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겨울 섬진강을 염주 삼아 돌리면서 묵언정진 중이다. 동안거(冬安居) 수행승의 자태랄까. 가끔 구름 사이로 보이는 히말라야 설산 같은 지리산 정수리 부근. 서둘러 결빙이 시작됐다.
바람이 매섭다. 시심(詩心)은 오히려 더 카랑카랑하고 쩌렁쩌렁해진다. 바람에 쓸려가는 벚꽃잎처럼 눈발도 난분분.
인적 끊긴 섬진강 백사장은 막 다림질 끝낸 명주옷 고름 같다. 지리산을 휘감고 나온 설한풍이 탱자나무 가시 같은 기세로 강물을 마구 패대기쳤다.
◆ 문득 한 시인을 만나러 지리산 가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뛰어들어
고문실 잡혀갔지만 다행히 무사
“한 일도 없는데…”
민주화운동 보상금은 수령 거부
새만금 개발 반대하다 위협받아
지리산 형제봉 보이는 곳에 정착
올핸 세월호 추모 봉화제에도 참여
“농촌운동이랍시고 할 때 부끄러워
흰 손을 농민 앞에 내밀수 없었다”
문득 한 시인을 만나러 간다. 박남준 시인(57).
지난 20일 전국의 박남준 팬클럽(악양편지) 회원 여럿이 산란기 연어처럼 이 산방으로 모여들었다. 여기가 모천(母川)인 모양이다. 박남준은 대취했고 통기타를 쳤다. 다들 놀던 자리에서 잤다. 아침에는 정화수처럼 일어났다. 박남준이 30분간 국밥을 직접 요리해 대접했다.
언어도단, 대략난감, 지랄맞은, 어쩌면 상엿소리 같은 사내. 표정의 3분의 2는 저승에 닿아 있다. 그래서 신명의 샘이 마르지 않는 모양이다.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산다. 누구는 그를 두고 ‘박남준교(敎)’의 교주란다. 외침과 읊조림을 동시에 주무른다. 광복 직후만 해도 이런 사내가 많았다. 어느덧 신자유주의는 이 나라의 예술적 광기와 ‘묻지마 낭만파’를 말살시켰다. 그는 용케도 살아남아 삭막한 일상 구출 작전을 ‘민란’처럼 벌이고 있다.
1991년부터 23년째 전업시인.
굶어죽을 만하면 수호천사가 나타나 사지(死地)에서 구출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 귀인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시인은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고 믿는다.
한때는 전주·김제시, 완산군에 걸려있는 전북의 계룡산 같은 모악산 무당집에서 13년 정도 ‘암약(暗躍)’했다. 모악산방 시절은 너무나 음습했다. 으스스했고 눈은 늘 충혈돼 있었다. 유배의 눈매로 종일 풀, 나무, 새, 바람, 별, 달, 해, 꽃의 본색과 마주했다. 유일한 친구는 산방 앞 개천에 사는 버들치. 먹고 남은 밥 알갱이는 버들치 몫이었다. 매일 같은 시각에 먹이를 주었다. 버들치가 그의 발걸음 소리만 듣고 몰려들었다. 순간 저들이 없으면 박남준도 없다는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런 산중에서라면 돈을 쓰지 않고 사는 삶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굳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92년 2월말 전주문화센터 관장직을 그만두고 자유인이 되었다.
◆ 풍류… 참여를 만나다
모악산방의 어느 날. 평화롭게 놀던 버들치가 한 떼의 중년의 사내에 의해 초토화된다. 버들치는 매운탕감이 되어버렸다. 그가 발악하면서 저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을 향해 ‘야, 이 놈들아, 급살 맞아 죽어버려라’면서 육두문자를 비수처럼 날렸다. 하지만 이 사내는 밤에 그 말을 즉시 취소한다.
‘정말 내 말대로 급살 맞아 죽으면 그 가족은 어떻게 되지?.’
자신도 모르게 생태운동가, 생명살리기 운동가로 변신하고 있었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이에겐 그는 단지 ‘낭만적 자연주의자’였다. 하지만 그의 80년대를 들여다 보지 않으면 오해일 수도 있다. 80년대 그는 두 주머니에 시집 대신 ‘짱돌’을 넣고 다녔다. 시를 쓸 수 없는 시절이었다.
분신과 데모 정국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던 84년. 그에겐 문학의 사부 같은 조태일 시인을 그때 만난다. 덕분에 시인이 될 수 있었다. 그도 광주학살의 자장권에 있었다. 86년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실무자로 가담한다. 저항할 만한 인사는 다 구금된 상태였다.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가 지하 고문실로 잡혀갔다. 간이 쿵 떨어졌지만 ‘시인은 절대 이런 새끼들한테 고문당하면서도 울면 안돼’라고 다짐한다. 87년 5월 무사히 풀려났다. 거리는 태연했고 자신만 그믐밤 같았다. 길바닥에 손을 짚고 엉엉 울었다. 속으로 펜을 향해 욕을 했다. ‘펜은 총보다 강하다고? 엿 먹어라!’
훗날 이런저런 민주화운동 보상금이 나올 때 그는 한 일도 없어 회피했다. ‘왜 돈을 안 받느냐’고 궁금해 했다. ‘보상금이 그렇게 중요하니’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라도의 한 민중미술관에 출근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운동하는 후배 여럿이 집을 찾아와 ‘민중미술 같은 건 부르주아나 하는 일이니 당장 때려 치우고 자아비판을 하라’고 강요했다. 기가 막혔다. 그는 그날부터 이념군단과 일정한 선을 긋는다. 전주와도 결별을 하고 상경해 서울 KBS 공채1기 구성작가가 된다. 주머니가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시심은 정반대로 폭감하고 있었다.
◆ 내 총재산은 관값 2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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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시인은 전주 모악산 자락에서 13년 정도 은거하다가 2003년 지리산 형제봉이 멀리 보이는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오두막집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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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모악산 시절을 정리해야 될 때가 왔다.
새만금 개발 반대를 위한 삼보일배 투쟁을 했다. 개발을 원하는 측에서 그를 ‘빨간 사내’로 몰고 갔다. 목숨까지 위협을 받았다.
그의 마음을 좀 더 아늑하고 안전한 곳에 이식시키기 위해 두 명의 인사가 의기투합한다. 그도 모르게 지리산 형제봉이 멀리 보이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준 것이다. 박남준표 유배지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잘 살아보라면서 집문서까지 넘겨 주었다. 하지만 그는 정색했다. ‘이 공간은 모두의 악양산방’이라면서 사후에 품앗이 형식의 사랑방으로 내놓을 모양이다. ‘원래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그는 어금니를 악물면서 작심했다.
‘세월이 지나 박남준의 풍류가 후줄근해지면 사람의 발길도 겨울 계곡물처럼 줄어들 것이고, 그럼 비명에 죽게 됐을 때 누가 그 주검을 봤을 때 부담 없이 화장을 해서 장례를 하려면, 관(棺)값 명목으로 예금통장에 200만원 정도 넣어두자’고 결심한다. 일찌감치 ‘관값 200만원’에 배수진을 쳤다. 자연과 벗하며 살아보니 한 달 생활비도 20만원 남짓하면 충분했다. 문학상을 받거나 목돈이 들어오면 쓸 만큼 쓰고 나머지는 좋은 곳에 기탁한다. 그래야 가장 홀가분하고 거침없는 박남준이 될 수 있다고 마음먹었다.
지리산 실상사 도법 스님과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다녔다. 시화호, 새만금, 대운하 사업에 그는 기겁을 했다.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순례단 일원으로 2008년 2월12일 한강 하류인 김포 조강나루에 애기봉에서부터 서울을 거쳐 한강과 남한강, 문경새재를 넘어 낙동강과 영산강, 새만금을 거쳐 금강 등 4대강 지역을 걸었다. 올해는 세월호 추모 봉화제에도 맘을 포갰다.
◆ 박남준의 고백
내겐 두 주먹이 있었다. 한 시절 농촌운동이랍시고 설칠 때 나의 백옥 같은 손이 농민 앞에는 부끄러워 도저히 내밀 수 없었다. 운동권 후배와 만날 때는 그들보다 몇 배 더 거친 내 손이 부끄러워 또 내밀지 못했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세상. 그렇다. 우리네 삶도 겨울 빨래처럼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선비라고 생각하며 사는데 인간 못된 반거충이들이 달려드는 바람에 나는 잠시 희희낙락 ‘잡놈’이 된다. 이치도, 이념도, 이해득실도, 주의주장까지도 모두 귀가한 설한풍의 밤. 악양산방은 혼자 눈을 맞는다. 그 집 굴뚝 위 따뜻하게 피어오르던 흰 저녁 연기 같은, 우우 눈발을 부르며 산자락에 소복으로 엎드려 우는, 그리움도 오래된 골목 끝 외딴 감나무처럼 낡아질 수 있을까. 등대 같은 쉰여덟의 내 겨울편지는 지리산 바람이 그대 가슴에 희망의 함박눈으로 우송할 것이리라.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영남일보)
☞ 박남준 시인 프로필
1957년 전남 법성포에서 태어났다. 84년 시 전문지 ‘시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91년부터 13년간 전주시 모악산, 2003년부터 현재까지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악양산방에서 풀들을 벗하며 살고 있다. 시집으로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풀여치의 노래’ ‘적막’ 등이 있고 ‘박남준 산방일기’ 등 5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2005년에 시낭송 음반 ‘아름다운 관계’를 펴냈다.
첫댓글 시인님!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