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공원(http://cafe.daum.net/khmkwangju/ )
게 시 판 : 수필 산책
번 호 : 34
제 목 : <b><font color="#5000AF"><font size="2">두드러기 - 최민자</b></font></font>
글 쓴 이 : 기호민
조 회 수 : 1
날 짜 : 2003/03/17 17:20:44
내 용 :
수상한 손님이 찾아왔다. 생면부지의 불청객, 두드러기다. 더러 소문
은 듣기야 했지만 아무래도, 이 작자는 엉큼한 데가 있는 것 같다. 밖에
서 일을 보는 낮 동안에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다가. 혼자 있거나 한가하
다 싶을 때, 하루 일을 마치고 자리에 들려 할 때, 슬그머니 정체를 드
러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스멀스멀 옷 속으로 기어들어와
이제무터는 저하고만 놀아 달라 한다. 반갑지 않은 유혹, 적과의 동침이
다. 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 분명히 알고 오는 과객의 거취는 얼마나 음
흉하고 용의주도한가.
그는 처음, 시계나 고무줄 자국 같은 압박 부위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으면 어렵잖게 토벌할 수도 있었으련만 무관심과
무저항으로 맞서려 했던 것이 사기만 높여 준 꼴이 되었다. 밖에 나갔
다 들어설 때 잠깐씩만 기척을 보이던 놈이 요즘엔 게릴라처럼 무시로
출몰한다. 술 취한 듯 불쾌한 얼굴로 신출귀몰 쏘다니는데, 일단 불이
붙었다 하면 그 또한 못말리는 다혈질이다. 내 등판을 캔버스 삼아 군데
군데 지도를 그리고, 제가 무슨 광개토왕이라고 영토 확장에 기염을 토
한다. 멀쩡한 팔뚝 위에 구릉이 솟고 종아히를 따라 백두대간이 형성된
다. 중부 전선 비무장 지대 안에 느닷없이 댜도해가 떠도를 때도 있다.
참다 못한 내가 반격을 시도한다. 열에 들뜬 대지는 지각 변동을 일으키
고, 해저가 융기되고 화산이 폭발한다. 섬과 섬은 부 풀어 신대륙이 태
어나고 손톱자국을 따라 물 이랑이 굽이친다.
이 좋은 봄날, 나는 왜 이렇듯 맹알한 불한당과 신경전을 해야 한단 말
인가. 잠잠하다 싶다가도 불쑥불쑥 공략해 오는 변덕스런 화상을 살살
달래다 탁탁 쳐보다 피가 나도록 빡빡 긁는다. 잠깐의 쾌감, 다시 번
지는 가려움, 악순환이다. 아무 곳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예기치 않은
춘투(春鬪)에 몸도 마음도 지쳐 버렸다. 알레르기 체질이 아니고 무얼
잘못 먹은 기억도 없는데 멀쩡하던 몸이 왜 반란을 일그키는가.
경험자는 말한다. 상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일단 점찍은 대상
은 괴롭힐 만큼 괴롭히고 나서야 못 이기는 척 퇴각을 할 거라고. 녀석
은 혹시 환절기마다 저항력이 떨어지는 내 약점을 꿰뚫고 있는지 모른
다. 꽃가루나 식품 첨가물, 집먼지 합성물 같은 알 수 없는 신무기로
내 육신을 장악하고 영혼까지 철저하게 교란시킬 음모를 하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왜, 왜 나란 말인가.
"두드러기가 왜 생긴 걸까요?"
아무래도 억울한 생각이 들어 처방전을 쓰고 있는 의사에게 물었
다.
"모릅니다."
대답이 짧다. 우문현답인가.
"원인이 확실치 않아요 ."
"원인을 모르고도 치료는 가능합니까?"
의사가 픽 웃는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 모든 병이 다 명쾌한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닙니
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하나의 증상으로 발현되는 거
죠. 그것보다는 적이 쳐들어오면 무찌르고, 피가 나면 지혈을 해야지,
왜 피가 나는지, 왜 전쟁을 해야하는지 따져 알아서 뭐 할 겁니까."
의사가 잠자코 처방전을 건넨다.약은 약사가 진료는 의사가 하니환자
는 돈만 내면 된다는 것인가. 주사실을 나오며 나는 얼덩이 주사보다
더 따끔한, 의사의 일침(一針)을 생각한다. 해결책도 없이 머리만 복잡
한 여자에게 의사는 덤으로 단순하게 사는 법을 주입(注入)해 주고 싶었
는지 모른다. 왜 사는가. 왜 쓰는가. 왜 사람은 늙고 죽는가. 왜 우리
는 그림자 없는 허무와 화해하지 못하고 사는가... . 세상을 바꾸는
건 '왜'가 아니고'어떻게'일 터이지만 나는 언제나 '왜'에 갇혀 제자리
걸음을 걸으며 산다. 명약 비방 없는 고질병이다. 그래도 그것이 살아
있음의 표시라고 가끔은 스스로 두둔하기도 한다. 어디 나뿐이런가. 그
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
이 나는 걸까.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 부
르면 대답하고 한숨이 나오면 내쉬면 될 것을. 모범 답안 없는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끝도 없이 왜, 왜를 외치며 산다. 두드러기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약이 잘 듣는 것 같다는 내 말에 의사가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왜 생겨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스러진다는
것, 그것 만이 분명한 위안이라고. 그는 어쩌면 인생에 대해서도 비슷
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가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명백한 진실이라고 의사는 오늘
도 묻지마 그룹의 총수 같은 얼굴로 묵묵히 처방전을 쓸 것이다. 매미
는 가을을 알지 못하고, 하루살이는 초하루와 그믐을 모르는데 사람이라
고 어찌 다 알려 하는가고, 행간에 가만히 적어 놓을 것도 같다.
약이 거지반 떨어져 가는 이즈음, 나는 두드러기가 왜 생기는 걸까요
묻던, 내 질문의 답을 짐작한다. 발진처럼 돋아났다 가뭇없이 사라지는
삶이란 한갓 두드러기 같은 것. 복잡할 것도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부
딪치며 살면 되는 것. 그 평범한 해법을 생각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
의 가벼움 앞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생각한다.
카페 게시글
시+수필
두드러기 - 최민자 (2003년 에세이 문학 수필 문학상 수상작, 재치 유머, 메타퍼)
기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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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7
03.03.17 17:24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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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처럼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글입니다. 정말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까지 하는 가벼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두드러기' 투성이에서 살고 있잖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이란는 이름의 두드러기도 선별해야하지 않을까?...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