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이들을 향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지난날 내가 수상(首相)이 되었을 제 두렵고 위태로운 마음을 품었으니, 오늘에 이르러 이런 일을
당할 줄 어찌 짐작했으리오. 내 몸이 건강했던들 달아나고 싶었음도 졸지에 닥친 일이 나한테 가당
치 않다는 생각에서였지요."
이렇게 전제한 후 이성계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민심은 천심이라, 경들과 더불어 새 나라에 참여하노니, 아무쪼록 경들은 나라 일에 충성하
는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박덕한 나를 힘써 도와주시오."
"진충보국(盡忠報國),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 전하!"
배극렴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그러자 전상에 자리한 신료들도 약속이라도 한듯 복창했다.
이것은 새 나라에 대한 신하로서의 맹세였다. 이미 쓰러져버린 왕씨(王氏) 고려의 신하가 새로운 나
라, 이씨 조선의 신하로 탈바꿈하는 엄숙한 다짐이기도 했다.
이로써 이성계는 삼천리 금수강산의 새 주인이 되었다. 이때의 보령(寶齡)은 쉰 일곱으로서, 슬하에
는 한씨와 강씨의 소생이 모두 8남 5녀에 이르렀다.
등극 예식을 마친 태조 임금 내외는 내관을 따라 수창궁 내전(內殿)에 들어갔다. 새 주인을 맞기 위
해 부랴부랴 단장한 내전은 봉접 쌍촉대(鳳蝶雙觸臺)의 불빛 속에 산뜻하게 꾸며져 있었다.
임금 내외는 똑같이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이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는 기분이 막연했
으나 내전에 드는 순간 비로소 '내가 지존한 상감이구나! 내가 지존한 왕비로구나!' 하는 생각이 임금
내외의 뇌리를 스쳐갔던 것이다.
꿈 같은 일이었다.
동북면 화주에서 한낱 무부(武夫)에 지나지 않던 이성계가 22세에 첫 벼슬을 얻고 그후 30년 만에 일
국의 어좌(御座)를 차지했다. 이 최고의 영광이 그의 의식 세계에서 전혀 뜻밖이었느냐 하면 결코 그렇
지는 않았다. 그가 일찍이 안변 땅에서 이상한 꿈을 꾸고, 무학대사로부터 그 해몽을 들었을 때부터 마
음 속에는 한 가닥 소망이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왕기가 있다면 언젠가 이 꿈이 이뤄질 것이 아닌가! 그날이 올 때까지 자중자애하리라!'
젊은 장군은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결심했었다. 그래서 이 학고한 신념을 발판으로 그는 남보다
더 열심히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그동안의 숱한 참전과 혁혁한 전공이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가 '곡주 보옥'을 취했던 것도 웅지를 펴기 위한 포석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벼슬이 오를수록 겸허한
자세로 임하였고, 급기야 그로 말미암아 낙마 소동까지 벌였음도 이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무튼 이성계, 그가 지금 받아 안은 행운은 그 자신의 피나는 수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왕비가 된 강씨 또한 남편의 후광(後光)으로 본분을 다한 터였다.
그녀가 이성계의 소실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장부의 뛰어난 기상에 반했음에 있지만, 남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모든 것을 다 바쳤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왕비가 되기 위해 그동안 정성껏 남편의
뒤를 밀어주고, 심지어 견인차 역할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남편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마다 기민하게 대처한 점이라든가, 정도전과 남은을 움직여 왕대
비의 교지를 얻어내는 데 앞장 선 일은 그녀의 영특함과 야망을 드러내주었다.
이제 소망을 달성한 새임금 내외의 감개무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보!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니 오랫동안 중전의 노고가 여간 크지않았소!"
어느새 들여놓은 야찬(夜餐) 술상 앞에 앉아 분홍빛 매실주를 비우고 있던 임금이 말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신첩, 오로지 전하만을 위해 살아가는 여인이 아니옵니까?"
"그래서 하는 말 아니오. 만약 중전이 나에게 없었던들 오늘과 같은 광영이 있었을까 여겨진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드리는 것이니 이 술잔을 받으시오."
"예, 이 나라 지존의 말씀을 어찌 거역하겠사옵니까? 꼭 한 잔만 남실남실 넘치도록 부어주십시오."
이렇게 왕비 강씨는 주저없이 말한 뒤, 임금이 가득 채워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사실 강씨는 오늘만은
마시는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어주(御酒) 한 잔을 모두 마시고 싶었다.
'영감과 내가 백성의 어버이가 되었으니 이 기쁜 날, 축하주 한 잔쯤 마시지 못하겠는가!'
강비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호기 있게 술잔을 비웠다. 그 순간 혓바닥을 쏘는 통증이 눈살
을 찌뿌리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구멍을 화끈거리며 흘러내려간 술은 이내 가슴을
마구 울렁거리게 했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백목련인 양 흰 얼굴빛이 삽시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전하, 못 먹는 술을 과음했나 보옵니다. 제 가슴이 울렁울렁하옵니다."
강비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도 '괜스레 호기를 부렸구나!'
하는 뉘우침이 고개를 들었다.
"허! 술 한 잔을 마시고 과음이라니요? 매실주 한 잔으로, 용모가 빼어남 중전께서 모란꽃
이 되었구려. 화중왕(花中王) 모란꽃 말입니다."
임금은 왕비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면서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강비는 임금의 칭찬이 달
갑게 여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하, 모란꽃은 싫사옵니다."
"모란꽃이 싫어요?"
"예."
"어째서요?"
"전하, 예로부터 모란꽃이 꽃 중에 왕이라 하오나 향기가 없어 벌과 나비를 부르지 못하옵니
다. 그러하온즉 제아무리 자태가 고운 모란꽃이라 하지만 제 마음을 채울 수는 없사옵니다."
"듣고 보니 맞는 얘기 같구려. 그렇다면 중전을 붉은 장미꽃이라고 이르겠소."
태조 임금은 취흥이 도도한 눈빛으로 강비를 바라보면서 장미꽃이라 불러주었다. 그제서야
강비는 볼우물이 패이면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맘에 딱 드옵니다. 장미꽃은 정열을 상징하기도 하려니와 가지에 가시들이 제 성품을
나타내주고 있사옵니다."
"중전의 성품을 가시가 나타내주고 있다 그 말입니까?"
다시 술잔을 기울이던 임금이 놀란 눈으로 강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비는 임금의 그러한
표정이 우스운지 계속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전하, 신첩한테는 여느 여인네보다 더 무서운 무기가 있사옵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경
계심, 혼자서 점유하려는 독점욕, 이러한 것이 소첩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는 가시라 생각하옵
니다."
"어흠! 그건 내가 중전에게서 느끼는 바와 다름이 없소. 그러나 바로 그 가시가 있었기에 중전
은 남보다 더 어여쁘고, 또한 지아비를 잘 내조할 수 있었던 것이오."
"과찬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전하!"
"과찬이 아니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있으니 오히려 자랑스럽소, 중전!"
임금은 술잔을 엎어놓은 다음 가만히 뒤로 물러앉았다. 눈치 빠른 강비가 상을 얼른 웃목으로
옮겼다. 벌써 금침은 아랫목에 깔려 있었다. 조금 지나면 수창궁 내전의 쌍촛불은 꺼지고, 운우
(雲雨)의 법열(法悅)이 대궐에서의 첫날 밤을 수놓을 것이었다.
주위는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중이었다. 강비는 눈을 뜬 채 멀리서 들려오는 닭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다시 정적이 무겁게 자리잡았다.
이 나라의 중전 강씨는 얼마 전부터 잠이 깨어, 어둠이 한겹한겹 벗겨져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
었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강비는 잠을 설치고 있는 중이었다. 태조 임금은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면
서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데 말이다.
별안간 환경이 바뀌어서일까. 등극식을 전후하여 너무 흥분했던 까닭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
라면, 무엇이 강비를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일까.
한바탕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애무와 절정에 이르는 그 숨막힌 쾌락이 지나면 으레 졸리기 마련
인데..... .
그렇지만 강비 자신은 불면의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세자 책봉(世子冊封) 문제였다. 이 문
제가 강비의 잠을 달아나게 하고 있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