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르심에 응답한 평신도 신학의 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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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명동주교좌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집전미사 도중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에 대해 강론하는 양한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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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는 경제·정치·언론의 현장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일에 요긴하게 쓰이기를 마다치 않았다. 한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선 말년의 양한모. |
통일 신학을 제안하다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나라 밖에 알리는 일에서 양한모는 작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으나, 이번에는 체포되거나 연행되지 않았다.
함께한 오태순 신부가 잠시 도피 끝에 자진 출두하여 심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동조자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 준 덕분이었다.
이 과정에서 양한모는 민족의 비극 앞에서 올바른 신앙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가톨릭에 귀의한 직후인 1970년대에는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지위와 역할을 구명하는 신도 신학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한국 가톨릭 교회와 그 일부인 평신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모색하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당시에 한국 가톨릭 교회가 어느 면에서 신앙과 지상의 현실, 교회와 세속을 구분함으로써 초월주의적인 입장에서 압박받는 민중의 현실을 외면하고 내세적 구원에만 치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세상 안에 존재하며, 그러기에 자신의 존립 근거를 모순된 현실을 끊임없이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세상의 문제에 교회 나름의 방식으로 뛰어들어서 세상을 그리스도의 세계로 변화시킬 임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회의 임무는 무엇일까. 양한모는, 한국의 가톨릭 교회는 구체적으로 한국이라는 현실에 자리 잡고 있으며, 따라서 그 임무 역시 민족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한국 교회는 무엇보다도 한민족의 역사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나아가 그 문제를 푸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고통은 분단에 있고, 그러니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임무는 통일이며, 그런 만큼 가톨릭 교회는 당연히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양한모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한편으로는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 문제에 대한 신학적 내용을 정립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1983년 봄에 사제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전국에서 모인 70여 명의 사제 앞에서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란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통일 신학’의 출발을 제안했다.
그는 이날 우리 민족이 겪는 슬픔과 번뇌, 기쁨과 희망은 곧 한국 가톨릭 교회의 슬픔과 번뇌, 기쁨과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 민족이 고통스러워서 신음하는 소리는 바로 교회가 아파서 외치는 신음 소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민족의 현실에 대한 교회의 자각을 촉구했다. 그리고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의 비극과 통일을 향한 미래의 희망을 성경의 메시지에 비추어 해석하고,
통일이라는 민족사적이고 세계사적인 과제를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바라보며 풀어나가자고 제안했다.
나아가, 그 실현 방안의 하나로서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일이기도 한 북한 선교에 소명감을 가지고 임하자고 호소했다.
통일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데 일조하다
이렇듯 현실적이고도 간곡한 제안을 하면서, 그는 통일 신학의 원칙 여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남북한 백성 전체의 회심을 요청한다.
둘째, 화해 정신에 입각한 남북 관계 개선으로 통일을 향한 대화를 시도한다.
셋째, 복음의 자유와 복음을 위한 자유를 확보한다.
넷째, 평화 확보를 우선 과제로 삼고, 평화의 복음을 통해 통일을 성취한다.
다섯째, 복음적 입장에서 우리 민족의 원점, 곧 일체성을 회복한다.
여섯째, 우리 스스로 새 인간, 새 민족이 된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하루라도 서둘러서 연구소를 세워 가톨릭의 입장에서 통일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제언도 잊지 않았다.
사실, 당시만 해도 한국 가톨릭 교회는 통일 문제나 북한 선교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정부 차원이 아닌 개인이나 기관이 통일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되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강연을 전후로 해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통일에 대한 관심이 차츰 높아져 갔다.
1982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북한 선교를 채택했고, 12월에 실무 담당 부서인 ‘북한선교부’를 설치했다.
북한선교부는 1985년 10월에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주교회의 상설기구인 ‘북한선교회원회’가 되었고, 1988년 5월에는 산하에 ‘한국천주교 통일사목연구소’를 두어 통일 사목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한편, 양한모는 개인적으로 통일 문제를 가톨릭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데 몰두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틈나는 대로 글로 써서 발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선교위원회라는 실천의 장에서도 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90년에는 발표한 글들을 모아서 「민족 통일과 한국천주교회」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 가톨릭 교회의 통일에 대한 입장은 어디까지나 복음적이어야 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복음적 통일은 남한과 북한의 화해로써 분열에서 일치로 향하고, 친교로써 민족 공동체를 실현하며, 새로운 삶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그 나름의 통일 신학의 방향을 제시했다.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
20세기 후반부터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국가들이 스스로 붕괴되었다. 이로써 공산주의는 그 결함을 이론으로도 실제로도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한때는 수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에 매료되었다.
양한모 역시 그러했다. 소년 시절에 일찌감치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들었고, 한동안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 본성을 존중하는 세상 또는 그런 삶을 추구하던 그에게 공산주의는 해답이 아니었다.
그 점을 깨닫는 순간, 그는 전향을 결행했다. 온갖 비난이며 불이익이 예견되었지만, 그는 그런 것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그가 판단한 대로 공산권은 몰락했다. 이를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은 자본주의의 전성시대를 노래했다. 그러나 양한모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도,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인류를 구원하거나 이끌어 갈 이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사상적 흐름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한 공산주의자가 전향하고 변신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체험과 교훈을 후대에게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고뇌와 그에 따른 노력으로 남은 생애를 일관했다.
이렇게 그가 걸어온 길은 어찌 보면 곧은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굽은 길을 돌아서 뒤늦게 온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나름대로 채비를 차리고서 올곧게, 때맞춰서 왔을 따름이다.
가령, 그는 사상적으로 준비되어 있었기에 이 땅의 평신도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선각(先覺)이자 선구(先驅)로서, 그는 자신이 알게 된 바를 실행함으로써 세상과 교회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리고 경제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일에 요긴하게 쓰이기를 마다치 않았다. 그러기에 1992년 세상의 삶을 마감할 때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끝>
다음 호부터는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요셉, 1903~1974) 편이 연재됩니다.