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대 극락 간 사람들
1. 2003년, 『정토삼부경』으로 현대 정토법문을 여신 청화 스님
대주(旲宙), 「청화대종사 행장 · 연보」
(청화사상연구회 2009년 학술발표회)
『청화대종사 행장 · 연보』에서 간추린 행장
1) 탄생 및 유년 시절
1923년(불기 2467년) 계해 음 11월 6일 전라남도 무안군 운남면 연리 697번지에서 탄생하셨다. 본향은 진주이며, 부친 강대봉씨姜大奉氏와 모친 밀양박씨 박양녀朴良女의 차남으로 속명은 호성虎成이다. 일제 강점기에 고향에서 망운望雲 소학교를 마치셨다.
1937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지인의 권유로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에 유학하여 신문팔이, 분뇨 수거 등 피나는 고학으로 동경 대성 중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무안 일로 농업실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 뒤 무안 망운 소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42년, 부모님의 뜻에 따라 성삼녀成三女 청신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대동아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징병 되어 일본군 해군훈련소가 있던 진해에서 4~5개월의 가혹한 훈련 도중 8.15해방을 맞아 징병에서 벗어났다. 대종사께서는 해방 후 교육활동에 관심을 두어 광주사범학교光州師範學校에 편입하시고 졸업과 동시에 준비된 교육자의 자리에서 활발한 교사 생활을 시작하셨다.
2) 출가(出家)
대종사의 출가 인연은 친형이신 범룡凡龍(~1943)께서 당시 2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생무상을 절감하게 되었고, 해방 후 좌우익의 이념 대립으로 인한 인간적 고뇌를 느끼시던 차에 육촌 동생의 소래고 백양사 운문암에 머물게 된 것이 계기가 되셨다.
운문암에서 순치順治 황제의 출가 시詩, 부설 거사浮雪居士의 사부시四浮詩와 금타 존사金陀尊師의 수능엄삼매도首楞嚴三昧圖를 열람하시고서 속세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오직 진리 탐구를 위한 발보리심(發菩提心)을 하게 되었다.
1947년(불기 2491) 정해 음력 1월 16일(25세)에 ‘사상의 거처’를 찾아 출가하신 후에 깨닫겠다는 마음을 내고(發菩提心) 송 만암宋曼庵 대종사의 상좌인 금타존사를 은법사恩法師로, 법련당 정수定修 선사를 계사戒師로 수계 득도하시니, 법호는 무주無住요, 법명은 청화淸華이다. 운문암 생활은 순수하게 참선을 위주로 하여 불공도 사절하고 식생활은 아침 죽 공양, 점심때 공양하고는 철저한 오후 불식이었고, 일체 경비는 대중 전원이 탁발로 충당하였으며, 장좌불와를 원칙으로 하였다.
3) 선사상(禪思想)
석가모니불로부터 전해 내려온 불조의 혜맥慧脈은 인도에서 전전展轉 상속하여 보리달마에 이르렀다. 금타존사께서 선종의 초조 보리달마에서 육조 혜능에 이르는 순선시대純善時代 선법禪法인 반야바라밀에 입각한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인 염불선으로 중흥하셨고 대종사께서 이를 계승하셨다.
출가 당시 화두선 일색인 한국 선禪 풍토 시절에 금타 존사께서 전수하신 견성성불의 첩경법문인 보리방편문과 수증론修證論인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와 일진법계의一眞法界의 성상性相을 관조한 수능엄삼매도결首楞嚴三昧圖訣을 수행의 요체로 삼아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수행법인 염불선을 선택하셨다. 또한 여러 종교 교리와 동서의 여러 철학사상뿐만 아니라 현대물리학 이론까지도 우주법계의 일원상인 불성으로 조명하여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실상으로 설파하셨다. 특히 금타존사께서 지으신 보리방편문은 순선시대純善時代의 선법을 계승한 것으로, 육조단경의 귀의자성 삼신일불에 입각한 심즉시불心卽是佛의 자성을 참구하는 자성선自性禪이자 제법실상을 여실히 밝힌 염불선의 행법임을 교시하셨다.
세계평화와 유심정토 건설을 위해서는 아집과 법집을 떠나 무아 · 무소유 정신으로 분파적 여러 사상과 이념을 원융회통圓融會通하여 종파와 교파를 초월하여야 가능하다고 역설하셨다.
4) 만행(萬行)
1953년, 무안군 대박산에 혜운사慧雲師를 창건하셨다. 1963년, 추강秋江 조응현 거사가 별장을 보시하여 추강사秋江師라 이름하여 주석하셨다. 1966년,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 태안사 주지를 맡으셨다. 1968년 새로운 수행처를 찾아 경남 남해에 있는 호구산 용문사 염불선원 · 백련암 · 부소대扶蘇台로 향하셨다. 1969년, 경남 진주 월아산月牙山 기슭에 위치한 두방사杜芳師 경내 뒤 정상 부근에다 토굴을 지어 겨울을 나셨다.
1970년, 전남 장흥군 부산면 심천리에 능엄사(현 金仙寺)를 창건하셨다. 1973년 4월, 서울 불광동에 있는 지인의 별장을 무주암無住庵이라 이름 짓고 안거하셨고, 9월에는 광명시 도덕산 성도사聖道寺에서 안거하시면서 『정토삼부경』 번역에 몰두하셨다. 1975년 6월, 구례 오산에 있는 사성암에서 정토삼부경 번역 분사를 계속하셨다. 1978년, 해남 두륜산 상원암에서 하안거 중에 『금강심론』, 『정토삼부경』 번역을 마치시고, 1979년 5월, 금타존사 불후의 유고를 정리하여 『금강심론』을 엮어 펴내셨다.
1980년 부처님 오신 날 월출산 상견성암上見性庵에서 『정토삼부경』 머리말을 쓰고 불사를 일단락 하셨다. 1981년, 백장암白丈庵 금강대에서 하안거 중에 『약사경』 번역을 마치셨다. 1986년 5월, 『금륜金輪』 창간호가 나왔다. 1989년 4월 1일 법어집 『정통선의 향훈』이 간행되었으며, 10월에는 성륜사를 창건할 터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1990년 3월 1일 강남구 도곡동에 정중선원(주지 태호 스님)을 개원하셨으며, 9월 성륜사 대웅전이 완공되어 첫 법회를 가졌고, 11월 20일에 혜운사가 중창되었다. 1992년 9월 9일에는 성륜사 대웅전 · 지장전 · 선원 · 요사채 · 정운당 · 일주문을 갖춘 대한불교조계종 설령산 성륜사가 위용을 드러내게 되었다. 10월 25일 뉴욕 미주현대불교 창간 기념 법회에 참석하시고 뉴욕 원각사에서 국제보살 수계법회를 봉행하셨고, 11월 8일부터 하이랜드 스프링 금강선원에서 동안거 결제를 하셨다.
1993년 2월 5일 미주 하이랜드 스프링 금강선원 동안거 해제를 하셨고, 20일에는 샌프란시스코 보림사에서 보살계 수계대법회를 개최하셨다. 11월 6일 법어집 『원통불법의 요체』가 출판되었다. 1994년 4월, IBS대학에서 법문을 하셨다. 1995년 1월, 미국 삼보사에서 동안거 결제 중 사부대중을 위해 3일간 ‘순선안심탁마법회純善安心琢磨法會’를 가졌다. 6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 ‘팜스프링 금강선원’에서 3년 결사를 들어가서 1998년 4월 5일, 3년 결사 회향식을 가지시고 4월 9일 귀국하셨다.
2000년, 남원 실상사에서 대종사를 조실로 추대하였고, 10월 15일에 성륜사에서 벽산당 금타 대화상 탑비 제막식을 봉행하셨다. 11월에 제주 표선 토굴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 번역을 시작하셨다. 2001년 5월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 자성원自性苑을 개원하셨으며, 10월에 성륜사 사천왕 조성 회향점안법회를 가졌다.
5) 임종(臨終)
2002년 3월, 대종사 어록집인 『진리의 길』이 간행되었고, 5월 서울 도봉산 광륜사 光輪寺를 개원하였다. 11월 강원도 횡성 진여원眞如苑에서 『육조단경』 번역을 계속하셨다. 12월 9일(음력 11월 6일) 몇몇 제자에게 친히 사세게辭世偈를 적어 주셨다.
辭世偈 임종에 즈음하여 적은 게송
此世他世間 이 세상과 저 세상에
去來不相關 오고 감은 상관치 않으나
蒙恩大千界 은혜 입음은 대천세계만큼 큰데
報恩恨細澗 은혜 갚음은 작은 시내 같기에 한이 되네
2003년 1월. 대종사께서 『육조단경 역주』를 마무리하시고 6월에 간행되었다. 6월 15일 서울 도봉산 광륜사의 보살계 수계식에 참석하시어 ‘마지막 법문’을 하셨다. 9월 27일~28일에 ‘정통불법의 재천명’이라는 주제로 학술 세미나가 있었다. 11월 12일(음력 10월 9일) 오후 10시 30분경, 성륜사 조선당祖禪堂에서 도일(성륜사 주지) 스님을 비롯한 상좌 스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적 하시니 세수 81세요, 법랍 56세셨다.
6) 저서 및 역서
대종사께서는 금타존사의 유고遺稿를 모아 『금강심론金剛心論』으로 합편하시고, 『정통선의 향훈』과 『원통불법의 요체』 등 법어집을 저술하셨다. 또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약사경藥師經』, 『육조단경六祖壇經』 등을 역주하셨다.
7) 청하 스님의 정토 어록
(1) 『금강심론』, 2장 「보디 방편문」, 1절 아미타불, 58~59쪽. (보정 옮김)
마음은 텅 빈 공중과 같은 것이니, 구름 한 점 그림자 한쪽 없는 크넓고 가없는 허공 같은 마음 세계를 관觀하면서 맑고 깨끗한 법신法身을 인달(認達?)하여 비로자나불을 염念하고, 이 허공 같은 마음 세계에 해와 달을 뛰어넘은 금빛 광명을 두른 때 묻지 않은 맑은 물이 가득한 바다 같은 자성의 바다를 관觀 하면서 너그러운 보신報身 인달하여 노사나불을 염念하고,
안으로 생각을 내고 여의는 무색계 중생, 밖으로 해 · 달 · 별, 산 · 강 · 땅 같은 온갖 유정有情 중생, 사람 · 짐승 같은 영혼을 가지고 꿈틀대고 움직이는(蠢動含靈) 유정 중생 같은 모든 중생을 자성은 바람이 없고 금빛 파도는 절로 일어나는 바닷속 거품이라고 관觀 하면서 천 백억 화신化身 인달하여 사까무니불(釋迦牟尼佛)을 염念하고, 다시 그지없고 가없는 푸른 하늘 같은 마음 세계와 맑고 가득 찬 자성의 바다와 거품 같은 중생을 공空 · 성性 · 상相이 하나인 일합상一合相이라고 통으로 관하면서(通觀) 세 붇다(三佛)가 하나의 불(一佛) 인달하여 아(화신)미(보신)타(법신)불을 늘 염念하고, 안팎 생멸상生滅相인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덧없는 여러 행行을 마음 따라 모든 경계가 변한다(心隨萬境轉)는 것을 인달하여 아미따불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사유하고 관찰할지니라.
(2) 청화선사 법어집 『원통불법의 요체』 (성륜각, 1993)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아阿 자는 화신을 의미하고, 미彌 자는 보신을 의미하고, 타 陀 자는 법신을 의미하니, 아미타불 곧 참나(眞我)를 생각하고, 마음으로나 밖으로 보이는 모든 현상이나 생하고 멸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의 덧없는 모든 행위를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라, 이것도 대승 경전에서 자주 나옵니다. … 마음이 만 가지 경계에 전변하는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생각하고 관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73쪽)
본사 아미타불이라, 모두를 포괄적으로 법法 · 보報 · 화化 · 삼신三身을 말할 때는 아미타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사 아미타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235쪽)
(3) 『정토삼부경』 (광륜출판사, 2007) 머리말 (1980년 씀)
불교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는 부처님의 거룩한 서원 부사의한 공덕으로 장엄된 이상향, 곧 극락세계 너무도 생생하고 인상적으로 밝히신 경전은 「정토삼부경」인데, 이는 「무량수경」 · 「관무량수경」 · 「아미타경」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극락세계란 욕계 · 색계 · 무색계 등 중생이 생사윤회 하는 삼계의 차원을 넘어선 영원히 안락한 복지로서, 시간 · 공간과 인과율을 초월한 경계이며, 우리 중생이 필경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허명무실한 방편가설이 아니라 엄연한 영생불멸의 실존이며, 우리들의 올바른 수행으로 업장이 소멸할 때, 우리 스스로 보고 느끼고 누리는 상주불변한 법락의 경계입니다.
정녕, 우리 중생은 본래의 자성이 아미타불이요, 우리가 본래 살고 있는 고향은 극락세계인데, 짓궂은 번뇌 업장에 가리어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지없이 생사고해에 방황하다가 다행히 부처님의 교법을 만나서, 비로소 참다운 자아와 진정한 고향인 극락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은 다만 극락세계의 교주이실 뿐 아니라. 법신 · 보신 · 화신의 삼신을 겸전한 삼세 일체불三世一切佛의 본체로서, 그 영원한 생명과 자비를 위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이요, 무한한 지혜 · 공덕을 위주로 할 때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며, 대자대비를 위주할 경우에는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래서 여러 경전에는 수없이 많은 부처님의 이름이 나오나, 필경 아미타불인 동일한 부처님의 화도化導의 인연에 따른 공덕의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유연 불자들과 더불어 다시금 극락왕생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1980년 4월 8일 월출산 상견성대에서
비구 청화 합장
卍 보정의 꼬리말
청화의 정토관은 금타의 영향이 크다. 아미타불이 단순한 극락세계의 교주가 아니라 법신 · 보신 · 화신 같은 3가지 붇다 몸을 아우르는 삼세 일체불의 본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일반적인 보신불의 극락이라는 개념보다 훨씬 큰 극락이다. 그러나 청화 스님은 어떤 극락이든 극락은 분명 실존하고, 모든 중생이 극락 가는 것을 목표로 하길 권하면서 자신도 마지막에 함께 극락왕생을 다짐한다. 아랫글은 엮은이가 정토를 공부하기 시작했던 초기에 쓴 메모다. 아직 공부를 제대로 하기 전 글이라 어설프지만, 이것이 보통 사람 생각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대로 실어 본다.
▣ 청화, 56년간의 증거, 그대 고향에 이르렀는가? - 2008년 「보정의 메모장」에서
2008년이 저물어 가는 11월 후반, 어느 해인가 부처님 오신 날 특집으로 방영된 청화 스님 이야기를 보았다. 참 세상은 좋아졌다. 스님이 번역한 경전으로만 대했던 청화 스님을 이렇게 만나 볼 수 있으니 말이다. 1시간을 보면서 참으로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신 스님이라는 것을 절절히 느끼면서, 아울러 무언지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다가온다.
우선 그 제목, ‘그대는 고향에 이르렀는가?’ 이렇게 시작되는데, 1시간 스님의 온 생애를 다 보고 나서 ‘청화는 어디로 갔을까! 도착한 곳 알 수 없다’라고 끝난다. 결국 청화가 간 곳을 모르고, “그가 걸어간 길만이 화두처럼 남았다”라며 아주 그럴싸하게 멋진 마무리를 한다. 그런데 이 프로를 보는 동안 나는 단박에 청화가 간 곳을 알 수 있었다. 스님의 마지막을 지켜본 상좌 스님이 이렇게 회고한다.
‘스님은 자기가 가실 때를 정확히 알았다.’
‘스님은 옷을 갈아입고 평소 수행하시던 것처럼 앉으셨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전형적인 극락왕생의 예이다.
그렇다, 청화 스님은 마음의 고향인 안양安養으로 가신 것이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무생법인을 얻어 대각을 이룰 극락으로 가신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가신 곳을 모르고 아직도 청하만 찾는다.
청화는 분명히 불교의 핵심을 내놓았다. 바로 염불선이었다. 아무리 염불선의 중요함을 역설해도 난행문難行門에서 허덕이는 도반들을 보시고 생의 마지막 작업으로 『육조단경』을 번역하셨다. 육조단경은 바로 조계종이 부처님 경전보다 더 신봉하는 경이다. “육조단경에는 화두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한국불교 교단에 내린 마지막 사자후였다. 그런데, 모두 청화가 던진 핵심을 모르고 묻는다. “청화가 도착한 곳이 알 수 없다. 청화는 고향에 이르렀는가?” 그러나 그 대답은 청화 스님이 번역한 『정토삼부경』 한 번만 읽으면 단박에 안다. 마음 편안히 옷 벗고 안양으로 가셨다. 일생을 준비한 아미따불의 극락세계에 이르렀다.
우리가 청화 스님을 가리는 길은 모두 청화 스님의 극락왕생을 즐겁게 축복하고, 우리도 그 길을 가기 위해 열심히 염불선을 행하면 된다. 그런데 이 프로를 보니, 후학들 참, 말 안 듣는다.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스님 육신 가지고 소란 많이 피우는구나. 극락 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모두가 엄숙하다 못해 비창한 모습을 하고 땅을 치는 곡소리가 다비장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그 많은 인터뷰, 스님의 인품, 고행, 만행, 이런 것만 잔뜩 늘어놓고 ‘극락 가신 스님 부럽다’ ‘나도 열심히 해서 스님 따라 극락가겠다’ (적어도 이 프로에는) 이런 후학이 단 한 사람도 없고 “그가 걸어간 길만이 화두처럼 남았다‘ 결국 이런 판에 밝힌 ’화두’라는 말로 마무리 짓는구나.
참, 못 알아듣고
참, 말 안 듣는 중생들이여!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즉득왕생안락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