! 난 지원군의 총사령 겸 정위로서 일체 군령군기를 위반한 사람에 대해 징벌할 권리가 있소! 난 다른 재간은 없어도 제갈량처럼 마속을 참형할 담력만은 있소!”라고 한바탕 욕설을 퍼붓는걸 너도 보지 않았더냐? 너 지금 어떤 벌을 받으려고 그러는거냐?)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보의 추측은 빗나갓다. 팽덕회의 반응은 모든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것이였다. 팽덕회는 모안영의 의견을 끝까지 들은후에 평온한 어조로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당신들이 보기에는 모안영동지의 의견이 어떻소?”
등화부사령은 “적의 기세가 사납습니다. 한번 얻어맞았다고 기가 꺾일 적이 아닙니다. 만약 전면 공격을 한다면 우리가 손실을 볼것입니다. 난 팽총령사의 작전에 동의합니다. 먼저 적을 무서워하는척 후퇴했다가 장계취계하여 적을 타격해야 합니다!”
팽덕회는 또 기타의 부사령에게 의견을 물어본후 “좋습니다. 우리는 먼저 30킬로메터를 후퇴합시다. 후퇴하면서 운동중에 기회를 보아 적을 섬멸합시다. 싸울 때 옛 방법을 한번 더 쓰려고 합니다. 그 부대로 하여금 다시 적진을 차단하게 하여 립공속죄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회의가 끝난후 팽덕회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점심시간이 되지 않은걸 본 팽덕회는 “누가 나하고 장기 한판을 두겠소?”하고 물었다. 지원군총부에는 팽덕회와 장기를 둘수 있는 사람은 홍학지, 성보, 모안영 세사람이였다. 팽덕회는 다른 취미는 없었지만 한가할 때에는 장기를 두기 좋아했다. 그는 장기를 잘 두지 못하여 늘 세 사람에게 패하군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가지 묘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한번만 물려주오”였다. 적수가 그의 기물중의 “포”나 “차”를 먹으려고 하면 그는 제꺽 “포”나 “차”를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쓴 기물을 원자리에 놓고 잡혔던 기물을 살리군 했다. 말이 한번이지 그런 일은 여러번 반복되군 했다. 팽덕회가 물려달라고 할 때에는 세사람의 태도가 모두 달랐다. 홍학지는 “하하하”하고 웃으면서 “로총께서 또 물려달라시네”하면서 막지 않았다. 성보는 감히 아무말도 못하고 팽덕회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모안영만은 팽덕회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자신이 먹게 될 장기쪽을 팽덕회의 손에서 빼앗군 했다.
“제가 한판 겨루어보겠습니다.”
모안영이 먼저 나섰다. 장기쪽을 다 배렬한후 모안영은 “로총, 이번엔 우리 한번 쓴 장기쪽은 다시 물리지 못한다고 약정합시다”고 말했다. 팽덕회도 그렇게 하자고 통쾌하게 대답했다. 장기가 시작되여 얼마후 팽덕회가 불리하게 되였다. 게다가 팽덕회는 모안영의 말이 자신의 차를 먹게 된것도 보지 못했다. 모안영은 주저하지 않고 팽덕회의 차를 먹어버렸다.
“안돼. 안돼. 난 그렇게 쓰지 않겠소.”
팽덕회는 자신의 차를 빼앗아왔다. 그것은 두번째로 물리는것이여서 모안영은 불쾌하여 “제미랄, 로총은 왜 또 물립니까?”라고 소리쳤다.
곁에서 지켜보던 홍학지는 개의치 않고 “하하하”하고 웃었지만 성보는 이마살을 찌프렸다…
점심을 먹을 때 성보는 모안영을 조용히 불러놓고 말했다.
“쏘련군대의 규정에는 참모장은 작전을 결정할 때 총사령에게 3번밖에 의견을 제기할수 없다고 했어. 그리고 우리 같은 참모들은 수장의 작전결정에 간섭할 권리가 없어. 우리의 직책은 정황만 제공하는것이야. 난 오전에 내가 한 발언이 우리 참모의 범위를 초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부사령들도 아직 발언하지 않았는데 네가 먼저 의견을 발표한건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냐?”
“아. 성처장, 그때 난 미군을 빨리 물리칠것만 생각하다보니 후퇴하겠다니 너무 급했던거요.”
“네 심정을 난 리해해. 그러나 지금은 미군이 매우 강대해. 그들의 무기는 우리보다 더 선진적이기에 정면으로 맞섰다가는 손해만 보게 돼.”
모안영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성처장의 말이 옳소. 회의때 나의 행위는 잘못된것이요!”
“그리고 장기를 둘 때도 말인데 팽총사령은 긴장하게 사고한후 장기를 노는 습관이 있는걸 너도 알잖아? 팽총사령은 긴장을 풀기 위해 오락삼아 노는것이니 정식경기처럼 생각하지 말아라. 홍부사령은 늘 져주지 않니? 그건 팽총사령을 기쁘게 하여 긴장을 풀게 하려는거야. 그런데 너는 ‘제미랄’하는 욕까지 하였으니 참…”
모안영은 눈을 크게 뜨더니 말했다.
“정말 내가 그렇게 말했소? 참 ‘제미랄’이란 말은 나의 입버릇이 돼서…”
1950년 11월 25일에 모안영은 북쪽벽의 난로앞에서 3개의 “A”자가 있는 전투전보를 등기하고있었다. 모안영은 지원군사령부의 로어번역이여서 일이 많지 않았기에 주동적으로 전보를 등기하고 발송하는 임무를 맡아서 했다.
팽덕회는 모안영의 옆칸에 있는 작은 방의 행군침대에 누워있었다. 전날 오전에 미군정찰기가 지원군총부의 상공에서 약 1시간동안 선회했는데 이 이상한 현상은 총부의 주의를 일으켰다. 미군이 가능하게 이 폭격목표를 발견한것이라고 예견했기에 등화, 홍학지와 당직이 아닌 참모들은 모두 오늘에 있을지 모르는 공습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무판자집에서 멀리 않은 동굴에 피신했다. 작전실에는 실제로 떠날수 없는 총사령과 몇몇 당직 참모들만 남아있었다.
오전 11시경에 4대의 미군폭격기가 지원군총부의 상공으로 날아왔다가 북쪽으로 날아갔다. 작전실에 남아있는 참모들은 미군폭격기가 북쪽의 어느 목표를 폭격하러 간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팽덕회총사령의 안전에 대해 걱정한 성보는 총망히 팽덕회가 잠든 작은 방으로 뛰여들어갔다. 마침 홍학지도 달려와서 팽덕회를 데리고 모안영이 있는 방옆을 돌아서 문밖의 동굴쪽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성보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런데 적기는 또 북쪽에서 날아와 다시 작전실상공에서 선회했다. 그것을 본 성보는 “적기가 방금 북쪽으로 갔는데 왜 또 돌아왔을가? 그들이 찾고있는 목표가 중국인민지원군총부인 이곳이 아닐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성보는 하늘에서 곧 작탄이 떨어지려는것을 보고 큰소리로 “위험해, 빨리 뛰여라!”라고 소리치면서 모안영과 고서흔이 빨리 작전실에서 뛰여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폭탄이 옹근 작전실을 명중하여 나무판자집이 전부 무너졌다. 이렇게 되여 모안영과 고서흔은 불속에서 사망되고말았다.
모안영의 묘지는 조선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인민지원군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