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쟁
goforest
그것은 울음소리였다
여린 가슴 속 종유석으로 굳어졌던 설움
부드런 활 어루만지는 순간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응어리
사대부의 갓끈에 졸려
울음 한번 크게 울지 못한 여인
목놓아 풀어헤친 슬픔
그것은 한숨소리였다
붉은 허파 슴배어든 검은 한숨
탱자나무 울타리보다 더 촘촘한
성리학의 그물 찢어버리고
하늘 향해 토해놓은 숨소리
그것은 씻김굿이었다
일곱 줄 비단 실
올올히 맺힌 여인의 못다한 사랑
오동나무 몸통 한번 흐느낄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매운 향기
결박됐던 여인의 혼 하늘로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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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여인의 삶은 고통스러웠습니다.
한국인 특유의 정서라는 '恨',
서양인들은 물론 같은 유교 영향권 아래 살고 있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조차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 '恨'의 정서는
어쩌면 한민족 가운데서도 형극의 삶을 살았던 조선 여인들의 삶에 가장 진하게 녹아있지 않나 합니다.
조선 사회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는 유학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남성 본위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은 단순한 이념이나 정치적 지향을 넘어 관혼상제같은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총체적으로 조선인의 삶을 규정하고 지배했습니다.
그 숨막히는 남성 본위 사회에서 여인들의 삶은 애닲았습니다.
평민은 말할 것도 없고 사대부 집안에서도 여성은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주체적인 인격체로 생활할 수 없다는 것이고 남자에게 의존해서 혹은 남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피동적 삶이었다는 뜻입니다.
철저한 신분질서 위에 구축된 유교는, 삼강오륜을 통해 부부유별의 수직적 위계를 공식화했고,
그 전근대적 질서는 후기로 내려갈수록 '女必從夫'라는 극단적 형태의 차별을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에 또 '三從之道'라는 가혹한 재갈을 물려, 여인은 어려서는 부모에게, 출가 해서는 남편에게,
노년에는 아들에게 생존을 위탁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이 있어도, 아무리 총명해도 여성은 대문 밖을 나서기 어려웠고,
벼슬을 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습니다.
남성의 축첩은 능력의 상징이었지만 여성은 남편의 사망 후에도 수절을 강요받았고
'烈女'라는 허울로 본능과 욕망마저 거세당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야만적인 왜구의 유린으로 스스로의 의지와 관계없이 겁탈을 당했어도
죽음으로 가문의 모욕을 씻어야 하는 허망한 존재였습니다.
율곡 선생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처럼 그저 자식을 낳아 잘 기르고 지아비를 잘 섬기는
이른바 '賢母良妻'라는 여인상,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他者로만 훌륭한 여인으로 기려지는 기막히는 세상을
살아야 했습니다.
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
靑鸞倚彩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
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조선 중기 천재 여류 시인이었던 허 난설헌의 詩입니다.
견고한 유학의 성채 안에 갇혀, 탁월한 文才 한번 제대로 꽃 피워보지 못하고
독수공방 쓸쓸한 삶을 살다 27살에 요절한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써 놓은 시입니다.
그녀는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 여인들의 상징입니다
더러 숨막히는 성리학에 도전했던 자유분방한 여인들도 있었지만 그녀들 역시
견고한 이념과 인습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비운에 사라져갔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가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던 여인들의 '한'은 단단한 응어리가 되어 작고 여린 가슴에 맺혔습니다.
조선 여인의 恨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대목 역시 사랑입니다.
혼인이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던 조선시대에 여인들은 어려서부터 아예 연애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수도승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 해도 제 힘으로 사랑을 이루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 그대 그리는 심정 간절하나 꿈에서 밖에 볼 수 없어
내가 님을 찾아 떠났을 때에 님은 나를 찾아왔네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오가는 그 길에서 우리 함께 만나기를 "
가곡 '꿈;으로도 잘 알려진 황진이의 시입니다.
개화기의 문인 김안서가 번역했고 김성태 선생이 곡을 붙였습니다.
너무 슬프고 애틋해서 아름다운 가곡입니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심정이야 조선의 여인이라고 어찌 예외일 수 있었을지요?
덕망높은 선비 서화담을 흠모했고, 위선과 권위주의로 썩어 문드러진 조선시대 양반들을
마음껏 조롱했던 황진이도 결국 철옹성같은 조선 유교사회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여, 그녀가 흠모하는 서화담과의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곳은 오직 꿈 속뿐,
제도도 관습도 이념도 세상의 눈총도 끼어들 수 없는 절대자유의 세상을 찾아
그녀가 찾아가는 곳은 꿈 속입니다.
변학도의 집요하고 난폭한 구애 속에서도 꿋꿋하게 정절을 지킨 춘향 역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사랑을 쟁취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 도령의 장원급제와 변심하지 않는 의리에 기대서야 겨우 첩의 자리를 얻는 춘향이
조선의 성공적인 러브 스토리이니 다른 여성은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사랑도, 삶도 고달팠던 조선 여인들의 '恨'이 슴배어 있는 악기가 있습니다.
아쟁! 사람 몸통 크기의 오동나무에 일곱 줄 혹은 아홉 줄로 명주 실을 매달고,
개나리 줄기로 만든 활로 연주하는 악기입니다.
서양 악기로 치면 콘트라 베이스나 첼로쯤 될 이 현악기는 대규모의 정악 연주에서도
중후한 소리로 연주의 격조를 높이지만, 역시 산조에서 유감없는 개성을 발휘합니다.
지난 주 가얏고을에서 열렸던 '시울雲' 그룹의 연주 가운데 '아쟁 산조'가 있었습니다.
박종선 선생님이 만드신 산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눈 앞에서 '아쟁' 소리를 생생하게 들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아직 여인의 恨을 알기에는 어려 보이는 여성 연주자가 활을 긁어내리는 순간,
제게는 조선 여인의 흐느낌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악기 소리라기 보다는 울음 소리였습니다
그것도 부슬부슬 옷을 적시는 가랑비 같은 울음이 아니라, 제 가슴을 적시고 뇌리를 적시고
온 몸을 흥건히 적시는 울음, 목놓아 평생의 설움을 토해놓는 여인의 울음소리로 들렸습니다.
심장이 저릿저릿했습니다. 근육이 움찔했고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습니다.
자꾸만 허물어져 내리는 등을 곧추세워 의자에 붙이곤 했습니다.
일곱 줄 비단실에는 그 여인들이 작은 몸통, 여린 가슴으로 감당해야 했던
고된 노동과, 갖은 차별, 이룰 수 없는 사랑, 품어 보지도 못한 세상 참여의 꿈.....
인습과 차별의 쇠사슬을 끊고 푸른 창공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은 여인들의 비원이
올올히 맺혀 있었습니다.
가슴 가득 고인 그녀들의 눈물과, 꺼멓게 타버린 가슴과 종유석처럼 쌓인 설움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 했습니다.
'음악이 없다면 세상은 하나의 오류다'
독일의 철인 니체가 한 말입니다.
흐느끼는 아쟁 소리를 들으면서 떠 오른 말이었습니다.
아쟁 소리가 아니었다면 저는 기억 저편 묻혀 있던 조선 여인들의 비극적 삶을 반추할 수 없었겠지요.
아쟁 소리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 경제적 안락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줄 몰랐겠지요.
아쟁 소리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세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감지할 수 없었겠지요.
음악이 없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만이 세상이라고 믿을테지요
음악은 진정 세상 너머의 세상, 사물 이면의 사물, 현상 속의 현상을 깨닫게 하는 상상력의 원천입니다.
니체가 '음악이 없다면 세상은 하나의 오류'라고 외친 까닭입니다.
가얏고을 작은 공간을 꽉 메우던 아쟁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돕니다.
하염없이 내리는 장맛비에도 묻어 옵니다.
못다 푼 조선 여인의 恨이 아쟁소리와 빗물에 씻겨 나가고 있습니다.
- 여의도에서 goforest -
첫댓글 임선생님의 글속에는 시인의 감성과 학문적 깊이와 음악을 통해 삶의 철학을 발견하는 한 차원 높은 풍류인의 품격이 느껴집니다. 바쁘신데도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