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경산(望京山) 광덕산(廣德山)산행
오늘은 산악회 에서 아산시 망경산과 천안시 광덕산 산행을 한다.
망경산(望京山)은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와 충남 아산시 배방면 수철리 경계에 위치한
해발 601m 의 산 으로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백자리와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경계에 망경대
(385m)가 자리 잡고 있다. 경(京)’은 한양 혹은 임금을 상징하며, 망경산이나 망경대는 나라에
상(喪)을 당하면 한양을 향해 망배(望拜)나 망곡(望哭)했던 곳이어서 이러한 지명이 유래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광덕산(廣德山)은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와 아산시 송악면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699m로 천안 시가지를 기준으로 남쪽에 위치한 천안시 관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광덕산을 북동쪽에서부터 태학산, 망경산과 함께 연속적인 산지의 양상을 이루고 있으며,
이 산지는 천안시와 아산시의 남서쪽 행정 경계를 이룬다.
광덕산의 이름은 광덕사(廣德寺)라는 사찰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광덕’은 부처의 덕을 널리
베푼다는 불교적인 명칭으로서, 광덕면 일대의 광덕리, 지장리 등의 이름도 이러한 불교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광덕산 인근의 광덕면은 전국 호두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1290년(고려 충렬왕 16)에 영밀공(英密公) 유청신(柳淸臣)이 원나라로부터 호두의 열매와
묘목을 처음 들여온 곳이라 전해지는 곳이다. 결국 호두과자로 유명한 천안의 명성은 광덕산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외에도 광덕산 인근의 보산원리에는 조선 세조가 온양 온천에 거동할 때 쉬어 갔다는 쉴바위가
있고, 조선 명종 때 도적 안수(安壽)가 쌍령(雙嶺)에 웅거하여 나라의 관곡이나 세금·진상품을
빼앗아 빈민들을 구제하였다는 설화와 관련된 지명이 여렀 전하고 있다.
예로부터 산이 크고 풍후(豊厚)하여 덕이 있는 명산으로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거나 불길한 일이
있으면 산이 운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산에는 광덕사, 잣나무 군락지, 장군바위, 강당사 등의
볼거리가 많다.
우리 일행은 07:30 청사역을 출발 하여 *경부고속도로 남천안 IC 를 나와 아산시 방배면 수철리 와
천안시 보산원리의 경계 고개인 충남 아산시 배방읍 수철리 넋티 고개 등산로 입구 맞은편 수철리
명막골 종점 버스 정류장에 도착 한다.
아산시 방배면 수철리(水鐵里/수철 저수지)는 본래 온양군 군내면 지역으로 소일, 쇠일 또는 수철리
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일헌리, 신대리, 매곡리, 상촌리, 곡촌, 명막리를 병합해
수철이라 해 배방읍에 편입 되었으며 풍수지리상 이곳에서 장수(將帥)또는 재상(宰相)이 나올
세출장상지지(世出將相之地)의 명당이 있다 하여 세출리 라고도 한다.
또한 천안시 보산원리는 조선 시대에 여기에 보산원(寶山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있였으며
넋티고개(넙티/넙치/넓티)는 아산 소일에서 천안군 광덕면 넙티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광티)라
하여 그리 불리었다 한다.
넘어 가는 고개를 넙티라 하지 않고 넋티로 표기 한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 길목
(서울~아산 수철리 넋티~ 순천 까지)에 “‘이 충무공 백의종군의 길’ 표석과 ‘백의종군 정신’을
기리는 시비(詩碑)가 세워져 국민모두 이순신 장군의 우국충정의 정신을 본받자는 데서 "넋티"
라고 표기 하였다 한다.
산행은 명막골'마을 표석 건너편으로 보이는 등산로 따라 입산 한다 등로는 부드럽고 걷기 좋은
완만한 오르막이 조금 이어지더니 농장 갈림길이 나오고 등로는 점점 경사를 이룬다.
농장 갈림길을 지나 경사가 점점 급해지기 시작하면서 한참을 가파르게 밧줄 잡고 오른다.
망경산 정상 900m전부터 급격한 경사 구간 일명 깔딱 고개 이다. 제법 가파르고 긴 코스다
급경사 구간을 지그재그로 아슬아슬하게 오르니 밧줄구간이 연속되는데 이 역시 쉽지가
않다.
한동안 급경사 구간을 올라간 봉우리가 정상 인줄 알았는데 그 뒤로 더높은 봉우리가 보인다.
여기가 480봉 쉼터 이다. 망경산 정상까지는 400m 남았다 잠시 휴식후 산행을 이어 간다.
.이정표(넋티고개 1.1km, 망경산정상 0.4km, 현위치 480봉 쉼터)
480봉 쉼터 에서 조금 내리더니 등로는 가파른 경사를 이우고 멀리 넋티 고개를 향해 버스로
지나온 보산원리가 간간이 눈에 든다.급경사 길을 오르고 또 오르니망경산 정상 헬기장이
눈에 든다.
드디어 넓은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망경산(600.9m)정상 이다.
널찍한 헬기장 망경산 정상 에는 아산시 에서 세운 정상석과 정상석 뒤로는 풍향계 깃발이
펄럭 이고 수철리 저수지가 발 아래 있고 멀리 설화산과 배방산이 좌청룡 우백호 처럼 펼쳐저
있고 북쪽 으로 온양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배방산 뒷쪽 으로는 아산시가 보이고 오른쪽 으로
태화산이 지척 이고 태화산 넘어로 공주시 방향도 희미 하게 조망 된다.
우리 일행은 망경산 에서 곧바로 광덕산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광덕산 까지 4.2Km)
가파르게 올라온 만큼 가파른 내리막이 잠시 이어지고 700m 정도 내리니 만복골 갈림길 이다.
망경산에서 광덕산 까지는 경사가 심 하지 않은 오르 내리막 길이 반복 되는 평이한 육산 길이다.
이어서 500m 정도 더 진행하니 망경산 광덕산과 설화산 갈림 망경산 삼거리 이다.
(←광덕산3.0km 장군바위1.8km →설화산5.7km ↓망경산1.2km 배방산10.0km)
길고길게 내려와 안부를 지나니 설화산 갈림길이다.직진 하면 설화산 가는 등로 이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완만 하게 지나고 다시 약간의 경사를 올라 가니 마늘봉 쉼터 (592m)에 도착 한다.
장군 바위 에서 광덕사로 내림길이 등산로 2코스 이고 윗길이 무용묘 가는 길 이다
마늘봉 쉼터 에서 20여분 진행 하니 삼거리 안부에 떨어 지는데 부용묘 내림길과 장군 바위 가는
등로 삼거리다.아마도 이곳이 지도에 표기 된 장고개인듯 하다 광덕산 장고개는 아산군 온양장
보러 넘어다니던 고개 로 전 한다.
부용묘 방향으로 내리면 장군 바위 에서 광덕사로 내리지 않고 직진 하면 이길과 만남 지점 에서
광덕사로 내리는 길이 있다.여기서 광덕사로 내리는 길이 부용묘로 하산 하는 길로 광덕산 산행
3 코스 이다.
우리 일행은 장군바위 방향 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조금 내리니 이내 장군 바위가 나온다
장군 바위는 광덕산 능선길에 있는 바위로 옛날 몹시 허약한 선비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허기와
갈증 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바위 에서 떨어지는 물을 먹은후 허약 했던 몸이 장군
처럼 우람 하게 변했다 하여 장군 바위라 부른다는 것이다.
바위산에 있으면 그냥 지나쳐 가는 바위 정도다.그러나 광덕산은 육산이라서 이정도 바위면
전설이 있을만큼 큰 바위다.
산딸 나무(층층 나무)
우리 일행은 장군 바위 에서 광덕산 정상 방향 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등로는 흙길 에서 바위돌
길로 바뀌고 급 경사길로 오르고 오른다.너댓 고개를 오르고 오른다.산등선 경사길 이라서 그래도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 준다.쉼터 바로 위로 나무 계단이 이어가고 산딸 나무(층층나무)가 하얀
꽃을 이고 군락을 이루어 아름 답게 피어 산행길을 즐겁게 해 준다.계단을 올라 서니 광덕산 정상
이다
광덕산 정상에서 바라본 예산 방향
노랑 매미 꽃
드디어 광덕산[廣德山] 정상 699.3m 이다.
널찍한 헬기장 한쪽에 커다란 정상석(아산시.천안시)이 있고 옆으로 천안 아산시의 화합과
공동 발전을 위한"상생협력"조형물이 우뚝 서 있다.
조형물은 가로 170㎝, 폭80㎝, 높이 210㎝의 규모로 광덕산을 형상화 하여. 양 기관을 상징하는
2개의 산봉우리와 천안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아산의 온천수를 형성화해 양 도시의 상생과 화합을
표현했다.정상이 천안시와 아산시 경계 인것 같다. 삼각점 도 있고 시비(詩碑)도 있다.
헬기장 옆에는 천안시 산악 구조대 초소도 있다.초소 주변 에는 노랑 매미 꽃이 아름답게 피어 하늘
하늘 춤을 추고 서쪽으로 열린 조망 멀리 오서산이 하늘금을 긋는다.시원한 조망을 둘러 보고 장군
바위로 향 한다.
우리 일행은 1코스 등산로 따라 광덕사로 하산을 한다.
등로는 돌계단길,흙길,지그재그 밧줄길등 한발자욱도 한발자울도 오름길 없이 처음 부터 끝
까지 내림길 이다.
1 코스 쉼터 팔각정
쉼터 정자 에서 한숨 돌린다.다른 산에서는 볼수 없었던 산악인의 선서 비석이 세워져 있다.
광덕사 까지는 아직도 1.0Km가 남았다.
568번째 계단
등로는 나무 계단길로 이어 간다.급경사 568 나무계단이 끝나고 조금 더 내린다.
광덕산 등산로 1코스 와 2코스 갈림 삼거리
한참을 내리니 1코스와 2코스 갈림 삼거리 이다.1코스는 직접 정상으로 오르는 등로 이고
2코스는 계곡길 따라 장군 바위를 들려 광덕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로 이다.
삼거리 에서 조금 더 내리니 관광 안내소를 날머리 이다.우리 일행은 광덕사 경내를 둘러 본다.
태화산 광덕사(泰華山 廣德寺) 일주문
광덕사 일주문 이다.아산시와 천안시의 경계를 이루는 광덕산(699.3m) 동남쪽 그리고 태화산(泰華山)
서남쪽 산자락에 위치한 광덕사(廣德寺)는 설경 으로도 유명 하며 천안의 6경중 하나로 설정 되어 있는
사찰 이다.
일주문 앞쪽은 "태화산 광덕사(泰華山 廣德寺) 뒤쪽은 "호서제일선원(湖西第一禪院)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참선을 수행 하는 스님들의 도량임을 짐작케 하듯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일주문 앞 편액이 태화산 광덕사(泰華山 廣德寺)라고 쓰여진 것이 의아 하다.태화산은 절에서
5~6Km북쪽에 있는 산이고 바로 뒷산이 광덕 산 인데...아마도 절을 지을 시절엔 제일 높은 산 은
태화산(泰華山)뿐이고 광덕사가 들어선 뒤에 그 뒷산이 광덕산으로 이름 지어진 것으로 추정 된다.
광덕사 사적비(事蹟碑)
호도(胡桃)전래 사적비(史蹟碑) 와 유청신(柳淸臣)공덕비
광덕사 안양암 (安養庵)
일주문을 드러서니 광덕사 사적비를 비롯한 호도나무를 가져와 심은 유청신의 공덕비 산행
안내 표지판등이 게시 되어 있다.수령 440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를 지나니 왼쪽으로 광덕사
안양암(安養庵)이 자리 하고 있다.
안양(安養) 이란 말은 불교 에서 마음을 편 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함을 의하는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정토를 일컷는 말 인데 광덕사의 안양암(安養庵)은 극락의 이명을 사용 하여 극락전
앞에 암자로 안양암 이라고 한것 같다.
광덕사 입구 마애불 석상
호도나무 전래비
광덕사 대웅전 3층 석탑 과 석(石)사자
지장 보살 과 5층 석탑
광덕사 다원,호두나무 전래비,불전들이 모습을 드러 낸다.
광덕사(廣德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麻谷寺)의 말사 로서 신라 진덕여왕6년(652년)
자장(慈藏)율사가 당나라 에서 가져온 불치(佛齒) 한개와 사리 화엄경 법화경 등을 승려 진산(珍山)
에게 주어 창건 했다고 전한다.
1464년(세조3년)에 세조가 온양온천에 요양 왔다가 이 절에 거동 하였을때 부처님 치아 사리를
친견한 뒤 한계희(韓繼禧)에게 명 하여 전지(傳旨)를 써 내렸는데 위전(位田)을 바치고 각종 요역(役)
을 면제 한다는 내용 이었다.그뒤 28방(房)에 부속 암자가 약 89개 9개의 금당(金堂) 80칸의
만장각(萬藏閣)3층 으로 된 천불전(千佛展)등이 신증축 되어 경기 충청 일대는 물론 전국 에서도
손 꼽히는 대찰이 되 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년)임진 왜랄때 모두 불타 버려 가까스로 대웅전.천불전만 중건 되어 큰절의
명맥 만을 유지 하였고 1981년 대웅전 천불전 적선당,선화루.명부전,육화당등을 신증축 하였다.
또한 광덕사에는 고려사경(보물 390)·광덕사 대웅전(충남문화재자료 246)·광덕사
삼층석탑(충남유형문화재 120) 등의 문화재가 있고, 이밖에도 호도나무 전래비와 조선시대
기생 김부용의 묘가 있다.
보화루로 향하는 계단 옆 호두나무는 고려후기 문신 유청신(柳淸臣)이 원나라에 불모로 가 있던
왕족을 인솔 하면서 우리 나라에 없는 과일 씨를 가져와서 이곳에 심어 씨를 맺었는데 그 모양이
복숭아 비슷 하여 호도(胡桃)라고 이름 하였는데 원나라에 수몰을 격으면서도 새과일 이름 에는
오랑 호(胡)를 붙혀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한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나라 호두의 기원이 되는 이 나무는 전설대로라면 700살이 넘어야 하지만 약400살로 추측되고
있으니, 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절이 피해를 입었을 때 호두나무도 같이 사라진 걸 후에 다시 심은
것일지도 모르겠다.호도나무가 유난히 많은 광덕산은 또한 모기가 없기로 유명하다
감강찬장군이 이곳에서 야영할 때 온 산이 울릴 만큼 큰 목소리오 "모기야 물러가라"고 호령한 후
부터는 광덕산에서는 모기를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다.
사미대백련지(沙彌臺白蓮池)
백련사 일주문을 나서자 사미대백련지(沙彌臺白蓮池) 라는 비석이 연못앞에 세워져 있다.
사미대(沙彌臺)는 승려가 되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비는 옛적 에는 광덕사
입구에 백련(白蓮)이 피는 큰 연못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 하는듯 하다.
김부용(金芙蓉) 시비(詩碑)
여기서 광덕사 보호수 옆 태화교를 지나 800m 지점에 있는 부용묘를 소개 한다.
광덕사 절옆 200m쯤 산으로 향 하면 조선조 개성의 의 황진이(黃眞伊) 가릉에 초희 허난설헌
(許蘭雪軒) 과 함께 여류 작가 이면서 황진이(黃眞伊) 부안의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 3대 명기(名妓)중의 한사람 이라는 부용상사곡(芙蓉想思曲)의 주인공 김부용(金芙蓉)
의 묘를 소개 한다.
김부용은 평양 감사를 지낸 연천 김이양(淵泉 金履陽)이 77세 일때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인연을 맺었고 김이양이 죽은 후에 기생의 몸으로 어렵게 수절 하다가 김이양의 옆에 묻히고 싶어
이곳 까지 찾아와 죽었지만 끝내 그옆에 묻히지 못 하고 같은 산자락인 이곳에 누웠다는 사연이
전 한다.부용은 얼굴도 아름 다웠지만 시문(詩文)도 능해서 그의 문집인 "부용집"과 오강루(五江樓)
등에 350 여편의 시(詩)가 전한다.오늘은 이렇게 4시간의 홀로 산행을 마치고 온길 되돌아 귀가길을
재촉 한다.
19세 신부와 77세의 신랑의 전설
김운초(金雲楚 )호는 부용당(芙蓉堂) 또는 추수(秋水)다. 양반인 선고(先考)는 추당(秋堂)의
무남독녀로 태어났으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학식이 깊은 중부(仲父)밑에서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에 사서삼경과 당시에 통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하여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이었으나 58세나 연상인 봉조하 연천(淵川) 김이양
(金履陽,한성부윤 4회, 함경도 관찰사.호조,병조,이조판서 역임)을 만나 소실이 되면서
명사들과 교유하며 그의 시재(詩才)가 이름을 났다.
ㅇ 19세 꽃과 77세 노인이 부부가 되다.
운초와 김이양의 운명적인 만남은 순조 31년(1831년) 김이양이 평양감사로 부임하자 성천부사가
관기였던 운초를 스승인 김이양에게 보내면서다.그때 운초는 19세 김이양은 77세였다.
김이양은 운초를 거둬들이는 것을 사양했으나 운초가 보낸 시 한 수를 보고서 소실로 앉혔다.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 객 노인이 있는가 하면,
팔십 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운초가 김이양에게 보낸 시)
김이양은 누구 인가?
그가 젊었을 때 몹시 가난하여 굶기를 밥 먹듯 하였다. 하루는 저녁을 굶고 자는데 도둑이 들어 쌀이
없자 부뚜막을 헐고 솥을 떼어가려는데 이 소리를 들은 부인이 남편(김이양)을 깨워 우리 살림살이의
전부인 솥을 도둑이 가져간다고 하자 김이양은 ‘오즉 가난하면 남의 집 솥을 떼어가겠소. 우리보다
못사는 사람인 것 같으니 내버려 둡시다’ 하였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도둑은 크게 깨달아 솥을 그냥 두고 갔으며, 그 후로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었다.
훗날 김이양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옥당 학사(玉堂學士)로 있을 때 은혜를 갚고자 찾아와
둘은 그 후 백년지기처럼 친하게 지냈다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남긴 사람이다.
김이양은 재기 넘치는 운초를 끔찍이 사랑하였고, 운초 역시 연만한 늙은 감사의 공양에 정성을
다하였다.두 사람은 비록 성속을 떠나 서로 마음을 나누며 어느 부부보다 정이 깊었다고 한다.
그러다 김이양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이때 운초를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을 만들어 주었고 그런 다음 정식 부실(室)로 삼고는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갔다.
이별 후 불러 줄 날을 기다리며 운초는 그 심경을 시로 써서 김이양에게 보냈는데 그때의 시는
지금도 애절해 가슴을 울린다. 후에 김이양은 서울 남산 기슭에 ‘녹천당’이란 작고 아담한 집을
짓고 운초와 함께 노년을 함께했다. 운초가 김이양을 만난 지 15년 되던 1845년 이른 봄 김이양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운초의 나이 33세였다. 임종 시 김이양은 운초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님을 잃자 부용은 방안에 제단을 모시고, 밤낮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十五年來今日流 (십오년래금일유) 峨洋一斷復誰栽 (아양일단부수재)
십오 년 정든 님 오늘도 눈물 짓네,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줄꼬.
운초는 이후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외부와 일체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다가,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고 김이양과 운초의 유언에
따라 김이양의 묘가 있는 천안의 태화산(광덕산)에 묻혔다.
비록 합장의 대우를 받지는 못했지만 김이양의 묘 아래에 잠들었으니 죽어서도 둘은 행복했지
않했을까 ~
오늘은 이렇게 산행을 마치고 광덕 종합 주차장에 대기중닌 버스에 승차 공주 마곡사 주차장
입구 추억의 삼학 식당에 들려 능이 버섯 찌개에 하산주겸 식사를 하고 귀가길을 재촉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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