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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민의 술이야기 - 벌교 녹차막걸리와 ‘흘러간 주먹’
탁주(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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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민/ 학민사 대표 · 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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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6일 밤, 나는 권총을 겨누고 들이닥친 두명의 수사관들에 의해 영문도 모르고 합동수사본부로 잡혀갔다. 당시 합수부는 옛 전매청 자리(지금의 경찰청)에 있었는데, 전두환 일당은 바람 한점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이곳의 담배창고들을 감방 겸 취조실로 꾸며놓고 여름 내내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족쳐댔다. 7월 중순이 되자 유시민(현 국회의원)과 같은 재학생들은 포고령 위반으로 분류되어 재판을 거쳐 석방되고, 이해찬(현 국무총리), 조성우, 송기원과 나 같은 복학생들은 ‘내란수괴’ 김대중씨 재판놀음의 말석을 채우기 위해 서울구치소로 넘겨졌다. 5년 만에 다시 와보는 감옥은 여전히 낯설었다. 퀴퀴한 냄새, 희미한 백열등 아래 철창 사이로 호기심 어린 눈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를 뚫고 어느 감방에선가 물어왔다.
“양은이 형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태촌이 형도 잡혔습니까?”
‘후리가리’로 들어온 조직폭력배들일 것이다. 두달여 동안 밀폐된 창고 속에서 갇혀 지낸 내가 조양은과 김태촌의 안부를 알 길이 없지만, 그들이 나에게 그걸 묻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70년대 중반까지 감옥의 권력은 조직폭력배가 쥐었다. 이후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가들이 감옥을 채우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조직폭력배가 감옥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심수들의 묵인과 양해 또는 공존이 필요해진 것이다. 곧 그 권력은 교도소쪽의 ‘적당한 부패’와의 교환인데, 이를 양심수들이 그냥 두고 보았겠는가?
조직폭력배들은 학생운동가들을 약간의 경외심과 동류의식을 갖고 대한다. 경외심으로 보자면, 그들은 서방파니 아카데미극장파니 하여 시장 골목이나 극장 주변의 패권을 둘러싸고 싸우거나, 순천파니 목포파니 하여 지방 소도시를 중심으로 ‘활약’하는 데 비해, 학생운동가들은 대한민국 또는 북한, 미국 문제로 다투다가 구속됐으니 우선 스케일이 다른 것이다. 또 그들보다 중형을 선고받으니 ‘콩밥의 권위’도 앞선다. 그리고 ‘감시와 처벌’이라는 같은 조건 아래 살고 있으면서, 이러한 상황을 강요한 ‘국가폭력’의 대변자 검사를 ‘공동의 적’으로 삼고 있는 점에서도 동류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은 석방 뒤에도 인연을 맺고 지내는 경우가 흔히 있다. 어느 정치인은 감옥 안에서의 그 인연으로 전두환 시절 2년여의 수배에서도 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한다.
나도 ‘흘러간 주먹’ 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는 감옥살이는 하지 않았지만, 한때 광주 OB파의 실력자로서 주먹만은 알아주었던 김태서이다. 김태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1960년 도쿄올림픽 100m 우승자의 기록과 국적, 아이슬란드의 수도와 인구, 초대 총리 이름, 소프라노 카트리나 비트의 앨범 수, 전통 경옥고 만드는 법, 인촌 김성수의 외사촌 형제 이름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전남편 5명의 이름 등 끝이 없다. 특히 문화예술에 대한 풍부한 ‘지식’ 때문에 그는 ‘문화무술인’으로 불리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점은 그가 돈이 되지 않는 것만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도 나도 건달생활 30년, 주머니가 얇아 주로 소주나 막걸리를 즐긴다. 요즈음은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의 감독 이미례가 인사동에 연 ‘여자만’(02-725-9829)에서 벌교녹차막걸리에 푹 빠져 있다. 순천에서 미모 자랑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 말고,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 했다. 오늘 밤에도 벌교녹차막걸리로 목 축이며 주먹 자랑하는 대신 돈 안 되는 지식만 열심히 펴고 있을 김태서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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