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월향과 김응서
김응서가 평양성 탈환의 명장이 된 배경에는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의 도움이 컸다. 계월향은 평양 무관이던 김응서와 연인(戀人)관계이었다. 1592년 왜군(倭軍)은 조선 침략 두 달 만인 6월 11일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계월향(桂月香)도 포로로 잡혀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친족이며 부장(副將)이었던 ' 고니시 히(小書飛) '의 진중(陣中)에 있었다. 1592년 12월 이여송(李如松)의 4만8000천 대군이 도착하면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본격적인 평양 수복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떼 계월향은 문루(門樓)에 있다가 성 밖에서 기밀을 탐지하던 김응서(金應瑞)를 발견하고, ' 난리 중에 헤어진 오라버니 '라고 속여 성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날 밤 김응서는 술에 만취된 적장(敵將)을 살해하고 계월향과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말을 탈 줄 모르는 그녀는 탈출이 지체되자 연인(戀人) 김응서를 혼자 보내고 스스로 자결(自決)하였다. 장수를 잃은 왜군은 대혼란에 빠지고 마침내 이듬해 1월 초 평양성은 수복되었다.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얽힌 이 로맨스를 두고 후일 만해 한용운 (卍海 韓龍雲) '은 계월향에게 바치는 흠모송(欽慕頌)을 지었다.
계월향이여, /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 나는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貞)을 사랑합니다. /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 그대는 남은 한(恨)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 그대의 붉은 한(恨)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 길을 가로막고 /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 그대의 푸른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 저문 봄을 잡아매려 합니다. /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볕을 받치고 매화(梅花) 나뭇가지에 새 봄을 걸어서 / 그대의 잠자는 곁에 그만히 놓아 드리겠습니다. / 자 그러면 속하면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계월향의 초상화
계월향의 초상화는 2008년 일본 교토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화폭 상단에는 ' 의기 계월향 (義妓 桂月香) '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글이 빽빽이 적혀 있다. 좌안칠분면 (左顔七分面)의 전신(全身) 좌상으로, 바닥에 깔린 돗자리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크게 땋아 올려 꾸민 머리 모양은 1519년 안동부사이엇던 이현보(李賢輔)가 당시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베푼 ' 화산양로연도 (花山養老燕圖) '에서 보듯 계월향이 살았던 당대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복식(服飾)은 19세기 초엽에 유행하였던 짧은 저고리에 부푼 치마를 입고 있으며, 저고리에는 향(香)노리개가 달려 있다. 앉아 있는 모습이나 손의 모습 등은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 복천오부인(福川吳夫人) 86세 초상 '과 유사하다.
계월향의 가는 눈썹, 얇은 눈꺼플, 오똑한 코, 작은 입술로 형용되어 있는데, 윤곽과 코 선, 목덜미 등을 따라 붉은 계열의 음영(陰影)을 짙게 넣었으며, 인중(人中)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좁은 어깨에 가녀린 두 팔을 교차한 채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앳된 모습에서는 여리고 고운 소녀의 이미지가 전달되어 온다. 핍진(逼眞 .. 진실에 가까운 )한 초상화라기 보다는 이상적(理想的) 여인상으로서의 미인도(美人圖) 범주에 속한다.
이 영정은 1815년(순조 15)에 그려져 평양 장향각(藏香閣)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그림에는 이 기록과 함께 주인공인 계월향(계월향)과 관련된 일화가 그림 윗부분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와 같이 영정의 제작연도, 그려진 배경, 모셔졌던 장소, 주인공에 얽힌 일화 등 관련내용이 함께 기록되어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더욱이 머리를 크게 올려 꾸민 형식,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에 달린 향노리개 등 당시의 복식(服飾)까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적혀 있는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92년 왜군이 평양을 점령하였을 때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이 김경서(金景瑞 ..김응서) 장군을 끌어들여 왜군 부장을 죽였으니, 지금까지 이를 의롭게 여기고 있다. 1815년 여름에 그 모습을 그려서 장향각(藏香閣)에 걸고 1년에 한번 제사를 지냈다. 평양부 기생 계월향은 왜군(倭軍) 부장(副將)의 총애를 받았지만,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김경서 장군을 친오빠라 부르며 성(城) 안으로 불러들였다. 계월향은 왜장(倭將)이 깊은 잠에 빠져들기를 기다린 후, 김장군을 안내하여 장막으로 들어갔다. 왜장은 의자에 앉아 두 눈을 부릅뜨고 쌍칼을 쥐고 있었는데, 얼굴빛이 붉어서 마치 망나니(작인. 斫人)가 서 있는 듯 하였다. 김장군이 칼을 빼서 왜장으 머리를 베었다. 왜장은 머리가 땅에 떨어졌음에도 오히려 칼을 던질 수가 있어서 하나는 벽에, 하나는 기둥에 절반쯤 박혔다. 이에 김장군은 성을 빠져나가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김장군이 두 사람 모두 온전하지 못할 것을 알자, 칼을 들어 계월향을 죽이고 성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아침에 적들이 왜장이 죽은것을 알고서 크게 놀라 사기가 저하되고 기세가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