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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63
11월3일[연중 제30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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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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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X5Bpa58PI1s
(서울대교구 이준혁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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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치유행위는 안식일 정신에 가장 합당한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평소 사이가 껄끄러웠던 바리사이들 가운데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식사란 마음 맞는 사람들 편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음식도 나누고 인생도 나누는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평소 틈만 나면 적개심을 표출하고, 이를 갈면서 분노하고,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아 고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바리사이들과 마주 앉아 식사한다는 것,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저 같았으면 단칼에 바리사이의 식사 초대를 거절했을 것입니다. ‘내가 미쳤어? 그런 부담스러운 자리에 초대받게? 그 위선적인 인간들과 식사하다간 소화불량 생길 것이 100%인데……. 차라리 집에서 마음 편히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고 말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바리사이의 초대에 응하셔서 식사도 하시고 포도주잔도 기울이셨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이라고 그 곤혹스러운 자리에 더 곤혹스러운 일이 한가지 발생합니다.
식사 중이신 예수님 바로 맞은 편에, 수종을 앓고 있는 사람 하나가 자리를 잡고, 예수님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치유를 청하는 간절한 눈빛이었을까요? 아니면 적개심으로 가득한 눈빛이었을까요?
아무튼, 예수님 처지에서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꼼짝달싹 못 하게 옭아매려고 데려다 놓은 미끼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날은 마침 안식일이기도 했습니다.
수종(水腫)이란 배가 산처럼 붓는 질환입니다. 신장 이상으로 부종이 심해져서 올 수도 있고, 간암이 깊어지면서 올 수도 있는, 당시에는 회복 불능의 치명적인 질환이었습니다.
식사를 중단하신 예수님께서는 악의적인 바리사이들의 계략에 분노하지 않으시고, 명쾌하고도 기가 막힌 단 한 문장으로 길고 긴 안식일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말문을 닫아버리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안식일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쉬는 날이라는 의미도 지니지만, 해방과 파스카를 기념하는
의미도 지닙니다. 당시 안식일에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해내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기념했습니다.
그렇다면 병으로부터 한 인간을 해방시키고,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너오게 하는 예수님의 치유행위는 안식일에 가장 합당한 일이 틀림없었던 것입니다. 치유행위야말로 안식일의 정신에 가장 잘 들어맞는 일이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는 우리 인간들을 모든 죄와 억압과 그릇된 오류에서 해방시키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서게 하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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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Dt_Bu0hR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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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왜 옆집 아저씨가 돌아가셔도 슬프지 않은데 내 강아지가 죽으면 슬플까?>
주교님들이 오셔서 집전해 주신 교구 위령 미사 중 한 분이 쓰러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 대응하는 방식이 조금씩은 달랐습니다. 성찬례 때 그랬기 때문에 심폐소생술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신 신자분들 중에 의사나 간호사를 찾아야 했습니다. 성체를 영하는 시간에 마이크로 공지를 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들은 미사 분위기를 망치더라도 한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마침 방송을 듣고 지나가시던 어떤 분에 뛰어 올라왔습니다. 의사셨습니다. 그래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미사에 참례하신 분은 그 쓰러진 모르는 분을 형제처럼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 아들이나 가축이 우물에 빠지면 안타깝게 느끼지만, 이웃이 그러한 처지에 처했는데도 자비심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개를 키웠을 때 개가 사라졌을 때는 매우 가슴이 아팠지만, 이웃의 누군가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만큼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사고로 피 흘리는 사람을 보았지만, 신고하면 할 만큼 했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쳐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람이 형제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언젠가 어떤 남자 청년이 자기 강아지가 자전거 바퀴에 걸려 죽은 것을 보고는 피 흘리는 강아지를 안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길옆에 있던 우리는 혀를 쯧쯧 차기는 하였지만, 그만큼 슬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도 그 강아지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청년은 사랑이 아주 많은 사람일까요? 강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슬퍼한다고 그 사람에게 사랑이 많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강아지에게 그만큼 사랑을 많이 주었겠지만, 불쌍한 이웃에게는 어떻게 하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체를 연결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강아지에게는 주인이 준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또 주인 마음에는 강아지가 받은 사랑에 보답한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이 상대의 감정을 내가 느낄 수 있게 이어줍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내가 꼭 사랑을 주고받은 대상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면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분께 사랑을 받고 그분을 사랑하면 됩니다. 영화 아바타에는 마더 트리가 나옵니다. 마더 트리는 그 생명력으로 모든 나비족에게 생명을 주고 또 그들로부터 생명을 받기도 합니다. 나비족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죽은 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마더 트리에 주고 마더 트리는 그 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며 살려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창조하신 분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먼저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와의 통교가 이루어지면 형제도 사랑합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이 아픈 것을 사랑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형제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느끼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마더 트리와 같습니다. 생명나무이고 성체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으로부터 존재와 사랑을 받지 않은 생명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조자의 마음을 그대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분 덕분으로 많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왜 예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과 통교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지의 이유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 마더 트리인 그리스도를 사랑합시다. 그러면 모든 이들, 모든 존재가 우리 형제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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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바리사이, 율법학자의 꼰대 근성에서 벗어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아닌지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들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 돌려보내신 다음,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이 나이 들면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대답을 즉시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대답을 즉시즉시 했더니 사람들이 그 대답으로 옭아매어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해도 일단 침묵을 지킵니다.
물론 말실수를 줄이기 위해 신중한 것은 좋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이 말을 막 할 때가 좋습니다. 어떤 것들에 일부러 침묵하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사람은 나에게 솔직해지고 싶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신중해서가 아니라 솔직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심으로는 무엇이 중요한지 알면서도 자신들이 외적인 것에만 치중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이렇게 솔직하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꼰대’라는 말을 듣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꼰대들은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이날치’는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입니다. 본명은 이경숙이지만, 날쌔게 줄을 잘 탄다는 의미에서 날치라는 예명이 붙었습니다. 상민과 양반, 모두에게 두루 사랑받은 서편제의 대표 소리꾼으로, 흥선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서 소리판을 열기도 했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전해지진 않지만,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실제 새가 날아들었다는 말까지 전해집니다. 조선 시대 이날치의 재기 넘치는 멋과 흥을 되살린 ‘이날치 밴드’가 지금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조선의 힙합’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날치 밴드가 등장하는 한국관광공사의 홍보영상은 조회수가 2억 7천만을 넘어서 해외에서도 인기몰이 중입니다. 반복되는 가사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 홍대 앞 클럽에 어울릴 법한 분위기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엉뚱하게도 판소리 ‘수궁가’의 한 장면입니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범 내려온다.” 별주부가 호랑이를 만난 순간을 묘사한 이 노래,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고, 유튜브 조회 수만 2천9백만, 이날치가 등장하는 다른 영상들까지 합하면 2억7천만을 넘었습니다.
베이스 2명과 드럼 1명, 그리고 정통 국악을 전공한 소리꾼 4명의 조합으로, 2018년 밴드 결성 이후 국악도, 힙합도, 디스코도 아닌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국악계의 불편한 시선도 없지 않지 않습니다. 그 불편한 시선에도 음악은 무엇보다 일상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안이호 보컬은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가 만들어준 가치라는 것이 주는 압박이랄까요. 그 무게감은 사실 일상에 스며들기는 힘들잖아요. 그 가치에 스스로 짓눌려있는 것 같아요.”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추구한다는 오랜 가르침을 새롭고 독특한 음악으로 몸소 구현하고 있습니다.
[출처: ‘2억7천만 뷰 기록한 ‘이날치 열풍’, 세계 매료시킨 ‘조선의 힙합’’, 정연욱 기자, KBS 뉴스, 2020.10.28]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이전의 틀을 고수하려는 사람과 이전의 것을 익혀서 현 대중들에게 맞추려는 사람들입니다. 판소리는 여전히 현대 음악과는 거리가 먼 일부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날치’란 젊은 그룹이 판소리를 힙합과 결합해 인기몰이 하니까 일부 판소리꾼들은 그들에 대해 거북한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판소리는 조선 시대의 힙합과 같은 대중음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시대에 맞춰 이 대중음악의 틀도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대중이 알아주지 않으면 판소리는 이제 영원히 잊힌 음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전의 형식만을 강조하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처럼 꼰대 소리를 듣게 될 수 있습니다. 대중이 원하지 않으면 잊히는 것이고 잊히면 의미 없게 됩니다.
이전의 가치의 무게를 벗고 현시대에 그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려면 ‘무엇은 바뀌면 안 되고 무엇은 바뀌어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몇년 전에 별세하신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중이 원치 않는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을 만드는 것에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꼰대 근성에서 벗어나려면 대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확대되면 ‘이웃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꼰대’는 젊은이들이 잔소리꾼 어른들을 일컬어 부르는 은어입니다. 이들이 잘 쓰는 말은 “나 때는 ~”입니다. 이것을 비꼬며 발음이 비슷한 ‘라떼’ 커피와 결부시키기도 합니다.
꼰대에서 벗어나려면 오늘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런 것을 주장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 법이 현재의 가치에 대해 논하십니다.
‘지금’ 바뀌지 말아야 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사랑의 가치’입니다. ‘지금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어떻게 변해야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지금 어떻게 변해야 사람을 기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가차 없이 바꿔야 합니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고 무엇이 바뀌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라고 하십니다.
‘지금’과 ‘이웃사랑’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길 수 있다면, 절대 꼰대라 불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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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휴가 중에 동창 신부의 사제관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 동창 신부님이 고마웠습니다. 몸이 쉴 수 있는 잠자리도 고마웠지만, 서재에 있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며칠 지내면서 ‘노자의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읽었습니다. 노자 제2 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높고 낮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것.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서로의 관계에서 어울리는 것.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따라서 성인은 무위(無爲)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합니다. 모든 일이 생겨나도 마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루나 가지려 하지 않고, 할 것 다 이루나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공을 쌓으나 그 공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공을 주장하지 않기에 이룬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이라는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삶에도 원칙과 기준이 있습니다. 성공, 재물, 권력, 명예라는 기준입니다. 그 탑에 오르기 위해서 앞서가는 사람을 끌어내리기도 하고, 따라오는 사람은 밀쳐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성공과 발전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한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염수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바다에 버립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터전을 총과 칼로 빼앗기도 합니다. 같은 조상을 모시고 있으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죽고 죽여야 하는 전쟁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의 법으로 단죄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는 달랐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같지만 그 위에 싹이 나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해서 직선으로 나가는 것 같지만 시간은 기억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순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리적인 시간에 우리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가치와 의미의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위령의 달에 우리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의 시간이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매년 순환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속에 죽은 이도, 살아있는 이도, 앞으로 살아야 할 사람도 모두 함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선과 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은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예수님께는 안식일과 율법 그리고 계명은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신앙은 편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나의 기준과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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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1-6: 안식일에 대한 논쟁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으시고 가셔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지켜보았다.”(1절) 그분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하여 율법의 존엄성을 훼손하면 올가미를 씌우려 한다. 거기서 주님은 수종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신다. 그는 육체적으로 방탕한 생활로 그 영혼을 더럽히고 영의 빛을 꺼버린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3절) 물으셨다. 그들은 침묵하고 만다. 안식일은 합리적으로 잘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영적 향기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죄를 멀리하고, 모든 덕행에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며 거룩하고 칭찬 들을 만한 삶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날이다.
그들이 나쁜 뜻을 품고 침묵할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파렴치를 설득력 있는 말씀으로 반박하신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 안식일에 자비를 베푸는 일을 율법이 금한다면, 어째서 그들은 우물에 빠진 생명을 구하는가? 그들의 침묵이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을 멈추시는 분이 아니시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해 자유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그들 자신은 물론 노예나 가축들도 쉬게 하였다(신명 5,14-15). 안식일이란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날이며, 해방과 자유의 날로 기쁜 날이었다(이사 58,13).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기쁨과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안식일”이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하느님의 선하심과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언제나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날이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하느님의 기쁨과 희망을 베풀어주셨다. 즉 문자적이고 법적인 해석 너머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바로 인간의 해방과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알려주셨다. 즉 안식일의 의미를 인간을 위한 것임을 확인해 주셨고,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회복해 주셨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계명의 문자에만 얽매여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이고 타성적으로 되면 그 신앙생활은 얼마 가지 않아 의미를 찾지 못하고 식어가고 말 것이다. 신앙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이 될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이, 즉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면서 그것을 실천한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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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교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루카 14,1-6)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는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즉 호의적인 사람이었을 텐데, 그 식사에 함께 참석한 다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수종을 앓는 사람’이 마침 예수님 앞에 있었다는 말은, 우연히 그 자리에 병자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병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앉혀 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무시하고 그 병자를 고쳐주실 것이라고 예상했고, 자기들이 생각한 대로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쳐주시면 율법을 어겼다고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라는 말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그런 속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병자가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지 않은 것도 그 자신이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데리고 왔음을 나타냅니다. <어쩌면 병자 자신도 안식일 규정을 강하게 의식해서 치유를 청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자리에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두려워해서 치유를 청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도와 속셈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자가 청하지 않아도 당신이 먼저 병자를 가엾게 여기셔서 고쳐주시는 분입니다.(요한 5,6)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는 사람’을 고쳐주신 일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병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라는 질문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율법을 위반하는 일이냐? 아니냐?”라는 질문이기도 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합당하다.”가 정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합당하지 않다.”가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루카 13,14) 그런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초대한 집주인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침묵은 예수님 말씀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의 병을 고쳐주신 다음에 그를 돌려보내신 것은, 그가 손님으로서 참석한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병자 자신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 감사드리지도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병자 처지에서는 ‘병을 고친 기쁨’보다 ‘안식일을 어겼다고 박해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압박감’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과 압박감 때문에,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했습니다.(요한 5,15)>
종교와 신앙을 “남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큰 죄를 짓는 일이고, 자기를 억압하는 멍에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종교와 신앙에서 구원, 자유, 해방을 체험하지 못하고, 억압과 압박만을 느낀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아주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은, ‘생명을 구하는 일’은 안식일 규정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종교는 ‘생명을 구하는 곳’, 또 ‘사랑만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말씀에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적대감이 더욱 깊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사도시대 때에 율법 논쟁이 벌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 사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사도 15,10-11)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계 신자들을 가리키고, ‘그들’은 이방인계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멍에’는 할례를 비롯해서 ‘모세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베드로 사도는, “율법은 조상들도 우리도 감당할 수 없었던 멍에였다.” 라고 분명하게 밝혔고, 멍에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선언했고,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으로 받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선언과 고백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구원과 해방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 구원과 해방과 자유는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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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안식일 규정은 구약 성경의 오경에 소개된 모세의 율법에 속합니다. 하느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탈출기 이야기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구원 체험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과 맺은 계약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십니다. 십계명을 포함하는 모세의 율법은 당신 백성을 향한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 사랑에 무감각해지고 바빌론 유배의 아픔까지 겪습니다. 그 과정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세부 규정을 더합니다.
안식일에 관한 규정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본디 안식일은 창세기에 나오듯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를 마치시고 마지막 날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거룩하게 지내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의 마음은 어느새 잊히고 법 규정만 남게 됩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린 채 세부 규정에만 집착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과 나눈 대화인 복음 속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에서 비롯합니다. 미사는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재현하며 현재화하는 공적인 전례입니다. 미사의 근본정신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 사랑을 다시한번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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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수 바오로 신부님]
월요일에 이어 다시 안식일이 문제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시작과 함께 두 가지 낯선 설정을 제시합니다. 먼저 그 자리에 있던 율법 교사와 바리사이들의 행동이 묘사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고 식사를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식사 자리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위계질서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앉기 좋아하던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자신들의 식사 자리에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병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게다가 그날은 주중의 다른 식사와는 구분되는 안식일의 식사 자리였습니다.
이 두 가지 설정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질문하시며, 그들의 계략을 무력하게 만드십니다.
비록 그들의 침묵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지만,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이라는 주님의 거룩한 날과 수종을 앓고 있는 병자를 예수님을 옭아매려는 도구로 삼는 모습이 참으로 무섭게 다가옵니다.
안식일이 지닌 참된 의미는 보지 못한 채, 병자가 겪고 있는 고통은 생각하지 않은 채, 하느님의 계명과 고통받는 이웃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그들의 폭력성은 끔찍하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지키는 계명과 의무가 지닌 본질적인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지 못한다면, 생명의 법이 나만을 위하거나, 누군가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말입니다. 지켜야 하는 계명보다, 그 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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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모든 법의 기초는 사랑이어야 한다>
법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선포한 이성의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은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야 하며 지켜져야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따라서 적용에 있어서 형평성을 지켜야 하지만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것이라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실정법보다는 하느님의 법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창세기 2장3절에 보면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저 쉬는 날이 아니라 감사와 찬미의 날입니다. 일주일을 잘 지내기 위해서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일주일을 잘 보내도록 안배하신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날입니다.
탈출기 20장 10절 11절에 보면 십계명 중 3번째 계명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 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사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다음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탈출19,8)한 후 시나이산에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는 노예뿐 아니라 가축까지도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노예살이했던 옛 상황을 기억하고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 위한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찬미와 감사, 그리고 해방의 기쁨을 함께하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 속에 안식일 안에 담긴 알맹이는 사라지고 법규의 틀만 지키기에 급급해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 규정을 만들고 해석한다는 빌미로 이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자신들의 뜻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안식일 법이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국가보안법’이니 ‘긴급조치 법’, ‘유신 법’ 등 정권 유지를 위한 방법으로 법의 남용을 많이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사형제도라든지 낙태법을 빌미로 살인죄를 용납하고 있고,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악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모든 것 위에 있고, 안식일과 같은 거룩한 제도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취지를 살리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기득권을 누리려고 외면해 온 것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수종 병자”는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병에 걸려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병, 마음이 오그라든 병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나쁜 것을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못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못된 것이 참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잘못을 범할 때 정말 모르고 범합니까?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의 달콤함을 채우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합리화시키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법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인간을 앞설 수 없으며 또한 그 근본취지를 잘 살려야 하겠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우리의 태도 또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날, 공동체가 함께 주님과 기쁨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의무적으로 주일미사에 오신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일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법은 영원합니다. 법을 집행할 때 사랑이 빠지면 악법이 되고 맙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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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한 청년이 노인에게 삶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청년에게 양동이 3개를 준비한 뒤 물을 넣고 끓이라고 시켰습니다.
물일 끓기 시작하자 노인은 청년에게 한 양동이에는 당근을, 다른 양동이에는 달걀을, 마지막 양동이에는 찻잎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노인은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이 끓는 시간은 곧 삶에서 겪는 고난의 순간들이라네. 세 가지 대상에게 고난이 주어졌더니, 어떤 결과가 펼쳐졌는지 보게나.”
물이 끓을수록 당근은 부드러워졌습니다. 달걀은 속이 단단해졌습니다. 찻잎은 물 전체를 향기로운 차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근에게, 달걀에게, 찻잎에게 뜨거운 물은 분명히 고통이고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실은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부드러워질 수도 또 단단해질 수도 그 결과 향기로움을 전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고통과 시련이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렵고 힘든 것은 무조건 피하려고만 하지요. 그 결과 고통과 시련은 무조건 나쁜 것이 되고 맙니다.
이 고통과 시련 속에서 축복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으려면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 안에서 축복의 통로는 훨씬 더 넓어집니다.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병으로 인해 그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 은총이라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남에서 방해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교사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병을 앓고 있음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죄인을 위해 안식일 계명을 어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병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서 큰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막는 사람이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자기는 맞고 너는 틀렸다고 규정을 짓습니다. 그런 섣부른 판단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자리는 없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없애고, 그곳에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결코 죄의 결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을 방해하는 사람이 아닌,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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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사람아>
루카 14,1-6 (수종을 앓는 이를 안식일에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이 사람아>
사람이라면
사람이고 싶다면
바로 앞에
앓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못 본 척
마음 편하게
아무리 맛난 밥이라도
목에 넘어가느냐?
뭐라도 해야지
안식일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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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기도로서 위로하는 우리>
오늘 복음은 지난 월요일 복음, 그러니까 루카복음 13장 10-17절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다르다면 13장에서는 회당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고 오늘 14장에서는 바리사이 집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신 겁니다.
오늘은 바리사이가 주님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 것인데 저는 여기서 왜 바리사이가 주님을 초대하였고 식사대접까지 한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더욱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뒤 그에 대해 비판적인 회당장을 주님께서 묵사발 만든 얘기를 틀림없이 들었을 텐데 그런데도 다시 수종 병자를 주님 앞에 있게 한 것은 무슨 의도인지 생각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서술만 보면 바리사이에게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지 않고 주님의 말씀도 그를 크게 나무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리사이는 주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바리사이는 주님께 식사 대접을 하고 있고 오늘 복음을 보면 아무런 불만의 표시가 없습니다. 식사는 싫어하는 사람하고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특별한 호의나 사랑이 있을 경우 식사에 초대하잖아요?
그렇다면 주님도 호의를 가지고 초대에 응하신 것이고 하신 말씀도 나무람이라기보다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실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시고 누구에게나 그에게 맞게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주님은 바리사이에 대해 무조건 적대감을 가지시고 당신의 복음 선포와 사랑에서 이들을 포기하거나 배제했을 것 같지만 결코 피하거나 포기치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마주치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 간절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한때의 자기처럼 죽어라 하고 주님을 거부하는 그들을 위해 자기가 저주받고 그리스도에게서 배척될지라도 뭔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아무도 포기치 않고 한두 번의 노력으로 포기치 않는 바오로의 사랑은 바로 오늘 주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얼마 안 되는 사랑은 한두 번 애써서 효과가 없으면 포기해 버리지만 진정한 사랑과 큰 사랑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지요.
부모 특히 어머니가 끊임없이 잔소리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지치지 않는 엄마의 사랑이 지치지 않고 잔소리를 하는 거지요. 사실 잔소리하지 않는 엄마는 엄마가 아니고 그래서 돌아가시고 나면 그 잔소리가 그립잖아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나무람이 아니고 사랑이고 가르침인데 그렇다면 어떤 가르침입니까?
안식일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이요 본질적인 가르침입니다. 안식일이 본래 사람을 살리는 날이라는 가르침이고, 무엇을 하든 본질적으로 판단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미워죽겠다고 제게 고백할 때 저는 종종 그러면 그가 정말 죽었으면 좋겠냐고 본질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면 밉기는 해도 죽기는 바라지 않는다고 펄쩍 뛰지요.
복음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듯이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마땅한지 죽이는 것이 마땅한지 이렇게 근본적으로 보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마땅하지요.
사랑이 사랑이기만 하면 사랑은 언제고 정당하고 언제나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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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
-내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 51,12)
새벽 성무일도 독서중 지혜서 마지막 대목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달리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혜가 누구의 선물인지 아는 것이 현명의 표시이다.” 거룩함뿐 아니라 지혜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이겠습니다. 악에 대한 처방은 거룩함이요, 무지에 대한 처방은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together) 사랑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입니다. 과연 내 사랑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요.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를 생각하면서 언뜻 떠오른 제목입니다. 얼마전 더불어 사랑의 여정에 대해 나눴습니다. 진정한 내적성장은 사랑의 성장이겠고 육신의 성장은 멈춰도 영혼의 성장, 사랑의 성장은 계속되어야 하겠는데 사랑의 성장에는 여전히 초보자처럼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를 반영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는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태평양 깊이의 사랑도 있겠고, 시냇물 깊이의 사랑도 있을 것입니다. 살아갈수록 깊어지는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11월은 위령성월이자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기도 하며, 어제 제가 명명한 “성인성월(聖人聖月)”이기도 합니다. 어제 인용했던 교황님의 고백을 통해 교황님이 얼마나 사랑의 노력을 기울이는 분인지 깨닫게 됩니다. 88세 노령에도 그 한결같은 열정이 놀랍습니다. 아마도 교황님의 사랑의 깊이 역시 한없이 깊을 것입니다. 다시 교황님 말씀을 인용합니다.
“교황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a process)’으로, 그는 목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가게 된다. 이런 과정중에 그는 더욱 사랑이 많아지고, 더욱 자비로워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인내하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처럼, 더욱 인내하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교황님의 고백은 믿는 모든 이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거룩함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참내가,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받은 거룩함의 선물을 실현시켜가는 하나의 과정이며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에 소개되는 바오로 사도의 이스라엘 동족에 대한 사랑의 깊이는 얼마나 깊은지요! 복음의 예수님 다음으로 거의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한 느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진정성 가득 느껴지는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한 바오로 사도 같습니다. 진정성 가득 느껴지는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한 바오로 사도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극진한 동족 사랑의 뿌리에는 다음 고백에서 보다시피 하느님 사랑이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이어 “영혼의 자서전”에서 읽은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그리고 “침묵의 산”에서 읽은 성 그레고리오 동방교부의 고백이, 불교의 지장보살이 연상되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겨 천국으로 들여보내든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은 자들을 위로할 질서를 세우겠나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없다면, 저는 지옥에 남아 그들과 고통을 나누겠습니다.”
이어 동방의 성 그레고리오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의 사상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선과 사랑의 확신에 기초한다. 하느님은 절대적인 사랑과 절대적인 연민으로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 지옥의 고통은 유일한 목적으로서 ‘영혼의 치유’에 있다.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 치유는 불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그 불은 감각적 불이 아니라 도덕적 성격의 불이다. 정화후에 영혼들은 영원으로 돌아간다. 어떤 이들은 지상생활 동안 정화에 도달하고 어떤 이들은 내세동안 성취된다. …… 마지막으로 ‘악의 발명자(the inventor of evil)’ 까지 비슷한 방법으로 치유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될 때 온창조계에 울려 퍼지는 찬미는 하느님께로 들어 높여질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지옥까지 미치는 하느님 사랑임을 보여주는 동방 교부들 사랑의 깊이는 얼마나 깊은지요! 놀라운 것은 위대한 고대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영원한 지옥의 개념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분들과 유사한 불교 지장보살에 대한 소개입니다.
“지장보살은 육도 중생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건져내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끝까지 지옥에 남겠다는 대원력을 세우신 보살이다. 대 자비로써 중생들을 구제하시고 계시는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멸하신 후로부터 미래세에 미륵보살이 나타나실 때까지의 무불시대(無佛時代)에 계시며 중생제도를 부촉받은 보살이다.
사바세계 일체중생들에게는 고맙기 그지없는 보살이다. 마지막 한 명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영원히 보살로 남겠다는 지장보살은 가히 대원본존(大願本尊)의 보살이라 할만하다. 뿐만 아니라 지옥 중생을 제도코자 지옥 문전에서 대비(大悲)의 눈물로써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 보살이다.”
흡사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교의 지장보살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사랑의 깊이에서 하느님 경지 까지 이른 분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침이 없고 추호의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런 용기와 확신은 그대로 하느님 경지에까지 이른 사랑에서만 가능합니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들 앞에서 추호의 주저함 없이 말씀하신 후 수종을 앓는 이를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고 병을 고쳐주신다음 돌려보내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안식일 잣대가 아닌 하느님 사랑의 잣대로 보면 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이미 물음 안에 답이 있기에 이들은 아무 대답도 못 합니다. 예수님 사랑의 깊이는 하느님 사랑의 깊이까지 도달해 있음을 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이 세 스타일, “친밀함(closeness), 연민(compassion), 부드러움(tenderness)”입니다.
문득 어제 복음 말씀중 주님께서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주님과 무관한 사랑의 관계였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씀입니다. 평생 주님을 섬겼는데 이런 나만의 이런 일방적 짝사랑의 관계였다면 그 착각이 너무 허망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너나할 것 없이 ‘더불어 사랑의 여정’ 중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사랑의 여정, 앎의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 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하박 3,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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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14,3)
<(1)형식과 본질!>
오늘 복음(루카14,1-6)은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는 이를 안식일에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그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5)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왜, 예수님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안식일, 곧 주일은 부활하는 날'입니다. 이 부활은 '죄(병)로부터의 부활'이며, '아픔과 시련과 지침으로부터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주일)의 본질'입니다.
늘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는 '형식과 본질'이 놓여져 있습니다. 형식은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형식이 향하고 있어야 할 곳은 본질'입니다. '형식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며, 본질로 나아가게 하는(이끄는) 도구요 수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본질보다도 형식에 집착하거나 얽매일 때가 많습니다. 법이나 규칙 등으로 표현되는 형식은 참으로 소중한 것들이지만, 그것이 결코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것(기도. 미사. 나눔 등등) 안에서, 그것들이 지향하는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질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바라보면서, 형식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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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 14장 3절)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하실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지 않고 예수님을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하지 않는 그들인데,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이 두 모습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있음을 바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런 다음 수종을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장 5절)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믿음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믿음을 뛰어 넘는 믿음, 곧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미사가 생각과 말로만 드리는 기도와 미사, 계명 안에 갇혀 있는 기도와 미사가 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뛰어 넘는 기도와 미사, 곧 구체적인 사랑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는 살아있는 기도와 미사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구체적인 메시지이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싸움에서 지켜내신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시고 지켜내신 이 소중한 메시지를 항상 기억하면서, 나의 믿음과 기도와 미사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나와 너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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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11Sfx-uH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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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 5)
생명을 위한
안식일이다.
생명이 있기에
안식일이 있다.
생명을 살리는
안식일이다.
안식일은
생명을
향한다.
우리 앞에 있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도
생명의 관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연민의 마음은
곧 안식일의
마음이다.
연민의 마음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마음이다.
안식일은
생명을 위한
날이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제도와 규정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다.
안식일은
그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안식일과 생명이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
생명을 되찾는
안식일이다.
생명이
안식일이다.
서로를 향한
측은지심이
안식일의
본래 마음이다.
생명은 마음이고
원칙은 본질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생명이 있기에
생명을 돌볼
안식일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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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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