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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시대 이후의 시기들은 가나안을 지배했던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헬레니즘), 로마 등의 여러 제국들의 이름을 따 붙여진다.[15]
선사[편집]
가나안의 자연지리학 지형
가나안의 문화는 가술 문화라고 하는 동기 시대 원시 가나안인들의 문화[16]에서 발전하였다. 가술 문화 그 자체는 인접한 아라비아 유목 목축 집단에서 발전한 것으로, 이 목축 집단은 기원전 6200년경 신석기 혁명을 촉발한 기후 위기 당시 동물을 사육하던 나투프/하리피안 문화가 농경 문화인 선토기 신석기 B와 결합함으로써 발생한 집단이다[17]
동기 (4500–3500년)[편집]
원시 가나안인들은 기원전 4500년대부터 레반트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집약적인 자급 원예, 대규모 곡물 재배, 상업용 포도주 제작 및 올리브 경작, 이동 방목식 목축 등으로 이뤄진, 가나안 지방의 전형적인 지중해 농경 체계를 개척했다. 이들은 소규모 마을에 살며, 구리를 캐내어 생산하였다. 원시 가나안인들은 셈어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서 분리되던 기원전 3800년경에 가나안인들이 되었다. 당시 가나안인들의 주요 신전이 엔 게디와 메기도에 지어졌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가나안의 대부분이 동지중해 침엽수-경엽수-활엽수림 생태 지역으로 덮여 있었다. 동기 시대 말에 지중해 남쪽에서 엔 에수르라는 도시가 생겼다.[18]
초기 청동기 (3200–2000년)[편집]
초기 청동기 시대까지 동셈어군의 일종인 에블라어가 사용되던 에블라와 같은 곳들이 자생적으로 발달하였으나, 기원전 2300년경 사르곤 대왕 및 나람신의 아카드 제국을 기반으로 한 메소포타미아권에 합병당한다.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서쪽 지역인 마르투에[주해 1] 대한 수메르인들의 언급은 사르곤보다 더 이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최소한 수메르 왕인 우루크의 엔샤쿠샨나 때까지 이르며, 수메르의 한 점토판은 실제 사건 이후 몇 세기 뒤에 만들어져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초기 수메르 왕인 루갈안네문두가 마르투를 지배했다고 적혀있었다.
에블라의 옛 기록들은 하솔과 예루살렘을 포함한 여러 성경의 장소들에 대한 언급을 나타냈다. 에블라 그리고 아모리인들은 하솔, 카데시(오론테스강의 카데시), 아무루 왕국(시리아)의 어딘가에서 가나안의 북쪽 및 북동쪽과 접했는데, 우가리트 역시 아모리족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9] 기원전 2154년 아카드 제국의 붕괴 당시 티그리스강 동쪽의 자그로스산맥(현재 이란)에서 키르벳 케락 토기를 사용하던 집단이 이주해 왔다.[20] 그 외에, DNA 분석을 통해서 기원전 2500–1000년 사이에, 자그로스의 동기 문화권과 캅카스의 청동기 문화권의 사람들이 레반트 남부로 이주했음이 밝혀졌다.[21]
남부 레반트 최초의 도시들이 이 시기에 발생하였고, 주요 도시들은 엔 에수르와 메기도 등이었다. 이 '원시 가나안인'들은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론 소아시아 (후리인, 하티인, 히타이트인, 루비아인)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아카드, 아시리아)의 사람들과 정기적인 교류를 하였고, 이 경향은 철기 시대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의 끝은 가나아인들이 도시들을 버리고 농경 및 반유목 성격의 목축 중심의 마을을 기반으로 한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종료되었으며, 그럼에도 이들은 특화된 공예 제작술을 유지하고 교역로도 개방한 채로 두었다.[22] 고고학적으로, 후기 청동기 시대의 국가 우가리트 (시리아의 라스 삼라)는 이들의 언어 우가리트어가 가나안어군의 성질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본질적으론 가나안인 계열이라 여겨진다.[6][23][24][25]
중기 청동기 (2000–1550년)[편집]
도시화가 다시 이뤄졌고 가나안 지역은 소규모 도시국가들로 나뉘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주요했던 곳은 하솔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6] 이 당시 가나안의 물질 문화의 많은 측면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반영했으며, 가나안 전 지역이 방대한 국제 교역 체계에 한층 더 밀접히 속하게 되었다.[26]
기원전 1900년경 이집트에 온 서아시아 방문객들
기원전 1900년경 이집트 관료 크눔호텝 2세를 방문하는, '힉소스`라 표시된 지도자가 이끄는 '아아무'(ꜥꜣmw)라 표시된, 가나안들로 추정되는 서아시아인들의 한 무리. 베니 하산에 있는 이집트 제12왕조의 관리 크눔호텝 2세의 무덤.[27][28][29][30]
아카드의 나람신의 재위 (기원전 2240년경)만큼 이른 시기, '아무루'는 수바르투/아시리아, 수메르, 엘람과 함께 아카드를 둘러싼 '네 세력' 중 하나라 불렸다.
아모리 왕조는 또한 라르사, 이신 등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고 기원전 1894년에 바빌로니아를 건국한다. 이후에, 아무루는 가나안 북부와 더불어 남부 내륙 지대를 나타내는 아시리아/아카드어 지칭어가 되었다. 이 당시에 가나안 지역은 이스르엘 계곡의 메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측과 좀 더 북쪽에 오론테스강의 카데시를 중심으로 하는 두 도시 연합측으로 나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수무아붐이란 이름의 아모리인 지도자가 기원전 1894년에 독자적인 도시국가 바빌론을 세웠다. 바빌로니아의 왕 중 한 명인 함무라비 (기원전 1792–1750년)는 제1차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국하였으며, 이 제국은 그의 일생 기간만큼만 지속되었다. 그가 죽자, 아모리인들은 아시리아에서 밀려나, 기원전 1595년까지 바빌로니아의 지배자로 있다가 그 뒤 히타이트인들에게 축출당한다.
반허구적인 《시누헤 이야기》는 세누스레트 1세 재위(기원전 1950년경) 기간 ‘상 레트케누’(Upper Retchenu)와 ‘피느쿠’(Finqu) 지역에 군사 활동을 벌인 이집트 관료 ‘시누헤’에 대해 묘사한다. ‘멘투’(Mentu), ‘레트케누’(Retchenu), ‘세크멤’(Sekmem, 셰켐)의 원정에 관한 가장 이른 이집트 기록은 세누스레트 3세 재위 때(기원전 1862년경)로 추정되는, 세베크쿠 스텔레이다.
기원전 1650년 무렵에, 가나안인들은 이집트 삼각주의 동부를 침입했으며, 그곳에서 힉소스로 알려진 그들은 지배 세력이 되었다.[31] 이집트의 비문들에서는, ‘아마르’(Amar)와 '아무루'(Amurru, 아모리인) 등이 오론테스강에 이르는, 페니키아의 동쪽 좀 더 북쪽의 산악 지대에 엄밀히 적용되었다.
이후에 가나안인들의 것으로 확인된 다수의 고고학 유적지들은 가나안 지역의 번영이 하솔의 지도하에서 최소한 이집트의 명목상 속국이라는 지위를 대부분 유지하며, 중기 청동기 시대 동안에 절정에 다다랐음을 보여주었다, 북쪽에선, 얌하드와 카트나 같은 도시들이 주요 도시 연합체의 패권국들이었고, 성경 속의 하솔은 남쪽에 있는 또다른 도시 연합의 맹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 청동기 시대 (1550–1200년)[편집]
당시 강대국들인 이집트(오렌지색), 하티(청색), 카시트의 비빌론 왕국 (검정), 중 아시리아 제국 (노랑), 미타니 (갈색)를 나타내는 아마르나 시대의 고대 근동 지도. 아카이아/미키네 문명 영역은 보라색으로 표시.
후기 청동기 시대의 초기에, 가나안의 도시 연합체들은 이집트와 히타이트 제국에 복속되기 이전엔 메기도와 카데시를 중심으로 하였다. 이후에 또한 신 아시리아 제국이 가나안 지역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성경에 따르면, 가나안 지역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이는 고대 셈어인족 이주 집단들에 이전에 바빌로니아를 지배했던 아모리인들이 있었다. 타나크는 족보의 민족들에서 아모리인들을 언급한다 (창세기 10장 16-18절). 분명한 것은 아모리인들이 가나안의 초기 역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창세기 14절 7장, 여호수아기 10장 5절, 신명기 1장 19절과 27절 그리고 44절에서 아모리들이 남쪽 산악 지대에 있음을 알 수 있으나, 민수기 21장 13절, 여호수아기 9장 10절과 24장 8절 그리고 12절 등의 구절에서는 위대한 아모리인들의 왕 두 명이 요르단강 동쪽인 헤스본과 아스테르스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창세기 15장 16절과 48장 22절, 여호수아기 24장 15절, 판관기 1장 34절을 비롯한 다른 경전들의 구절들은 ‘아모리인’이라는 이름을 가나안인들의 동의어로 여졌지만 그럼에도 아모리인은 해안가의 사람들에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성경상의 히브리인들의 출현에 앞서 수세기 전에, 이집트의 지배 지역이 산발적이었고, 잦은 토착민들의 봉기와 내부 도시들 간의 갈등을 억제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는 못했지만 가나안의 일부 지역과 시리아 남서쪽 지역은 이집트 파라오의 조공국 상태가 되었다. 가나안의 북부와 시리아 북부 같은 지역들은 이 시기에 아시리아의 지배에 놓여 있었다.
가나안의 전형적인 경관 생태
투트모세 3세 (기원전 1479–1426년)와 아멘호테프 2세 (기원전 1427–1400년) 시기에, 이집트 지배자와 그의 군대의 지속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은 아모리인들과 가나안인들이 충성심을 충분하게 유지하게끔 했다. 그렇지만, 투트모세 3세는 이 지역의 인구에서 새롭고 문제를 일으키는 한 집단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다. 하비루 또는 이집트어로 아피루 ('Apiru)들이 처음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용병, 도적때 혹은 무법자들로 보이며, 한때 정착 생활을 했을지도 모르나, 이들 집단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한 요소에 기여한 불운이나 상황과 환경에 떠밀려, 자신들의 지원에 대한 대가를 치를 어떠한 지역 유력자들과 왕, 혹은 군주들에게 고용될 준비를 갖췄다.
아카드어로 도적때로 설명된 수메르 설형문자 표기 SA-GAZ 혹은 아카드어로는 하비리라고 한 민족들은 수메르의 왕인 우르 제3왕조의 슐기 재위 시기 때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 알려졌으나, 이들의 가나안 지역 출현은 아시리아 북쪽에 소아시아를 기반으로 하고 말이 끄는 전차 귀족 사회인 마르야누인들이 중점이된 새로운 국가의 등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이들 마르야누들은 미탄니라고 알려진, 후르리인들의 인도아리아인계 지배자들과 관련되어 있다.
하비루는 민족 집단이라기보다는 좀 더 사회 계층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분석 결과에서는 셈어 화자들도 다수 있었지만, 하비루의 대다수가 후르리인(고립어를 구사한 소아시아의 비셈어군 화자 집단)이었고, 그중에는 심지어 일부 카시트인들과 루비아인들도 있었다고 나타내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재위 시기는 결과적으로 하비루/아피루가 정치적 불안정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아시아 지방에서는 그다지 평온하지 않았다. 호전적이던 지도자들은 대체로 주변의 왕의 도움 없이는 자신들의 지위를 얻을 수 없었음에도 독립의 기회를 엿보았다고 일부에서는 여겨진다. 이런 불만을 품은 귀족들 중 가장 용맹하던 이가 아무루의 지배자인 압디 아시르타의 아들 아지루로, 그는 아멘호테프 3세가 죽기 이전부터 다마스쿠스 평야로 세력을 늘리려 했었다. 카트나(하마 인근) 총독 아키지는 이러한 소식을 아지루의 시도를 저지하려던 것처럼 보이던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보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 파라오의 치세 (아크나톤, 재위: 기원전 1352년경-1335년경)에, 이집트 대신에 인근 소아시아를 기반으로 팽창하던 수필룰리우마 1세 치세(재위: 기원전 1344년경–1322년)의 히타이트 제국에 충성심을 열렬히 보낸 압디아시르타와 아지루는 구블라의 총독 립하다 같은 이집트에 충성하는 가신들과 끊임없는 분쟁을 야기했다.[32]
이에 따라 가나안에서 이집트의 세력은 히타이트인 (또는 하티인)들이 아멘호테프 3세 치세 때 시리아로 진입하여, 이들이 아모리인들을 제거하고 셈족계 민족들의 이주를 촉진하며, 아멘호테프의 후임자들 시기에 더욱 큰 위협이 되던 시기에, 중대한 퇴보를 겪었다. 압디아시르타와 그의 아들 아지루는 처음에는 히타이트들을 두려워했으나, 히타이트 왕들과 조약을 맺은 뒤에는 히타이트에 가담하여 이집트에 충성을 유지하던 지역들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리브하다는 저 멀리 있던 파라오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감동적인 호소를 보냈으나, 파라오는 그 소식에 관심을 갖기에는 자신의 종교 개혁에 너무나 열중했기에 허사였다.
아마르나 문서는 시리아 북쪽의 하비리들에 대하여 전하며, 에타카마는 파라오에게 다음의 서신을 보냈다:
"경청하소서, 남야와자가 주군의 도시들 전부를 카데시와 우비 땅의 도적때(SA-GAZ)에게 넘겼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나설 것이고, 당신의 신들과 당신의 태양이 제 앞에서 앞장선다면, 저는 하비리들로부터 그 도시들을 주군께 되찾고 그들을 주군께 복종시겠으며, 그 도적때들을 내쫒겠나이다."
유사하게 시돈의 왕 짐리다도 “파라오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나의 모든 도시들이 하비리들에게 넘어갔다.”라고 나타냈으며, 예루살렘의 왕 압디헤바는 파라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만일 병력(이집트의 병력)이 올해 안에 도착한다면, 영토와 군주들은 주군께 남게 될 것이지만, 병력이 오지 않는다면, 이 영토들과 군주들은 군주께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압디헤바의 주요 문제사항들은 일리킬리와 라바야의 후예들이라 불리는 이들한테서 일어났는데, 이들은 하비리들과 반역을 목적으로 한 동맹을 맺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이 무자비한 전사들이 기나 공방전에서 그를 죽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군주들은 파라오에게 보낸 서간에서 서로를 헐뜯었고, 반역적 행위에 대한 자신들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이에 대한 예시로 배신을 했다고 에타카마에게 비판을 받았던 남야와자는 파라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경청하소서, 저와 제 군사들은 제 동포들과 아피루, 수투인과 함께 주군이 마음대로 명하시는 어디로든지 즉시 움직이는 군대입니다”[33]
신왕국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 이집트는 레반트 거의 전저역에 지배력을 행사했었다. 제18왕조 기간에 지배력은 강력히 유지되었지만, 제19왕조와 제20왕조 시기에 불안정해졌다.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5년 카데시에서 히타이트와의 교착된 전투 상황으로 레반트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얼마 후에, 히타이트는 레반트 북부 (시리아와 아무루)를 성공적으로 장악해냈다. 건축 사업에 물두되어 있던 반면에 아시아의 소식을 등한시 하던 람세스 2세는 레반트에 대한 지속적인 지배력 감소를 야기하고 말았다. 그의 후임자인 메르넵타 치세에, ‘이스라엘’이라 알려진 사람들을 포함한 레반트 남부 지역의 여러 장소들을 파괴했다고 주장하는 메르넵타 스텔레 반포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조사에서 메르넵타 스텔레에서 언급된 지역들 어느 곳에서도 파괴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고 따라서 선전 활동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이며, 이 군사 활동은 남부 레반트의 고지대를 피했을 가능성이 크다. 람세스 3세 (기원전 1186-1155년) 치세 기간에 걸쳐, 남부 레반트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력은 바다 민족, 좀 더 명확히는, 남서쪽의 해안 평야에 정착했던 블레셋인들의 침입의 여파로 완전히 소멸했다.[34]
청동기 시대의 붕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입니다.
앤 킬러브루(nn Killebrew는) 예루살렘 같은 도시들이 '이스라엘 민족 이전 시기'인 청동기 IIB 시대와 이스라엘 민족의 철기 IIC 시대 (각각 기원전 1800–1550년경과 기원전 720–586년경)에는 크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요 도시였으나, 후기 청동기와 철기 시대 I과 IIA/B 시대 사이 기간에는 작고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며 요새화되지 않았음을 증명해냈다.[35]
아마르나 시대 직후, 가나안 남부(그 외 지역은 당시 아시리아가 지배)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에 문제를 일으킨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파라오 호렘헤브는 요르단강을 건너 갈릴리와 이즈르엘에서 이어지는 이집트의 무역로를 위협하던 유목민들인 샤수(이집트어로 방랑자들)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세티 1세 (기원전 1290년경)는 Taru (Shtir?) 요새에서 "Ka-n-'-na"에 이르는, 사해의 동쪽과 남쪽에 살던 셈어족계 유목민들인 샤수를 정복해냈다고 전해진다. 거의 패배할 뻔한 카데시 전투 이후 람세스 2세는 이집트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나안으로 원정을 해야만 했다. 이집트군은 모압과 암몬으로 진격하여, 영구 주둔지를 세웠다.
일부에선 '하비루'가 '히브리인들' 그리고 특히나 자신들을 위한 비옥한 토지를 장악하려던 판관기 시대의 초기 이스라엘인들이라 알려진 모든 유목 민족들을 일반적으로 나타낸다고 믿는다.[36] 그러나, 이 용어는 샤수를 묘사하는 데 드물게 사용되고는 했다. 이 용어가 다른 모압인, 암몬인, 에돔인 들 같은 그 밖에 고대 동족 셈어를 구사하는 민족들을 포함하는지는 불확실하며,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종족명이 아닐 수도 있다.
철기 시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페니키아 및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입니다.
초기 철기 시대 무렵, 지중해 연안의 불레셋인들의 도시 국가들, 요르단강 동쪽의 아람 다마스쿠스, 모압 왕국, 암몬, 남쪽으로는 에돔을 제외한 레반트 남부는 북이스라엘 왕국 및 유다 왕국의 지배에 놓였다. 레반트 북부는 시리아 히타이트라고 하는 소왕국들과 페니키아인들의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불레셋, 사마리아 등과 함께 모든 페니키아/가나안 및 아람인 국가들을 포함한 전 지역이 기원전 10세기와 9세기 기간 신아시리아 제국에 정복되어, 기원전 7세기 말까지 300여년간 지배하에 놓였다. 아슈르나시르팔, 아다드-니라리 2세, 사르곤 2세,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에사르하돈, 센나케립 아슈르바니팔 같은 아시리아의 통치자들이 가나안 국가들을 정복하였다. 누비아 왕조 시기 이집트가 가나안 지역에 교두보를 다시 확보하려다 실패하였고, 아시리아에 완패하며, 아시리아의 이집트 침입 및 정복과 쿠시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기원전 616 - 605년 사이에 아시리아 제국은 지속적인 격렬한 내전과 그 이후에 이어진 바빌로니아인, 메디아인, 페르시아인, 스키타이인 연합군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바빌로니아인들은 가나안, 시리아, 이스라엘, 유다 왕국을 포함한 아시리아 제국의 서쪽 영토를 물려받았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뒤늦게 자신들의 옛 주인들인 아시리아를 도우러 온 이집트 세력을 성공적으로 제압하였으며, 근동 지역에 발판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가나안 지역을 유지하였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기원전 539년에 무너졌고, 가나안 지역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넘어가 아케메네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그리스인]들에게 정복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2세기 후기에 로마에 넘어갔으며, 서기 7세기 아랍인들의 침입과 정복 때까지 비잔티움에 속했다.[37]
문화[편집]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B%82%98%EC%95%88
가나안족속
https://m.cafe.daum.net/Fullgospelgk/EMwg/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