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튜브를 통해서 이런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30여년 전에 서울에 살다가 남편과 이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 갓난 아기인 세쌍둥이 남매를 데리고 강원도 곰배령에 들어와 그곳에서 30여 년을 살아온, 아직은 젊은 어떤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3남매 쌍둥이들은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곰배령 산골에서 학교 다니며, 자연 속에 애들을 풀어놓고 맘껏 뒹굴면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3남매 중 유일한 남자인 아들이 얼마 전 결혼을 하면서 산골을 떠나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는데, 오랜만에 새로 생긴 자기 부인까지 여자 넷에 둘러싸여 식사를 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도시에 나가 살아보니 어떻든?” 어머니가 묻습니다. 그에 대한 갓 결혼한 아들은 “'도시가 편한 것도 많은데, 그런데 무엇보다 도시 생활에선 내가 덜 바쁘면, 어? 내가 왜 이렇게 한가하지? 뭔가 내가 잘못 사는 거 아닌가?'라는 조바심이나 죄책감 같은 게 든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그 대목에서 그 엄마가 ‘그렇게 조급할 필요 없다. 여유롭게 살아라.’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와는 달리 “너도 알다시피 나는 오랜 서울 생활, 그리고 이 산골 생활 둘 다 해봤는데, 어느 게 더 좋다 나쁘다 하는 것보다, 너도 30년 산골 생활에 이어 도시 생활을 시작했으니 양쪽 모두 충분히 경험해 보고 네가 선택한 삶을 살길 바란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어찌되었든 내 인생은 ‘본인의 선택’입니다. 자기가 좋은대로, 자기가 선택한 방법으로 사는 것이 나쁜 게 아닙니다. 가령 나의 수도 생활도 누가 등 떠밀어서 이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본인이 선택한 삶입니다. 또한 우리 사제생활 역시, 같은 신부더라도 어떤 신부는 큰 도시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과 부딪혀 가며 바쁘게 사는 게 좋은 사람이 있고, 사람들에 치이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그저 조용하니 동떨어진 곳에서 사는 게 오히려 편하고 좋은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은 결국 사는 방법은 자기 취향이고 자기 선택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 여러 다른 장소로 떨어진 씨앗의 이야기와 오늘 ‘선택’ 이야기가 연결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결국엔 전혀 상관도 없는 누군가가 껴들어서 이게 옳다, 저게 옳다,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각자의 삶입니다. 다만 나의 선택의 결과가 금방 사스러들지, 열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지는 어느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