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겨울호(109호) '문단산책'에는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가 소개되어 있다.
2024봄호(110호)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 기록하지 못하고
대신 2023겨울호를 남긴다.
***************
<2023겨울호>
서석대/ 신현영
몇 살이야 하고
바람이 다가와 물었네
내 나이
다 털어버리고 없다 했네
인생은 가고
나는
그 때에
허공을 맞대고
무한대로 서 있었네
********
꽃 image/ 오명규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너와 나
구름 위에 띄운 낱말
한 천년 어느 하늘 헤매다가
백리 들녘 풀섶 사이
꽃으로 피는 건가
그대 가슴 속 저리고 시린 말씀
은하의 별들이 밤하늘 수놓듯이
꽃으로 피라
앞산 마루에 한 송이 날개 꽃으로 피고
숲 속 덤불 속에 초롱꽃으로 피고
동구 밖 개울가에 나리꽃으로 피라
한세월 집시처럼 살아가는 그대는
이 땅의 마지막 순수이거니
순수만 남고 모두들 가라
*******************
<2024여름호>
바람재에서/ 김재창
바람을 보았어요.
아빠와 무등산에 갔다가
바람재에서 보았어요.
언덕 위에서 갈대와 장난질하며
뒹굴고 있는 바람의 모습
산등성이를 오르면서도 보았어요.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땀 식히며 하늘바라기 할 때
낙엽을 타고 날아가는 바람의 모습
말을 타고 날아가는
장군의 모습도 보았어요.
***********
5월 대나무/ 이꽃별
아기 낳은
엄마 대나무
쑥쑥 잘 자라라
엄마 대나무
아기 죽순에게
죽죽 젖을 주어요
아기 죽순
푸르게 푸르게
죽죽 자라는데
엄마 대나무는
마디마디 노래졌어요
*********
재주꾼 거미 아빠/ 임성규
아슬아슬
제 키 수천 배 되는
배롱나무 우듬지에서
줄을 달고 오르고 있는
거미 아빠
펄럭펄럭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휘청휘청
줄 달고 나무에서 나무로
외줄 타기 재주부리지
- 조금만 기다려
곧 사냥터가 만들어질 거야
태풍에도 끄떡없는
우리 집도 생길 거야
아빠의 말에
환호성 지르는 우리들.
********
라면/ 정관웅
보글보글 보글 소리
마음 웃는 소리
곱슬곱슬 탱글탱글 모양내는 소리
뽀글뽀글 뽀글 소리
입이 익어가는 소리
출렁출렁 출렁다리 춤추는 소리
호로록 후르룩
엄마 마음 소리
*********
눈사람/ 정문규
데굴데굴 굴려서
만든 눈사람
엄청 많이 추워도
웃는 눈사람
눈사람 곁에 서면
따뜻해지네
엄마, 아빠 닮아서
그런가 보네
*********
붙박이 바람칼·3- 길섶 곤줄박이/ 송선영
산책길 길을 열면 낯익은 토박이 애들
오늘도 뽀짝뽀짝 촐랑대네, 길벗하자네
- 찌찍, 쉿!
매님은 잠든 겨?
기웃 갸웃 긴 벽 살펴
*************************
<2024가을호>
회화나무/ 이혜숙
옛 도청 앞
회화나무 꽃폈다
태풍 볼라벤이 왔을 때
뿌리째 뽑히면서도
분신 하나 남기고 떠났던
어미 회화나무
그 많은 사연을 대신하여
피워낸 꽃
역사는
하나의 꽃보다 못한가
꽃으로라도 말하고 싶어
저렇게 저렇게
흐드러지게 피우고
서 있는가
사람아 나는 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서 있는가
하얗게 하얗게 핀
꽃만 보고
서 있는가
**********
까치집/ 조현아
창 너머 흔들리는 풍경 하나
베란다 눈높이에 걸려있다
허공에 덧댄 방 한 칸
하루에도 몇 번씩 가난의 대물림은
바람의 음률을 탄ㄴ다
가죽나무 꼭대기에 마련한 보금자리
볼멘 그리움 하나 달아놓고
가끔은 노을이 쉬었다 간다
따뜻한 이야기 몇 소절 풀어내는 오후 햇살
지상 높이 8층
전망 좋은 집 한 채가 흔들린다
문득
세상 사는 일 아득해진다.
*******
도시의 낯선 사람/ 한연섭
아파트 숲속을 지나
인의 물결 속에 스며
사라진다
땅속으로 땅속으로
두더지처럼
해와 달도 없는 거리
환히 불 밝혀 두고
서걱거리며 엇갈린 발자국들
옷깃 한번 스쳐도 인연이라던가
수십 번 스쳐도
눈길 한번 잘못 주면
의심받는 도시의 거리
시멘트로 집을 짓고
철문에 두세 개 열쇠 잠그고
창문에 커튼 가려져
앞집 뒤 옆집 낯선 사람들
아파트 숲속을 지나가네
********
심지(心志)에 불을 밝히다/ 오종희
옛날의 우리 할머니 이야기보따리는
양파의 속살처럼 벗기고 또 벗겨도
마음의 그 속내에는 푸른 심지 숨어있다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성벽
파도가 밀려와도 꼼짝 않는 절벽이다
험난한 생의 길목에 밀어 올린 파란 촉수
혼탁한 시간들을 휘감아 돌고 돌아
힘차게 걸어가는 들판의 발걸음에
오늘도 슬픈 역사가 불꽃으로 타오른다
*************************
<2024겨울호>
낙조/ 윤하연
산다는 것은
파도를 타는 것
밀고 당기는 일들이 해조음으로
이명을 흔든다
살아간다는 것은
불 하나 품고
궁륭처럼 가는 뜨거운 길
돌아보면
벅찬 산봉우리 같은 길도,
잔잔하게 흐르는 호반의 언덕도
뒤로 하고 가야만 하는 허기진 길
하늘 자락 반 자쯤 남겨두고
저물어가는 상사호에서
뉘엿뉘엿 걸어가는 해넘이에
마음을 얹어본다
알 것 같았다
맨몸으로 가는 길은
서녘으로 가는 길
단풍, 빛 생의 낙조가
잉걸불로 달아오른다.
*********
낙엽/ 정순영
손바닥 편지지에 양각으로 새겨진 상형문자가 그물망처럼 드리워져 있다
하고픈 이야기가 편지지마다 넘쳐났는지
저세상 가신 어머니, 내 앞에서 바람에 날리신다
삶이란 넓이나 높이가 아닌 깊이란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어머니의 말씀이 적힌 편지를 집어 든다
낙엽은 어머니의 유서
봄날에 돋아날 말씀이 손 위에서 환생한다
깊이 내려가기 위해 우리는 모두 이렇게 달려가나 보다
어머니의 유서를 땅으로 돌려준다
땅은 유서들로 깊고 깊어져 봄을 잉태하는 모양이다
**********
더치커피를 만들 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바로 원두가
머금고 있는 커피를 쥐어짜는 것이다. 원두 100g에 찬물 500ml를 넣
고 침출식 더치커피를 만들면 30%의 로스가 발생한다. 처음에는 원두
가 품은 커피가 너무 아까워서 손으로 쥐어짰다. 그 순간 나머지
350ml의 커피는 스틱스강을 건나갔다. 쓰고 떫고 탄 맛이 섞여버려서
마실 수 없는 커피가 되어버렸다.....(중략)
바리스타가 내려준 커피는 양모처럼 포근한 단맛 덕분에 새콤달콤한
과일즙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같은 원두로 집에서 추출한 커피는
양조식초처럼 산미만 가득했다. 원인은 그라인더였다. 다이소의 저렴한
핸드밀로는 원두에 알맞은 분쇄도로 커피의 맛을 제대로 뽑아낼 수 없었
다. 고민 없이 말코닉 X54를 들였다. 부족한 나의 실력을 커버해 주는
전동그라인더. 이후 커피의 맛과 향의 편차가 둘어들었고, 본격적인
홈카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 달 동안 집에서 홀 빈 3kg을 소비했다.
같은 원두라도 분쇄도와 드리퍼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졌다. 물을 붓는
레시피, 점적식 콜드브루, 침출식 더치커피에 따라서도 변화했다.
커피를 만들고 내리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조급했을까? ...(중략)
어떤 이는 자신의 시간을 곱게 갈아 포터 필터에 담는다. 적당한 압
력으로 다져서 고온 고압으로 짧은 시간 안에, 진하게 뽑아낸 에스프
레소의 삶을 산다. 다른 이는 그것보다 굵게 간 시간을 드리퍼에 넣는다.
뜨거운 물을 부어 뜸을 들이고 세 번에 나누어 물을 붓는다. 에스프레소
보다 긴 시간 동안 천천히 내린 브루잉 커피 같은 여유로운 삶도 있다.
또 있다. 그 두 가지 사이의 굵기로 간 시간에 찬물과 얼음을 넣어
침출식으로 12시간 이상 천천히 녹여내야만 얻을 수 있는 더치커피도
있다. 우리는 시간이란 원두를 각자 취향과 방식에 맞춰 분쇄했다.
그리고 그것을 삶이라는 커피로 추출해 즐기고 있었다.
더치커피 같은 내 삶을 에스프레소와 비교하며 압력을 가하면 쓰고
떫고 탄 맛이 섞여버린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느긋한 시간뿐이다.
찬물에 천천히 우러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향과 맛이 깊어지는
더치커피처럼. 나에게 맞는 삶을 추출하기 위해 충분히 기다려야지.
이제는 진득한 크레마와 두꺼운 바디감을 가진 에스프레소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 청량하고 선명한 맛의 깔끔한 더치커피도 매력적이니까.
- 전현수, 광주문학 제7회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더치커피를 만들 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