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pinion :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트로이 황금 유물, 지금 왜 러시아가 갖고 있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중앙일보 입력 2022.07.15 00:32
*끝나지 않은 트로이 전쟁 : 고고학에 특별히 관심이 없어도 트로이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 그는 독일 출신으로 거의 무학에 무일푼이었지만 특유의 능력과 수완으로 돈을 벌고 1870년대 트로이를 발굴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트로이를 찾아낸 그의 업적은 지금도 이집트 투탕카멘의 미라와 함께 세계 고고학사에 남을 대표적인 발굴로 꼽힌다. 하지만 정작 그의 이름에는 수많은 논란이 따라다닌다.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그와 트로이의 진실을 두고 여전히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마치 드라마 한 편 같은 그의 성공담에 숨겨진 진실,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 트로이를 둘러싼 각국의 전쟁 같은 암투를 살펴본다.
*허세와 과장 심했던 슐리만 : 슐리만에 대한 고고학자와 일반인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 무엇보다 그에 대한 고고학 전공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실제로 그가 발굴했다는 황금은 트로이 유물이 아니었으며, 트로이 유적에서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전쟁을 증명하는 증거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슐리만이 주목받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어렸을 때 읽은 『일리아스』를 찾았다는 드라마틱한 서사 때문이다. 하지만 트로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영국인 캘버트였다. 트로이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던 슐리만은 캘버트와 함께 조사했고, 결국 캘버트를 밀어내고 발굴 성과를 독차지했다.
슐리만의 문제는 개인의 일대기뿐 아니라 발굴 과정에도 걸쳐 있다. 그가 찾아낸 트로이의 황금(프리기아의 보물)은 트로이가 존재했던 시절보다 1000년이나 이른 시기의 것이다. 물론 슐리만이 살던 시대 상황이나 기술 수준으로 보면 그의 실수는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슐리만은 객관적인 실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중적인 인기와 명예를 지나치게 추구했고, 그 결과 실수는 감추고 자신의 성공을 과장하는 회고록을 남겼다. 반면 그 회고록으로 특유의 허세와 과장이 후대까지 전해지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됐다. 슐리만은 자신이 발굴한 황금 유물을 편법을 써서라도 해외로 빼돌리려고 했다. 트로이 유적이 위치한 터키 서부 히사를리크 언덕은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관할이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이미 황혼의 길에 접어든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유럽을 통제했던 세계적인 국가였다. 그런데 슐리만은 처음 발굴할 때의 약속을 무시한 채 더욱 교묘하게 유물을 바깥으로 빼내 갔다. 나중에 마지못해 일부를 돌려주긴 했지만 분명 엄연한 주권 위반이었다. 제국주의 국가가 힘을 앞세워 힘 약한 나라의 유물을 강탈하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2차 대전 때 사라진 트로이 황금 : 슐리만이 촉발한 문화재 전쟁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됐다. 슐리만은 말년에 자기 이름을 딴 전시실 설치를 조건으로 관련 유물을 각국 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슐리만의 만행에 혀를 내두른 박물관들이 이를 모두 거부했다. 결국 별다른 기념 없이 독일 베를린 박물관이 유물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으로 히틀러의 나치가 무너지면서 미국의 문화재부대(이른바 모뉴멘츠맨, 전쟁 중 적국의 문화재를 접수하는 부대)가 베를린 박물관에 도착하고 보니 막상 트로이 유물은 온데간데없었다. 당시 베를린 박물관은 수차례 폭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실크로드 벽화 같은 귀중한 유물도 크게 훼손됐다. 그런 사이에 트로이 유물도 폭격으로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트로이 유물은 1995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푸시킨 박물관에서 발견됐다. 나치가 패망할 당시 미국과 소련의 문화재부대는 베를린 박물관을 경쟁적으로 찾았다. 그런데 소련의 문화재 부대가 한발 빨랐다. 당시 독일은 베를린 박물관의 주요 유물을 인적 끊긴 베를린 동물원에 설치한 대공포탑에 숨겨 두고 있었는데, 독일 고고학자의 도움을 받은 소련의 문화재 부대(고스폰드)가 한발 앞서서 러시아로 가져간 것이다. 소련은 이런 사실이 문제가 될까 우려해서 비밀에 부쳤으나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관련 사실이 알려졌다.
*러시아, 2003년 자국 소유권 선언 : 러시아의 태도도 논쟁적이다. 2차 대전 혼란기에 독일의 유물을 훔쳐가서 50년이나 숨겨둔 점도 그렇거니와, 이후에도 자신들의 유물임을 선언하고 2003년에는 최종적으로 자국에 귀속시켰다. 그런데 막상 독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들도 100만 점이 넘는 러시아 문화재를 불태우거나 독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일은 추리소설 『호박방』의 소재가 됐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호박방’을 히틀러의 특별 지령으로 아예 통째로 떼어갔는데, 여태껏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독일이 지금도 트로이 유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배경이다. 여기에 원래 주인인 터키도 가세하면서 문제가 계속 복잡해지고 있다.
어쨌든 이들 나라의 반환 요구를 러시아가 들어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토록 슐리만의 보물이 러시아로 들어간 것은 운명의 짓궂은 장난과도 같다. 원래 슐리만은 러시아에서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었고, 러시아정교회에서 러시아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 신분증을 위조하여 일방적인 이혼을 신청했다. 그리고 트로이를 함께 발굴한 31살 연하, 그리스 출신의 대학 1학년생 소피아를 만나서 결혼했다. 호사가들은 슐리만이 죽고 나서야 러시아에서 비싼 위자료를 준 셈이라고 수군대기도 했다.
*트로이는 과연 실재했을까 : 게다가 슐리만이 찾아낸 트로이의 황금은 진짜 트로이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트로이라는 도시는 실재했다.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기 200여년 전에 작성된 히타이트 문서에는 각각 ‘윌루사’와 ‘타루이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트로이도 일리온이라고도 불렸다. 장편시 『일리아스』는 바로 트로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아나톨리아반도 내륙에서 서쪽으로 세력을 키우던 히타이트는 바닷가의 트로이와 연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바다가 근거지였던 그리스 미케네 문명은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수백 년에 걸쳐 전쟁을 벌여왔다. 바로 트로이 전쟁의 배경이다. 트로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차고도 넘친다. 하지만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전쟁을 벌였던 트로이의 역사를 직접 증명할 만한 유물이나 글자는 아직껏 없다. 어쩌면 앞으로도 발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호메로스는 역사가가 아니라 문학가였다. 그가 노래한 트로이 전쟁은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수백 년간의 전쟁에 대한 기억이 섞이고 섞이며 재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륙·해양세력 곳곳에서 대립 : 트로이 전쟁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트로이 전쟁엔 마침표가 찍혔지만 이후에도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계속됐다. 트로이가 위치한 지역이 아시아와 유럽의 사이에 흑해로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지정학적 조건도 핵심 갈등 요소였다. 1차 대전 때는 트로이가 위치한 곳에서 현대 터키를 탄생시킨 갈리폴리 전투(다르다넬스 전투)가 일어났다. 또 2차 대전 당시 슐리만의 황금 유물을 두고 벌어진 강대국들의 분쟁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전쟁은 여신 에리스(Eris)가 주고 간 황금사과를 두고 세 여신(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이 다투면서 시작됐다. 이에 비춰볼 때 트로이의 황금유물은 지난 수 천년간 지역 분쟁을 일으켜온 황금사과에 해당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대륙과 해양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대판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를 두고 러시아와 서유럽·미국 연합이,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한국과 대만이 중국과 대립 중이다. 트로이 전쟁을 현재진행형으로 부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