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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경부터 조성된 경주의 거대한 무덤들이 10세기 전반 신라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계속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6세기 중엽에 이르러 무덤의 규모는 대폭 줄어들었다. 왕릉이라 하더라도 그 크기가 예전에 비해 1/4 이하로 축소되었다. 결국 신라를 상징하는 거대 고분은 겨우 100년 내지 150년 정도 존속하다가 사라진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의문에 접하게 된다. 신라는 6세기 이후 국력이 더욱 성장했고, 특히 7세기 후반 삼국을 통일한 이후 100여 년 간은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렇다면 5세기대보다 국력이 더욱 강성했던 통일신라 시기에 거대한 무덤들이 조성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앞선 시기의 무덤들이 거대하고, 이 시기의 무덤들은 오히려 왜소해진 걸까? 6세기 전반부터 신라는 주변 지역을 공격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시키려 했고 자연히 많은 군사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까지 신라의 군대는 주로 경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만 조직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낙동강을 건너 가야의 잔여 세력들을 정복하고, 소백산맥을 넘어 한반도 중서부 지방으로 뻗어 나가며 고구려·백제와 겨루고자 하는 마당에 경주 사람들로만 구성된 군대로는 역부족이었다. 자연히 지방민들에게 유화적인 조처가 필요해졌다. 그들에게도 경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신라인'이라는 의식을 심어 주어야 했다. 과거처럼 지방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는 것보다 신라인으로서 동류의식을 갖게 하면서 그들을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하는 데 활용하는 것이 훨씬 득이 되었다. 아울러 당시 백제나 고구려 등 주변 강대국에서 유행하던 무덤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 橫穴式石室墳]'의 전래도 거대 고분의 소멸을 부추겼다. 이전의 거대한 무덤들은 대개 나무로 짠 큰 상자 안에 시체가 든 널[棺]과 부장품을 넣고, 그 나무상자 상부와 주위를 수십 겹의 돌로 감싼 뒤 다시 그 위에 흙을 덮는 복잡한 구조였다[돌무지 돌널무덤, 積石木槨墳]. 이러한 무덤은 많은 노동력이 소요될 뿐 아니라 한 번만 사용 가능할 뿐 다시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새로 전래된 굴식 돌방무덤은 돌로 견고하게 만든 무덤칸[석실, 石室]에다 들어가는 길[연도, 道]과 입구까지 만들어 놓아 한 번 조성한 후 여러 번 재사용이 가능한 구조였다. 이처럼 경제성이 큰 굴식 돌방무덤이 기존의 돌무지 돌널무덤을 대체한 것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굴식 돌방무덤은 신라에 전해질 때부터 그 규모가 이전의 거대 고분보다 현저히 작았다. 무덤칸 위로 바로 흙[봉토, 封土]을 덮는데, 그 흙이 무덤칸에 미치는 압력을 줄이기 위해서는 과거와 같이 엄청난 높이로 봉분을 쌓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굴식 돌방무덤의 채용과 함께 무덤의 크기가 자연스럽게 줄어든 것이다. 지방민의 힘을 더욱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과 무덤의 규모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새로운 무덤 양식의 채용으로 인해, 6세기 중엽 이후 거대 고분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거대 고분의 소멸은 국력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방민의 포용과 토목공사에 있어서 경제적 마인드의 발전을 뜻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진보를 상징하는 하나의 지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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