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리기 위해 옆 사람에게 손 한 번 더 내밀기
얼마 전 한적한 길을 운전하며 가다 개와 산책하는 노년 남성을 만났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런데 점점 가까워지며 티셔츠 등에 ‘자유통일’이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자유통일? 평화통일이나 남북통일도 아니고 자유통일이라니, 갸우뚱할 때 그를 지나쳤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앞모습을 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60대 후반이라는 것과 티셔츠 가슴 왼편에 ‘광화문 온’이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순간 광화문 태극기가 떠오르고 동시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온갖 불쾌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 흐뭇하고 평화로웠던 마음이 왜 ‘자유통일’과 ‘광화문 온’이라는 여덟 글자에 정반대의 마음이 된 것일까. 돌아오는 내내 그가 특별히 이상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나는 그 글자 몇 개에 그렇게 기묘한 흥분 상태에 빠진 것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광화문이나 이태원 근처가 아니라 내 동네의 한적한 길이어서 놀라웠다 해도 티셔츠 한 장으로 사람을 달리 보다니, 괴물을 잡으려다 괴물이 된다고 어쩌면 나도 혐오라는 못된 놈에게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소름이 끼쳤다.
‘자유통일’ ‘광화문 온’ 여덟 글자에 괴물이 된 나
집에 돌아와 ‘광화문 온’을 검색하니 대국본이라는 ‘광화문 온(ON)’과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온라인 국민참여플랫폼 ‘온(ON) 국민소통’이 뜨고 ‘자유통일’을 검색하니 전광훈씨가 대표라는 자유통일당이 뜬다. ‘온 국민소통’은 문재인 정부가 인수위 시절부터 운영한 정책제안 플랫폼인 ‘광화문 1번가’의 후신이다. ‘광화문 온’과 ‘온 국민소통’, 어느 게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뜻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솔직히 ‘온 국민소통’의 존재에 대해 처음 아는 것이기도 했다. 정부의 온갖 태도를 보면 그들이 소통하고자 하는 국민이 누구인가 싶지만 그만큼 나도 정부에 무관심했다는 뜻이리라.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진보진영의 목소리는 늘 크고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제 손으로 극적으로 뽑고도 감시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았을 정도니 말해 무엇하랴. 보수정부에서는 그런데 말입니다! 하고 손을 드는 것과 동시에 언론과 사정기관이 달려들어 사상검증에 신상 털기, 그도 모자라 밥줄 끊기를 했으므로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전해지기도 전에 재갈이 물리고 포박당해야 했다. 그러나 보수, 극우적인 목소리는 정부의 성격에 따라 굴곡이 커서 묵인과 조장이 느껴지면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라는, 피로써 얻어낸 열매를 온갖 혐오와 증오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선택적으로 휘둘러 왔고 지금 최고조에 이르렀다.
경제 양극화든 정치 양극화든 양극으로 치닫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경제 양극화는 점점 심화되고 정치적으로는 내전 상태에 가깝다. 정부는 통합은 수사로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드러내놓고 국민을 갈라치기하고 양극단을 조장한다. 국익과 민족적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법치를 유린하는 정부와,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용공시하는 구시대적 행태를 지켜보는 것은 세월호 침몰을 생방송으로 지켜보던 때의 절망감 그 이상이다. 전 국민이 침몰하는 세월호에 갇히고 이태원 좁은 골목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바닷물이 오염되고 결국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에게 재앙이 될 것이 뻔한 후쿠시마 핵폐수 불법투기에 굴욕적인 협조를 다하는 정부를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내 나라의 절규하는 노동자와 어민들은 때려잡을 떼쟁이 취급하며 남의 나라 변호와 남의 나라 기업 걱정하기 바쁜 정부, 기후위기의 재앙은 현실화되어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음에도 성찰은커녕 당대에 모든 것을 끝장낼 것처럼 구는 정치인들에게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을 맡겨야 하는 신세가 가련하다. 금도를 넘어 침몰하는 대한민국, 기후위기로 침몰하는 지구를 생중계로 지켜보는 이 모든 것이 마치 ‘젠가 게임’을 보는 듯 아슬아슬하다.
12일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성당에서 열린 12차 친일매국 검찰독재 윤석열 퇴진 주권회복을 위한 월요 시국기도회'에서 신도와 시민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2023.6.12. 에큐메니안 임석규 객원기자
침몰하는 나라·지구 구하기 위한 100℃의 마음
<산호초를 따라서>(CHASING CORAL, 2017, 제프 올롭스키)라는 다큐멘터리는 바다가 병들면 지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를 알리기 위해 몇 달간 산호초 백화현상을 기록한 작품이다. 화석연료가 뿜어내는 이산화탄소로 대기층에 갇힌 열의 대부분이 바다로 흡수되기에 바다는 수온이 상승하고 해양생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의 서식지를 만들 줄 아는 산호는 열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외선 차단제를 만들어 아름다운 형광산호로 변하지만 이는 생장이 멈춰 죽음에 가까운 상태라고 한다. 다큐는 상황이 개선되지 않아 한두 달 만에 죽어가는 호주의 그레이트베리어리프의 끔찍한 학살현장을 고발한다. 시커멓게 죽은 조류만 나풀거리는 산호초 주변에 더 이상 물고기는 보이지 않고 골격만 남은 산호초 무덤은 마치 폭탄이 투하된 전쟁터나 원폭으로 폐허가 된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다큐는 절망에 그치지 않고 죽어가는 산호초 무덤 위 선상 레스토랑에서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말한다. 죽어가는 산호초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다이버와 과학자, 포토그래퍼들이다. 이들은 수중캠페인을 만들고 편견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바다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주어 지구를 좋아하게 만들며 가상 잠수영상을 통해 바닷속에 대한 관심을 높여간다. 기후변화는 피할 수 없지만 그 속도는 늦출 수 있지 않냐며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어 경종을 울리는 종지기를 자처한다. 최고의 시민성은 세계문제를 자기 문제로 느끼는 사람이다. 이들이 있어 세상은 더디지만 조금씩 진보해 왔고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키워낸다. 여기에 핵 폐수가 흘러들면 이들의 어깨는 더 무거워지겠지만 말이다.
〈송곳〉과 〈지옥〉의 작가 최규석의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 100℃〉(2009, 창비)라는 만화가 있다. 반공소년이었던 주인공 영호는 대학에 입학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알게 되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겪으며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되는데 6월 항쟁에서 싸우다 감옥으로 끌려간다. 이길 수 있는 건지, 끝이 있긴 한 건지 끝이 없을 것 같아 두렵다고 하자 장기수 어르신은 이렇게 말한다.
“물은 100℃가 되면 끓는다네. 그래서 온도계를 넣어보면 불을 얼마나 더 때야 할지 언제쯤 끓을지 알 수가 있지.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지금 몇 도인지, 얼마나 더 불을 때야 하는지. 그래서 불을 때다가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원래 안 끓는 거야 하며 포기를 하지. 하지만 사람도 100℃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1℃ 올리기 위해 옆 사람에게 손 한 번 더 내밀기
바다가 병들면 지구가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위기감에 기록과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지구가 100℃라는 임계점을 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동시에 사람들을 행동하게 하는 100℃로, 민주주의 퇴행 앞에 스크럼을 짜는 이들도 사람의 마음을 100℃로 끌어올리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있어 지구는 간신히 99℃를 유지하고, 이들이 있어 100℃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들도 저마다 99℃를 살고 있을 거라는 믿음, 마지막 1℃를 올려 마음을 끓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우연이라는 카이로스가 될지 4년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때까지 만화가는 부조리와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내고 가수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시민들은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눈과 귀를 열어두면 된다. 어제 원주에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월요시국미사에 함께한 한 감리교 목사님은 신의 섭리보다 우연이 더 힘이 세다고 했다. 각자 자리에서 지금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다보면 언젠가 99.9℃가 되었을 때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낚아채고 그가 쥔 저울과 날카로운 칼을 거머쥘 수 있으리라.
1987년 6월 항쟁 때도 시위하는 청년들에게 소 팔아 학교 보냈더니 데모나 한다며 철없는 학생 취급하고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한 이들이 다반사였다. 식당에서 병원에서 무차별적으로 주입되는 극우 종편과 극우 포장지들은 사람들을 70년대, 80년대에 묶어두려고 안간힘을 쓰고, 촛불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광장이든 성당이든 가리지 않고 혐오를 내면화한 이들이 등장한다.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게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는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광화문에서 만난 ‘시끄럽기만 한 이들’ 무리 중 한 사람을 일상공간에서 마주쳤다고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기묘함이 혐오로 이어지지 않도록, 분노의 대상을 헷갈리지 않게 해달라고 시국미사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언제 끝날지 몰라 두렵고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지금이 99℃라 믿는다며 99℃에서 그만두면 너무 아깝지 않냐고 허허 웃던 장기수 어르신의 역사적 낙관을 기억하자고 말이다. 사람의 온도는 잴 수 없지만 지금은 99℃, 언젠가 100℃를 꿈꾸며 곁에 있는 이에게 한 번 더 손을 내밀자고, 그것이 하루하루 지지 않고 사는 방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