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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세운 임금이다. 알에서 태어난 뒤 경주 지역을 다스리던 여섯 촌장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촌장들이 조심스럽게 알을 건드리자 껍질이 갈라지면서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촌장들은 하늘에서 임금을 보내주었다고 생각하고 사내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
기존 학자들은 “신라사가 고구려사·백제사보다 비교적 완전하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모르고 하는 말이다. 고구려사나 백제사의 경우에는 소멸된 게 많지만, 신라사의 경우에는 위조된 게 많아서 이 역시 사료로 삼을 만한 게 매우 적다. 신라 건국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이에 관해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신라의 제도는 6부와 3성으로 조직되었다. 신라 본기에 따르면, 6부는 알천양산·돌산고허·무산대수·자산 진지·금산 가리·명활산고야의 6촌에서 출발했다. 신라 건국 후인 제3대 유리왕 9년 즉 서기 32년에 6촌을 6부로 고치고 각각의 성씨를 부여했다. 알천양산은 양부로 고치고 이 씨 성을 부여했고, 돌산고 허는 사량부로 고치고 최 씨 성을 부여했고, 무산대수는 점량부로 고치고 손 씨 성을 부여했고, 자산 진지는 본피부로 고치고 정 씨 성을 부여했고, 금산 가리는 한 지부로 고치고 배 씨 성을 부여했으며, 명활산고야는 습비부로 고치고 설 씨 성을 부여했다. 한편, 3성은 박·석·김 세 가문을 가리킨다. 하루는 고허촌장인 소벌공이 양산 밑의 나정 옆에서 말이 꿇어앉아 우는 것을 보았다. 그리 가보니, 말은 간 데 없고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보니 아이가 나왔다. 아이를 거두고 성씨를 ‘박’이라 했는데, 나온 알이 박만 하여 ‘박’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름은 혁거세라고 했다. 혁거세에 해당하는 이두문자의 발음과 의미는 전해지지 않는다. 나이 열셋에 슬기롭고 조숙하게 되자, 인민들이 그를 거서간으로 받들었다. 거서간은 당시 귀인 칭호였다. 이것이 신라 건국 원년(기원전 57년)이니, 그가 박씨의 시조다. 신라 동쪽에는 왜국이 있고 왜국 동북쪽에는 다파나국이 있었다. 다 파나 국왕이 여인국 공주와 결혼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불길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내다 버리라고 하자, 왕비는 차마 죽일 수 없어 비단에 싼 뒤 금궤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금궤가 금관국 해변에 도착하자, 이곳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겨 건지려고 하지 않았다. 금궤가 진한의 아진포구에 도착하니, 이때는 박혁거세 39년(기원전 19년)이었다. 해변에서 노파가 건져보니, 어린애가 그 속에 있었다. 노파는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금궤에서 탈출했다고 하여 이름을 탈해라고 했다. 금궤가 떠내려 올 당시에 까치가 따라오며 울었다고 하여, 성을 까치 작자에서 우변을 떼어내 석이라 했다. 그가 석 씨의 시조다. 석탈해 9년(서기 65년), 금성(신라 서울, 즉 경주) 서쪽의 시림이란 숲에서 닭울음소리가 들렸다. 석탈해는 대보(총리_옮긴이)인 호공을 내보냈다. 호공이 가보니 작은 금빛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금궤를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거두어 기르기로 하고, 이름은 알지라고 했다.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이라고 하니, 이가 신라 김 씨의 시조다. 궤에서 나왔다느니 알에서 나왔다느니 하는 신화는 고대인들이 시조의 출생을 신비하게 장식하려고 지어낸 것이다. 6부나 3성과 관련된 것은 원래 모습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후세에 첨삭이 가해진 상태로 전해졌다. 애석한 일이다. 이것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조선 고대사의 인명·지명은 처음에는 우리말로 짓고 이두로 표기했다. 나중에 중국 문화가 성행하자 이두를 한자로 번역했다. 예컨대 전자는, 우리말 메주골을 미추홀이나 매초홀로 표기한 것과 같은 것들이고, 후자는 그것을 한자인 인천으로 바꾸어서 표기한 것들이다. 그런데 알천양산·돌산고허 등은 한자로 쓴 6촌의 명칭이고, 양부·사량부 등은 이두로 쓴 6부의 명칭이다. 신라 본기에서는 한자로 쓴 6촌의 명칭이 처음 명칭이고 이두로 쓴 6부의 명칭이 나중 명칭이라고 하니, 이것은 필시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둘째. 신라가 불경을 수입하기 전에는 모든 명사가 이두의 음과 뜻에 맞추어 만들어졌다. 그러나 불경이 성행한 뒤에는, 일부 괴승들이 조금만 비슷하기만 하면 불교 어휘에 맞추어 이두문자를 바꾸었다. 예컨대 소지왕은 비처왕이라고도 한다. 소지나 비처는 다 ‘비치’로 읽어야 한다. 비처는 원래부터 쓰던 이두문자이고, 소지는 불경에 따라 개작한 이두문자다. 유리왕은 세리지 왕이라고 도 한다. 유리나 세리는 다 ‘누리’로 읽어야 한다. ‘유리’는 원래의 이두문자이고, ‘세리’는 불경에 맞춰 개작한 이두다. 탈해왕의 경우, 삼국사기 주석에서 ‘토해라고도 한다’고 했다. 탈해나 토해는 다 ‘타해’ 혹은 ‘토해’로 읽힌다. 말뜻은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속어로 지은 명사인 것만큼은 명백하다. 토해는 원래의 이두이고, 탈해는 개작된 이두다. 불경에 ‘탈해’란 말이 있기 때문에, 토해를 탈해로 개작한 것이지만 원래 토해는 당시의 속어와 똑같은 발음을 취했을 뿐이고 탈출한다거나 풀려난다는 뜻은 없었다. 금궤에서 탈출했기에 이름을 탈해라고 불렀다는 것은 괴승들이 멋대로 만들어낸 말이라고밖에 단언할 수 없다. 셋째. 3성의 시조가 다들 큰 알에서 나왔다. 큰 알은 박만 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3성의 시조가 다 박씨가 되지 않고, 박 씨 이외의 둘은 석 씨·김 씨가 되었을까? 또 석 씨·김 씨가 다 금괴에서 나왔거늘, 무슨 이유로 둘 다 김 씨가 되지 않고 한쪽은 석 씨가 되고 한쪽은 김 씨가 되었을까? 까치가 석탈해의 금궤를 따라다니며 울었다고 하여 까지 작 자에서 변을 떼어내 석 씨가 된 것이라면, 김알지가 출현할 때 닭이 따라다니며 울었으므로 닭 계 자에서 변을 떼어내 해 씨가 되었어야 하지 않는가? 무슨 이유로 한쪽은 김 씨가 되지 않고 석 씨가 되었으며, 한쪽은 해 씨가 되지 않고 김 씨가 되었을까? 아무리 신화라도 이렇게 난삽하고 무원칙적으로 만들어 놓고 한자 파자 놀이 같은 수작을 섞어 놓았으니, 신화에 나온 단어들이 이두시대의 실상과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 건국 당시의 신라는 경주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가장 작은 나라였다. 그런데도 “변한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해 왔다”거나 “동옥저가 좋은 말 200 필을 조공했다”라고 한다.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을 주워 바쳤다”는 기록은 더욱더 황당하다. 북명은 북동부여의 별칭인 북가시라에 해당하는 훈춘 등지를 가리킨다. 이곳은 고구려 대주류왕의 호위무사인 괴유의 시신이 묻힌 곳이다. 훈춘 농부가 밭에서 예왕의 인장을 주워 수천 리를 걸어 경주 한 귀퉁이의 소국인 신라왕에게 바쳤다는 이야기가 어찌 실화일 수 있으리오. 이것은 경덕왕이 동부여 즉 북명의 지명을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망설이다. 다른 것들도 거의 다 신뢰할 만한 가치가 없다. 신라는 열국 중에서 문화가 가장 뒤처진 나라였다. 그래서 역사서 편찬도 건국 600년 뒤에야 이루어졌다. 그 역사서도 북방 국가들의 신화를 모방해서 꾸며낸 것이다. 그나마도 신라 역사서는 궁예·견훤 등과의 전쟁으로 상당 부분 불타버렸다. 그런 뒤에 여기저기 남은 부스러기를 고려시대 문사들이 주워 모아서 만든 것이 신라 역사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 신라 본기 역시 고구려 본기·백제 본기처럼 진위 여부를 가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역사가들은 〈신라 본기〉가 비교적 완전하다고 믿고 그대로 맹신했다. 3성 중에서 박씨뿐 아니라 석 씨·김 씨도 사량부의 성씨였다. 3대 성씨를 존숭 한 것은 삼신설에 따른 것이다. 신라 본기에서는 석탈해왕 9년(서기 65년)에 김 씨의 시조인 김알지를 주웠다고 했지만, 파사왕 원년(서기 80년)에 왕후인 사성부인 김 씨가 허루 갈문왕(추존한 왕을 신라에서는 갈문왕이라 함)의 딸이라고 했으므로, 나이를 따져보면 허루는 알지의 아버지뻘 되는 김 씨였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보면, 박씨·석씨·김씨 3성은 처음부터 사량부 안에서 서로 통혼하는 강력한 가문으로, 그들은 서로 협력하여 6부 전체를 3성이 왕이 되는 나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진한의 자치시대가 끝나고 세습 군주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기원전 69년경, 한반도의 남동쪽에는 여러 부족 국가들이 모여 연맹을 이룬 진한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한 중에서 경주 지방에는 모두 여섯 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알천의 양산촌, 돌산의 고허촌, 무산의 대수촌, 취산의 진지촌, 금산의 가리촌, 명활산의 고야촌 등이었다.여섯 마을의 촌장들은 회의를 열고 나라를 세우자고 뜻을 모았다. 그러려면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모셔야 했다. 촌장들은 먼저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촌장들의 눈에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는 흰말이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흰말은 크게 울면서 하늘로 올라갔고, 흰말이 있던 자리에는 자줏빛 알이 있었다.촌장들이 조심스럽게 알을 건드리자 껍질이 갈라지면서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촌장들은 하늘에서 임금을 보내주었다고 생각하고 사내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 혁거세란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이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왔으니 성은 박 씨가 되었다. 박혁거세는 촌장들의 손에서 무럭무럭 자라 기원전 57년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라고 지었는데, 서라벌은 시신라의 옛 이름이다. 박혁거세는 약 61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한편, 여섯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위에 올렸다는 사실로 보아 신라는 박혁거세와 여섯 개의 부족들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박혁거세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처럼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이는 나라를 세운 임금이 하늘의 후손임을 내세워 신성시하려는 의도로 짐작된다.
혁거세는 기원전 69년에 태어났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에서 웬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었다. 다가가서 보자 말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고 큰 알만 하나 남았다. 이 알에서 바로 혁거세가 나왔다는 것. 이어서 5년 뒤, 용이 알영의 우물에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 여기까지가 [삼국사기]가 전하는 박혁거세 탄생 신화의 일단락이다. 처음부터 신이로운 탄생 부분을 그대로 살려 신라 왕실과 혁거세의 위대성을 드러내려 한 것은 모처럼 삼국사기가 거둔 성과였다. 바로 다산과 다른 김부식의 일면이다. 신라 6부의 사람들이 출생이 신이한 혁거세를 받들어, 나이 열세 살이 되자 왕으로 세웠다는 부분에 와서는 애써 논리를 갖추려 하지만 말이다.이 신화에서 혁거세는 철저히 신비로운 출신으로 포장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오면 이것은 더 재미있고 실감 나는 이야기로 확대된다. 혁거세가 담겨 있던 알이 자주색이라고 한다거나, 알영의 몸매와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아 월성의 북천으로 데려가 씻겼더니, 그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는 대목은 읽는 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한다. 알영은 그렇다 치고 혁거세가 태어난 알은 누가 낳았단 말일까?김부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겪은 일 하나가 삼국사기'신라본기'의 맨 마지막에 적혀 있다. 고려 예종 11년(1116), 김부식은 사신의 일행이 되어 송나라 조정에 갔다. 일행을 접대하는 송나라 사람 왕보가 한 사당에 걸린 선녀의 초상을 보여주는데, 이이는 고려의 신이라 하며, “옛날 어느 제왕가의 딸이 남편 없이 임신해 사람의 의심을 받게 되자, 곧 바다를 건너 진한에 도착해 아들을 낳았는데, 곧 해동의 첫 임금이다. 딸은 지선이 되어 오랫동안 선도산에 살았는데 이것이 그 초상화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김부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선도산 신모며 아들이라니,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가. 조공을 드리러 온 나라의 신하 입장에서 그는 더는 입을 열지 못했지만, 불만은 가득한 표정이 역력하다. [삼국사기]의 다음 대목에 김부식은 분명히 ‘그의 아들이 어느 때 왕 노릇 했는지 모르겠다.’고 적었다.정작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사람은 일연이었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감통' 편을 선도산 신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신모는 본디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였다. 어려서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 와서 살더니,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의 발에다 편지를 묶어 부치면서, “솔개를 따라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라고 하였다. 사소는 편지를 받고 솔개를 놓아주자, 이 산에 날아와 멈추었다. 그대로 따라와 집을 짓고, 이 땅의 신선이 되었기에 이름을 서연산이라 했다.일연이 적은 이 기록은 김부식이 송나라 관리에게 듣고 적은 부분보다 훨씬 길어졌다. 그만큼 더 실감 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연은 그다음 줄에서 아예,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하였으니,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이 그렇게 나왔다.”라고 하여, 혁거세의 출신이 중국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럼 혁거세의 알을 낳은 이는 중국 황실의 딸 사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