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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추억의 팝송/가요 원문보기 글쓴이: Bolsa
당대 최고 가수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
본격적인 TV시대가 열리기 전 극장 쇼는 대중가수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수많은 스타가 숱한 에피소드를 만들어 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남진과 나훈아는 각각 윤복희, 김지미를 만나 결혼했다.
또한 한국 가요사에서 가장 완벽한 음을 구사했던 ‘천재가수’ 배호는 마지막 순간까지 열창을 뿜어냈다.
지금이야 대중음악의 중심지가 방송이지만 TV의 힘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1960~70년대
가수들의 주요 활동무대는 극장 쇼였다.
압도적인 인기를 누렸던 ‘10대 가수 쇼’를 비롯, 스타의 이름을 내건 ‘리사이틀’이 전국
극장이나 야간업소에서 열려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 시절 가수와 관객은 무대에서 직접 만났다.
어떤 측면에서 지금보다 인간적 냄새가 물씬 풍겼고 그만큼 많은 일화를 쏟아냈다.
1960~70년대 극장 무대를 주름잡던 쇼단으로는 김영호 단장이 이끈 ‘AAA’와 최봉호 단장이 주도했던 ‘777’이 꼽힌다.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스타들은 거의 이곳에서 배출됐고 그 유명세를 등에 업고 TV로 진출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아무리 얼굴을 많이 내밀어도 결국 수입원은 극장 쇼였다. 그래서 트로트 가수든 포크 가수든 극장 쇼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원로가수나 음악관계자들이 이때를 ‘가요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다.
당시 쇼 무대 사회자들이 털어놓는 스타들의 비화(秘話)를 통해 그 시절 가요계로 돌아가 본다.
1)‘열대지방 펭귄’ 최희준
극장 쇼의 전성기를 이끈 가수로 먼저 묵직하면서도 안정된 저음으로 ‘하숙생’ ‘나는 곰이다’ ‘진고개 신사’ 등을
히트시킨 최희준이 있다.
그는 간혹 외국 쇼 단체가 내한공연을 가질 때마다 한국을 대표해 마이크를 잡았던 ‘국가대표’ 가수였다.
학벌과는 인연이 멀었던 당시 가요계에서 서울대 법대라는 간판은 그에게 누구도 갖지 못한 위세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가요계 신사’였고, 이러한 후광은 1990년대 들어 국회의원으로
그를 견인하는 밑거름이 된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 최희준이 보여준 면모는 영락없는
‘코미디언’이었다. 작은 키, ‘능글맞은’ 유머, 위트감각 때문이었다.
기성세대들은 지금도 그가 TV에 나와 능숙한 말솜씨를 뽐내던 순간을 기억하겠지만,
무대 뒤에서도 그의 언변은 가요계가 알아주는 수준이었다.
1970년 그가 가수분과위원장이었을 당시 쇼 무대 유명 사회자였던 고(故) 최성일씨와 입씨름이 벌어졌다.
최성일씨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참, 너도 딱하다. 법대를 나왔다는 놈이 코에 땀내면서 노래나 부르고 있냐?
지금쯤 재판소를 차렸어야지, 가수는 무슨 얼어죽을 가수냐? 참, 한심하다 야!”
그러자 최희준은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반격했다.
“ 성일아! 너는 그래 공대(工大)를 나와 가지고 공장을 짓거나 하다못해 ‘자전거포’나 차려야지.
사회자? 그거 순 이빨만 가지고 벌어먹는 거 아냐? 그래도 난 마이크나 들고 다니지만, 도대체 넌 가진 게 뭐 있냐?”
그러나 최성일씨는 사실 공대를 졸업하기는커녕 대학 문도 두드려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최희준은 말하자면 최성일의 자존심을 한치도 건드리지 않은 채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수준급의 카운터 펀치를 날린 셈이었다.
그는 이처럼 약을 올리면서도 상대방의 기를 살려주는 유머에 능했다.
최희준에게는 별명도 많았다. ‘신사’ 외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찐빵’은 1969년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은방울 금방울’이란
코미디 쇼에서 아들역으로 나온 최희준을 보더니 대뜸 부른 뒤 히트를 쳐서 오랫동안 유행했다.
최희준은 때로 ‘웨이터’나 ‘열대지방의 펭귄’으로 불리기도 했다. 후자는 사시사철 검정 양복, 흰 와이셔츠, 검은 넥타이 차림에다
조금만 열창해도 코에서 땀이 수돗물처럼 나오는 모습에서 비롯됐다.
실수가 없고 딱 부러지는 생활태도를 가진 최희준이 아무리 ‘짜다짜다’ 했어도 커피 인심은 넉넉했다.
누구를 만나도 “커피 한잔 드세요”가 그의 인사였다.
2)‘잔소리의 여왕’ 이미자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인정이 많았다.
경찰의 검문검색이 많았던 그 시절 행여 쇼단원 가운데 누군가가 경찰서에 끌려가면
부리나케 달려가 사정을 호소해 풀어주게 한 일도 있었다.
쇼 무대의 사회자였던 이대성이 나중에 텔레비전의 톱 코미디언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자의 도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69년 장안의 화제였던 TBC 코미디 ‘웃음의 파노라마’의 연출자였던 고 김경태씨에게 틀림없이 잘 해낼 것이라며
이대성의 출연을 알선해준 사람이 바로 이미자였다.
그는 연예인위문단 시절인 1962년, 그러니까 최숙자가 한창 인기 정상을 구가할 때 홀연히 가요계에 등장했다.
데뷔 무렵 그에 대한 팬들의 열화 같은 호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공연에서 톱스타 최숙자가 앙코르로 한 곡을 부를 때
유망주에 불과하던 이미자는 2곡을 불렀을 정도다.
하지만 이미자는 ‘국가대표 여가수’로 부상한 이후에도 거의 지방공연을 다니지 않고 중앙무대에서만 활동했다.
어쩌면 이것은 인정이 많은 대신,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시도 때도 없이 투덜거리는 까다로운 성품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미자만큼 잔소리 많은 사람도 없었다고 당시 쇼 무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 시절 이미자의 별명은 그래서 ‘쨍쨍이’였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대놓고 말하기 무서워했지만, 최희준만은 가끔 ‘쨍쨍이’라고 부르며
이미자를 약올렸다. 그가 한참 공연을 다니던 1968년 연예인에게 필요한 물품을 팔던 30대 아주머니가 있었다.
외상값을 받으려고 졸졸 따라다녀서 그 아주머니의 별명도 ‘쨍쨍이’였다.
최희준은 그 아주머니가 나타나면 이미자 들으라고 “쨍쨍이 아줌마 왔어요?” 하며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그때마다 이미자의 표정이 일그러지곤 했다.
1970년 서울 동대문극장 공연에서 사회를 맡았던 ‘원맨쇼의 개척자’ 남보원은 본의 아닌 실수로 이미자의 원성을 산 적이 있다.
“이미자!”라고 소개해야 되는데 그만 “조미자!”라고 해버린 것이다(당시 실제로 조미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여가수가 있었다).
여기에 심사가 뒤틀린 이미자는 노래를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와 “아니, 저 놈 실성한 것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성을 바꿔?” 하며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핀잔을
퍼부었다. 그의 직설적인 성격은 어쩌면 노래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른다.
히트곡이 많다 보니 이미자는 공연중에 객석으로부터 보통 20곡이 넘는 리퀘스트를 받았다.
그러면 보통 사회자나 악단은 손님들이 많이 요청한 곡을 준비하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이미자는 다른 곡을 부르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결과는 악단이 판단한 곡보다 이미자가 선택한 곡이 항상 많은 박수를 받았다.
어느 곡이 그 순간에 가장 알맞은가를 예측할 줄 아는 ‘무대의 천재’가 바로 이미자였다.
그의 천부적인 센스에 대해 당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고봉산씨의 평. “이미자는 그날로
곡을 받아서 단숨에 가사를 외우고 취입에 임할 수 있는 가수다. 국내에 그런 능력을 갖춘 가수는 이미자 한 사람밖에 없다!”
3)'마지막 잎새'처럼 떠나간 배호
이미자라면 모르지만 누가 배호 앞에서 가창력을 논하랴.
사망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노래방에서는 줄기차게
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누가 울어’가 불린다.
특히 그의 노래는 더러 저음 부분이 모창됐지만, 저음에서 급격히 고음으로 치솟는
‘멀티 옥타브’라서 실은 완창이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당시 최고가수였던 최희준도 배호의 환상적 음역과 음색을 내심 크게 두려워했으며,
만약 그가 더 살았더라면 남진과 나훈아도 그의 사후 곧바로 이어진 독점적 라이벌전을 전개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수 가운데 가장 먼저 금테안경을 끼고 언제나 단정한 싱글차림이었던 배호는
얼핏 말붙이기가 어려운 인상이었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소탈하고, 장난기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9년 서울시민회관(현재 서울시의회회관)의 ‘10대 가수 쇼’에서 문주란이 굵직한 목소리로 배호를 흉내내자 배호는 이에 뒤질세라
문주란의 툭 튀어나온 윗입술을 흉내내며 성대모사를 해 관객들을 웃겼다.
그것도 손가락으로 자기 윗입술을 앞으로 잡아당겨 문주란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당시 ‘안경 낀 사람은 깐깐하다’는 속설과 달리 그는 이것저것 가리는 법이 없었으며,
식사도 닥치는 대로 잘 먹는 그야말로 ‘천골’이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호주머니에서 ‘소화제’를 꺼내 마치 디저트인 양 먹곤 했다.
‘하루 세 차례 소화제 복용’은 예외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건강한 몸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배호는 1970년 12월 광주 태평시네마 공연에서 급기야 무대에 서기도 전에 쓰러졌다.
무대에는 10대 가수가 다 등장했으나 배호는 분장실에서 신음소리로 “노래할 수가 없다”며 누워버렸다.
사회자 이대성과 최성일은 객석에 양해를 구했으나 관객들은 막무가내로 “우린 배호를 보러왔다!
안 나오면 돈 물어내라!”며 아우성쳤다.
객석의 상황을 전해들은 배호는 “그럼 무대에 나가야지요” 하며 최성일씨에게
“좀 부축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배호는 최성일의 등에 업힌 채, 이대성이 들고 있는 마이크에 대고 눈물을 흘리며 노래했다.
관객들의 코끝이 찡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무렵 배호의 인기가 어땠는지는 이른바 ‘땅콩세례’가 잘 말해준다.
극장손님 중에는 술집 아가씨가 많았으며 그들은 공연 구경을 와서 스타가 등장하면 상습적으로 땅콩을 무대로 던졌다.
어떤 가수는 그땅콩에 눈을 정통으로 맞아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배호가 등장하면 마치 소나기가 퍼붓듯 땅콩이 무대 위로 뿌려졌다.
공연 뒤 빗자루로 쓸어보면 땅콩이 대두 한 말이나 됐다는 것이다.
요즘은 관객들이 꽃을 던지지만, 당시 쇼 스타를 위한 팡파르는 땅콩이었다.
병든 배호는 오랫동안 땅콩 쇼의 환호를 누리지 못했다.
1971년 경기도 문산의 사흘 공연 중 마지막날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배호는 끝내 무대에
서지 못했고, 서울로 급송되어 세브란스병원에 3개월간 입원했다.
하지만 퇴원하자마자 무리하게 용산 성남극장 무대에 나서는 바람에 건강은 더 악화되었고,
사경을 헤매며 대기실에 누워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그럼에도 배호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불굴의 집념으로 마이크만 잡으면 ‘기침 한번 없이, 음 하나 흔들림 없이’ 열창했다.
그의 마지막 공연에서 피날레 곡은 운명의 장난처럼 ‘마지막 잎새’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1월7일 그는 병원에서 서울 삼양동 자택으로 옮기는 도중 차에서 기어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31세 젊은 나이의 요절이었고, 사인은 과로로 인한 신장염이었다.
배호는 정말 ‘신은 천재를 시기해 일찍 저세상으로 데려간다’는 속설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가 죽은 지 올해로 정확히 34년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음악계의 어떤 추모 움직임도 없다.
가요사에 획을 그은 그를 생각할 때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배호가 활약하던 시기의 10대 가수는 여자 이미자 최숙자 이금희 현미 문주란 조미미,
남자는 배호를 비롯해 김상국 최희준 위키리 박형준이 단골이었다.
4) 여걸 현미
그가 우리 가요발전에 주춧돌 구실을 한 ‘미8군 무대’의 무용수 겸 싱어였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로는 격조가 높았던 ‘밤 안개’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의 노래가 미8군 무대에서
공력을 다진 소산이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현미와 문주란 춤도 서양식으로 잘 추고 노래에 대한 자신감이 누구 못지않았기에 현미는 다른 가수들이나 악단들을 비웃기도 했다.
그래서 가수가 악단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단이 현미를 따라가면서 연주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곧잘 오만함이 아닌 호탕함으로 나타났다.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누구든 상대하기가 편했고 웃음소리도 ‘호호호’가 아닌 ‘껄껄껄’이었다.
1970년 현미를 간판스타로 내세운 파월장병 위문공연 때의 일이다.
월남의 사이공, 나트랑, 다낭 지역을 순회한 대규모 공연에서 어느 날 현미가 숙소에 돌아와서 가방을 열어보니 소지품이 없어졌다.
그런데 요상한 것은 액세서리 등 귀중품과 현금은 그대로 있는데 팬티만 고스란히 사라진 것이었다
(현미는 남들보다 팬티를 많이 갖고 다녔다고 한다).
현미는 “아니 지저분한 팬티를 대체 뭐 하러 훔쳐갔지?” 하며 흥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실된 팬티는
그 연대의 장병들이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이유를 캐보니 ‘전쟁터에서는 여자의 팬티가 행운을 가져온다’는 ‘미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현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공연에 참가했던 여자단원들이 빨래를 해서 널어두기만
하면 유독 속옷만 도둑을 맞는 일이 계속되었다.
까다로운 성격의 여자라면 더 화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현미의 반응은 ‘껄껄껄’이었다.
정말 현미는 ‘만약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장군감’이었을 인물이다.
배호가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매력적 저음의 가수 문주란도 현미에 못지않은 ‘여자 얼굴을 한 남자’였다.
우선 남자를 부르는 호칭부터가 ‘선생님’이나 ‘오빠’가 아니라 당시로는 파격적이라 할 ‘형’이었다.
현미야 그래도 당당한(?) 몸집이었지만 문주란은 155㎝ 남짓한 왜소한 체구였기에 처음 대하는 사람들의 ‘문화충격’은 더했다.
당장 나오는 소리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였다. 사실 텔레비전으로 볼 때보다
더 작았기 때문에 관객들은 문주란을 옆에 놔두고도 “아직 문주란씨 안 왔어요?”라고
묻는 일이 허다했다. 문주란은 지나칠 정도로 남자다웠다.
여가수 중 가장 먼저 자가운전을 한 그는 핸들만 잡으면 동승한 사람이 후회할 만큼 난폭한 운전으로 일관했다.
커브 길을 돌 때 삑 하는 마찰음을 스릴로 여길 정도였으니, 같이 탄 사람은 생명선이 끊기는 듯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차를 몰았으니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1985년 ‘홀리데이 인 서울’ 공연에서는
급기야 얼굴을 완전히 ‘짜깁기’한 상태로 무대에 나섰다.
사회자 최성일씨가 물으니 문주란은 넉살좋게도 “자가용의 차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82바늘이나 꿰맸다”고
말했다. 보나마나 난폭 운전 때문이었다. 최성일씨는 그때 문주란을 이렇게 놀렸다.
“얼굴 평수가 작았기에 망정이지 더 큰 얼굴이었다면 꿰맨 바늘 수가 더 많았겠지!” ‘눈물을 감추고’ ‘미련도 후회도 없다’와
같은 히트곡을 남긴 위키리는 현미나 문주란과 정반대였다.
현미와 같은 미8군 무대 출신으로 훤칠한 키에 늘 정장 차림이었던 그는 언제나 신사의 품위와 격조를 유지했다
(나중에 KBS ‘전국노래자랑’ MC로 맹활약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5)‘신사’ 위키리, ‘악동’ 김상국
1974년 강원도 황지 공연 때 그는 탄광지역에 유난히 즐비했던 요정으로부터 거의 매일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옆에 있는 남자들이 김샐 만큼 그는 술판이 끝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신사다운 매너를 지켰다. 덩달아 따라간 사람들은 호스티스들과 질탕 놀이를 즐기는데도
막상 주빈(主賓)인 그는 한치도 짓궂거나 추잡한 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결과 한없이 길어질 수도 있는 술자리가 일찍 끝나버리는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신사도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코미디언을 웃기는 가수’로서 ‘쇼 무대의 명물’로 통했던 가수 김상국은 위키리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반대로 ‘악동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입증한 인물이었다.
도를 넘어선 짓궂은 행동으로 사람을 골탕먹였지만, 때로는 ‘기행’으로 배꼽을 잡게 했다.
쇼 무대 사회자들은 지금도 주저없이 “김상국이야 말로 앞에서나 뒤에서나 사람을 즐겁게 한
진정한 의미의 엔터테이너였다”고 말한다.
그는 공연단원들 앞에서 놀다가 신이 나면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자신의 신체까지 ‘속속들이’ 드러냈다.
한술 더 떠 여자단원 숙소에 슬그머니 다가가 방문을 슬쩍 열고 자신의 ‘물건’만 불쑥 집어넣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여자들이 대경실색하여 “어머나! 이게 뭐야?” 하며 괴성을 내질렀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71년 서울 시민회관 공연에서 나타난 그의 악동기질은 유명하다.
멀지 않은 곳에 분명히 화장실이 있음에도 그는 무대 뒤에서 실례를 했다.
당시 시민회관 무대감독이던 배영달씨는 격노해 그를 다그쳤으나 김상국은 “시간이 촉박해서 그러는 거요” 하며
전혀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응수했다.
결국 김상국이 사과를 해서 말다툼은 끝났지만, 예의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아 김상국은
또 무대 뒤에서 소변을 봤고, 배영달씨도 마침내 두손 들고 포기하고 말았다.
6)숙명의 라이벌 남진과 나훈아
남진과 나훈아는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초반 숙명의 라이벌로서 가요계를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군 인물들이다.
아마도 국내 대중음악 사상 본인들이나 팬들이나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며 긴장하고
갈등했던 가수로는 이 둘밖에 없을 것이다.
방송에서 행여 둘이 함께 소개되면 두 사람은 카메라 앞에서도 시큰둥한 채 서로 인사를
나눴으니까. 게다가 두 사람은 당시 야당 정치의 치열한 경쟁자였던 DJ와 YS처럼 목포와 부산 출신이었다.
그리하여 남진과 나훈아의 격전에는 ‘지역성’마저 개입, 한층 팬들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고지를 선점한 남진은 가히 1980년대의 조용필이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의 리사이틀이 열리는 곳은 전지역 주민들이 술렁거렸고, 공연이 끝나면 극장 앞은
물론이고 숙소에서도 그를 만나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자연히 남진은 인파를 피해 별도의 여관에 투숙해야 했고 그 덕에 공연단 숙소에서는 엉뚱한 사람들이 ‘포식’을 했다.
여성 팬들이 남진이 머무는 줄 알고 정성 들여 만들어온 음식을 쉴새없이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옛이야기가 돼버렸지만 1970년대 남진 하면 윤복희와의 열애와 결혼을 빼놓을 수가 없다.
1977년 전남 완도 공연 때 사랑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여관방에서 잠도 자지 않고
미국에 있는 윤복희와 전화통화에 열을 올렸다. 통화가 얼마나 길었냐 하면 그날 공연에서
번 돈을 전화 통화료로 몽땅 날려버렸을 정도였다.
이 공연의 사회자였던 김태랑씨의 회고담.
하루는 미국에 있던 윤복희가 남진 모르게 전남 완도에 잠입했다.
무대에서는 한창 코미디 ‘최진사댁 셋째 딸’이 벌어지고 있었고 남진이 칠복역을,
상대역 셋째 딸은 홍화숙이란 무명가수가 맡아 연기했다.
윤복희는 잽싸게 분장실로 들어가 홍화숙의 의상을 빼앗아 입고 무대로 걸어나갔다.
이를 까맣게 모르는 남진은 맞절 연기를 하고 신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파랗게 질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갑자기 쇼는 3분이나 중단되었다.
진상을 알고 있는 김태랑씨와 분장실 요원들은 낄낄 웃어댔지만, 관객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쥐죽은듯 조용했고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신성한 공연까지 그르칠 만큼 두 사람은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나중에 갈라설 때 기자회견에서 했던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이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훈아의 경우는 영화배우 김지미와의 로맨스가 걸작이다. 두 사람도 역시 공연 중에 그 관계의 실체를 드러냈다.
1974년 박종구씨가 단장이었던 ‘라이온스’ 쇼단 주최로 시민회관에서 나훈아 리사이틀이
열렸을 때였다. 이 무대 사회자였던 최성일씨가 나중에 밝힌 이야기.
1회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에 돌아와 있는데 갑자기 사과와 배 한 궤짝이 들어왔고
박단장은 나훈아가 사는 것이라며 많이들 먹으라고 했다.
단원들이 나훈아에게 감사표시를 하고 한참 먹고 있는 도중 난데없이 김지미씨가 나타났다.
김지미씨가 “수고들 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자 나훈아는 “뭘 이렇게 많이 보내주셨어요?
정말 잘 먹겠습니다” 하며 얼굴을 붉혔다. 사람들은 바쁘고 위세 높은 대스타가 남의 쇼에 와서 먹을 것까지 사온 것에 의아해했고,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의 눈빛이 여느 사람과는 크게 달랐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 뒤 매스컴에는 ‘나훈아와 김지미의 열애’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마침내 둘은 웨딩마치를 울렸다.
이를 목격한 최성일씨의 한마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고, 연기 나는 곳에는 반드시 불이 있다!”
전성기 시절 남진은 특유의 장난기로, 나훈아는 ‘소도둑’이란 별명과는 다르게 스스럼없는 인정으로 많은 뒷이야기를 남겼다.
남진은 공연이 끝나면 자가용도 보내버리고 한사코 삐걱거리는 공연단의 전세버스를 탔다.
이유는 사람들과 떠들고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아서였다.
1972년 경북 안동 대한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어렵사리 숙소를 구했는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방이었다.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남진 특유의 악동기질이 발동했다.
대뜸 ‘물이야!’를 ‘불이야!’로 바꿔 소리치며 방을 뛰쳐나왔다.
정말 화재가 발생한 줄 알았던 단원들은 한바탕 대소동을 벌였다.
구석에서 남진은 신난다며 낄낄거렸다. 그는 “공동체랄까, 너도 나도 웃고 즐겼던
그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며 상대적으로 낭만이 메마른 지금의 가요 풍토를 꼬집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괴짜’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나훈아는 뒤끝이 없는 성격이었다.
1983년 그가 서울 천호동 은성카바레를 경영했을 때 과거에는 같이 자리하기조차 꺼렸던
남진을 출연가수로 섭외, 함께 무대에서 정답게 노래했다.
‘당사자 해결’ 차원에서 관계개선의 기회를 나훈아가 마련하고 남진이 선뜻 응한 것은
‘휴머니즘’을 체험한 그 시절 스타들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장면인 듯하다.
7)김세레나의 피날레
김세레나 하면 ‘신민요의 여왕’이란 사실에 앞서 가히 국보급이라 할 무대 욕심을 꼽는다.
신인 때부터 그의 의상 가방은 컸다. 쌀가마니만한 크기의 궤짝을, 그것도 두 보따리씩이나 들고 다녔다.
뭔가 특별한 것을 보여주려는 의욕, 남들을 꼭 이기려는 욕심 때문에 무대에 임하기도 전에 주변사람들은 백기를 들었다.
1969년 부산극장에서의 에피소드.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김추자와 함께 공연(共演)했던
이 쇼에서 주최측은 가장 인기 있는 가수가 나서는 피날레의 주인공으로 김추자를 결정했다.
김세레나와 김추자의 인기는 막상막하였지만 김세레나가 민요가수였기 때문에
현대적인 김추자를 마지막 순서로 택했던 것이다.
그러자 분장실에서는 김세레나의 언성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피날레 아니면 안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짐 싸서 서울로 올라가버리겠다!”
그의 고집에 김추자가 양보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김추자와의 자존심 싸움에서 결국 김세레나가 ‘승리의 피날레’를 장식한 셈이었다.
그 무렵 대구 만경관 극장공연에서는 바로 앞 순서였던 펄 시스터스가 사정이 생겨 펑크를
내자 김세레나는 그 시간을 자신이 메우겠다고 자청했다.
그리고는 무대에 올라가 단 1분도 쉬지 않고 논스톱으로 열아홉 곡이나 노래를
부른 일도 있다. ‘무대는 나 없이 안 된다. 내가 다 책임진다!’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같이 누가 노래하든 꼭 자신이 마지막 순서를 장식해야 한다는 고집과 철칙은 국제무대에서도 여전했다.
1987년 일본에서 열린 ‘동경가요제’에서도 그는 제일 끝에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김세레나의 무대 욕심은 ‘국제적’이었다.
1980년대 그러니까 그의 인기가 상당히 퇴조했을 무렵에도 그의 고집은 변함이 없었다.
서울 장안평의 스탠드바 ‘스카이’에 출연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출연을 알리는 그의 선전포스터가 이주일 조영남 뒤에 걸려 있었다.
그러자 김세레나는 계약금 800만원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그 자리에서 계약포기를 선언해버렸다. 한창 이런 말이 돌았다.
‘만약 포스터에 김세레나가 두 번째나 세 번째에 걸려 있으면 그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제일 크게 그의 사진이 붙어 있는 업소가 있다면 그곳에는 김세레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온다!(물론 맨 마지막에)’
그는 욕심이 많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인정미로도 명성을 날렸다.
1983년 서울 ‘카네기’에 출연했을 당시 그가 무명가수들과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거기에는 문영주라는 무명가수가 있었고 그의 눈에 김세레나의 화려한 무대의상이 탐날 정도로 멋지게 비쳤다.
그가 김세레나 옆으로 다가가 재롱피우듯 “언니 드레스는 참 예뻐요! 언니하고 너무나 잘 어울려요” 하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김세레나는 그 옷을 벗더니 “그래? 그럼 너 가져!” 하며 즉석에서 그 비싼 드레스를
문영주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무대에는 평상복을 입고 올라갔다.
만약 그가 남자였다면 틀림없이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렸을 것이다
(엘비스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 자동차고 현금이고 마구 주는 큰 통으로 유명했다).
김세레나는 실제로 노인정, 나환자촌, 학교 등에 아낌없이 위문품을 전달하는 ‘숨은’
자선사업가였다. 김세레나의 격의 없는 이웃돕기는 근래 톱 가수들 사이에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미디어를 통한
선전용 자선사업과 그 동기의 순수성에서 차이가 있다.
8)'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김세레나가 무대 욕심의 여왕이라면 김추자는 ‘무대장치 욕심의 여왕’이었다.
노래는 기본이고 조명, 마이크 상태 그리고 무대배경 등 장치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했다.
특히 ‘부분조명’에 목숨을 걸다시피 해 ‘이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얼굴만 비추고 이 대목에서는 가슴만 비추어달라’ 등등
세세하게 조건을 따졌다.
김추자의 무대철학은 “조명, 마이크와 같은 노래 외적인 요소의 뒷받침이 완전해야 노래가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대장치 욕심과는 달리 타이틀이나 위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974년 서울시민회관의 김추자 리사이틀 때, 많은 외국인들이 벌떼처럼 그에게 몰려와 사인을 요청했다
(김추자는 유독 국내거주 외국인 팬이 많았다).
그 무렵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추자의 전성시대’였다. 내국인 팬들이라 할지라도 감사의 제스처를 보이는 것이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스타의 당연한 자세였지만, 그는 미소도 짓지 않고 단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냉정하게 외국인들에게만 사인 해주었다.
그래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관계자들이 도리어 민망해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남진 나훈아에 뒤지지 않는 폭발적 인기를 누려 능히 ‘방송 10대 가수상’을 받고도 남을 가수였지만,
김추자는 단 한 번도 10대 가수에 들지 못했다. 그런 상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늘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주변의 지원도 내켜하질 않았다.
늘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 혼자 개척해서 최고 가수가 되겠노라”고 스스로 되뇌곤 했다.
그의 ‘나 홀로’ 버릇은 가히 미스터리였다.
외부와 접촉을 차단한 채 언제나 혼자서 조용하게 처신했다. 심지어 분장실도 별도로 썼다. 분장실에는 당연히 거울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김추자 공연을 준비한 극장측은 극장 사장의 거울을 떼다가 그의 전용분장실에 달아주기도 했다.
터질 듯한 율동과 내지르는 가창이 그의 상표임을 감안할 때 그런 무대 뒤의 ‘폐쇄성’은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노래도 절창이었지만 신들린 요정과도 같은 그의 춤은 하나의 전설이었다.
마치 무척추 동물처럼 휘면서 추는 춤, 그리고 하체의 굴곡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만큼 몸에 딱 달라붙는 판타롱 바지는
한때 ‘노 팬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을 정도로 전국의 화제였다.
1973년 부산 보림극장에서 열린 김추자 리사이틀에서는 한 남자 관객이 느닷없이
‘와! 노 팬티다!’ 하고 소리쳐 객석이 크게 술렁인 적도 있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김추자 공연 때는 평소 뒷자리에 앉는 남자들이 ‘뭘 보려 했는지’ 무대 앞으로 대거 몰려나오기 일쑤였다.
그러고 보면 김추자는 이 시대를 수놓고 있는 이른바 ‘비주얼 댄스가수’의 선구자였다.
지금 가수들은 모든 게 요즘 새로 생겨난 것이라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다 뿌리와 계보가 있는 법이다.
보여주는 댄스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더욱이 ‘님은 먼 곳에’를 비롯한 그의 히트곡이 잇따라 재조명되는 시점에서,
‘비주얼의 원조’인 김추자의 컴백소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시 돌아와 예전처럼 세심하게 신경 쓴 무대장치와 함께 보여줄 그의 환상적 열창무대가
기대된다. 김추자를 말하면서 같은 ‘신중현 사단’이며 댄스음악 붐을 일으켰던 배인순 배인숙 자매,
바로 ‘펄 시스터스’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가요계 최고의 듀엣이었던 이들은 다른 가수들과 달리 극장 쇼의 인기를 업고 방송으로 진출한 게 아니라
반대로 텔레비전의 인기를 가지고 무대로 뻗어간 예였다.
이것은 요즘 말로 ‘오디오 비디오 겸용가수’이며 나아가 ‘비주얼 시대’의 효시임을 말해주는 단서다
++계속++
- 음악 평론가 임진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