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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영조 원릉
영조(英祖, 1694~1776)는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으로. 탕평정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였고 여러 차례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린 왕으로 유명하다.
영조는 숙종의 2남으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지고,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숙종의 서장자(庶長子)로 태어나 1699년(숙종 25년) 연잉군(延礽君)에 책봉되었다.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임금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당시 무수리는 궁중 하인 중에서도 그 직급이 가장 낮아서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형이었던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으며 자랐고 왕이 된 후에도 서출(庶出) 왕으로서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영조 33년에 첫 왕비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승하로 1759년에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를 계비로 맞았다.
숙종을 이어 즉위한 이복형인 경종이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자 노론파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등이 영조를 왕으로 추진하였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붕당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1727년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하고(→정미환국), 이후 양파를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탕평책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당쟁의 격화를 막았다.
영조(英祖)는 탕평책의 한 방법으로 “쌍거호대”를 실시했다. 즉, 주요 자리마다 노론과 소론의 인물을 같이 등용하여 서로를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정권을 독점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1772년에는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끼리는 결혼을 금지시켰다. 또 사형을 시킬 때는 반드시 3심을 거쳐 시행하도록 하는 삼복제도를 다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사대부 집안에서 임의로 형벌을 내리는 것을 금지시켰다.
영조가 임금이 된후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를 당파에 휘말려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인 일이다. 후궁(後宮)인 정빈 이씨(靖嬪 李氏)소생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자 후궁(後宮)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 소생인 장헌세자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0세에 혜경궁 홍씨와 결혼하였다. 어려서는 학문을 열심히 하여 신하들들로부터아 주 총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세자 시절에는 소론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0세 때는 경종 때 발생한 신임옥사(辛壬獄事) 사건을 노론들이 잘못 처결하였다고 비판하여 일찍부터 노론의 미움을 받아 정치적인 적(敵)이되어 일찍 죽은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 배후에는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가 있었다.
영조(英祖)는 뒤늦게 잘못을 뉘우치고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가슴깊이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라 불렀다.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보고, 듣기 위해 재위 25년째 이 후 50여 회나 궁성을 나와 거리 행차를 하였으며, 1773년에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에 신문고를 달게 하였다.
탕평론은 요 ·순 임금의 경지를 이상(理想)으로 하여 군주 스스로 자기를 수양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노력을 최대로 하였다. 영조는 학식 있는 신하들과 강론하는 경연(經筵)을 재위 52년간 무려 3,458회를 열었다. 연평균 66회에 달하는 이 횟수는 조선일대에 최다 기록이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특히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 1758년에 성균관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대학》에 〈어제서(御製序)〉를 붙였다.
영조는 스스로 검약 ·절제의 생활로 일관하는 한편, 재위 중에 여러 차례 금주령과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리고 임금의 수라상도 반찬을 간소하게 하였다.
영조의 삼대 치적으로는 탕평 ·균역 외에 준천(濬川), 즉 청계천(淸溪川)을 준설한 것이 꼽힌다.
영조(英祖) 가족 관계 부왕(父王)-숙종 선왕(先王)-경종 (이복형) 어머니-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 무수리 출신 원비(元妃)-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년 – 1757년) 계비(繼妃)-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 – 1805년), 김한구의 딸 후궁(後宮)-정빈 이씨(靖嬪 李氏) 왕자(王子)-진종(眞宗, 효장세자, 1719년–1728년) 옹주(翁主)-일찍 죽음 화순옹주(和順翁主) 후궁(後宮)-영빈 이씨(暎嬪 李氏) 장조(莊祖)-사도세자1735년-1762년) 세자빈(世子嬪)―혜경궁홍씨1735년-1815년) 세손(世孫)-의소세손(懿昭世孫) 정조(正祖1752년-1800년) 옹주(翁主)-화평옹주(和平翁主) 화협옹주(和協翁主) 화완옹주(和緩翁主) 후궁(後宮)-귀인 조씨 옹주(翁主)-화유옹주(和柔翁主) 후궁(後宮)-폐숙의 문씨 옹주(翁主)-화령옹주(和寧翁主) 화길옹주(和吉翁主)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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