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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8 - 카리브해의 진주 쿠바, 미국의 도움으로 스페인에서 독립하다!
“카리브해의 진주” 라고 불리는 나라 쿠바는 아름다운 섬이니, 그중에도 아바나 동쪽에 바라데로
해변은 마탄사스 지방의 휴양지로.... 2019년 World’s Top beaches 에서 2위를 한 정도로
흰 백사장과 푸른 바다가 예쁘지만, 쿠바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벗어나려 오랜 세월 처절하게
싸워야 했는데, 2006년에 멕시코를 거쳐 쿠바를 여행했으니 그때 사진이 몇장 포함되어 있습니다.
쿠바는 스페인에서 독립하고서도 미국의 세력하에 있었는데, 때문에 농업은 주로 환금작물이니 설탕
과 담배에 커피 등으로.... 훗날 카스트로가 혁명으로 친미정권을 축출하면서 미국의 경제 봉쇄
조치로 고통받았으니 의약품 수입까지도 끊겨 침으로 마취를 하기도 했으며, 흑인국가로 라틴
음악이 탄생한 나라니 타악기를 즐겨 쓰고 룸바, 맘보, 차차차와 같은 다양한 댄스 리듬을 낳았습니다.
1. 신대륙에 상륙한 콜럼버스
콜럼부스는 보물 10% 및 그 섬들의 총독 자리를 평생 보장할 것 외에도 여러 가지를 요구했는데 700
여년간 스페인을 다스리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카스틸랴의 여왕 이사벨 1세가 자신의 왕관을
톨레도 대주교에게 파는 등 돈을 마련해 지원해 1492년 8월 3일 스페인 카디스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2달 10일 뒤인 10월 12일 쿠바 북쪽 미국과의 사이에 위치한 바하마 제도에 상륙했으며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상륙한 곳이 아시아로 알았다고 하는데 6년 후인
1498년 5월 바스쿠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발견했고 1503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가 항해한 곳은 아시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 주장했습니다.
이사벨 1세의 적극적인 지원에 대해서는 레콘키스타 이후 스페인은 동방으로 향했던 지중해
무역은 오스만 투르크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독잠해 왔고 또 이웃 포르투갈이
항해왕자 엔히크를 필두로 서아프리카 지역을 탐사 및 개발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것을 보고는 신항로 개척이 스페인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여왕이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무관하게 개인 자격으로 후원했던
탐험이라 신대륙에서 막대한 이득이 스페인으로 몰려왔을 때 덕을 보는 쪽은 카스티야 뿐이었고
아라곤에 속한 지중해 무역을 업으로 삼던 카탈루냐 지방은 오히려 큰 손해를 입었으며, 콜럼부스
의 고향 이탈리아의 4대 무역항이던 제노바도 역시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쇠락하게 되었다는?
콜럼버스는 쿠바 북쪽인 바하마 제도에 속한 섬에 상륙해 '산살바도르 섬' 으로 이름붙였으며 훗날
서인도 제도로 불릴 카리브 지역을 탐험할 때 12월 25일 쿠바 동쪽인 히스파니올라 섬(아이티
와 도미니카) 에 선원 30명을 남겨두고 되돌아오면서 기함인 산타마리아 호가 좌초되기도 했습니다.
1493년에 2차 원정에서 콜럼버스는 엄청난 노예와 금을 얻을수 있다며 이사벨라여왕에게서 1차 원정때
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원조를 받아냈지만 히스파니올라섬에 돌아오니 남겨놓은 30명 가량의 선원
들은 단 한명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한 사람당 최고 5명씩 원주민 여자를 거느린다거나 금을 비롯한
보물을 긁어모으기 위해 원주민을 죽이는 행패를 부리다가 원주민들의 반란으로 몰살된 것으로 보입니다.
콜럼버스는 히스파니올라에 여왕의 이름을 붙인 식민지를 세운 뒤, 원주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으니
한 마을에서는 700명 가량을 모두 생포해 창칼로 찔러 죽였다고 하며 그 후로도 학살은 이어졌고
원주민들은 철기가 없이 돌로 만든 무기들을 가지고 싸웠으니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원주민들은 저항
하다가 붙잡힐 시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패배에 직면하면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3차 원정(1498~1500)과 4차 원정(1502~1504) 때 콜럼버스 탐험대는 더 잔인해져서, 마스티프라고 하는
맹견을 데리고 와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14세 이상
원주민들은 석 달마다 콜럼버스가 제시한 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시 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고 과다
출혈로 죽어갔으며, 9살 소녀부터 35세의 성인 여성들까지 강제로 은화 한두닢에 매춘부로 만들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오기 전 까지 히스파니올라의 인구는 30만 명이었으나 2년만에 10만 명이
죽고, 나중에는 500명 밖에 남지 않다가 결국 원주민인 타이노족은 전멸했고
오늘날에는 혼혈 후예만 남았는데 콜럼버스와 스페인인은 처음에 원주민 노예들을
수출하다가 우너주민이 학살과 전염병으로 멸족당하자 흑인 노예들을 수입해 왔습니다.
2. 디에고 벨라스케스 와 에르난 코르테스
그후 쿠바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에 의해 쿠바 총독령이라는 이름으로 통치되었는데 디에고는 1492년
에 레콩키스타 군대가 스페인 남부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함락할 때 참전하였으며 1493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제2차 항해에 따라왔고 1503년에 히스파니올라를 정복하는데 참여했습니다.
1511년에 콜럼버스의 아들인 디에고 콜럼버스로 부터 총독에 임명되면서 쿠바를 정복하라는
임무를 받아 에르난 코르테스와 함께 4척의 배와 300명의 병력으로 쿠바로 출발하여
저항하는 쿠바의 아라와크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추장인 하투에이를 붙잡아 참수했습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4년동안 바라코아, 바야모, 산티아고 데 쿠바, 아바나등 거점
7곳을 건설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들을 죽이고 서쪽으로 쫒아
냈으며 가혹한 통치로 20만으로 추정되는 쿠바의 원주민들을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코르테스는 페르난디나섬(쿠바)에 건설된 바라코아 시의 알 칼데로 일했는데 관리로서는
물론이고 목장과 금광 경영을 통해 많은 돈을 모았으며 벨라스케스 도독의 처제와
내연관계였으니 벨라스케스는 그에게 처제를 책임지라며 결혼을 강제하던 중에
노예를 사냥하던 페르난데스 라는 사람이 유카탄 반도에는 금이 많다는 보고를 합니다.
그러자 도독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517년에 부관인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는
유카탄 반도를, 조카인 후안 데 그리힐바에게는 멕시코 만의 해안을 탐사하게
했으며 1518년에 부관 에르난 코르테스를 원정대 지휘관으로 임명해 멕시코 본토
를 정복하게 하려고 했지만... 코르테스가 독립하려고 한다고 의심해 이를 취소합니다.
도독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519년에 무단으로 아즈텍 제국(멕시코)으로 출정한 에르난 코르테스
를 2차례나 체포하려고 했으니... 베르쿠르즈에서 나르바에스의 진압군과 마주하여 위기를
았으니 그는 아즈텍 제국에서 자신의 병력을 거의 다 잃었고 사기 역시 바닥을 친 상황이었습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자신의 남은 소규모의 병력을 규합해, 이번엔 무장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하여 중과부적임에도 또 한번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되었으며 게다가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인 스페인군대를 설득해서 자신의
세력에 합류시킴으로써 귀중한 병력 보충을 해서 2차로 아즈텍제국으로 쳐들어 갑니다.
그러자 쿠바 도독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명령에 불복종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행위
를 스페인 왕실에 호소했지만.... 그후 에르난 코르테스가 보낸 엄청난 아즈텍 제국의 황금 보물을
받아 입이 벌어진 스페인 왕실의 명으로 코르테스를 견제할 수 없었으며 이후 1524년에 병사했습니다.
똑 같은 이름의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혼동이 될수 있는데 다른 디에고는 스페인의 화가로 펠리페 4세
시절 궁정 화가가 된 이후 평생 궁정 화가로 지냈으니 바로크 시기 최고의 화가 중 한명으로
사실적인 초상화로 유명하며, 특히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는 역대 최고의 초상화로 거론되고
대표작 '시녀들' 은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후대의 화가들에게 까지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3. 7년전쟁으로 쿠바가 영국에 점령당하다
16세기 초에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 와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쿠바의 스페인 식민지에 최초 거점을 두고 일을 시작했으며, 멕시코와 남미가 정복되기
전까지 쿠바는 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 경영의 거점이자 정치, 경제적 중심지였습니다.
1702년 발발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으로 스페인 제국은 많은 식민지를 잃고 크게 약화되지만
스페인과 달리 쿠바는 유럽의 전쟁으로 막대한 번영을 누렸으며 스페인은 1740년 쿠바산
설탕과 담배를 본국이 독점 구매하자 쿠바의 담배 농장주들은 막대한 부를 쌓아올렸고
1756년 발발한 7년 전쟁에서 스페인은 1762년부터 1763년 동안 영국에게 쿠바를 뺏기게 됩니다.
7년 전쟁 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공주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에 오르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대왕
은 게르만 살리카법에 여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1740년오스트리아를 침공해 1748년
까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때 패해 부유한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긴 마리아
테레지에는 국력을 기르고 외교를 강화해 저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니 7년 전쟁 입니다.
8년 후인 1756년 벌어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에 유럽의 모든 열강이 참여하니 전쟁은
유럽뿐만 아니라 그들의 식민지가 있던 아메리카와 인도에까지 퍼진 세계대전으로 번졌으니
인도의 무굴 제국은 프랑스의 지지를 받으며 영국군의 벵골 지방의 침공을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 작센- 스웨덴- 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 하노버- 영국 연합에 맞섰는데 이때
영국과 프랑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싸운게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 불리는데 유럽에서는 영국의 지원
을 얻은 프로이센이 작센을 선제공격하고 결국에 최종 승리를 거두어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보했습니다.
식민지 전쟁에서는 영국이 프랑스의 상선 수백척을 나포하는등 여러번 승리를 거두어서 북아메리카의
뉴프랑스(퀘벡주와 온타리오주)를 차지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고, 인도에서도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 대영제국 기초를 닦았으며 카리브해에서는 영국군이 쿠바를 점령했던 것입니다.
4. 쿠바 독립 전쟁이 시작되다
7년 전쟁후 파리조약 체결로 쿠바를 돌려받은 스페인은 카를로스 3세가 쿠바 사탕수수 산업을 증진
시키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쿠바에 들여왔으며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인텐덴테
(Intendente) 제도를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쿠바에 도입하였는데, 쿠바에 경제적인 부담을
주어 크리오요들에게 많은 불만을 사게 되고 흑인 노예들도 16세기후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스페인 제국의 가혹한 무역관세제도, 노예제도 등으로 쿠바인들의 불만은 지속적으로 증대
되었으나 쿠바에서 태어난 백인인 크리오요와 스페인 본국 페닌술라르들이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독립은 지체되다가 19세기 중반, 설탕산업의 기계화로 크리오요
들 사이에서도 양극화 현상을 일어나고.... 더많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수입하게 됩니다.
1867년 스페인이 세금을 증세하자 자유주의자, 개혁주의자, 독립주의자, 중소규모 농장주,
노예제 폐지론자등 사람들이 반스페인 운동을 일으켰으니 1868년 설탕 농장주 카를로스
세스페데스를 중심으로 크리오요들이 10년 전쟁이 일으키는데... 세스페데스는 '야라의
외침' 을 발표하고 자신의 노예들을 풀어주면서 쿠바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자고 호소합니다.
여기에 독립운동가 안토니오 마세오가 합류하니 세스페데스는 쿠바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스페인
에게 저항하니 200여명으로 시작된 이들은 1개월후 1만명의 대군을 형성하게 되었고
민족주의적 크리오요들을 중심으로 노동자, 농민, 해방된 유색인들이 주체가 된 이 들은
승승장구해 1869년 임시정부는 세스페데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스페데스의 쿠바 공화국은 스페인 제국을 지지하는 쿠바 내 지주들을 의식하여
개혁에 소극적이었으니 노예제 폐지론자, 노동자, 농민들로 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고 전쟁이 쿠바 공화국과 스페인 제국 양쪽이 비등한 상태로 10년 동안
지속되자, 쿠바 보수적 지도층은 1878년 산혼 조약을 맺어 전쟁을 사실상 종결시킵니다.
5. 미국이 쿠바 전쟁에 참전하다
1886년 "산혼 조약" 에 따라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고 기존의 부유했던 쿠바의 지주들은 몰락
하고 중산층으로 편입되었으며 쿠바의 설탕산업에 미국의 자본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쿠바는 사실상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니 1895년 지식인이자 혁명가인 호세 마르티
를 중심으로 쿠바 독립 전쟁이 발발하였지만 호세 마르티는 스페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합니다.
그러나 쿠바 독립 전쟁은 과거 10년 전쟁과는 다르게 미국의 지원을 받을수 있게 되었
으니 독립전쟁은 미국내 신문들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고, 미국인들은 스페인을
쿠바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잔인한 제국주의 열강으로 여기고 분노하게 되었으니
급기아 윌리엄 매킨리는 1896년 선거에서 쿠바 독립문제를 공약으로 꺼내들게 됩니다.
1896년 부임한 발레리아노 웨일러는 '재수용 정책을 시행하여 1898년까지 10만명의 쿠바인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매킨리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쿠바 독립전쟁은 더욱 거세졌고
그 반작용으로 스페인의 진압도 점점 잔인해졌으니 쿠바는 아비규환의 상태였고, 더이상
좌지우시할수 없었던 매킨리는 국무장관 셔먼에게 지시하여 스페인 대사에게 교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매킨리는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니 1898년 초까지 미국은 스페인과 마찰
을 최대한 피하려고 했는데, 1898년 2월 15일 쿠바 아바나 항에 정박한 미국 순양함 메인호가 폭발해
침몰한 사건으로 급격하게 반전되니 호전적 미 언론들은 앞다투어 메인호 폭발사건을 보도했고 은연중
스페인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자.... 미국인들은 분노했고 여론은 전쟁측으로 급격하게 기울었습니다.
메인호 폭발사건 초기 매킨리의 대응은 이성적이었지만 연일 보도되는 언론들의 자극적인
메인호 사건 보도와 그로인해 분노하는 국민들의 압박을 무시할수 없었으니 4월
22일 매킨리는 쿠바에 대한 해군 봉쇄령을 내렸고 미 의회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선포
했으니 전쟁은 쿠바 전역 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 치하에 있었던 필리핀에서도 벌어집니다.
1898년 8월 12일까지 계속된 미국 - 스페인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전후 파리 조약이 체결
되어 독립에 성공하였으나 쿠바는 미국의 영향권 하에 편입되는데..... 미국은 쿠바의 독립 투사
들을 1945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처럼 "교전 당사자로 인정하기를 거부" 하고, 쿠바를 점령해 4년
동안 군정을 실시하였으며 미국은 스페인으로 부터 쿠바 외에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얻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귀국을 불허했으며 미국에
있던 이승만을 먼저 귀국시켜 자리를 잡게 한후, 김구등 "광복군은 무장을 해제" 하고 그것도
"개인 자격" 으로 뒤늦게 귀국시키니.... 이는 광복군은 1940년에 충칭에서 조직됐지만 병력수
가 5백명도 되지않는등 미약하고 재정도 열악해 일본군과 단 한차례도 전투를 벌이지 못했습니다.
1941년 일본이 미국 하와이를 공습해 시작된 5년간의 전쟁에서 한국인들은 미군을 도와 일본군과 전투
한 적이 전혀 없는데도 1943년 카이로선언에 한국 독립을 약속했지만, "in due course” 다시 말해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 귀절을 한국인들은 애써 외면했으니.... 미국은 20년간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것이
었고 1898년도 역시 미국은 쿠바를 4년간 신탁통치하며 친미정권을 수립해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합니다.
그렇다고 5년간의 태평양전쟁에서 한국인들이 전쟁에 불참한건 아니고, 일본군으로 입대해 미군 및
중국군, 영국군과 싸운 사람은 10만명이 넘고..... 한국인 노무자들은 태평양 군도에서 비행장을
건설했으니, 이륙한 일본군 비행기가 미국 군함을 격침시켰으며 징용공들은 철광석과 석탄을 캐고
공장에서 무기와 군복을 만들며 민간인들은 쌀과 면화를 공출해 일본군의 보급을 후방지원 했습니다.
6. 쿠바의 독립과 카스트로
쿠바는 1902년 독립핶지만 미국 자본에 종속된 사탕수수 단일작물재배 경제가 형성되어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니 토지가 미국 자본과 쿠바인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고 독재정권
의 부패도 심화되어 여러차례의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미국의 비호하에 진압되었습니다.
그후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의 주도하에서 몬카다병영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게릴라
전을 포함하는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노선인‘7월 26일 운동’이 결성되었고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로 쿠바에 상륙한 카스트로, 체 게바라등 17명이 출발한 게릴라
운동은 기적적으로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 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게 됩니다.
카스트로가 멕시코에서 배로 쿠바 동부 시에라마에스트라에 상륙할때는 몇십명의 젊은이에 불과했으나
산악지대에 은거하여 수십배가 넘는 정규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전멸의 위기에서 밤이면 노동자
나 농민의 아들인 정부군 병사에게 스피커로 안무 공작을 펴서는 마침내 기적처럼 혁명을 성사시킵니다.
카스트로가 친미 바티스타 정권을 붕괴시키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 하자 1961년 4월 15일 미국
CIA 는 쿠바 공산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마이애미에 모인 쿠바 망명자들을 군사기지
에서 훈련시켜 쿠바에 상륙시켜 이들을 통한 게릴라전과 항공 지원으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수년전 쿠바 혁명군이 벌였던 쿠바 혁명의 재탕을 노린 야심찬 계획을 세웁니다.
15일 새벽 국적 마크를 지운 A-26 공격기들이 쿠바 공군기지들을 공습하면서 피그만
침공작전이 시작되니 쿠바 공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 2차 공습을 안한 것은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숨길려고 했으니...... 공군참모총장인 커티스 르메이는
“해변에 상륙한 놈들의 목을 벌써 따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준비와 각오를 마친 카스트로와 쿠바 정부는 전면전을 선포했으니.... 전군을 물론 자국
국민들에게까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반정부 성향을 지닌 인사
10만여명이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니 미국의 계획대로라면 피그만 침공과 더불어
반정부 인사들의 폭동이 벌어져야 했지만 쿠바 내무부에 의해 사전에 차단당한 것입니다.
17일 동이 트기 전의 새벽 1,500명의 상륙부대는 피그만에 상륙을 시작했는데 쿠바군은 상륙부대
의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고 최정예 공수부대와 20대로 이루어진 전차
대대를 선봉에 세워 반격해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상륙부대도 1년 이상 훈련을 반복해
온 정예부대라 쿠바군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었으나 10배가 넘는 병력 차를 어쩔수는 없었습니다.
미 공군과 해군은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명령 전달이 늦어지며 오지 않았고 정치적 이유
로 후속지원이 틀어졌고..... 계획의 융통성 있는 변경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쿠바 공군은
공습에서 살아남거나 피해입은 비행기들을 모아 빠르게 수리해 출격시켰으니 쿠바 공군은
중화기를 실은 수송선을 폭격하여 격침시켰고 이로써 전세는 완전히 쿠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2506 여단은 쿠바군과 카스트로에게 박살이 났으며 100여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혔으니 카스트로 정부는 재판을 통해 주동자급 게릴라들을 처형하였고, 미국은
5천 3백만 달러 상당의 의료품을 쿠바에 지불하고 나서야 나머지 1,113명의 포로를
석방시킬 수 있었으며 더불어 체포되었던 반정부 인사들은 이 침공을 명분 삼아 숙청했습니다.
7. 미국 쿠바를 봉쇄하다
이후 미국은 쿠바에 대해 경제 봉쇄조치에 들어갔으니 미국경제에 예속된 쿠바는 설탕, 담배,
커피를 생산해 바다 건너 미국에 수출하고 식량이며 석유와 자동차에 비료와 의약품등
모든 것을 수입하던 의존형 경제체제라 큰 타격을 받았으니..... 쿠바 아바나 거리에는
뷰익 등 50년 된 낡은 차와 오토바이 택시인 코코며 우마차 등 각종 탈 것들이 돌아다닙니다.
처음에는 소련과 동구권이 1950년대 북한에 했듯 석유를 싼값에 공급하고 사탕수수와 커피, 담배를
수입해 주니 쿠바경제는 호황을 구가해 대학 까지 학비 일체 무료, 심장 수술비 까지를 포함하는
의료비 일체 무료 등을 실현했고 체르노빌 원전사고때는 소련 어린이 2만명을 데려와 치료해 주며
2천명 의사를 세계 의료봉사로 파견했으나 1989년 소련이 무느지자 쿠바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됩니다.
쿠바와 무역한 회사는 미국 기업과 무역할수 없고 쿠바에 입항한 배는 미국에 입항할수 없는등
석유를 수입하지 못하니 쿠바는 중국(모택동)에서 200만대의 자전거를 긴급 수입했으며
시골의 농산품이 석유가 없어 대도시로 운반할 수가 없는데 농약과 비료도 없는지라 쿠바
건물의 옥상에 스티로폴 박스를 두르고는 흙과 톱밥을 담아 유기농으로 직접 채소를 기릅니다.
의약품 통제로 약품은 약초나 아로마 요법으로 대체하였지만 마취제가 없으니 중국에서 침을 수입해 수술시
침으로 마취를 하는데... 쿠바 화폐는 관광객등 외국인이 사용하는 CUC 와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CUP
두가지가 있으니 이중가격 체제로 1$ 는 1 CUC 이지만 수수료를 10% (캐나다 달러나 유로화) 내지 20%
(미국 달러) 를 떼니 실제로는 1$ 는 0.8 달러인데 1 CUC 는 깜비오(환전소) 에서 24 CUP 로 교환해 줍니다.
8. 쿠바의 음악
쿠바의 음악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의 영향이 강하기 때문에 타악기가 즐겨 쓰여 룸바, 맘보, 차차차
와 같은 다양한 댄스 리듬을 낳았으니 19세기에 쿠바섬을 방문한 에스파냐의 작가 제바스티안
이라디에르는 섬에서 유행하고 있던 하바네라의 리듬을 써서 “라 팔로마” 라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리듬이 세계에 소개되는 효시이며 그뒤 1930년대의 룸바, 1950년대의 맘보
등 쿠바계의 리듬이 세계적으로 유행했으나, 룸바나 맘보는 수출용의 쿠바음악으로서
국내에서는 룸바나 맘보는 잘 사용되지 않았으며 쿠바 사람들이 애호한 것은, 1930년대
에는 손, 1940년대에는 과라차, 1950년대에는 차차차이며 지금도 한창 유행하고 있습니다.
아바나에는 나시오날 클럽이 유명하니 Hotel Nacional 은 VEDADO 지역으로 말레콘 중간쯤 언덕에
있는데 주말의 밤 9시 30분에 레스토랑 "살롱 1930" 에서는 1인당 40$ (식사 포함) 입장료를 받고
공연하니 예전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이 공연 하던 곳으로 식사는 8시경 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공연은 세군도를 추모하는 ‘찬찬’ 으로 시작하는데 원초적 열망의 서사시로 거대한 감동이
조류처럼 밀려온다고 하며 사랑과 정열, 향수와 기쁨을 노래하는데, 폭풍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담담히 지내온 흔적을 회상하며 항구에 다다른 뱃사공을 연상 시킨다고 합니다.
또한 거기다가 아주 현란한 기교의 남여 흑인 무용수의 춤 은 쿠바가 맘보, 차차차,
룸바, 살사의 고향임을 일깨워 준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칸델라 ’ 를 열창
하면 객석 쪽에서는 관중들이 일어서서 함께 춤을 추는 감동의 무대가 된다고 합니다.
첫댓글 허선생님 또 오랜만에 들럿습니다 .잘 지내시죠?
제가 하는일 없이 늘 바쁘네요. 죄송합니다
여행계획은 없으신가요?
늘 건강히 잘 지내십시요.
수원에서 김성길올림
아.... 저야 잘 지내지요?
그리고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는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