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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 도정 권상호 님의 라이브서예 대통령취임을 축하하면서/ 3년전, 2008년 2월 29일/ 도정 권상호, 운학 박경동 님과 함께 천개천 장통교위에서 라이브서예 개최 지난 22일날 이명박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이날 날씨가 좋지 않았다./ 태그: 도정 , 권상호 , 박경동 , 운학.../ blog.daum.net/ 와석방(daum 2011)
권상호 : 대창80년사:부록(26) 학생회임원(2)-주번복무규정/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년 2월 27일 (일)/ 윤원진, 총무차장에 이상익, 문예부장에 황병기, 문예차장에 김영호, 새마을부장에 권상호, 새마을차장에 황용철, 체육부장에 윤경원, 체육차장에 이인복, 훈련부장에 최재현, 훈련차장에 김진철.../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권상호 : 대창80년사:부록(10) 부장교사-대입자(1)/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년 2월 11일 (금)/ ...(수학), 정영교(고분자), 노재열(지리), 권용정(생물), 최재호(일사교육), 장지륜(지리교육), 권상호(국문), 황철상(농공),♣윤여창(공대), 황부해(농대), 안상모(인문계), 조자영(전자), 황우섭(인문계.../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권상호 : 대창80년사:부록(3) 수상현황(2)/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년 2월 4일 (금)/ 권오석, 고 : 1982 장석황, 1983 김이규, (33) 예천우체국장상(醴泉郵遞局長賞) 중 : 1970 권상호, 1973 이일직, 1975 황진섭, 1976 황우기, 1997 정동진, 1998 우병희, 1999 권준수 고 : 1970 .../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권상호 : 대창80년사:부록(2) 수상현황(1)/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년 2월 3일 (목)/ 김경호 외 6, 2000 정현진 외 11, (3) 3년 개근상(三年皆勤賞) 중 : 1969 김수용 외 22, 1970 권상호 외 42, 1971 황재영 외 74, 1972 이경식 외 83, 1973 최희열 외 69, 1974 박인호 외 84, 1975.../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권상호 : 대창80년사:중고병설시대(29) 송원선생논문집-영풍수련장입소/ 작성 장병창/ 2달전, 2011년 1월 27일 (목)/ ...(康五漢), 강홍원(姜弘遠), 권기모(權奇模), 권대갑(權大甲), 권대섭(權大燮), 권도하(權道河), 권상호(權相浩), 권용정(權容正), 김교은(金敎殷), 김돈(金墩), 김봉균(金奉均), 김상묵(金相?), 김윤구.../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권상호 : 재경예천군민회cafe/ 재경예천군민회 2011 신년교례회 성황리에 열려/ 2달전, 2011년 1월 19일 (수)/ 이날 예천여중고 24회(17회) 동문들의 영남농악 시연으로 장내 흥을 돋우었다. 또한 식후행사로 서예가인 도정 권상호 님의 라이브 서예와 가수 지훈의 뜨거운 열창 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권상호 : 재경예천군민회 2011 신년교례회 성황리에 열려/ 2달전, 2011년 1월 17일 (월)/ 영남농악 시연으로 장내 흥을 돋우었다. 또한 식후행사로 경기문화재 제8호인 최정옥 씨의 살풀이와 서예가인 도정 권상호 님의 라이브 서예와 가수 지훈의 뜨거운 열창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권상호 : (군민동정)-도정 서예가 권상호 (지보면) 예술세계/ 2년전, 2009년 10월 26일/ 水原大學校 美術大學院 書藝 兼任敎授, 大韓民國書藝大展 招待作家(韓國美術協會), 大韓民國書藝大展(韓國美術協會) 特選 2回, 入選 6回(漢文, 한글) 자랑스런 예천인 도정 서예가 권상호/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권상호 : 미국 워싱턴주에서 라이브 서예 -도정 권상호(지보면)/ 3년전, 2008년 8월 18일/ ...열렸다. 이 행사에 서북미 한국문화재단(김철홍 회장)의 초대로 한국 서예가 도정 권상호(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서예과), 운학 박경동 씨(마라톤 서예가), 혜향 조혜경 씨를 비롯 가수 김민홍 씨가.../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권상호 : 숭례문 추모 라이브 서예-塗丁 權相浩 (예천지보産)/ 3년전, 2008년 3월 7일/ ...(불승영모)로소이다. 비옵나니 다시 우뚝 일어서소서. 흉례문에서 숭례문으로…… - 문화 자존심 발인날에 권상호 哭拜 2월 10일 밤, 뜻하지 않은 화재로 국보 제1호 숭례문이 소실되었다. 이를 추모하는 전국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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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경(4月 26日 開封, 注目받고 있는 映畵 '맨발의 기봉이' 권수경 監督은 醴泉 土種) [記事] : 최근 영화팬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켜 최고의 화제작으로 등장한 휴먼드라마 '맨발의 기봉이'의 권수경(40) 감독이 예천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권 감독에 대한 지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권수경 감독은 아버지 권석재(69,예천읍 상리) 씨와 어머니 변정교(66) 씨의 2남 중 둘째로 예천초, 예천중, 대창고,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북경영화학교에서 장예모 감독에게 영화 수업을 받은 후 영화 '비천무'에서 조감독을 맡은 바 있으며, 이번에 영화 '맨발의 기봉이'로 데뷔하게 됐다.(윤현숙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6-05-11 오후 8:49:18)
권수경('맨발의 기봉이'로 映畵팬 사로잡아 : 醴泉邑 上里 胎生 권수경 監督..中國 장이모우(北京映畵學校) 監督의 弟子) [記事] :ꡒ수경이가 영화감독이 된 것은 내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군복무 시절 나도 영화 보러 엄청 다녔거든요.ꡓ안동 권씨 집성촌인 예천읍 상리에서 10년 정도 이장직을 맡았던 권혁재(68) 씨와 상리새마을부녀회장이었던 변정교(65) 씨의 차남 권수경(39) 감독. 지금은ꡐ맨발의 기봉이ꡑ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감독이지만, 아버지 권혁재 씨는 아들이 다른 사람들 사는 것처럼 학교 졸업하고, 회사 생활하다가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권 감독은 1998년 경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2년 정도의 짧은 회사생활을 한 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영화학교에 입학했다. 그만큼 그에게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절실했고, 영화 제작에 관한 열정이 컸다.ꡒ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막을 수가 없더라구요.ꡓ북경에서 전화를 걸어온 아들에게 권혁재 씨는ꡒ이미 갔으니 최선을 다해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ꡓ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고 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몰려든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영화공부에 열심이던 권 감독은 재학 중 영화ꡐ비천무ꡑ 조감독을 맡을 정도로 영화 제작에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 북경영화학교 지도교수였던 장이모우(장예모) 감독이 권 감독을 ꡒ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ꡓ라고 칭찬했을 정도라고. 예천초등, 예천중(32회), 대창고(31회) 졸업생인 권 감독은 어린 시절 축구를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한 학생이었다. 그의 고향집에는 학창시절 받은 글짓기 상장이 여럿 남아 있다. 권씨의 거실에는ꡐ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가훈이 걸려있다. 자기 할 일을 제대로 찾고, 계획대로 잘 하고 있는지 늘 생각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ꡒ학비 한 푼 보태주지 못 했는데, 우리 아들이 만든 영화를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가더라구요. 남들처럼 살지 않는다고 꾸지람도 많이 했는데, 많은 취재진과 관람객을 보니 아들이 멋지고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더라구요.ꡓ권 감독은 2006년 4월 19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메가박스에서 가진 시사회에 부모님을 초대하여 자신의 첫 작품을 선보였다. 또한 권 감독은 2006년 4월 29일ꡐ맨발의 기봉이ꡑ 주연배우, 영화의 실제 모델인 엄기봉 씨와 함께 청와대의 초청을 받아 노무현 대통령과 영화를 보고 청와대 주최의 다과회에 참석했다.ꡒ수경이가 원하는 길로 가서 충분히 그 일을 해내고 있으니 욕심이 하나 생기네요. 이제는 배필을 만나서 가정을 꾸렸으면 합니다.ꡓ라고 아버지는 작은 소망을 말했다. 권 감독은 다가오는 어머니 생신에 예천에 올 예정이며, 조만간 중국으로 건너가 장이모우 감독을 만날 계획이다. 권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휴먼드라마 '맨발의 기봉이'는 2006년 4월 26일 개봉했으며, KBS '인간극장'의 '맨발의 기봉씨'를 통해 알려진 정신지체장애인 엄기봉 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김연수 記者 醴泉新聞 2006년 05월 17일 13:14:46)
권수경(<取材後記> 맨발의 기봉 氏는 우리에게 어떤 意味인가?) [記事] : 때묻지 않은 순수함, 밝은 미소를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주변의 애정어린 관심도 많으시길 소망 해봅니다. <독자>/ 저는 기봉이 형 흉내를 내어 우리 집 꼬마들한테 웃음을 주곤합니다. 그러면서 이 말은 꼭 잊지 않고 하죠. 너희들도 기봉이 아저씨처럼 마음 따뜻한 사람이 되라고... <독자>/ 기봉이 아저씨 웃는 모습을 보면 저까지 기분 좋아져요 마음이 뭉클하게 만들어 주시는 형님... 건강하시구요.. 어머님도 건강하시구요.... 진짜 평생 행복이라는 단어만 아시고 사셨으면 합니다. <독자>/ 미디어다음 블로거뉴스를 통해 영화 <맨발의 기봉이>(감독 권수경, 예천읍 상리 출신)의 실제 주인공인 엄기봉 씨 기사가 나갔다. 참으로 많은 독자들이 기봉 씨 기사를 봤다. 36만5천 명이 봤고 댓글만 해도 900건에 가깝다. 게다가 오마이뉴스를 통해 나간 기사가 몇몇 포털에서 주요하게 배치됨으로써 많은 독자들이 기봉 씨 소식을 접했다. 기봉 씨는 여덟 살 때 열병을 앓고 난 후 지능이 멈췄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하루도 빼지 않고 마라톤을 하고 있다. 여하튼 지금 나이는 마흔 셋이지만 생각과 심성은 여덟 살이다. 여전히 엄마 좋아하는 순수한 어린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엄마에 대한 효도가 의무나 도리, 혹은 주변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적어도 기봉 씨가 출연한 TV 프로그램을 봐도, 영화를 봐도, 기봉 씨를 다룬 에세이집, 만화책을 읽어봐도 말이다. 기사보기 : '맨발의 기봉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까지 기봉 씨에 대한 사실들을 간략히 이야기해봤다. 이번 기사가 나가고 난 후 댓글 내용을 유심히 살펴봤다. 특히 미디어다음 댓글의 경우 95% 이상이 긍정적인 내용이었다. 샘플로 댓글 3개를 위에 가져왔다. 그렇다면 맨발의 기봉 씨가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효도를 다하면서 언제나 희망차게 마라톤을 하는 굳건한 삶에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 것일까? 단지 그 이유뿐일까? 물론 그것이 가장 큰 이유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힘의 원천은 바로 기봉 씨의 ꡐ웃음ꡑ이라고 생각한다. 일명 ꡐ백만 불짜리 웃음ꡑ .. 영화 <마라톤>에서 주인고 초원이의 다리를 '백만 불짜리 다리' 라고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봉 씨의 웃음은 많은 독자들의 얼굴을 펴게 만들고 따라 웃게 만든다. 댓글에서도 알 수 있지만, 무슨무슨 일로 기분이 안좋았는데 기봉 씨 웃는 얼굴보고 나서 기분이 풀렸다, 혹은 하루종일 상쾌하다는 내용의 댓글도 상당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웃음 속에 숨어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순수이다. 계산되지 않은, 때묻지 않은 순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표출해 내는 천진난만한 웃음, 그래서 백만 불짜리 웃음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덟 살 어린 아이답게 자신이 그린 일기도를 자랑하며 함박웃음을 짓는 기봉 씨. 실제로 두 번에 걸쳐 기봉 씨를 만나봤지만, 기봉 씨는 사람을 끄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언론 등 각종 매체에서 비친, 그것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아닌, 직접 만나봄으로써 아주 가까이서 대면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매력, 글쎄, 필자만 느끼는 것일까? 맨 처음 기봉 씨를 세상에 내놓은 KBS 인간극장 양창용 피디(현재는 이직)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기봉 씨를 ꡒ기봉 형ꡓ이라고 칭했다. 두 달 넘게 기봉 씨 집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촬영했으니 정이 들만큼 들었을 것이다. 필자도 현재 기봉 씨에게 느낌이 감정이 그렇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기봉 씨 관련 기사에 대해 우려하는 독자들도 있다. 다름 아닌 2001년 강원도 산골소녀 ꡐ영자 씨ꡑ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너무 유명세를 탄 나머지 돈 때문에 강도로 목숨을 잃은 영자 씨 아버지 이야기이다. 요즘 세상은 꼭 돈이나 원한이 아니더라도 이유없이 길거리에서 사람을 해하고 범인이 자연스럽게 갈길을 가는 험한 세상이니 이런 우려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영화제작사 측에서 우려하는 바이기도 하다. 기봉 씨와 영자 씨의 공통점은 인간극장을 통해 세상에 나왔고 정도 차이는 있지만 강원도 산골과 충남 시골에서 순수한 삶을 캐내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줬다는 사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자 씨는 아버지와 함께 직접 모 통신회사 TV 광고에 출연했고 기봉 씨는 직접은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가 영화해 돼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기봉 씨에게는 후견인이자 법정대리인인 이장님이 있고 주변에 동네 이웃들도 많다는 사실이다. 또한 파출소 지구대에서도 기봉 씨의 안전을 위해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영자 씨처럼 전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다가 세상에 나오면서 겪는 부작용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엄마와 단둘이만 있으면 행복하고 마라톤할 때 희열을 느끼는 그에게 더 이상의 욕심도 없다. 다만 만약에 기봉 씨에게 TV 광고를 찍자는 제안이 들어온다면 나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다. 이장님을 통해 설득하고, 그렇게 친한 인간극장 전 PD 양창용 님께도 부탁하고... 영화사 등 후원회에서 지어주는 아담한 집. 그 안에서 더 이상은 쥐하고 친구하지 않고 집 무너질 걱정 안하며 언제나 그랬듯이 종종 독자들에게 순수의 웃음을 보여주며 마라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봄 꽃 향기에 취해, 매미의 울음소리를 미소에 담아, 코스모스 한 잎 하늘 속으로 풀풀 날리며, 훅훅 ꡐ엄마ꡑ라는 글자를 따듯한 입김으로 날리며 ...그렇게 사시사철 달리는 기봉 씨의 모습을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이 종종 기봉 씨를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언론 노출에 대한 부작용과 위험성보다는 기봉 씨 본인에게 활력소가 되는 것은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 순수와 희망을 메시지를 오래토록 전해줄 수 있는, 즉 더 많은 긍정적인 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자 바람이다.(다음Only 2006-08-06 추천 : 18 | 조회 : 172849)
권수경 : 예천의 자랑(1068) : 지보 출신 내과전문의의 저술(附 예천인 영화감독, '맨발의 기봉이' 개봉/예천군체육회, 축구 전국대회 예천 유치.축하)/ (장병창 (), 2006-05-12 오후 5:12:22, 조회 1255)/ *예천인 영화감독, '맨발의 기봉이' 개봉... 축하합니다. 권수경 : 예천읍 상리 출신 영화감독 권수경(1967- , 석재의 2男, 醴泉初, 醴泉中, 大昌高, 慶熙大 國文科 卒業, 北京映畵學校 修了) 씨의 데뷔작인 ‘맨발의 기봉이’가 2006년 4월 26일 개봉되었다.(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권수경 : 영화감독/ 출생 1968년 (만43세) | 원숭이띠/ 데뷔 2004년 영화 '내사랑 브루스리'/ 주요작품 : 슈퍼스타 2009 | TV// 리틀 히어로 2011 | 영화// 맨발의 기봉.. 2006 | 영화// 학력 - 북경 전영학원, - 경희대학교 국문학/ 경력 2007 ~ 제6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단편영화상 심사위원, 1999 ~ 영화 '비천무' 조감독, 1998 ~ 베이징 영화아카데미 입학/ 영화(2건) : 맨발의 기봉이 2006.04.26, 감독,각본/ 리틀 히어로 감독// TV(1건) 슈퍼스타 2010. 연출(daum 2011)
권수경 : 권수경/ Daum 카페 | 작년, 2010년 5월 24일/ 권수경| 수다방/ 핑크로즈 | 2010.05.24. 18:30/ “‘러브 스토리’에 감동 먹고 영화에 내 인생 걸었죠” 수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은 많이 알지만 남자는 처음이다.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맨발의 기봉이’를 데뷔작으로 만든 권수경 감독은 진짜 남자처럼 생겼다. 이런 표현이 외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알 것이다. 87학번인 권 감독은 고르바초프의 동방정책에 의해 동구권이 대몰락하는 세계사적 격변기에 대학을 다녔다. 경희대 국문학과를 나온 그가 왜 영화를 만들려고 했을까? 시인 유하, 소설가 이창동처럼, 혹은 시인이며 소설가였던 하재봉처럼 활자 문화에서 영상 문화로 중심 이동되고 있는 문화의 흐름을 읽고 변신한 것일까? 그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영화를 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가 너무 강해서 차선책으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국문과에 진학했다. 그렇다면 고등학생이었던 그에게 영화를 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킨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광고회사에서 영상제작 기초 다진 뒤 중국 유학 : 에릭 시걸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아서 힐러 감독이 영화화한 ‘러브 스토리’가 바로 그 계기였다. 1970년 만들어진 이 고전적 사랑 이야기가 고등학생의 마음을 울린 것이다. TV 명화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고 권 감독은 고백했다. ‘내 인생의 영화’가 ‘러브 스토리’라는 것은 권수경 감독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러브 스토리’는 신파적 코드를 갖고 있었지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 이야기로 당시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던 파라마운트사를 일약 영화사 순위 1위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권수경 감독이 가장 만들고 싶은 영화도 슬픈 멜로 영화다. 1995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곧바로 광고회사에 취직했다. 그가 영화를 하고 싶어하는 줄 알고 있던 한 선배가 그에게 광고회사 입사를 권했다. ‘빡세게’ 하드 트레이닝을 하지만, 영상 제작의 기초를 튼튼하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97년 3월까지 약 2년 동안 그는 100여 편의 광고를 만들었다. 최진실, 심은하, 김지호를 모델로 한 신원 에벤에셀의 의류 광고는 거의 다 찍었다. 콘티 짜고 세트 설치하고 장비 빌리고 촬영하는 과정을 모두 경험했다. 영화는 각 분야가 분업화되어 있지만 광고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밑바닥 일을 배우는 데는 오히려 광고 쪽이 더 좋다는 것이다. 광고회사를 그만둔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국으로 영화 유학을 떠났다. 장예모나 첸 카이거 등 중국 5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유난히 좋아했기 때문이다. 특히 권 감독이 좋아한 감독은 장예모였다. 1년 넘게 랭귀지 스쿨을 다니며 중국어를 익힌 뒤 1998년 9월, 1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베이징영화학교 대학원 연출과에 합격했다. 총 정원은 5명. 3명은 중국인, 2명은 외국인 학생이었는데 권 감독과 함께 뽑힌 사람은 프랑스 여학생이었다.
베이징 유학 시절 그는 소중한 경험을 두 가지 했다. 하나는 장예모 감독이 만들던 ‘책상서랍 속의 동화’ 촬영 현장에 현장 실습을 나가서 약 2주 동안 자신이 존경하는 거장의 작업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촛불도 안 들어오는 산간벽지에서, 영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캐스팅해서 찍은 ‘책상서랍 속의 동화’의 촬영 현장은 권 감독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에게 연기를 시키는 게 아니라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뒤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라고 물으며 촬영을 하는 장예모의 모습에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 또 하나의 소중한 경험은 중국 올 로케로 찍은 한국 영화 ‘비천무’의 연출부로 일한 것이었다. 2001년 9월, 3년제인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베이징에서 학교를 다닌 3년 동안 그는 매년 단편영화 하나씩을 만들었다. ‘건배’ ‘에피소드 1, 2’ ‘에피소드 3’ 등 3편이었다. 학년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매 학년 마지막에 제출하는 단편영화가 심사를 통과해야만 했다. 졸업 논문은 ‘임권택, 장예모 감독의 비교론’이었다. 두 거장 감독의 공통점은 자기 민족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간혹 오리엔탈리즘을 상품화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두 감독은 그런 목적이 아니라 실제로 민족 문화에 대한 무한한 애착과 자긍심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두 감독의 차이점은, 장예모 감독이 임권택 감독에 비해서 도회적이고 세련된 기법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귀국 후 권수경 감독은 두 편의 영화가 엎어지는 경험을 했다. 첫 번째 작품은 김수로, 김선아가 캐스팅된 ‘내 사랑 브루스 리’였다. 이소룡을 동경하는 무술인과 가수를 지망하는 음치가 만나 각자의 꿈을 이뤄가는 이야기였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캐스팅까지 마친 이 영화는 2004년 촬영 직전 제작 투자가 중단되어 결국 엎어졌다. 다음 작품은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였다. 감우성, 장나라, 봉태규가 캐스팅됐지만 배우들이 약하다는 이유로 촬영이 무산됐다. 지금 같았으면 김수로든, 김선아든, 감우성이든 제작자들이 반색을 하며 투자했겠지만 당시만 해도 제작자들은 이들의 티켓 파워가 약하다고 판단했다. ‘비천무’의 연출부 경험은 권수경 감독에게 신현준이라는 친구를 만들어주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마음이 맞았고 이때의 인연이 ‘맨발의 기봉이’로 이어졌다. 권 감독의 작품이 연이어 엎어지는 것을 본 신현준은 VHS로 녹화된 테이프 5개를 주었다. 그것을 본 권수경 감독은 곧바로 영화화를 결심했다. 2003년 2월 KBS-TV ‘인간극장’에 방송된 엄기봉 씨 이야기였다. 원래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권수경 감독은 다른 방향으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다시 쓰겠다고 제안했고, 방송된 기봉 씨 이야기 중 어머니의 틀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비천무’ 통해 신현준과 인연 … 의기투합 ‘맨발의 기봉이’ 만들어 : ‘맨발의 기봉이’는 2004년 프리 프러덕션을 시작해 2005년 10월부터 2006년 2월까지 석 달 반을 찍었고, 한 달 반 동안 후반 작업해서 시사회를 가졌다. 올 상반기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기대를 모으고 있는 ‘도마뱀’ ‘사생결단’과 같은 주에 개봉한다.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지 모르지만, 세 편의 영화 모두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섣부른 예측을 하기 힘들다. ‘맨발의 기봉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현준의 변신이다. 카리스마 넘치던 황 장군은 어디로 갔는지, 입에 보철을 낀 채 히죽거리며 웃는 기봉 역의 신현준은 약간의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실제 주인공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권 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진정성이다. 욕심 부리지 말고 초지일관 캐릭터를 유지하자는 감독의 말을 신현준은 충실히 따랐고 거의 NG 없이 촬영했다. 현장에서 가장 많은 NG를 낸 사람은 권 감독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너무 웃었기 때문이다. “슬프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웃음과 감동을 주는 게 기본 설정이었다. 웃음은 자신 있는데 감동은 잘 모르겠다.” 한국의 어머니 김수미는 현장에 100인분의 간장게장을 가지고 나타나 스태프들을 즐겁게 했다. 모두 3그릇씩 밥을 먹었다고 한다. 직접 담근 김치나 총각김치를 촬영지인 경남 남해까지 가지고 와서 스태프들에게 제공한 김수미는 진정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 영화는 실화가 갖고 있는 리얼함으로 감동을 준다. 영화화되면서 실제 주인공인 두 분의 삶에 파문이 일어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법 없이 살아갈 효자와 팔순 노모가 언론에 오르내리면 좋은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이 생긴다. 실제 기봉 씨에게는 혹이 있다. 영화에서는 그것을 심장병으로 바꿨다.” ‘맨발의 기봉이’를 만든 권수경 감독은 당분간 쉬면서 다음 작품을 구상해보겠다고 했다. 삶의 깊이를 영화적으로 드러내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이제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못지않게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다. 그는 쉬는 동안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그 해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cafe.daum.net/foodmail/RVAZ/| 요리.인테리어.맛집 생활 노하우 공유와 친목카페 [푸드메일](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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