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봉 송공 묘갈명(參奉宋公墓碣銘)
송홍(宋泓) 공의 자는 호이(浩而)이다. 20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글공부를 하고 행실을 가다듬어 사우들 사이에 명성이 있었다.
병인년(丙寅年,1686, 숙종 12)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고 기사년(1689) 탄핵을 받아 떠났다.
누차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임신년(壬申年,1692) 3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0세였다. 공의 집은 고양(高陽) 용두촌(龍頭村)에 있었는데 세상을 떠나자 그대로 장사 지냈으니, 내 집 화전(花田)과 몇 리 떨어진 곳이다.
그의 아들 하서(夏瑞)는 내게 배운 적이 있는데, 하루는 이렇게 청했다.
“선친은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또 열한 살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성인처럼 예법을 지킬 줄 알았고 장성해서도 사모하는 마음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기일이면 재계하여 정성을 다하고, 마치 돌아가신 부모님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여기며 죽을 때까지 갓과 옷에 채색 단을 두르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도 장중한 태도를 지켰으며, 남과 어울릴 적에는 온화하고 모나지 않아 모두의 환심을 얻었습니다. 선친이 돌아가실 때 저 역시 아홉 살이었는데, 어리고 아는 것이 없어 들은 것이 겨우 한두 가지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군자의 한 말씀을 얻는다면 불후히 전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을의 어른들을 통해 공이 근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 현석(玄石 박세채)을 비롯한 여러 선배들이 몹시 추켜세웠다고 하니, 착한 선비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기사년(己巳年,1689)에 화가 일어나 현인군자들이 죽거나 유배되고 작게는 파직과 삭직을 면하지 못했는데, 공은 미관말직이었는데도 거기에 들어갔다.
이 또한 착한 사람의 무리가 아니겠는가. 명(銘)은 이와 같으면 충분하다.”
송씨는 신라 대아찬 순공(舜恭)에게서 나왔으며, 고려 평장사 인(仁)이 진천백(鎭川伯)에 봉해지면서 대대로 진천 사람이 되었다.
근세에 집의를 지낸 거(鐻)라는 분이 있고, 집의의 손자 구(耈)는 좌랑을 지냈다. 이분이 휘 취규(聚奎)를 낳았고, 배위 화순 최씨(和順崔氏)는 선교랑 진해(鎭海)의 딸이니 이분들이 공의 부모님이다.
공은 완산 이씨(完山李氏)와 혼인하였으니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통덕랑 운망(雲望)의 딸이다. 현숙하고 온화하여 이웃과 친족이 현명하다고 일컬었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하서(夏瑞)는 장남이고 다음은 은서(殷瑞)이며 진사 이현좌(李鉉佐), 사인 이적(李迪), 이사맹(李師孟)은 사위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이 사람은 우리 고을의 착한 선비이니 / 是惟吾鄕之善士
이곳에서 죽고 이곳에 묻혔노라 / 死於是葬於是
----------------------------------------------------------------------------------------------------------------------------------------------------------
[脚註]
[주01] 참봉 송공 묘갈 :
이 글은 송홍(宋泓)의 묘갈명이다. 송홍의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호이(浩而)이다. 1653년(효종4) 태어나 1692년(숙종19) 3월 9
일에 세상을 떠났다.
[주02] 갓과 …… 않았습니다 :
《예기》〈곡례 상(曲禮上)〉의 “고아가 집안을 이으면 갓과 옷에 순수한 채색 단을 두르지 않는다.[孤子當室, 冠衣不純采.]”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