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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피조물이기에 참 연약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윤기 없는 질그릇 던져보세요 그냥 깨집니다. 그릇 같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알렉산더대왕이 있는데 이 사람을 그냥 왕이라고 하지 않고 대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시대적 영웅이었습니다. 그가 이러 말을 남겼습니다. 온 세계를 정복하고 하는 말이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는다.” 이런 권세 있는 왕이 모기에 물려 죽었습니다.
인간은 육신만 약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 독불 장군 같은 말을 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고독감과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음에 우울함 하나를 다스리지 못하고 자살하는 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영적으로도 약한 존재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엘리야를 아십니까? 갈멜산에서 바알 신을 섬기는 거짓선지자들과 싸워 450명을 기손 시냇가에 죽인 위대한 영적지도자였지만 무엇을 두려울까요? 한 여인 이세벨에게 죽을까봐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 저를 죽어 주시십시오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애원 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와 싸웠던 영적인 능력은 다 어디가고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군사를 이끌고 오는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죽여 달라니요 이렇게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연약하기만 합니다.
문제는 언약한 인간임을 우리가 인정하고 있느냐입니다. 제 허물입니다.
2년 전부터 교회 텃밭 은행나무가 전선줄에 겹쳐 사고 날 수 있어 베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2년 동안 나무만 훌쩍 커버렸습니다. 베어내려면 사다리차를 부르자니 돈이 들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자니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만 생겼습니다. 미리 겁만 잔뜩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는 시간이 2년이나 지난 주간 은행나무를 벤 적이 있습니다.....자르고 나서 느낀 것은 김승권 환경앞에 연약했구나 속으로 내 자신을 자책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자신은 ‘우리의 연약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 자신도 연약한 자들 가운데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인물입니다. 이방인의 전도자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데 한 획을 긋는 영적지도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전도자이지만 로마교회에 편지하기를 자신을 하나님앞에서 연약한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도 연약했기에 자신의 육체적 결함을 가시로 여겼습니다. 그만큼 몸 또한 약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고전2:3....내가 너희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여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했습니다.
고후 12: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런 진솔한 바울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주님 앞에 이런 진솔한 고백이 축복의 통로로 열려지게 됨을 믿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 26절 시작을 보십시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여기에 사용되는 단어 ‘도와주신다’는 말이 참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당시 로마서가 쓰여진때 도와 주신다 적당한 단어가 없어서 이 단어를 헬라어 세 단어를 한 단어로 묶어서 ‘도와주신다’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쑨 안티 람바노’라는 말입니다. ‘쑨’이라는 말은 ‘함께’....... ‘안티’라는 말은 ‘반대편에’......... ‘람바노’라는 말은 ‘번쩍 들어 옮겨준다’는 말입니다. 반대편에서 번쩍들어 나의 연약함을 성령님이 옮겨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날, 우리의 인생길에 우리를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가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치우지 않고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바위를 치울 수가 없습니다. 문제 앞에서 절망의 심정으로 있을 때 어떤 분이 우리의 맞은 편에서 그 바위를 번쩍 들어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문제는 해결되고, 가야할 길이 보였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쑨..안티...람바노’라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인생이 된다는 것 그런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친구목사가 10일 동안 이디오피아 선교여행을 떠나 지난 금요일 돌아왔습니다. 선교지를 탐방하면서 산상예배 드리는 장면 그들이 사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내왔는데 하는 말이 우리나라처럼 주변 마을마다 십자가가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그래 제가 문자로 그랬습니다. 행8장에 나온 복음의 원조 내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000년전 이디오피아 재무담당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까지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드리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업무를 마치고 자기나라 이디오피아로 수례를 타고 가는데 그냥 주변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기에 수레안에서 성경에 몰입한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말씀을 읽어도 통 할 수가 없어요!! 누가 도와주셨으면 좋겠는데 이 사실을 누가 먼저 알았습니까? 주님이 보시고 아셨습니다. 그리고 누가에게 성령님이 임하였습니까?
당시 빌립집사에게 성령님 강하게 임하여 네시가 말씀알기를 원하니 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서 빌립집사는 성령님 도우심으로 내시가 타고 있는 수레에 올라 이사야말씀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행8:29....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2000년전 내시의 영향이 오늘의 이디오피아가 복음이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뿐만 아니라 우겨쌈을 당하는 어떤 일이라도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성도여러분,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말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데,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앞에 막다른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가 주님을 믿기에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 주님!! 지금 당장이라도 모세가 지팡이들어 홍해를 마른땅처럼 가른 것처럼 우리에게도 보여 주십시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그냥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겨싸는 일이 있을 때 우리 언약함을 도우실 때 성령님 우리 중심 가운데 오셔서 먼저 기도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기적의 영이기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영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님께서는 기도를 아주 귀하게 여기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기도하기를 좋아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아주 흐뭇해하십니다..우리가 기도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위해 기꺼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기도가 정말 중요합니다........ 성도의 성공과 실패가 기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아주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그런데 우리가 기도응답의 약속을 믿지만 정작으로 기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기도해야 하는데도 기도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왜 기도가 안 될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 우리의 육체가 피곤하면 기도가 안 됩니다. 깨어 기도해야 하는데 자꾸 눈이 감깁니다.
* 육체에 병이 들면 더욱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가 안 됩니다. 몸에 열이 조금만 나도 기도를 못하고 누워버립니다.
* 기분이 상하면 기도할 마음이 안 생깁니다.
*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실망했을 때도 기도가 안 됩니다.
*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기도 또한 막힙니다.
* 일이 계획대로 잘 안될 때 낙심하여 기도가 안 됩니다.
* 창피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민망하여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 하나님의 존재나 능력을 의심할 때 기도할 수 없습니다.
* 게을러서 기도하지 못합니다.
* 일이 너무 바쁠 때도 기도하지 못합니다.
* 너무 세상살이가 재미있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 자신만만해서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없을 때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위기의 때라는 것입니다. 장기간 기도하기를 쉴 때, 혹은 기도하는 힘까지 상실할 때 찾아오는 것이 영적 침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적 침체에 빠져 기도하지 않고 있을 때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할렐루야!!
26절 중반절 보십시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즉 우리가 기도는 하기는 하는데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를 말합니다.
이렇 때도 누가 도와주시는 겁니까?........ 오직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조금 전 나열해드렸던 기도하지 못하도록 환경이 만들어질 때 누가 제일 걱정하고 탄식하실까요?
내 옆에 있는 아내가 아닙니다...... 남편도 아닙니다,.....친한 믿음의 동역자도 아닙니다........ 자녀들도 아닙니다.
바로 성령님이 먼저 탄식하십니다........... 그것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탄식’이란 해산의 고통을 뜻합니다.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자녀을 낳아본 우리어머님 들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산모가 해산의 고통을 감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통을 이겨내야 생명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자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감내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탄식은 불평이나 푸념이나 하소연이 아닙니다........ 사랑을 가지고 간절하게 기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만면에 미소를 띠고 웃으면서 기도할 때가 많지 못합니다. 행복한 얼굴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요. 주님 찬양해요. 주님 사랑해요." 기뻐 뛰며 기도할 때가 있긴 합니다만 그런 기도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게는 탄식하는 기도입니다.
탄식하는 기도는 눈물이 쏟아집니다........ 마음을 쥐어 뜯습니다.......... 옷을 쥐어뜯습니다.......얼굴을 찡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괴로워합니다......... 주님 날 좀 도와 주십시오........ 마치 야곱의 씨름 현장을 연상케 하는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그 순간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여러분을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얼굴이 웃을 때에는 근육 17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웃을 때는 얼굴변화가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괴로워하고 찡그리기 시작하면 43개의 근육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굴이 많이 찡그려 지는 거예요.
3년전 가까운 몇몇 목사님들과 서울 전도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소중한 세미나를 진행하는데 말씀을 듣고 합심하여 목사님들이 두 손 들고 기도하는데 하필이면 제 모습이 클로즈업 되어 기독공보 신문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제 모습을 보니까 얼굴을 찡그리며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도 보니까 거의 얼굴을 찡그리고 기도하는 겁니다.
성도여러분!! 저 사람 왜 그렇게 찡그리나, 무슨 걱정이 많은가, 왜 저리도 근심거리가 많지 그러지 마십시오. 기도할 때 성령님이 지금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는데 기도하는 그순간 우리의 영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 성령님과 함께 탄식하고 나면 여러분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문제가 해결 될 것입니다........ 눈물이 변하여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실패가 변하여 승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멸망의 자리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이 탄식하게 할 때는 탄식하는 것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탄식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괴로울 때 나보다 더 괴로워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바울이 연약함을 인정하였듯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연약함을 인정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오셔서 도와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쑨 안티 람바노(마이), 이 시간 번쩍 들어서 옮겨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그분 앞에 나아 오십시요. 그분께 당신의 인생을 맡기세요. ..........인생길 지치고 힘들 때 당신의 등 뒤에서 당신을 도우시는 손길을 느껴 보십시요.......... 당신의 한계를 느낄 때 힘있는 그 손길을 느껴보십시요......... 쓰러져 일어날 수 없을 때 당신에게 힘을 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요.
영으로 찬미 29번을 다함께 부르시고 탄식하는 심정으로 기도합시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때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 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주여! 주여! 합심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