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새벽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참석해야 하는 예불은 그 자체가 수행이다. 사찰의 많은 풍속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했지만 조석 예불만은 여전히 옛 전통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예불은 부처님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의식이다. 예불은 제불의 공덕을 찬탄하며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예경의 대상은 불법승 삼보이며 그 중에서도 부처님이 핵심이다.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의식을 갖춘, 예불이라는 별도의 의례가 없었다. 당시 비구들은 부처님과 함께 정해진 규범, 즉 계율에 따라 하루의 일과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부처님을 공경하는 예법은 있었다. 오늘날 오체투지나 탑을 도는 것 등이 부처님 당시부터 존재하던 예경법이다. 경전에 나타나는 부처님에 대한 가장 최초의 예경은 보드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에게 두 상인이 행한 두면례(頭面禮)이다. 트라프사와 바루리카라는 두 상인은 미숫가루를 바리때에 담아 올린다. 식사가 끝난 뒤 두 상인은 부처님의 발밑에 머리를 대고 예배하며 재가신자로 귀의한다. 이것이 부처님에 대한 최초의 예경이다.〈사분율제30권〉
부처님에 대한 예경으로 또 다른 장면이 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범천왕은 중생들에게 설법하기를 청하고 부처님 발에 예배한 뒤 오른쪽으로 세 번 돈다. 〈사분율제31권〉. 이렇게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도는 예법을 우요삼잡(右繞三)이라고 한다. 발등에 머리를 대는 신체적 접촉이나 오른쪽으로 동심원을 긋는 행위는 예경자가 성스러움을 희구하는 행위이다. 오른쪽으로 세바퀴 도는 방식은 이후 탑돌이에 전이된다. 〈사분율〉제33권에는 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가죽신을 벗고 대중의 발에 예배하고 오른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고”라며 예경의 한 형식을 묘사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의 이같은 예법은 모두 고대 인도에서의 상대방에 대한 예경법이었다고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0에서는 “예를 표하는데는 세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말로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머리를 땅에 닿지 않고 숙이는 것이며 세 번째는 머리를 땅에 닿는 것이다. 이는 최상의 머리를 최하인 발에 닿음으로써 예를 표한다”고 했다. 즉 오체투지를 말한다. 이 오체투지가 오늘날 남방 북방 불교 구분없이 모두 쓰이는 가장 보편적인 예경법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에는 탑을 돌며 예불을 올렸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은 부처님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부처님이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탑을 둥글게 그리며 돌았던 것이다. 이후 부처님의 형상을 묘사한 불상이 생겨나면서 예불은 정형화 의식화 되었다.
그러면 오늘날과 같은 이같은 예불의식은 언제부터 형성된 것일까. 월운스님은 ‘일용의식수문기’(日用儀式隨聞記)에서 “오늘날과 같은 예불문과 의식이 언제 성립되었는지 알수없지만 삼보를 대상으로 삼아 예참법이 발달하다가 그것이 보편화되면서 조석예불로 정착된 듯 보인다”고 했다. 고대 중국에서 발달한 예참법이 그 원형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예불모습은 보조스님이 지은 〈계초심학인문〉에서 확인된다. “예불에 나아가되 모름지기 조석으로 근행하여 스스로 게으름을 꾸짖으며”라고 한 것을 볼 때 오늘날과 같은 조석예불이 고려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새벽과 저녁예불은 전 사찰에서 필수의식이다. 그 형식도 거의 대부분 유사하며 형식은 1950년대 정화 이후 정형화됐다.
아침예불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새벽 3시 즈음 자리에서 일어난 부전은 법당 다기 물을 떠올린 다음 단(壇)의 촛불을 켠다. 이어 3시가 되면 법당 앞 중앙에 선 채 목탁 세 번을 오르내린 뒤 목탁을 치면서 도량을 돈다. 이를 도량석(道場釋)이라 한다. 자신의 구업을 청정케하는 진언을 외우고 난 뒤 모든 법계에 존재하는 신들의 안위를 비는 진언을 외운다. 이들 모두가 부처님께 귀의하여 몸과 마음의 평안을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새벽 3시에 도량석 돌며 산사와 스님의 하루 열어
고대 중국 예참법서 유래… 선원예불은 절차 간단
새벽 3시에 예불을 시작하는 것은 주역의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른 것이다. 이를 미뤄 오늘날의 새벽 예불이 중국의 주역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나무로 만든 목탁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첫 소리를 내는 것도 주역의 영향이다. 오행 가운데 3은 우주의 기운이 동으로부터 싹터오는 시간으로 나무를 의미한다고 한다. 목탁은 처음에는 작은 소리에서 점차 큰 소리로 울린다. 이는 잠자는 미물이 놀라 깨지 않도록 배려 한 것이다. 저녁 예불은 이와 반대다. 쇠로 만든 종을 먼저 울리는데 그 소리가 처음에는 크고 점차 작아진다.
도량석에 이어 동서남북 사방이 편안해졌음을 나타내는 사방찬(四方贊)과 도량을 찬탄하고 하늘 신들의 가호를 비는 도량찬(道場贊)을 한다. 여기까지가 도량송(道場誦)이다.
한편 도량석을 돌 동안 대중은 모두 일어나 세면을 하고 법당에 들어가 불전에 삼배를 드리고 조용히 앉는다. 도량석이 끝나는 것과 함께 낮은 소리로부터 종송(鐘誦)을 한다. 이어 법당 밖 종고루에서 법고와 목어 운판 범종 등 사물을 울린다. 아침 예불 때는 법고를 시작으로 목어 운판 범종을 차례로 치며 저녁에는 법고 운판 목어 범종 순이다. 아침 28회, 저녁 33회 타종한다. 이 숫자에는 여러 이설(異說)이 있다. 욕계 색계 무색계 28천과 도리천 33천에 종소리가 울려퍼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라는 인도의 우주관 설과 동쪽 방위를 나타내는 3과 8을 곱한 것에 간방(間方) 4를 더해 28, 서쪽 방위 4와 9를 곱한 것에 4를 더해 36으로 보는 오행설이 있다.
이어 예경의식이 시작된다. 아침 예경은 다게(茶偈)와 예경문으로 구성된다. 불전의 다기에 청정수를 올린 후 그것을 감로다로 변화시켜 불법승 삼보께 올린다는 것이 다게의 내용이다. 이어 예경의 핵심인 예경문 봉송이 시작된다. 예경문은 삼보께 귀의한다는 내용이다. 예경문을 봉송하면서 일곱 번의 절을 하는데 이를 칠정례(七頂禮)라고 한다. 이 칠정례는 1955년 월운스님 등이 기존에 사용되던 많은 종류의 예경문을 종합해서 만든 것이다. 월운스님은 “1955년 통도사에 있을 때 정화분규의 소용돌이 속에 입산한 승니(僧尼)가 많은 것을 보고 분규가 끝난 뒤 고저가 순탄하여 어느 종파나 누구나 쉽게 창화(唱和)할 수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사중의 가장 연로한 스님이나 또는 노전스님이 축원을 한다.
축원은 아침 예불 때만 한다. 축원문으로는 고려말 나옹화상이 지은 행선축원(行禪祝願)이나 중국 당의 이산연 선사가 짓고 1964년 운허스님이 번역한 이산연선사 발원문 등이 주로 사용된다. 축원문의 내용은 나와 남이 동시에 성불에 이르게 해달라는 기원과 다짐이 들어있다. 중단예불과 반야심경 봉독으로 예불은 끝난다.
조계종의 경우 정화 후 비구니 사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단예불은 폐지되고 반야심경 봉독으로 대체됐다. 그 이유는 수행자가 중단에 예를 올리면 신장(神將)들이 복을 감(減)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전은 촛불을 끄고 부처님 께 올렸던 다기의 물을 마신다. 이렇게 해서 산사와 스님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저녁 예불은 종송으로 시작한다. 종송이 끝나면 사물을 울리고 범종 36번을 친다. 이어 예경이다. 저녁에는 오분향례 및 헌향진언 예경문 등을 한다. 축원은 하지 않고 중단예불이나 반야심경을 봉독한 뒤 마친다.
선원예불은 이와 다르다. 아침 도량송의 시작과 함께 입승은 죽비 삼성으로 대중들의 기상을 알린다. 이어 큰방에 불이 켜지면 잠자리를 정돈하고 대중은 가사 장삼을 입은채 큰 방 중앙을 향해 자리한다. 이어 입승의 죽비 삼성에 맞춰 불법승 삼보께 각각 1번 씩 3번의 절을 올린다. 이것으로 예불은 끝이다. 이어 좌복 위에 앉아 화두 참선에 들어간다. 선원 예불이 이처럼 간단한 것은 수행자가 곧 미래세의 부처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많은 사찰과 승가의 풍습이 세월 따라 변했지만 이 아침 저녁 예불만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물론 중단예불이 없어지고 사찰에 따라서 예경문의 내용도 약간씩 다르지만 거의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대중이 적은 작은 사찰에서는 아침 예불에 빠지는 스님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가끔 부전 스님 혼자서 예불을 모실 때도 있다. 새벽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참석해야 하는 예불은 그 자체가 수행이다.
1980년대 서울 도심의 어느 사찰에서는 주지스님이 예불을 예사로 빠트리는 일이 일어났다. 밤에 손님을 만나는 등 일이 많아져 도저히 새벽예불에 참석할 수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신도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놀란 그 주지 스님은 일체의 밤 약속을 없애고 절대 예불에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